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 해외대법제자
【명혜망 2005년 9월 26일】며칠 전 명혜망에 《정념에 대한 이해를 간단히 말한다》라는 문장이 올라왔는데, 우리는 이 동수의 견해에 대해 동의하는 바이며 또 거기에 일부 구체적 사실을 예를 들어 보충하고자 한다. 대법제자들이 오늘까지 걸어온 정체(整體) 형식은 바른 것이며 진상을 알린 성과가 현저하다는 것은 그 누구도 부인할 수 없다. 그러나 우리는 법에 대한 인식을 마땅히 더욱 깊이 해야 하며 수련이란 무엇인가를 더욱 명백히 해야만 한다.
많은 동수들은 정념을 말하기만 하면 공능을 사용하여 사악을 철저히 제거하는 것이라고 여기면서 문제가 생기면 안으로 찾는 것이 아니라 입장을 자기 생활에서 수련의 난제(難題)를 해결하는 영단묘약(靈丹妙藥)으로 여긴다. 진정한 정념은 대법제자에게 지혜를 가져다 줄 수 있는데, 무엇 때문에 봉착한 문제들을 선해(善解)할 수 있는 적절한 방법을 생각하지 못하는가?
나는 동수들이 ‘교란’이란 단어를 말하는 것을 적지 않게 듣는다. 아래에 평상시에 봉착하는 일부 정황을 예로 들겠다.
엄중한 병업(病業)이 표현된 수련생이 병원에 입원한 후 응급치료를 받은 후에 씬씽(心性)상에서 잘 찾는 것이 아니라 오로지 고집스레 입장으로 ‘교란’을 깨끗이 제거하려고만 하였다. 사부님께서 해외에 계시는 까닭에 해외에 있는 개별적인 수련생은 문제에 부딪히면 스스로 깨달으려고 하지 않으며, 잘못 깨달을까 봐 두려워하거나 혹은 곤란이 있을 때 스스로 극복하려 않고 직접 사부님을 찾는다.
어떤 수련생들은 병업 표현으로 이미 병원에 입원한 수련생을 도와 줄 때, 동수에 대해 책임지고, 대법에 대해 책임지는 태도에 입각하여 그 수련생을 고무격려하면서 수련인의 각도에 서서 문제를 보고, 문제를 해결하는 것이 아니라 매일 가서 입장(立掌)하며 수련생이 장시간 청성한 상태를 유지하기 힘든 상황임에도 불구하고 덮어놓고 그의 신변에서 책을 읽으며, 또 동수에게 “정념을 확고히 하고 어떠한 치료도 받아들여선 안 됩니다”라고 반복적으로 권고한다 —표면적으로는 약을 먹지 않은 것 같지만 사실상 대법 책을 읽는 것을 약으로 여긴 것이나 다름없다.
이렇게 하자 병원 의사는 이 사람들을 이상하게 여긴다 ― 당신들이 기왕에 치료를 하지 않는다면 여기 와서 입원을 해서는 뭘 하겠는가? 결과적으로 동수에게는 생명의 위험이 출현했으며 어떤 수련생은 심지어 육신까지 잃었고 속인 가족들은 대법에 대해 오해하게 되었다. 이때 그런 수련생들은 저 세상으로 간 수련생들을 “정념이 확고하지 못하다”고 하면서 자신은 이미 최선을 다해 “정념으로 지지했다”고 말한다.
일부 대륙 수련생들이 막 해외로 나온 후에 적응이 잘 안 되지 않으면 해외 수련생들에게 요즘 나타나는 교란이 어찌된 일인가 하고 묻는다. 일부 해외 수련생들은 동수에게 법에서부터 안으로 찾고, 사상속의 문제를 분석해보라고 일깨워 주는 것이 아니라 그 수련생이 대륙에서 가져온 물건 중에 좋지 않은 정보가 있다고 한다. 그 결과 방금 해외에 온 이 수련생은 이지(理智)적이지 못하게 자신이 가지고 온 옷들을 거의 전부 버렸다. 그 중에 많은 것은 새 옷들이다. 막 해외로 나온 수련생들은 해외에서 가뜩이나 경제적으로 어려운데 결과적으로 자신에게 부담을 더 크게 증가시켰다.
일부 수련생은 가장 기본적인 일부 수련문제를 해결하지 못하고 늘 모순 속에서 생활하는데 이것은 신(新)수련생과 속인들이 대법을 인식하는데 대해 부정적인 영향을 주었다. 대법 일을 하는 효과 역시 좋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심지어 반면작용까지 일으켰다. 일부 수련생들은 선의(善意)적으로 다른 사람을 도와주는 것이 아니라 수련생이 곤경에 빠졌을 때 “정념이 부족하다”, “집착이 있다”, “업력이 너무 크다” 등의 한마디를 하고는 몸을 돌려 가버린다.
