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대륙대법제자 소범
[명혜망 2005년 9월 9일] 자신의 수련상태가 부동함에 따라 주위의 환경에 대한 감수도 부동한 것이다. 어떤 동수들은 지금이야말로 세인을 구도하는 좋은 시기라고 생각하지만 어떤 동수들은 여전히 형세의 준엄성을 느끼며 가정의 마난속에서 배회하고 있다. 어떤 지역에는 지금까지도 여전히 뒤를 따르고 보초를 서며 숨어서 감시하고 제멋대로 동수들을 체포하는 현상이 있다. 정법이 오늘 날에 이르러 수련인과 수련인사이의 차이는 커져가고 있으며 지역과 지역사이의 차이도 커져가고 있다. 어떤 지구는 “탈당, 탈단, 탈대”한 사람의 수가 상당히 많지만 어떤 지역의 수련생은 자신부터 “구평”에 대한 이해에도 장애가 있다. 무엇때문에 차이가 있는가? 어떻게 해야 차이를 줄일 수 있겠는가? 이는 이미 우리 앞에 놓여진 문제이다. 차이를 줄이는 방법은 곧바로 법을 학습하는 것이며 정체적인 환경을 개척하는 것이다.
인류사회는 곧바로 하나의 염색독인 바 매 하나의 생명은 여기에서 혹은 많게 혹은 적게 모두 부동한 정도로 오염되고 있다. 삼계에 접근하고 있는 각층 신들도 인류사회의 교란을 받을 수 있기 때문에 일정한 시기가 되면 서로 바꾸는데 이 인류사회에서 생활하고 있는 생명임에야 더 그러한 것이다. 우리는 부단히 단체학습하고 교류하는 정토속에서 자신을 깨끗이 씻을 것이 요구된다. 사부님은 에서 이렇게 말씀하셨다. “내가 대법제자에게 남겨놓은 수련형식은 제자들이 진정하게 제고하여 올라올 수 있게 하는 보장이다. 예컨대 내가 당신들더러 공원에 가서 여러분들이 집단적으로 연공하여 하나의 환경을 이루라는 것이다. 이 환경은 사람의 표면을 개변시키는 가장 좋은 방법이다.” 수련형식, 즉 단체학습, 단체연공, 단체교류는 영원히 불변 부동한 것이다.
사부님은《장춘 보도원 법회에서의 설법》에서 아래와 같이 말씀하셨다. “그러나 사람들이 진정하게 수련해 나갈 수 있느냐 없느냐는 여전히 하나의 문제에 연루되는데 바로 우리는 하나의 진정한 실수(實修) 환경이 있을 수 있는가 없는가 하는 것이며 수련생으로 하여금 법을 얻어 수련하는 중에서 안전하게 제고할 수 있는가 하는 이것은 극히 중요한 것이다.…… 당신들의 가장 큰 일은 바로 우리 수련생들에게 하나의 교란을 받지 않는, 하나의 안전한 수련 환경을 창조하는 것으로, 이것이 당신들의 가장 큰 책임이다.”
우주중의 사악은 다른 공간에서 대법제자의 제고를 보증하는 두 가지 요소가 곧바로 법 학습과 수련의 환경임을 보아냈다. 때문에 99년 7월 20일, 첫 시작부터 조금도 지체할세라 대법책을 없애고 수련형식을 파괴하여 대법제자사이의 간격을 조성하였다. 대법제자가 사부님께서 우리에게 남겨놓은 수련형식에 따라 자신을 수련하는 자체가 곧바로 사악한 낡은 세력의 배치를 부정하는 것이며 대법제자가 법을 실증하는 길을 올바르게 걷는 것이다. 이 환경속에서 우리는 능히 차이를 찾고 부족한 점을 보아낼 수 있으며 교류를 통하여 부족한 점을 미봉할 수 있다. 특히 정법시기에는 정체적인 힘으로 대법을 실증할 것이 요구된다. 그 어느 동수에게서 생긴 문제든지 우리는 이미 7.20 전처럼 문제를 개인수련 중에서 나타난 문제라고 볼 수 없다. 왜냐하면 사악은 수련생의 빠뜨림을 이용하여 대법에 대해 파괴를 진행하는데 목적은 중생을 훼멸시키고 낡은 세력의 눈에 차지 않는 대법제자를 도태시키려는 것이다. 낡은 세력의 배치에 대해 우리는 전반적으로 부정해야 한다. 왜냐하면 사부님께서는 될 수 있는 한 일체 중생을 구하려 하기 때문이다.
