글 / 중국 대법수련생
[명혜망] 수련의 노정에서 매 사람은 자신의 관을 넘어야 한다. 우리 모두 수련자로서, 우리는 사부님께서 우리를 위해 배치하신 고험을 잘 이용해야 한다. 왜냐하면 그것들은 우리가 업을 제거하고 우리의 心性(씬씽)을 제고하는 귀중한 기회이기 때문이다.
순전히 개인수련을 하는 사람과 정법시기 수련생과는 구별이 있다. 즉, 수련자의 길에는 항상 낡은 세력이 배치한 교란이 있게 될 것이다. 낡은 세력은 그들의 “배치”에 집착하고 있으며 수련생은 그들의 소위 “요구”에 부합되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우리의 사부님께서는 이러한 소위 “배치”를 인정하지 않으시고, 우리도 물론 그것들을 인정하지 않는다.
이론에서, 매 수련자는 이 이치가 분명해야 한다. 그러나 실제로, 수련의 길에서, 일부는 명석하지 못하여, 무의식적으로 낡은 세력의 배치를 따르고 있다. 모든 수련생들이 작든 크든 각종 집착심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만약 그들이 법공부를 철저히 하지 못한다면, 그들은 알게 모르게 낡은 세력이 배치해 놓은 함정에 빠지게 될 것이다. 그런 다음 그들은 낡을 세력에 이끌려 수련의 길에서 우회하게 될 것이다; 가장 심한 사람들은 대법의 반대편으로 가게 될 것이다.
이런 일이 일어나는 이유는 매우 간단하다. 이 역사시기 전반에 걸쳐, 우리의 수련을 인도하는 이 법을 공개적으로 가르친 적이 없었다. 이것은 “우주 大法”이며 또는 우주의 “근본 大法”이다. 시간이 너무 길고 이것의 층차가 너무 높기 때문에, 아무도 이 법의 전체 범위를 모른다. 우리의 인간 역사는 길고 수많은 수련방법이 있었지만, 그럼에도, 우리의 머릿속에 있는 모든 정보는 大法과 비교될 수 없다.
길고 긴 인간 역사과정 중에서 각종 수련방법들이 존재했고, 여러 각자(覺者)들이 사람들을 구도하기 위해 세상에 내려왔다. 이 모든 정보와 가르침은 다른 공간에서 강대한 마당을 형성했다. 이것이, 낡은 세력의 의도적인 교란파괴와 합쳐져서 수련생이 법공부에 충분한 주의를 기울이지 못한다면 때때로 박해와 대면해서 그 자신을 방어하지 못하게 만든다.
달리 말하면, 대법수련생들은 실제 낡은 세력이 배치한 환경 중에서 수련하고 있다. 그렇기 때문에 낡은 세력의 교란을 제거하려는 노력이 중요하다. 대법을 수련함은 우주에 전례가 없었다. 수련생이 따르고 의지할 만한 본보기가 없다. 모든 제고와 승화는 법에서 나온다. 우리는 오늘날의 부패한 사회에 살면서 수련할 수 있어야 하고 깨달아야 한다. 수련생에게 필요한 매 한 푼의 에너지는 모두 파룬따파(法輪大法) 자체에서 나온다. 수련자의 공(功)에 있는 파룬따파의 것이 아닌 자취는 미래 우주를 순수하지 못하게 할 것이다. 더러운 주위환경을 갖는 것이 우리의 수련에서는 유리하지만, 우리는 여기서 아무것도 가질 수 없다. 낡은 세력이 최선을 다해 수련생들이 대법을 실증하는 것을 교란하려 하는 것은 그들이 원하는 식으로 정법을 이끌어가기 위해서이다. 그러한 교란을 제거하기 위해 우리가 할 수 있는 단 한 가지는 계속 수련 층차를 제고해나가는 것이다. 우리가 법공부를 견지해야 하는 것은 그것이 제고의 원동력이기 때문이다.
개인의 수련에서 완전한 성공이 수련의 진정한 목적이 아니다. 정법시기 수련자는 대법을 실증해야 한다. 대법에 대해 사람들에게 이야기하고, 중생을 구도해야 한다. 그에게는 중생을 구도하시는 사부님을 도울 책임이 있다. 낡은 세력의 교란을 제거하는 것 역시 중생 구도의 한 부분이다. 낡은 세력을 완전히 부정하고 제거하는 것을 포함하여 특수한 것은, 그들과 약속했을 수도 있는 이전의 약속을 인정하지 않는 것이다. 그러나 이것은 말하기보다 행하는 것이 더 어렵다. 조금이라도 주의를 게을리 한다면 우리는 낡은 세력이 배치한 함정에 떨어지게 되고, 그들 식의 사고와 판단하는 방법을 따르게 되며, 사부님께서 우리에게 하라고 하신 세 가지 일에 불필요한 교란을 가져올 것이다.