해외의 대도시의 중국영사관 앞에서 24시간 박해를 정지하라는 청원을 하는 것은 본래 대륙제자에 대한 아주 큰 성원(聲援)이다. 그러나 일부 해외 수련생들은 ‘영사관에서 당직을 서는 것은 아무 의미가 없다’고 여기며 자신은 영사관 앞에 세워 둔 차 안에서 잠을 자는데, 낮에 하는 다른 일에도 영향을 주었다. 결국에는 아예 책임을 미루고 영사관에서 발정념 교대를 책임진 수련생은 사람을 찾는 것마저 곤란하다. 이렇게 영사관 앞에 사악한 요소가 많이 쌓이게 되자 어떤 수련생은 매를 맞는가 하면 어떤 수련생은 사진에 찍히는 등등 아주 많은 ‘교란’이 나타났다.
뉴욕 맨해튼에서 진상을 알리는 것이 처음 시작되었을 때, 많은 수련생들은 그것이 자신이 제고할 수 있는 기회라고 여겼다. 처음에는 전부 뉴욕에 가고자 했으며 심지어 일부 책임자까지도 현지 대법 일을 포기하고 ‘위덕을 수립하기 위해’ 뉴욕에 가고자 했다.
개별적인 책임자는 심지어 이런 말까지 했다. “우리 이 책임자들은 모두 뉴욕으로 갈 테니, 우리 지역에서 위덕을 수립할 수 있는 기회를 당신들 보통 수련생들에게 남겨주겠소.” 1년 동안 모두들 벌 떼처럼 한번 갔다 오더니 다시는 가는 사람이 없다. 뉴욕에 남은 개별적인 동수들은 또 과부하 상태로 운행되고 있다. 그러나 이때 영사관 앞에서 당직을 서는 것은 그들이 돌아왔음에도 교대가 잘 이루어지지 않는다.
기실(其實) 대법제자들이 무엇을 하든 막론하고 모두 수련의 요소가 그 속에 있는 것이 아닌가? 우리가 무엇을 하든지 간에 자기 개인이 얻고자 하는 것을 위해서인가 아니면 대법을 실증하기 위한 것인가 하는 기점문제가 존재한다. 뿐만 아니라 어떠한 한 가지 일에 대해 책임지는 마음과 곤란을 극복하는데 필요한 인내성도 모두 수련인의 씬씽 경지의 체현이다.
해외 대법제자들은 속인 매스컴의 형식으로 해외 및 중국 대륙에 대면적(大面積)으로 진상을 알리고 있는데 이것은 평화로운 환경에서 매우 효과적인 일종의 방법이다. 기왕 매스컴 회사를 꾸린 바에야 우리는 마땅히 그것을 잘 운영해 나가야 한다. 그러나 동수들은 여기에 마음을 쓰지 않으며, 회사를 경영하는 방법을 배우려고 하지 않으면서 “속인은 그런 것들이 있지만 우리는 정념이 있지 않은가” 라고 여긴다. 운영 중에 문제가 생기면 입장(立掌)을 하지만 일부 문제는 여전히 해결하지 못하고 있으며 이로 인해 동수들 사이에는 또 모순이 증가하였다.
어떤 사람은 “낡은 세력은 어쩌면 그렇게 나쁜가, 돈을 틀어쥐고는 우리 대법제자들이 쓸 수 없게 한다!”라고 원망만 한다. 그러나 설사 속인이라 할지라도 우리가 표면상 잘못한 그런 현상을 보게 되면 “당신들은 회사를 이렇게 경영하면서 또 돈을 벌려고 하는가?” 라고 말할 것이다. 만약 신이 사람 속에 있다면 회사 경영을 어떻게 했겠는가를 우리 모두 곰곰히 생각해 봐야 하지 않겠는가?
우리가 속인의 마음에 집착을 하지 않는다는 것은 속인의 표면적으로 좋은 사업형식을 포기하자는 것이 아니다. 기왕에 속인 형식을 이용하여 진상을 알렸다면 그것을 잘 이용하자는 것이다. 전반 인류의 문화는 모두 사부님께서 대법제자들을 거느리고 육성한 것으로, 오늘 우리가 정법하기 위해 창립된 것이다. 그렇다면 그 속에는 효과적인 기업경영관리 메커니즘이 포함되어 있지 않겠는가? 우리는 수련인이기 때문에 이런 것들을 배우고 응용하는데 있어 속인보다 더 빠르고 더 효과적이어야 한다. 절대 사람의 생각을 써서 당연하다는 듯이 ‘정념’을 사용하여 학습을 거절하거나 자신의 나태한 마음을 덮어 감춰서는 안 된다.