1. 단체로 법을 학습하고 수련하는 환경
정체를 형성하려면 우선 제일 중요한 것이 법 학습 팀을 형성하여 모두들 이 환경속에서 자신을 순정히 하는 것이다. 만약 매 하나의 대법제자마다 모두 법을 학습하고 교류할 수 있는 환경이 있다면 떨어지거나 그릇되게 깨닫는 수련생이 없을 것이다. 설사 동수한테 문제가 생겼다 하더라도 법 학습과 교류를 통하면 법 중에서 해결방법을 찾을 수 있는 것이다. 그 어떤 일이던지 인류사회에서 존재하려면 반드시 하나의 마당이 존재하여야 한다. 대법제자가 함께 형성한 순정한 마당은 그 자체가 곧바로 사악을 해체하고 있으며 우리가 형성한 환경은 곧바로 다른 환경의 사악을 해체시키고 있다.
한 A 지역의 일이다. 사악한 박해가 시작될 때 그곳의 정황은 매우 악렬하였다. 대법제자들이 불법적으로 집을 수색당하고 불법적으로 벌금을 물며 불법적으로 체포되는 현상이 늘 발생하였다. 교류를 통하여 한 대법제자가 그녀의 집에서 법 학습 팀을 만들 것을 제기하였는데 처음에는 겨우 두 세 명의 대법제자만 감히 그녀의 집에 갈 수 있었다. 그러나 교류를 통하여 모두들 점점 연속으로 이 동수의 집에 와서 법 공부를 할 수 있었다. 법 학습 팀에서 모두들 법 학습하고 대법실증에 대한 심득체험을 교류하였으며 서로 추진하고 공동으로 제고 하였으며 또 어떻게 현지의 민중들에게 진상을 이야기 하며 어떻게 분공이 질서 정연하고 빠뜨림 있는 곳 없이 하겠는가를 토론하였다. 현지의 파출소에서 이 지역의 대법제자들이 단체연공하고 있다는 말을 듣고 경찰차를 이곳에 파견하였다. 대법제자들은 이 소식을 알고는 심태를 온전히 하고 모두들 같이 발정념 하여 사악을 해체시켰다. 결과 경찰차는 매번 이 마을과 멀지 않은 다리에 이르면 바퀴가 터졌는데 그 회수가 십여 번이나 되었다. 어떤 때는 할 수 없이 견인차로 경찰차를 끌어가곤 하였는데 대법제자를 박해하려고 망상하던 음모는 나중에 대법제자의 정념의 마당속에서 철저히 해체되었으며 당지의 중생들은 거의 전부가 대법의 진상을 똑똑히 알게 되었다.
B 지역에서는 법 학습 팀을 줄곧 매우 잘 견지하였을 뿐만 아니라 당지에서 장터가 열리는 기회를 이용하여 법회도 몇 번 열었다. 당지의 동수사이에는 그 무슨 오랫동안 해결되지 못하는 모순이 없었으며 오직 어느 한 수련생이 법에 부합되는 건의를 제기하기만 하면 모두들 적극적이고도 주동적으로 배합하여 하였다. 설을 쇨 때 현지의 속인들은 모두 대법진상에 관한 주련(对联)을 붙였으며 이것은 자신의 분복이라고 인정하였다. 후에 현지의 한 수련생이 사악이 비교적 창궐한 C 지역에 가서 진상을 이야기 하다가 납치당하였는데 C 지역의 악경이 B 지역에 와서 이 동수의 정황을 이해하려 하였다. 결과 악경은 B 지역에 들어서자 곧바로 머리 피부가 뻣뻣해지고 머릿속이 팽창되는 감을 느꼈다. 악경들이 무서워 가슴이 두근거리며 동수의 집에 이르렀는데 동수집의 수련하지 않는 집식구에게 한바탕 욕을 얻어먹고는 부랴부랴 줄행랑을 놓았다.
