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려주 국봉
[명혜망 2005년 8월 9일] 70세 고령인 임복생은 대만 이란에 사는 자상한 노인이다. 그는 지나온 세월을 말할 때 한탄은 커녕 아주 담담하게 서술하였다. 마치 이야기를 하는 것처럼…… .
고생스럽던 어린시절, 오래된 병이 낫기도 전에 명의가 되다
제2차 세계대전을 겪은 임복생은 유년시절에 늘 공습을 피하면서 지냈다. 그의 어린시절은 즐거움이 없었으며 그 당시 물자가 매우 결핍하였으므로 생활은 곤란하기로 말이 아니었다. 8살이 되어 밥을 지어야 했고, 10살이 넘어서는 길가에 떨어진 나뭇잎을 쓸어 땔감을 마련했으며, 닭똥을 모아 논밭에 비료를 냈다. 이러다 보니 잡일을 하는 것이 일상생활의 주요한 일과로 되었다.
어릴 적부터 병투성이던 그는 10여 세 때부터 약을 몸에 달고 다녔으므로 청춘시절은 그야말로 생기가 없었다. 19살이 되던 해 부친의 배치로 그는 양복을 마름질하였다. 그의 진지하고 책임을 다하는 태도로 2년 뒤 그는 젊은 재봉사로 변신했다. 제대 후 그는 사업을 위해 열심히 분투하였다. 매일 적어도 밤 12시까지 일을 했으며 일을 다그쳐야 할 때엔 늘 밤을 새웠다. 장기적인 피로는 허약한 몸을 더욱 허약하게 만들었다. 비록 명의를 미신하지 않는 그였지만 자신에게 알맞은 한약을 찾기 위해 어떤 때엔 하루에도 약을 여러 첩을 바꾸었다.
무수히 많은 한약을 먹었지만 건강한 몸을 얻기는커녕 풍족했던 자신의 수입마저 거의 다 써버리고 말았다. 바로 이렇게 그는 한약을 한 첩 또 한 첩 바꾸었고, 약 주전자도 바꾸고 또 바꾸었다. 힘들고 고생스러운 이 나날들을 어쩔 수 없이 하루하루 반복해야만 했다. 건강에 대한 추구는 지나친 욕망으로 되었다.
이른 아침 연공을 배워 그 후로 약물을 멀리하다
1997년 5월의 어느 날 아침 임복생은 체육공원에서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부부 한 쌍이 연공하는 것을 보았다. 그들의 동작은 아주 부드러웠다. 옆에는 “파룬궁”이라고 씌어진 전시판이 놓여 있었다. 그는 마음속으로 이것은 불가일 것이다고 생각하면서 문득 수련하려는 염두가 떠올랐다. 그러나 곧 출국해야 했기에 잠시 그만 둘 수밖에 없었다. 귀국한 후, 6월 중순에 체육공원에서 태극권을 칠 때 옆에서 파룬궁의 연공음악 소리가 임복생을 사로잡았다.
이튿날 아침 체육공원으로 간 그는 자전거를 세우려다 정씨 부부를 만났다. 그 후로 부터 그는 파룬따파 수련자로 되었다. 그는 매일 아침 4시 50분에 정확히 연공장에 나가 연공하고 법공부를 하였다. 수련한 지 8년이 되었지만 그는 하루도 빠진 적이 없었다.
40여 년 간 먹었던 한약을 그는 연공을 시작한 그날에 기적같이 까맣게 잊고 먹지 않았다. 몸에서 떠날 줄 모르던 약 주전자도 버리고 담배도 점점 적게 피웠다. 법을 얻은 2주일 후 《전법륜》책을 얻었고 아는 글자가 많지 않은 그였지만 보배를 얻은 듯, 날마다 배우고 또 읽었다. 바로 법을 읽은 첫날 그는 매일 한 두 갑씩 피우던 담배를 끊어버렸고, 손가락의 관절통, 신체의 통증, 경추가 굳어지는 병도 모두 사라졌으며, 얼굴은 점점 불그스레해졌다. 그는 “나는 지금 70세 되는 몸이지만 몸 상태가 젊었을 때보다 더 좋습니다.”라고 한다. 한평생 한약을 떠나지 못하던 악몽을 끝내 깨고 말았다!
