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혜망 2005년 10월 9일】사부님께서는 신경문 《최후일수록 더욱 정진해야 한다》 중에서 “한 사람은 수련 중에서 많은 관(關)을 넘어야 하는데 조성된 원인은 사람이 출생한 이후로부터 끊임없이 인류사회 인식 중에서 각종각양의 관념이 생김으로써 이로부터 집착이 생긴 것이다.”라고 말씀하셨다. 법을 학습한 후에 나는 우리 많은 수련생들이 마치 모두 많은 고생을 겪으려 하지 않고 편안하고자 하는 등의 현대인의 변이된 관념의 영향을 받아, 수련이 일찍 결속되기를 희망하는 마음을 가지게 되어 결과적으로 도리어 자신의 수련에 불필요한 외부 압력, 교란, 어려움을 가져다준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 방면의 교훈은 동수들의 문장 중에서 모두 적지 않게 언급된 적이 있다. 여기서 내가 말하고자 하는 것은 왜 시간에 대한 집착을 현대인의 관념이라고 말하는 가이다.
옛적에는 수련의 문화가 성행(盛行)했었다. 그 때는 어느 문(門), 어느 파(派)든지 막론하고 모두 고생스럽게 몇 십 년, 일생(一生) 심지어 몇 생을 수련해야만 비로소 성공할 수 있었다. 과거의 속인(수련인을 말할 필요도 없다)은 만약 어떤 사람이 손가락을 꼽으면서 어느 해 어느 달에 수련이 결속될까 바라는 것을 보게 되면 모두 매우 황당하다고 느낄 것이다. 왜냐하면 그런 심태는, 수행(修行)의 결과는 수련자 자신의 경지가 표준에 도달했는가를 봐야만 하며 시간으로 계산할 수 없다는 수련의 상식을 위배한 것이기 때문이다. 그렇지 않고 만약 시간이 되면 곧 원만할 수 있다고 한다면 그 속인 역시 한평생을 살았는데 왜 원만하지 않는가? 게다가 수련인이 만약 정진(精進)하지 못하여 시간이 부족해서 일생의 회한(悔恨)을 조성한 것은 이미 많은 기재(記載)가 있다. 가령 작은 사슴에 대한 정(情)에 집착한 수도인(修道人)처럼 수명이 다하면 단지 유감만을 가지고 갈 뿐이며 일생의 수련 기연(機緣)은 이미 헛되이 버려졌고 손실은 만회할 방법이 없게 된다.
99년 7.20 중국대륙에서 박해형세(迫害形勢)가 전면적으로 등장한 이래 매번 한 단락 시간을 지날 때마다 늘 일부 수련생들이 “어느 때 결속된다”고 말하는 것을 듣게 된다. 실천이 증명하다시피 시간에 대한 집착은 수련인의 경지를 끌어올리고 또 최후에 원만성공할 수 있는가에 대하여 치명적인 파괴(破壞)작용을 일으킬 수 있다. 가령 당초 어떤 수련생이 박해가 석 달, 2년, 봄, 혹은 가을이면 결속될 것으로 여겼다면 자신이 상상한 시간 안에는 견지함이 아주 좋을 수 있고 단지 사악에게 타협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심지어 세간의 모든 명리(名利)를 포기하는 것도 아쉬워하지 않을 수 있다. 그러나 자기 생각속의 시간이 기한이 다 되었음에도 결속되지 않으면 신심(信心)은 곧 준엄한 고험(考驗)에 직면하게 된다. 단지 속인 중의 이해득실만을 따질 뿐만 아니라 수련해 나갈 수 있는지 없는지도 임박한 목전의 문제로 된다. 기실 이는 종종 수련생 자신이 바로 ‘시간’이란 이런 관념을 내려놓지 못함으로 인한 것으로, 관념이 갈수록 강해지고 집착이 갈수록 자라고 커져서 낡은 세력의 사악한 요소 등에 의해 틈을 타게 되어(혹은 직접 대뇌에 반영되거나 혹은 당신의 집착을 강화시키거나 확대시킨다) 비로소 조성된 것이다.
고대에 진심(眞心)으로 수련하는 사람, 그가 매일 생각한 것은 바로 어떻게 해야만 좀 더 수련하고 더 많이 수련하며 보다 많이 진보하는 가였으며 감히 조금도 태만하지 않고 시간을 허비하기를 원하지 않았으며 망령되이 자신은 이미 수련이 충분하니 결속만을 기다린다고 감히 가정하지 않았다. 그들은 시간에 대한 집착, 결속에 대한 집착이 없었다. 급하게 이루기를 구하고 고생을 하려고 하지 않는 것은 바로 현대인의 한 가지 큰 특징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현재 대법을 수련하고 있으며 짧고 짧은 몇 년에 과거 수련인들이 상상할 수 없을 성도(成度)에 도달할 수 있는데 우리는 왜 도리어 늘 시간의 장단을 따지는 것을 잊지 못하는가? 더군다나 매 사람이 어느 성도(成度)까지 수련했는가는 결속하기 전에는 자신도 알지 못한다. 시간이 있어야만 비로소 계속해서 위로 수련할 수 있고 비로소 수련 중에서 보다 잘 대법을 실증할 수 있으며 중생구도를 보다 잘 할 수 있다. 그러므로 결속하지 않았다는 것은 바로 아주 좋은 기연으로 마땅히 소중히 여겨야한다.
어떤 개별적인 수련생은 장기간 시간에 대한 집착과 기타 일부 속인의 관념을 내려놓지 못하고 사상 중에 수련을 포기하려는 염두가 출현하는데 수련을 포기하면 사는 것이 좀 더 편안하지 않을까 망상한다. 우선 이런 염두는 전혀 당신 본성의 생각이 아님을 말하지 않더라도, 간단히 말해서 기실 업력이 있다면 누가 또 편안할 수 있겠는가? 하물며 수련의 초탈(超脫)한 즐거움을 체득한 생명으로서 또 다시 속인의 칠정육욕에 잠겨 각종 고난 중에서 진정한 즐거움을 찾기가 아주 어렵다. 속인 중에서 아무리 돈이 많고 아무리 명예로운 지위를 얻었다 할지라도 모두 속인 중의 각종 모순을 벗어날 수 없으며 또한 백년이 지나면 빈손으로 떠나야하고 오직 업력만이 몸을 따른다. 수련인은 일생동안 마찬가지로 모순과 고통을 겪지만 도리어 공(功)을 얻을 수 있고 아울러 이로 인해 생명의 영원한 아름다움과 귀착을 얻을 수 있다. 그렇다면 도대체 어떤 인생이 헛되지 않은 것인가?
문장완성 : 2005년 10월 9일
문장발표 : 2005년 10월 9일
문장갱신 : 2005년 10월 9일
문장분류 : 【수련마당】
원문위치 : http://www.minghui.org/mh/articles/2005/10/9/112067p.html