D 지역에서는 “7.20”,박해가 시작될 때 거의 모든 대법제자들은 모두 이 큰 난에 눌려 어찌하면 좋을지 몰라 하였다. 한 수련생이 일어나 7월 22일에 그의 집에 법 학습 팀을 만들었다. 그녀는 자신이 알고 있는 모든 수련생을 찾아서 법을 학습하고 교류를 하였으며 명혜망에 실린 동수의 체험을 보았는데 이를 통해 모두들 어떻게 법 실증의 길을 걸어야 할지 알게 되었다. 이 법 학습 팀은 점점 여러 개 팀으로 나뉘어 졌으며 당지의 모든 동수들은 자기의 학습팀이 있을 뿐만 아니라 또 한개 뿐이 아니었다. 어떤 동수들은 오전에 시간이 없으면 오후의 법 학습 팀에 참가하였으며 오후에 시간이 없으면 저녁의 법 학습 팀에 참가하였다. 모두들 하나의 정체를 형성하였으며 다른 공간에서 하나의 순정한 마당을 형성하였기에 사악으로 하여금 틈 탈 곳이 없게 하였다. 일단 사악이 그 무슨 행동이 있다는 소식을 들으면 모두들 한편으로는 발정념하여 사악을 해체하였으며 다른 한편으로는 편지 등 여러가지 형식을 이용하여 직접 사악의 책임자에게 진상을 이야기 하였다. 때문에 6년 동안 이 지역에는 마음대로 집을 수색하고 불법적으로 체포하며 세뇌반을 여는 등 일들이 나타나지 않았다.
나는 E 지역에 간 적 있는데 그곳의 몇 십 여명 동수들은 몇 개 법 학습 팀을 만들었는데 모두들 저녁에 법을 학습하고 연공하였으며 열두시 발정념을 한 후에야 집으로 돌아갔다. 현지에서 “구평”은 인심에 깊이 심입되었으며 파출소의 경찰들도 기본적으로 모두 탈당, 탈단, 탈대하였다. 당지의 동수들은 겸손하게 이렇게 말하였다. “우리 이 곳은 작은 곳이에요. 서로 간에 서로 익숙하기에 진상을 말하기가 참 좋아요.” 후에 나는 또 이 지역과 몇 백 키로 떨어진 F 지역에 갔는데 그곳의 사악들은 지금까지도 여전히 숨어서 지키거나 대법제자의 뒤를 밟으며 대법제자가 진상자료를 붙이기 바쁘게 바로 순찰하는 악인들이 찢어버렸다. 당지에서는 또 마귀우두머리의 사진을 크게 만들어 붙여서 대법제자들이 많은 방법을 썼지만 사악은 사진을 붙이고 또 붙였다. 어떤 동수들이 말하기를 “우리 이곳은 너무 작아 서로 간에 모두 알기에 진상을 이야기 하는 일이 쉽지 않다.”고 한다. 수련생이 말하기를 당지의 법 학습 팀은 조직하려 한지 이삼년이 되었지만 조직될 수 없었다고 했다. 교류를 통하여 모두들 법 학습 팀, 정체적인 환경 및 법학습의 중요성을 의식하였으며 또 동수간에 서로 의뢰해서는 안 되며 매 수련인은 진정하게 자신의 길을 걸어야 함을 인식했다. 또 매 사람마다 자신이 무엇 때문에 법 학습 팀을 만들지 못했는지 물어보아야 하며 다른 사람이 어찌 하는가만 눈여겨보지 말아야 하고 우리가 오직 자신에 대해 책임져야 만이 비로소 중생을 위해 책임지고 법을 위해 책임질 수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교류회의가 열린 이튿날, 마귀우두머리의 사진이 없어졌다.
“낡은 세력이 표면공간에 남겨놓은 요소와 썩은 귀신, 거기에 악당(惡黨) 사악한 영의 요소를 함께 더하면 백분의 십오이다. 대법이 이 공간에 설치한 장은 백분의 사십오를 점하는데 이는 또 대법제자 자체의 작용을 계산하지 않은 것이다.”() 대법의 마당은 사악을 족히 억제할 수 있다. 다만 우리가 진정으로 사부님의 요구대로 하지 않아 법의 위력을 나타내지 못할 뿐이다. 제자 몇 사람이 잘하고 몇 개 지구의 대법제자가 잘한다 하더라도 그것은 아직도 빠뜨림이 있어 사악은 여전히 박해할 구실과 이유가 있는 것이다. 오직 우리들이 동수와 동수지간, 구역과 구역지간의 간극을 타파하여야 만이 진정으로 정체적일 수 있고 정체적으로 제고할 수 있으며 정체적으로 승화할 수 있는 것이다. 그러면 삼계는 사악들이 판치는 낙원으로 되지 않을 것이다.
2. 법을 학습하는 것과 자신을 잘 수련하는 것에 관하여
우리는 언제나 “일을 하는 것”과“수련”을 갈라놓고 있는데 예를 들면 진상자료를 배포하고 진상을 말하는 것이다. 사람의 표면에서 본다면 “일을 하는 것”은 과정이나 실질상에서는 두려워하는 마음을 수련하여 없애고 바르지 못한 생각을 제거하는 과정인 것이다.
