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 북미대법제자
【명혜망 2005년 10월 10일】존경하는 사부님께서는 9월 18일 경문 《뜻을 굽히지 말거라》를 발표하시어 우리에게 “법도(法徒)들 정진하며 뜻을 굽히지 아니하거늘 만고(萬古)의 간난신고 오로지 이 한 차례 위할 뿐”이라고 자비롭게 가르쳐주셨다. 겨우 20일의 시차를 두고 자비하신 사부님께서는 또 경문 《최후일수록 더욱 정진해야 한다》를 발표하시어 일부 수련생들 사이에 출현한 소침상태와 정진의 의지가 해이해지는 것을 겨냥하여 엄숙하게 깨우쳐주셨다. 신경문 학습을 통해 나는 사부님께서 정법수련의 최후단계에서 다시 한번 엄숙하게 우리 수련 중의 부족함을 지적해주시고 우리를 위하여 수련 정진하는 법리를 말씀해주셨고 우리를 위하여 어떻게 최후의 길을 바르게 걷고 잘 걸어야 만고의 이 일회(一回)를 저버리지 않을 수 있는지 자비롭게 분명히 지시해 주셨다고 본다.
근래에 주변에서 다음과 같은 말을 늘 듣게 된다. 즉, 자신의 정신상태가 좋지 않으며 원래 정진(精進)하던 상태가 사라지고 마치 수련을 이렇게 오랜 시간 했음에도 많은 사람마음과 집착이 여전히 존재하는 것 같다거나, 끊임없이 자신을 합리화하고 자신에게 스스로를 느슨하게 하는 ‘이유(理由)’을 찾는다거나, 비록 청성할 때에는 상태가 정상이 아님을 느끼지만 그러나 그것을 돌파하기가 아주 어려움을 느낀다는 등이다.
행위상에서도 일부 아주 정진하지 못하는 표현들이 출현했는데 가령, 대법일을 하는 것을 법공부 위에 놓는데, 법공부를 보증할 수 없도록 하는 수많은 이른바 ‘정당한 이유’들이란 모두 ‘바빠서’ ‘시간이 없다’는 것이다. 일부 동수들은 법공부의 질과 양을 보증하기 어렵고 법공부가 형식적인 법읽기로 변했지만 그러나 사실상 담당하는 대법 일도 법공부를 잘 하지 못하면 진정으로 잘 할 수 없다. 매일 아침 6시(한국 시간 7시) 발정념도 일어나지 못하여 보증할 수 없고 진상을 알리는 것도 이전처럼 그렇게 적극적으로 마음을 쓰지 못하며 사람을 구도하려는 마음도 점점 옅어졌다. 심지어 어떤 수련생은 대량의 시간과 정력을 속인 일을 하는데 사용하거나 속인 생활상의 것들을 하는 데(가령 속인의 연속극을 보는데 많은 시간을 투입한다) 보내는 등등이다.
사부님께서는 신경문 중에서 명확하게 우리에게 알려주셨다. 수련 중의 소침상태와 수련의 의지가 해이해지는 것은 곧바로 우리가 “정법시간(正法時間)에 대한 집착 혹은 부정확한 후천관념(後天觀念)의 교란으로 조성된 것임을 의식하지 못하여 낡은 세력이 이전에 인류 공간 표층에 남겨놓은 교란요소와 사악한 영[邪靈], 썩은 귀신[爛鬼]으로 하여금 빈틈을 타게 했으며 이러한 집착과 사람의 관념을 크고 강하게 하였기”때문이다.
그렇다면 우리의 어떤 집착이나 혹은 후천관념이 사악이 틈을 타게 했는가? 바로 우리가 지금까지의 수련과 법을 실증하면서 치른 대가에 만족하고 좀 느슨해도 되겠다고 여긴 것이 아닌가? 우리가 망령되이 자신이 닦은 것은 이미 충분하며 수련의 결속을 기다려도 된다고 여긴 것이 아닌가? 우리가 수련이 결속하는 시간은 자신의 상상을 초월하기 때문에 속인생활 중의 이해득실에 대해 따지기 시작한 것이 아닌가? 우리가 안일하고 편안함에 미련을 두고 더 이상 무조건적으로 고생스럽게 수련하려고 하지 않는 것이 아닌가? 우리가 수련을 착오적으로 이해하고 자기 스스로 자아를 만족시키는 수련방식을 배치한 것이 아닌가? 우리가 후천적인 관념을 사용하여 우리의 수련을 ‘지도’하고 어떠한 때에나 모두 법을 스승으로 삼지 못하는 것이 아닌가? 우리가 사부님의 자비를 이용하여 한번 또 한번 우리가 저지른 잘못을 합리화시키고 사부님께서는 우리를 포기하지 않으실 거라고 여기면서 내심으로부터 자기의 집착을 방임한 것은 아닌가? 또 우리가 자신의 시간으로 정법이 결속될 시간을 가늠하면서 착오적으로 “아직 시간이 있다”, “오늘 잘 하지 못해도 내일이 있다”고 여기는 것이 아닌가?