환골탈태, 자유로운 심신을 얻다
수련을 한 후의 임복생은 일마다 파룬따파의 “쩐,싼,런”의 법리에 따라 하였으며, 너그러운 포용과 상냥한 태도로 가정의 분쟁을 풀었다. 대륙 아내의 행위를 회억하면서 대충 묘사해서 말했다: “벽에 지워지지 않는 먹의 흔적은 내 아내가 뿌린 거예요” 아내의 끊임없는 도발적인 행동 역시 논쟁을 일으키지 못했다. 그는 이렇게 말했다. “어느 날 저녁밥을 먹은 후 내가 방에서 책을 보며 법공부를 하는데 그릇을 땅에 힘껏 내던지는 소리가 나더니 점점 더 격렬해지면서 나의 분노를 일으키려고 하였습니다. 그 당시 성은 내지 않았습니다. 나는 자신에게 수련인은 “선타후아”를 수련하는 것이 아닌가, 높은 표준으로 자신을 요구해야 한다. 한 발작 물러서면 끝없이 넓다. 참기 어려워도 참을 수 있어야 한다고 당부했습니다. 이 일념이 나오자 갑자기 화가 어디론가 사라지면서 문뜩 아주 가뿐함을 느꼈습니다.”
수련하기 전에 임부인은 양보하는 역할만 했다고 하였다. 임복생은 부끄러운지 어색해하면서 수련한 후 “남자는 하늘”이란 고유적인 관념을 포기했다고 말했다. 부부가 말다툼이 있거나 마찰이 있을 때 부인의 입장에서 사고하기 시작했고 부인을 자상하게 돌봤다. 그는 이렇게 말했다. “부인이 어떤 때 행동에서 평소와 다를 때 나는 마음속 깊이 자신의 잘못한 부분을 찾습니다. 그녀를 상처준 일이 없는가.”라고. “잃는 것이 있으면 얻는 것이 있는 것처럼 자신의 잘못과 집착을 발견한 후 용감히 그것과 맞서고 그것을 없애 버리게 되면 얻는 것은 유쾌한 심정과 더욱 많은 자유, 상서로움입니다.”
야위고 병이 많은 임부인은 수련하기 전 남편이 환골탈태한 변화를 목격하고 일년 후 그녀도 파룬궁을 수련하기 시작하였다. 살도 찌고 잔병도 적어진 임부인은 이렇게 말했다: “결혼한 후 그에게 날마다 약을 달이던 시절이 이젠 끝내 멀어져 갔네요. 우리 지금의 생활은 간단하고도 편안하고 자유롭습니다.”
홍법하고 진상을 알리다
1999년 7월부터 질투가 난 장(江)씨 집단은 “쩐,싼,런”을 신앙하는 억만 파룬궁 수련생을 잔혹하게 탄압하기 시작하였다. 장씨 집단은 분신자살, 살인, 재물을 긁어모은다는 등 일련의 새빨간 거짓말들을 날조하고, 온갖 국가 기관를 동원하여 수련생을 박해하였다. 지금에 이르기까지 이미 2,000여명의 수련생이 박해로 치사하였다. 전 세계에 널리 퍼진 파룬궁 수련생은 6년간 정체적으로 정념정행을 해오면서, 각종 경로를 거쳐 끊임없이 전 세계에 진상을 알리여 세인들로 하여금 점차 이번 박해의 경과를 알게 하였다.
임씨 부부는 대법 수련속에서 직접 이익을 얻었으며 또 이란현의 홍법활동에 적극적으로 참여하고 있다. 그들은 “정법의 길 사진전”에서, 린샤오카이의 구원서명 활동, 박해받는 아이 구원 청소년 자전거여행, 매년마다 열리는 “파룬궁교사 연구 캠프”, 각급 학교 파룬궁 결사단체 활동(예를 들면 불광대학, 이란고급상업직업학교, 쑤아오해사학교), 학교운동회, 병원 경축날, 쑤아오 샘물 카니발, 녹색 박람회 등 명절날 공법시범, 국내 유람 명승지(예를 들면 뤄뚱체육공원, 동산하친수공원 등 지역)에서 연공 홍법 할 때 모두 그들 부부의 모습을 볼 수 있었다.
임복생은 또 해외 홍법 진상활동에 여러 차례 참가하였다. 어느 한번은 필자가 뉴욕 맨하탄 지하철 입구에서 그가 혼자 진상자료를 배포하는 것을 보았다. 원래는 영문을 몰랐는데 지금은 혼자서도 부르클린 지역에서 버스를 탄 다음 지하철을 바꿔 타고 맨하탄까지 올 수 있다고 그는 웃으면서 말하였다. 그의 경쾌하고도 확고한 발걸음을 바라보면서 필자는 진짜로 그를 위해 기뻐했다.
문장완성: 2005년 08월 08일
문장발표: 2005년 08월 09일
문장갠신: 2005년 08월 09일 16:53:43
문장분류: 수련마당
원문위치: http://minghui.org/mh/articles/2005/8/9/108015.html