한번은 동수와 교류를 하였는데 수련생은 한 노수련생이 줄곧 나서지 않는다고 불만을 토로하였다. 나는 우리가 그런 나오지 못하는 동수, 그런 집착심으로 인하여 떨어진 동수들을 일깨워 줄 때 우리가 상대방에게 기회를 주고 상대방을 도와 제고한다고 여기지 말아야 한다. 실제상에서 이 과정은 우리가 자신을 승화하는 과정이고 우리가 자신을 수련하여 제고하고 법에 동화되는 기회이다. 상대방의 목석같은 상태, 법을 떠난 상태를 보고 우리가 만약 마음속으로 포기하려는 염두, 탓하는 심리, 질책하는 태도가 있다면 이것은 곧 바로 우리들에게 수련해야할 것들이 있고 자신에게 법에 동화되는 기회를 주는 것이 아닌가?
많은 동수들은 “세 가지 일”을 함에 있어서 일을 하는 것으로 여기고 있고 임무를 완성하는 것으로 여기고 있으며 법 학습을 단순히 책을 보는 것이라고 이해하고 있다. 사부님께서는“대법이란 곧 수련이다. 대법은 수련을 제외하곤 별다른 것이 없다”(《아태지역 수련생회의에서의 설법》) 라고 하셨다.
무엇 때문에 어떤 동수들은 소극적은 상태에 처해있고 어떤 동수들은 시종 두려워하는 마음과 가정의 마난의 속박에서 나오지 못하며 어떤 동수들은 동수지간의 모순이 장기적으로 해결하지 못해 동수지간에 간극이 생기는가? 근원은 법 학습에 있는 것이다.
법 학습을 말한다면 어떤 동수들은 우리는 매일 법 학습을 한다고 생각할 것이고 어떤 동수들은 또 나는 하루에 《전법륜》 몇 강씩을 학습한다고 생각할 것이다. 법 학습을 할 때에는 마음이 조용해야 한다. 마음을 조용히 하고 작은 한 단락이라도 보는 것이 마음이 조용하지 못하고 한 권의 책을 보기보다 효과가 좋은 것이며 동시에 마음을 조용히 하고 법 학습을 하는 자체가 바로 이 한 부의 우주대법에 대한 존경인 것이다.
어느 한번인가 사부님께서《뉴질랜드 법회에서의 설법》(1999년 5월 8일)에서:“내가 여러분들에게 알려주겠는데 가장 애석한 것은 무엇인가? 이미 이 법에 들어섰는데 스쳐 지나가 버리고 심지어 그에게 주어도 그가 역시 갖지 않는다면 이것이야말로 영원히 영원히 생명의 막심한 통한(痛悔)이다!”라고 하신 것을 보고 나는 당시 “사부님께서는 그런 대법을 이해하고도 수련하지 않는 사람이거나 그런 정법시기에 떨어져 내려갔거나 그릇되게 깨달은 사람을 말하였구나!”라고 생각하였다.
후에 내가 고비를 넘으면서 사부님의 이 한 단락의 법과 자신을 대조해 보아서야 비로소 “만약 내가 어느 한 문제에서 대법의 요구에 따라 하지 못했다면 그 한 문제에서 나는 곧 대법과 어깨를 스치며 지나간 것이다”라는 것을 깨달았다.
책을 볼 때, 사부님의 매 한마디 말씀으로 자신을 비추어 보아야 하지 다른 사람을 비추어 보지 말아야 한다. 어떤 수련생은 법을 학습할 때 사부님의 어느 한마디 말씀을 보고는 마음속으로 “이 한마디 말씀은 모모 동수의 모모 행위를 말한 것이다”라고 생각한다. 어떤 수련생은 다른 사람만 주의하며 “그가 이렇게 함은 법에 부합되지 않고 저렇게 함은 수련인답지 않다”라고 한다. 수련은 곧 한 생명이 자신의 일체 관념을 버리고 법에 동화하는 과정이다. 진정으로 사부님께서 말씀하신 법에 자신의 일사일념, 일언일행, 일거일동을 비추어 보는 것이야 말로 수련인 것이다. 사실 동수사이에는 응당 좀 더 이해하고 좀 더 양해하며 좀 더 너그럽게 용서해 주어야 하며 진정으로 상대방의 각도에 서서 문제를 고려해야 한다. 우리는 자신이 무변한 대법중에서 깨달은 조그마한 것으로 다른 수련생을 가늠하지 말아야 한다. 왜냐하면 모두들 수련중의 사람이고 설사 동수의 행위가 진짜로 법에 부합되지 않아도 만약 우리가 마음속에서 이해하지 못하고 원망하며 질책한다면 이는 곧 우리들 자신이 문제가 있는 것이며 우리들의 심성이 제고가 필요함을 설명한다. “나는 대법을 위해 책임지고 있는 것이다”라는 말로 자신이 응당 수련해야 할 마음을 덮어 감추지 말아야 한다.