사부님께서는 법에서 우리에게 알려주셨다. 수련 상에서 나타나는 어떠한 문제든 모두 사람의 집착과 관념의 결과라고. 만약 우리가 사부님의 가르침에 따라 할 수 없고, 진정으로 엄숙하게 법에서 안으로 자신을 찾지 못하며, 수련 중에서 반드시 제거해야할 그런 사람마음과 집착을 제거하지 못한다면 그러면 곧 낡은 세력과 사악한 영, 썩은 귀신이 교란하고 파괴할 틈을 주는 것과 다름이 없다. 만약 우리가 사람의 관념을 써서 회피하거나 덮어 감추고 얼버무리면서 의기투합하거나 혹은 자신을 속이고 남을 속이는 자아의 상상에 의지하여 스스로 자신을 안위(安慰)한다면 곧 낡은 세력이 대법을 파괴하는 것을 용인하고 사악이 멋대로 중생을 훼멸하도록 용인하는 것과 다음이 없는 것이다.
어떤 수련생은 교류 중에 자신의 소침상태가 비록 불만이긴 하지만 그러나 돌파할 힘이 없음을 느끼거나 혹은 개변하고자 노력해도 효과가 좋지 않다고 한다. 법리(法理) 중에서 우리는 알게 되었다. 확실하고 확실하게 법속에서 수련하고 최종적으로 집착을 제거해야만 비로소 착실한 수련에 도달할 수 있음을.
한 수련인이 만약 “고험(考驗)임을 뻔히 알면서도 집착을 내려놓지 못하”면서 결심하여 착실히 수련하고 관을 넘으며 층차를 제고하지 못하고 심지어 충만(充滿)된 미혹 속에서 이른바 현실사회 중의 미혹에 집착하며 사람의 관념으로 수련을 대하고 수련의 법리를 인식하면서 대법의 바른 법리에 따라 수련하고 제고하지 못한다면 그것은 바로 최종적으로 대법수련의 원만으로 걸어갈 방법이 없는 것이다. 기실 그런 형형색색의 집착과 관념은 결국 그것들이 기왕에 우리 자신이 아니며 또 우리의 수련을 교란하고 저애하며 파괴하는 작용을 일으키고 있는데 그럼 왜 깨끗이 제거하지 못하는가? 우리가 법속에서 수련해 낸 정념(正念)이 위력을 발휘할 때면 그것들은 곧 생존할 곳이 없게 된다.
매 하나의 대법제자는 모두 이 만고기연(萬古機緣)이 비할 바 없이 소중함을 알고 있으며 또한 우리 정법수련이 성취하는 영광스런 과위는 전무후무한 것으로서 우리는 바로 사부님의 이끌음 하에서 진정으로 신의 길에서 걸어가는 사람임을 알고 있다. 그러나 이 일체의 위대함은 모두 우리가 사부님의 정법 속에 있으며 대법 속에서 용련(熔煉) 중에 있고 법을 실증하고 중생을 구도하는 사명을 완성하는 중에서 일체 사람의 집착과 법을 실증하고 중생을 구도함을 교란하는 일체 관념을 제거하고 최후에 신(神)으로 걸어가는데서 체현된다.
수련 중의 일체 어려움은 사람이 보기에는 고생이고 관을 넘는 것이며 도피할 방법이 필요한 것이지만 그러나 수련인에 대해 말한다면 “업력을 제거하고 죄를 없애 버리며 인체를 정화(淨化)시키고 사상경지를 제고하며 층차를 승화시키는 아주 좋은 기회로서, 이는 대단히 좋은 일이다.”
우리는 오직 사부님과 법을 믿고 대법의 바른 법리[正法理]의 수련을 따라 “철저하게 속인의 관념을 개변”하여 우리를 교란하고 속박하며 장애하는 인류사회의 일체 반대적인 이치[反理]를 벗어버리고 자신의 장래에 영원히 만회할 수 없는 유감을 남기지 않으며 정법(正法)정각(正覺)을 성취해야만 위대하신 사존께 “저희는 부끄러움 없이 ‘이 한 회’를 걸어왔습니다!”라고 위로의 말씀을 드릴 수 있을 것이다.
문장완성 : 2005년 10월 9일
문장발표 : 2005년 10월 10일
문장갱신 : 2005년 10월 10일
문장분류 : 【수련마당】
원문위치 : http://minghui.org/mh/articles/2005/10/10/112104.html