그 외에, 현재 일부 수련생들은 일을 함에 있어서 빠른 길만 걷는다. 진상을 알림을 통해 사회단체 속에서 국면을 열어가는 것이 아니라 툭하면 수련생 속에서 기부금을 모으며 수련생이 제공한 그 돈을 자신이 일을 한 ‘성적(成績)’으로 간주한다. 재무관리도 사회적인 층면에서 볼 때 엄격하지 않다. 기실 대법제자가 채용한 일을 하는 많은 형식들은 근본적으로 진상을 알리기 위해 사용하려는 것이다. 진상을 잘 알리는 과정이 바로 더욱 더 잘 꾸려나가는 과정이며, 착실하고 착실하게 진상을 잘 알려야만 잘 할 수 있는 것이다. 그러나 만일 거꾸로, 구체적으로 해야 하는 어떤 일들(예를 들어 음악회를 열거나, 신문사를 꾸리는 등)을 가장 중요한 것으로 본다면 수련 중에서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비뚤게 나가게 될 것이며, 또 큰 범위내의 묵계(黙契)에 교란을 줄 수 있다.
6년이 지났지만 우리는 자신이 집착을 내려놓았는지 진지하게 검토해본 적이 있는가, 진상을 알릴 때 평범한 속인처럼 그렇게 속인을 감동시킬 수 있는 바른 이치로 말할 수 있는가? 혹시 동수들이 정념을 오직 초상적인 일로만 여기고 생활 속의 일언(一言)일행(一行)을 소홀히 한 것은 아닌가?
기실 우리 신(神)의 일면이 순정(純正)할 때면 신통을 아주 자연스럽게 운용할 수 있으며 이것은 다만 정념의 일종 표현형식에 지나지 않는다. 정념은 생활과 수련에서 방방면면에서 체현된다. 일상생활 속에서 매 사건에 부딪혔을 때 우리가 무슨 일이나 성급히 서두르지 않고 자비롭게 중생을 구도하는 각도에 서서 사고하고 이로부터 문제를 해결해 나가야한다. 그러면 속인들은 곧 우리의 표현이 적극적이고 낙관적이며 지혜가 넘치는 것임을 보게 되며, 우리의 언행(言行) 속에서 대법과 대법제자의 아름다움을 느끼게 되고 이로써 대법을 인정하며 구도 받게 된다. 이래야 만이 비로소 우리가 법을 실증하는 목적에 도달한 것이다.
물론 불법신통(佛法神通)을 이용한 정념의 위력은 거대한 것이며 자비로운 정념의 장(場) 속에서 사악은 몸을 숨길 곳이 없다. 그러나 사부님께서 우리에게 전수하신 발정념하는 단수입장(單手立掌)과 대연화수인은 신성한 것이며 이것은 대각자(大覺者) 불법(佛法)의 장엄한 체현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입장하기 전에 마땅히 그때 자신의 심태가 각자(覺者)의 경지에 부합되는지 한번 검토해보아야 한다. 만일 사상의 기점이 줄곧 화내고 원망하며 공포 등 악한 것으로 쌓여 있다면 아마 악으로 악을 다스리는 격이 되기에 사악한 요소에게 에너지를 가지해 줄 수 있으며 사악을 제거하는 작용을 일으킬 수 없다. 때문에 단지 사악한 생명을 철저히 제거하려는 생각은 정념과 같다고 말할 수 없다.
우리가 잘 수련하지 못한 부분을 포함하여, 낡은 우주 중의 일체 사물은 변이로 말미암아 모두 그리 순정(純正)하지 못하게 되었다. 그러나 완전히 나쁜 사물도 아주 적은데, 만약 정말로 그렇게 나쁘다면 구도한다는 것은 말할 나위도 없는 것이다. 만일 진정으로 중생을 구도하려는 자비심을 가진 대법제자라면 봉착하는 모든 일에서 능히 적극적인 심태로 유리한 일면을 볼 수 있을 것이며 그 속의 바른 요소가 발휘해 나오도록 할 수 있을 것이다. 이렇게 부족한 일면을 검토하게 되면 부(負)적인 일면의 요소는 자연히 억제되고 제거될 것이다. 설사 이 일이 정말로 낡은 세력의 교란이라고 할지라도 우리는 그것들을 모두 풀어버리거나 선(善)하게 이용할 수 있다.
개인 층차의 제한이 있으므로 자비로 지적해주기 바란다.
문장완성: 2005년 9월 24일
문장발고: 2005년 9월 26일
문장갱신: 2005년 9월 26일 01:40:00
문장분류: 【제자절차】
원문위치: http://www.minghui.ca/mh/articles/2005/9/26/111202.html