어느 한 지역에서 정체적으로 배합을 잘 했다면 그 지역의 중생을 구도하는 형세는 좋을 것이며 대량의 중생들이 구도 될 수 있고 사악도 날뛸 환경이 없게 된다. 반대로 한 지역의 동수들 사이에 오랫동안 해결되지 못한 간극이 있다면 그 지역의 정체적인 환경은 곧 좋지 못한 것이다. 때문에 동수들 사이에 오랫동안 해결하지 못하는 모순이 나타났다면 진정 손실을 입는 것은 대법이고 중생이며 더욱 손실이 큰 것은 바로 모순속에 있는 동수 자신이다. 사실 곧바로 진정으로 안을 향해 자신을 찾지 않은 것인바 어떤 때, 자신을 찾으면서도 이렇게 생각한다. “나는 안을 향해 찾았는데 그 역시 안을 향해 찾아야 하지 않겠는가?” 여전히 무조건적으로 대법에 동화하지 못한 것이다.
사부님은《유럽법회에서의 설법》중에서“ 그럼 모순이 생길 경우 각자 나름대로 안을 향하여 자신의 원인을 찾아야 하는 것으로, 이 일이 당신 탓이든 당신 탓이 아니든지 막론하고 말이다. 내가 말한 말을 기억하라. 이 일이 당신 탓이든 당신 탓이 아니든지 막론하고 당신이 모두 자신을 찾는다면 당신은 문제를 발견하게 될 것이다. 만약 이 일이 절대적으로 당신과 관계없으며 당신이 마땅히 버려야할 마음이 없다면 당신 몸에서 이 일은 아주 적게 생길 것이다. 만약 당신이 이 하나의 마음이 없다면 모순을 일으키지 않을 것인즉 당신수련에 대하여 책임져야 하기 때문이다. 무릇 당신 몸에 모순이 생기고 당신 여기에 나타났으며 당신들 사이에 나타났다면 아주 가능하게 당신과 관계가 있을 것이며 당신이 버려야할 것이 있는 것이다. 당신 탓이든 당신 탓이 아니든지 막론하고 나의 법신이 당신의 마음을 제거할 때 이 일이 그의 탓인지 아니면 당신 탓인지를 상관하지 않는다. 오로지 당신이 이 마음이 있기만 한다면 그는 온갖 방법을 다하여 당신더러 모순이 나타나게 하며 당신더러 부족한 이 하나의 마음을 인식하게끔 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당신들은 아직도 거기에서 찾으며 이 일은 내 탓이 아니잖은가 라고 한다. 혹은 당신들은 여전히 생각하고 있다. 나는 법을 수호하고 있다고. 그는 생각하고 있다. 나 역시 법을 수호하고 있다. 사실 당신들은 아마 모두 잘못된 곳이 있기 때문에 비로소 모순이 있을 수 있다.” 라고 말씀하셨다.
안을 향해 찾는 문제에 대하여 어떤 동수들은 틀리게 여기고 있는데 안을 향해 찾는 것은 자신의 심성에 존재하는 빠뜨림이 있는 곳을 찾는 것이지 일의 표면을 찾는 것이 아니다. 만약 대법제자가 하는 일이 진짜로 대법의 요구에 부합되지 않는다면 우리는 곧 선의적으로 지적해 주어야 하며 상대방이 받아들이지 못하면 우리는 있는 힘을 다 하여 부족한 점을 미봉하는 한편 동수와 교류하여야 한다. 만약 수련생이 받아들이지 못하고 논쟁이 생긴다면 우리는 마음을 조용히 하고 자신의 심태를 보아야 하며 안을 향해 찾는 것이 곧 자신이 일을 틀리게 한 것이라고 여기지 말아야 한다.
