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혜망] 사부님께서는 《정진요지, “무엇을 참음이라고 하는가 (何爲忍)?”》에서 말씀하셨다,
“참음(忍)은 心性(씬씽)을 제고하는 관건이다. 화를 내고 원망하며, 억울해 하고, 눈물을 머금고 참는 것은, 속인이 우려하는 마음에 집착한 참음이다. 화를 내고 원망함이 전혀 생기지 않고 억울함을 느끼지 않는 것이야말로 비로소 수련자의 참음이다.”
몇 년 전 나는 동수 B가 수련 중의 그녀의 이야기 하나를 듣는 기회를 가졌었다. B가 파룬궁을 시작한 후, 한 번은 그녀가 동료 한 명과 같은 프로젝트에서 일하게 되었다. 그런데 그녀가 갑자기 동료에게 말했다, “나는 당신하고 같이 일할 수 없어요.” 그녀의 동료가 왜냐고 물었다, 그녀가 대답했다, “나는 당신을 질투하기 때문에 당신과 일해서는 안 됩니다.” 자신의 질투심을 공언하는 바로 그 순간, 그녀는 무엇인가가 그녀의 몸으로부터 제거되는 것을 느꼈다. 그런 다음 그녀가 동료에게 말했다, “좋아요! 이제 당신과 일할 수 있어요. 지금은 더 이상 당신을 질투하지 않아요!”
아마도 B는 물질과 마음은 하나라는 법을 설명하느라고 이야기를 했겠지만, 그 이야기는 내게 수련하는 동안 다른 일반적인 문제에 대해서도 생각하게 하는 영감을 주었다. 나의 요점을 설명할 수 있는 이야기를 하나를 하자면, 어느 날 한 아름다운 젊은 여인이 길을 걸어가고 있었는데 갑자기 한 모르는 사람이 그녀의 목에 큰 사마귀가 있다는 것을 지적했다. 그녀는 집을 떠나기 전에 이것을 덮어 감추는 것을 잊어버렸다는 것을 깨닫자 즉시 사마귀를 감추려고 애썼다.
그러자 또 다른 똑같이 아름다운 젊은 여인이 나타났다. 같은 남자가 그녀의 목에도 역시 큰 사마귀가 있다는 것을 지적했다. 당신은 이 여인도 첫 번째 여인처럼 사마귀를 감추려고 애썼을 것이라고 생각할 것이다. 하지만, 그녀는 모르는 사람에게 고맙다고 인사하고 “검은 사마귀”를 만지니 이것이 당장에 사라졌다. 어떻게 된 일일까? 이것은 사마귀가 아니고, 새똥이었던 것으로 나타났다.
첫째 여인은 까만 사마귀를 그녀의 일부분이라고 여겼다. 그러므로 단 한 가지 그녀가 알고 있는 해결 방법은 이것을 감추는 것이었다. 두 번째 여인은 이것이 새똥임에 틀림이 없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래서 그녀는 즉시 그녀의 일부분이 아닌, 더러운 것은 목에서 제거해버렸다.
마찬가지로, 만약 우리가 그것들을 우리의 일부라고 간주한다면, 사부님께서는 우리에게서 집착심과 관념들을 제거하실 수 없다.
사부님께서는 《전법륜, “당신의 主意識(주이스)가 강해야 한다”》에서 말씀하셨다,
“[…] 어떤 수련자는 어찌된 영문인지를 모르며 그냥 자신이 이렇게 생각한 것이라고 여긴다.
[…]하지만 대다수 사람은 아주 강한 주관사상 [主意識(주이스)가 강함] 으로 그것을 제거(排除)할 수 있으며 그것을 반대할 수 있다. 이렇다면 이 사람을 제도할 수 있음을 설명하는바, 좋고 나쁨을 능히 가릴 수 있다. 즉 오성(悟性)이 좋으므로 나의 법신이 도와서 대부분의 이런 사상업을 없애버릴 수 있다. 이런 상황을 비교적 많이 볼 수 있다. 일단 나타나면 자신이 이 나쁜 사상을 극복할 수 있는가 없는가에 달렸다. 확고하게 할 수 있는 사람은 가히 업을 없앨 수 있다.”
파룬궁 수련자들로서, 우리는 다만 법에 순응하는 그런 생명들이나 요소들만을 인정해야 하고 진정하게 우리 자신을 법에 동화시키기 위해, 우리는 후천적으로 획득한 모든 집착심들, 관념들과 업을 반대해야 한다
하나의 집착심을 발견했을 때, 우리는 이것을 덮어 감추려 해서는 안 된다. 대신에, 우리는 이것을 폭로하고 그런 다음 강한 생각으로 우리 자신에게서 이것을 배척해야 한다. 물론, 말하는 것이 하기보다 어렵지만, 그러나 수련자들로서 우리는 늘 사부님의 법에 따라 살도록 노력해야 한다.
동수 B가 질투심이 그녀의 일부분이라고 생각하지 않았기 때문에 그녀의 질투심을 부끄러워하지 않았다. B가 그녀의 질투심에 대한 집착을 폭로하는 용기를 가졌기 때문에, 다른 수련생들이 그녀의 집착심을 지적했더라도 그녀는 이것을 받아들일 수 있었을 것이라고 나는 확신한다. 실제로, 일단 그것을 알아낸 다음 까만 사마귀로 가장한 새똥처럼 그것을 제거해버린다면 우리 자신이 더 깨끗해지기 때문에 우리는 그러한 동수들에게 감사해야 한다.
종종 동수들이 우리의 집착심을 날카롭게 비판할 때, 우리는 우리의 프라이드를 보호하기 위해 어느 정도 우리자신을 방어하려고 한다. 때로는 우리 자신을 방위하려고 노력하지는 않더라도, 화, 불평, 또는 눈물을 참는 것 이상은 아닐 것이다.
한 수련생이 다른 수련생이 가진 집착심에 대해 날카롭게 비판할 때, 비판받은 수련생은 이것이 참기 힘들다는 것을 발견하면서 냉정함을 유지할 것이지만, 보통 우리는 제3자로서, 문제된 집착이 우리의 집착이 아니기 때문에 평화를 유지하는 것이 어렵지 않다. 만약 우리에 대한 다른 사람의 비판을 우리가 아닌 다른 것에 향한 것 같이 그렇게 우리가 다룰 수 있다면, 우리는 훨씬 쉽게 비판을 받아들이고 우리의 집착심을 제거할 수 있는 것을 발견하게 될 것이다. 다른 말로 한다면, 사부님의 경문에서 우리에게 요구하시는 사부님의 참음의 기준을 따르기 위해서는 우리가 집착심을 “우리의 일부”로 간주해서는 안 된다고 생각한다.
사부님께서는 《정진요지, “무엇을 참음이라고 하는가 (何爲忍)?”》에서 말씀하셨다,
“참음(忍)은 心性(씬씽)을 제고하는 관건이다. 화를 내고 원망하며, 억울해 하고, 눈물을 머금고 참는 것은, 속인이 우려하는 마음에 집착한 참음이다. 화를 내고 원망함이 전혀 생기지 않고 억울함을 느끼지 않는 것이야말로 비로소 수련자의 참음이다.”
처음 http://www.pureinsight.org/pi/articles/2005/7/25/3180.html에 영문으로 발표되었다.
발표일자: 2005년 10월 4일
원문일자: 2005년 10월 4일
문장분류: [수련마당]
영문위치: http://www.clearwisdom.net/emh/articles/2005/10/4/65545.html