예를 들면, 오늘날 중국에서, 중공을 반대하는 것은 국가를 반대하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자유세계의 어떤 당도 그러한 반-민중적인 법률을 만들지 않는다. 공산주의 국가에서는 기준이지만 민주주의 국가의 정당(政黨)은 이렇지 않다. 그렇기 때문에 만약 파룬따파 수련생이 낡은 세력의 배치를 받아들인다면, 어떻게 사람들에게 대법에 대한 진상을 말할 수 있으며 중생을 구도할 수 있겠는가? 그런고로 대면하는 것이 무엇이든, 우리는 낡은 세력의 배치로 향할 수 없다. 수련에 필요한 것을 찾기 위해 우리는 낡은 세력의 배치를 따를 수 없다. 오히려, 우리는 대법에서 그것들을 찾아야 한다; 즉, 대법을 우리의 지침으로 삼아야 한다. 낡은 세력이 우리에게 강요한 박해와 관련하여, 존경하는 사부님께서는 우리에게 수없이 또 많은 경우에 이것을 인정할 수 없다고 말씀해주셨다. 우리는 공산당 사령이 이끄는 교란을 완전히 제거해야 하고 어떠한 낡은 세력의 배치도 받아들여서는 안 된다.
더욱이, 때로 수련에서의 고험은 낡은 세력의 배치와 비슷하다, 특히 수련의 초기 단계에서, 일부 예를 들면 색욕과 명예욕, 개인적인 흥미, 그리고 “정(情)”이 그것이다. 어떻게 해도 수련에서 낡은 세력의 배치를 따라서는 안 된다. 이것은 파룬따파의 요구이며, 낡은 세력과는 아무런 관계가 없다. 두 세트의 요구가 부분적으로는 겹치지만, 이것이 낡은 세력의 배치라는 뜻은 아니다.
파룬따파의 내포는 거대하다. 대법과 낡은 세력의 내용과는 비교가 될 수 없다. 우리는 이에 대해 명백해야 하고, 파룬따파의 개념에 비슷한 점이 존재하기는 해도 다른 수련 단련의 것을 흉내 낸 것은 없다. 일부 개념이 부분적으로 서로 일치하지만 그들은 분명히 같지 않다. 두 개의 예로 “무위(無爲)”와 “누락이 없음(無漏)”의 개념이다. 다른 수련에는 똑같은 개념이 존재하지 않는다. 파룬따파 수련생들은 수련에서 파룬따파를 따라야 한다.
사부님께서는 《전법륜 제3장, “수련(修練)은 전일(專一)해야 한다”》에서 명확하게 하셨다. “나 여기서는 의념활동을 이야기하지 않는다. 우리 法輪大法(파룬따파)는 어떠한 의념활동도 없다. 그러므로 여러분은 그 속에 무슨 의념적인 것을 넣지 말아야 한다.”
위에서, 우리는 대법을 공부하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가를 볼 수 있다. 왜냐하면 대법만이 수련생들을 위한 표준을 담고 있기 때문이다.
사악을 폭로하는 실제 일에서, 파룬궁의 진상을 말하고, 대법을 실증하면서, 우리는 각종의 교란을 만나게 된다. 때로는 사악의 직접적인 박해를 만나기도 한다. 때로, 대법을 실증하기 위해 대법의 요구를 따르고 있는가를 인식해야 한다. 다른 요인들을 고려해서는 안 된다. 그들이 아주 미쳐서 날뛸 때라도, 낡은 세력은 감히 우주의 법리 “眞, 善, 忍”을 직접 손상시키지 못한다. 대법을 가까이 따르기 위해서는 수련생들의 순수하고 명석한 마음이 요구된다.
사부님께서는 《정진요지 II, “생각대로 사용(隨意所用)”》에서 말씀하셨다, “나는 줄곧 현대중국어(現代漢語)의 규범 된 내포(內涵), 천박한 문법과 문자를 좋아하지 않았다. 그러므로 설법할 때 나는 늘 규범된 문법과 문자를 사용하지 않았다! 이에 대하여 어떤 사람은 이해하지 못한다. 사실 현대인에 의해 개변된 단어의 뜻에 이미 현대인의 관념이 섞여 들어갔다. 특히 무신론(無神論) 및 정치요소와 단어들을 설법 중에서 근본 이용할 방법이 없었다. 수련생들이 알아듣게끔 하기 위하여 나는 단지 되도록 현대 중국어의 문법과 문자를 채용했을 뿐이다.”
내가 인식하기에는, 이것은 사부님께서 낡은 세력의 배치를 어떻게 돌파하는가 하는 하나의 예를 드신 것이다. 그런고로 우리는 다만 사부님이 요구하신 세 가지 일에 초점을 두어야 한다. 우리는 우리 자신을 수련하고 중생을 구도하기 위해 속인 사회에 부합해야 한다.
발표일자: 2005년 11월 13일
원문일자: 2005년 11월 13일
문장분류: [수련마당]
중문위치: http://minghui.ca/mh/articles/2005/11/4/113582.html
영문위치: http://www.clearwisdom.net/emh/articles/2005/11/13/66808.html