많은 동수들은 정법시기 대법제자가 해야 할 세 가지 일에 대하여 이해상에서 오차가 있는데 일체 마난은 모두 낡은 세력이 조성한 것이며 모두 외래의 박해라고 인식하면서 자신을 유의적이거나 혹은 무의식적으로 “수련” 밖의 위치에 놓았다. 안을 향해 찾는 것은 무조건적인 것이며 다른 사람의 표현이 법에 부합되지 않는 것이 우리가 심성을 수련하지 않는 이유로 되어서는 안 된다. 낡은 세력의 사적인 근본적인 속성은 생명이 다른 사람만 개변시키려 하고 자신을 개변시키려 하지 않으며 최대한도로 자신이 집착하여 놓지 못하는 것을 보류하려 함을 조성하였다. 때문에 낡은 세력은 꼭 대법에 거대한 난을 만들어 주려 하는데 이것은 그들의 눈에는 전반 우주의 위기를 해결하여 구하는 것이 곧 다른 사람을 개변하는 과정이기 때문이다. 낡은 세력의 변이와 바로 잡아야 할 요소들은 우리들의 수련 잘 하지 못한 일면에 낱낱이 체현되는데 이것이 바로 법에 동화되어야 할 일면인 것이다. 우리는 모두 사악한 낡은 세력의 배치를 부정해야 함을 알고 있지만 도대체 어떻게 부정해야 하는가? 그저 입으로만 사악의 배치를 승인하지 않는다고 하면 그것은 안 되는 것이다. 우선 우리는 자신의 일사일념을 바로 잡아 낡은 세력으로 하여금 틈탈 곳이 없게 해야 한다. 물론 우리는 낡은 세력이 배치한 길을 따라 수련하는 것이 아니라 생명이 주동적으로 법에 동화하는 과정인바 부단히 자신을 수련하여 올바르게 해야 한다.
3. 기다리지 말고 의거하지 말며 자신의 법 실증 길을 걸어야 한다
대륙의 일부 지역의 많은 동수들은 협조인에 의뢰하고 협조인이 무엇을 배치하면 곧 무엇을 하며 문제가 나타나면 협조인이 가서 해결하기를 기다리고 일단 협조인에게 빠뜨림이 생기면 곧 질책하고 협조인이 여하여하 하다고 원망한다.
사실 협조인은 바로 한 수련인이 대법을 실증하는 과정에서 자신이 한 갈래의 법 실증의 길을 선택한 것이며 그 무슨 파견한 사람이 없다. 대법을 실증하는 길에서 걷고 있는 매 하나의 대법제자는 모두 협조인인 바 동수지간에 응당 서로 협조하고 배합하여야 한다. 매 하나의 대법제자는 모두 자신의 길을 걸어야 한다. 왜냐하면 우리는 미래우주의 주재자(主宰者)이고 부동한 체계의 왕과 주(主)이기 때문에 반드시 스스로 자신의 길을 걷는 과정에서 자신의 세계에 속하는 법리를 정오(正悟)해야 한다. 그러나 정체적으로 무엇이 수요될 때에는 곧 모든 힘을 다해 배합하여야 하는데 예를들면 정체적으로 발정념하여 수련생을 구하는 일이다. 어떤 수련생은 다른 수련생이 자신의 집착으로 문제가 나타난 것을 보고는 가서 동수와 교류하지 않고 현지의 협조인을 찾아서 협조인이 책임지고 해결하게 하며 자신을 그 일 밖의 위치에 놓는다. 우리가 정법시기에 보고 접촉하고 감수한 것은 모두 우연한 것이 아닌바 모두 우리가 가서 할 것을 요구하며 하는 과정에서 자신을 수련하고 대법을 실증해야 한다.
협조인에 의뢰한 결과는 보통 일단 협조인의 몸에서 나타난 문제를 보면 받아들일 방법이 없어 하며 많은 불필요한 모순을 조성하였다. 어떤 협조인들은 “나와서 대법일을 하는 사람은 적고 질책하는 사람은 많다.”고 말한다. 사실 우리는 어떤 문제를 보았을 때, 서로 원망하지 말아야 하며 설사 협조인에게 진짜로 어느 문제상에 빠뜨림이 있다면 우리는 묵묵히 보충하고 당신이 빠뜨림이 있다고 여겨지는 곳을 미봉하여야 한다. 그 어느 동수나 모두 수련중의 사람인바 수련인이 어찌 잘못이 없겠는가? 설사 신들이 일을 해도 모두 자신의 경계에서 법에 대한 이해에 따라 하는 것이다.
수련은 보험에 참가한 것이 아니며 수련의 길에 들어섰다 하여 곧 새 우주에 동화되어 갈수 있다고 여기지 말아야 한다. 수련은 엄숙한 것인바 특히는 정법시기에 낡은 우주의 생명은 새 우주속에 들어가려 하는데 이는 마치 더러운 옷을 깨끗이 씻는 것처럼 그렇게 간단한 것이 아니다. 그것은 한 생명이 미시적으로부터 거시적인 것에로, 근본적인 속성을 포함한 동화이며 한 생명이 자아를 버리는 과정에서 관념, 사람의 사상, 사람의 집착, 낡은 우주의 속박에서 나오는 것인바 그것은 버리는 과정이다.
나는 한 수련생이 이렇게 말하는 것을 들은 적 있다. “나는 진짜로 자신이 능히 막대기로 해를 멈추게 할 수 있으면 좋겠어요. 그럼 나는 더 많은 사람들에게 진상을 이야기 할 수 있을 텐데요.” 그와 반대로 어떤 수련생은 매일 아침 일어나 연공하고 오전에 법을 학습하며 점심에 한 잠 자고 오후에 나가 채소를 사러 나간 김에 진상을 이야기 하며 돌아와 저녁밥을 짓고 또 법 학습을 하고는 잠이 든다. 잠을 자기 전에 속으로 생각한다. “나는 오늘 하루 사부님의 요구에 따라 법공부도 하고 발정념도 하였으며 진상도 이야기 하였으니 세 가지 일을 다 한 셈이다. 정법이 끝날 때면 나는 꼭 앉아서 우는 사람속에 속하지 않을 것이다.” 이 두 가지 생각은 본질상에서 다르다. 하나는 사(私)를 없애는 과정에서 자신의 사전 염원을 실현하는 것인바 모든 힘을 다하여 진상을 이야기 하고 중생을 구도하고 있다. 그러나 두 번째 생각은 낡은 우주의 사적인 근본적 속성을 안고 자신의 원만을 위하여 임무를 완성하듯이 하고 있다. 그러니 이 두 가지 생각의 결과가 어떠하리라 한 것은 불을 보듯 뻔한 것이다. 매 수련인은 모두 진정으로 자신을 위하여, 법을 위하여, 중생을 위하여 책임져야 하며 진정으로 자신의 수련의 길을 걸어야 한다.
4. 자신을 순정히 하여 “탈당,탈단,탈대”를 잘 이야기 하여야 한다
“구평”의 발표는 정법이 또 하나의 새로운 단계에 이르렀음을 말한다. “구평”은 우리가 중생을 구도하고 진상을 이야기 하는 예리한 무기이다. 매 하나의 대법제자는 응당 반복적으로 “구평”을 보아야 하며 그저 “구평”을 아는데 그쳐서는 안 되며 그저 말 타고 꽃구경 하듯이 이해해서는 안 된다. 우리가 “구평”을 보는 과정은 곧바로 자신 몸 공간에서 중공의 사악한 영체의 요소를 청리하는 것이며 오직 우리 자신을 순정히 하여야 비로소 중생을 구도할 능력이 있을 수 있다.
한 수련생이 있는데 그녀가 “구평”을 이야기 하여 “탈당,탈단,탈대”한 사람이 이미 이천명이 넘었다. 그녀가 하는 말은 길지 않고 그저 몇 마디지만 사람의 마음을 움직일 수 있었다. “구평”을 이야기함에 있어서 그녀 자신은 그 어떤 관념상의 장애가 없을 뿐만 아니라 발정념 하여 공산사령의 일체 요소를 없애는 것을 중시하였으며 동시에 하나의 사람을 구하려는 자비로운 마음을 지니고 있었다.
우리가 진상을 이야기 하여 사람을 구도하는 것이 일을 하는 것이라고 여기지 말아야 하는바 우리는 이 과정에서 자신을 수련하고 있다. 두 수련생이 한 젓가락 공장에 가서 진상을 이야기 하였다. 처음에 가서 자신들이 익숙한 사람들로 하여금 모두 진상을 알게끔 하였다. 약 삼십 여명 사람이 사악의 당조직과 단조직에서 나올 수 있도록 요구하였다. 두 사람은 기뻐하며 집으로 돌아가다가 길에서 대법 진상을 알고 있는 한 속인을 만났다. 그 속인은 젓가락공장의 “삼퇴”한 사람의 수를 알고는 “우리 공자에서는 이 삼백 명이나 “삼퇴”하였는데 그 공장에서는 이제 겨우 이 몇 사람이니 너무 적어요!”라고 했다. 두 수련생은 며칠 후에 또 젓가락 공장에 갔는데 이번에 접촉한 사람은 모두 그전에 서로 모르던 사람들이었다. 찌는듯이 더운 직장에서 수련생은 그 사람들을 도와 한편으로 젓가락을 포장하고 한편으로는 진상을 말했는데 결과 한번 다 이야기 하여도 “삼퇴”하겠다고 하는 사람이 한 사람도 없었다. 후에 한 수련생이 구평을 이야기 하고 한 수련생이 옆에서 발정념 하였는데 반시간 이야기 하니 겨우 세 사람이 “삼퇴”하는데 동의 하였다. 수련생은 집에 돌아와 자신에게 존재하는 문제를 찾았는데 시끄러워 하는 마음이 있고 자비로운 마음이 부족함을 발견하였다. 두 수련생이 진정하게 자신의 부족한 점을 찾으니 며칠 후 젓가락 공장의 한 속인이 종이 두 장에 사악의 당,단조직에서 탈퇴할 것을 요구하는 사람들의 명단을 적어 왔다.
우리가 삼퇴를 말하는 과정중에서 만약 상대방이 우리들이 말하는 것을 받아들이지 않는다면 상대방이 어떻게 고집이 세고 어떻게 공산사령의 독해를 받았다는 등으로 객관적인 원인에서 이유를 찾지 말아야 한다. 진정한 원인은 우리자신의 마음에 있는 것으로서 그것은 오늘의 인류사회에서 나타난 일체는 모두 대법제자의 마음으로 조성된 것이기 때문이다.
“구평”을 배포하는데 대하여 어떤 동수들은“구평”에 투자되는 자금이 비교적 많으므로 응당 신중해야 한다고 여긴다. 하지만 우리가 오직 법의 기점에 서고 법의 요구에 부합된다면 법의 위력은 곧 나타날 것이며 자금도 역시 부족하지 않을 것이다. 99년 7.20 사악이 미친듯이 대법을 박해할 때 사람들은 하늘땅을 뒤덮는 듯한 거짓말속에서 대법의 진상에 대해서는 아무것도 모르고 있었다. 하지만 우리들은 대면적의 각종 형식의 진상자료를 배포함으로써 사악의 거짓말을 없애 버렸고 또 사람들과 직접 진상을 말함으로써 대량의 중생들이 법륜대법이 좋다는 것을 알게 하였다. 공산악당이 통치하는 국가의 민중들은 공산사령에 대한 인식이 기본상에서 공백인 것으로서 공산악당이 나쁘다고 여기고 있을지라도 역시 당 문화 속에서 악당을 보고 있으므로 진정으로 자신들 공간마당의 중공공산사령의 요소를 없애지 못하고 있다. 정법진정은 부단히 빨라지고 있으며 중생을 구도하는 시간은 긴급하다. 때문에 응당 대면적으로 “구평”을 배포해야 하며 또한 한 가지 형식에 구속되지 말아야 한다. 각종 채색그림을 부쳐야 하고 각 지역의 정황에 따라“구평”VCD 도 배포해야 한다. 몇 년간 대법을 실증하는 수련기초상에서 오직 우리들이 정념정행하고 이지적이며 지혜롭게 한다면 곧바로 좋은 효과를 거둘 수 있을 것이다.
우리는 중생이 구도될 수 있는가 없는가 하는 유일한 희망이다. 대법실증의 길에서 걷고 있는 수련인으로서 자신이 대법에 대한 이해를 고집하고 다른 사람의 집착을 집착함으로써 동수지간에 간극이 생기지 말아야 한다. 될수록 자신을 내려놓고 온갖 심혈을 기울여 동수들과 원융함으로써 빠뜨림이 없는 정체를 형성하고 사악을 모두 소멸해야 한다. 더는 각종 관념으로 자신을 제한하지 말아야 하며 될수록 자신의 특징을 발휘하여 중생을 구도하는 사명을 짊어짐으로써 우리가 집으로 돌아가는 그 순간에 어떠한 유감도 남기지 말고 우리들의 사전의 웅대한 염원을 원만히 완성해야 한다.
이는 근래에 느낀 감수이므로 동수들이 시정해 줄 것을 간곡히 바란다.
문장완성: 2005년 9월 8일
문장발표: 2005년 9월 9일
문장갱신: 2005년 9월 8일22:05:55
문장분류: 수련마당
원문위치: http://minghui.ca/mh/articles/2005/9/9/110058.html