简体 | 正體 | 대법서적

인연(因缘)을 말하다

[명혜망]

속인의 인연

속인은 인연을 떠나 살 수 없다, 왜냐하면 인연이란 사람들 사이의 업력윤보로부터 나온 것이기 때문이다. 그것을 믿어도 좋고 믿지 않아도 좋지만, 그것은 제거될 수 없는 것이고 또 그것으로부터 벗어날 수도 없다.

속인의 인연은 바로 그의 운명이며, 피할 수 없는 것이다. 만약 그가 인연에서 벗어나고자 한다면, 그는 그의 운명을 개변해야 하고 업력윤보에서 벗어나야 한다. 한 사람의 운명을 바꾸는 데는 두 개의 길이 있는데, 하나는 무제한으로 악행을 저질러, 형신전멸에 이르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수련을 시작하여 철저히 악업을 제거하는 것이다.

속인은 인연의 지배를 받으며, 그들의 일생은 정해진 것이다.

속인은 그들의 삶이 안정되지 않아, 바깥세상에서 오는 교란으로 어느 때 인생의 진로가 바뀔 지 모른다고 느낀다. 이 모든 것은 그들 자신이 결정할 수 있는 일이 아니어서, 다만 그의 무능력으로 인해 운명의 복잡성을 한탄하게 만든다.

하지만, 인연은 속인 층차에서의 이치이다. 이 층의 이치에 부합하면, 바로 이 층에서는 좋은 사람이 된다. 사람들에게 인연관계가 존재하는 것을 알게 하는 것은 좋은 일이다. 이것은 불필요한 싸움과 걱정과 고통을 줄인다. 이것은 사람들에게 침착성과 평온함을 높여줄 수 있다.

수련자들의 인연

인연이 수련자에게는 적용되지 않지만, 인연관계가 있다는 것을 속인들에게 알게 하고 이해시키는 것은 적절하다.

수련자는 더 이상 속인의 인연관계에 의해 통제받지 않는다. 그(녀)의 미래의 매 일보는 업력에 의해 지배받지 않으며, 사부가 그(녀)에게 배치해주신 길은 또 결코 한 갈래의 길이 아니다. 수련자가 마주하게 되는 인연은 수련의 길에서 제고하고 성공할 수 있도록 사부님께서 선택하시고 배치하신 것이다. 수련자가 인연관계 중에 있기는 하지만 이것은 수련자가 그것에 의해 통제된다는 것을 뜻하는 것이 아니다. 한 수련자가 인연관계로 인해 인연의 문제를 대면했을 때, 이것은 수련자의 자비, 선량함과 용서로서 그에게 있던 인연의 매듭을 풀어주고 이 인연관계를 끝내기 위한 것이다. 동시에, 가장 중요하게는, 집착심을 내려놓고, 업을 줄이고 그의 수련층차를 제고해야하는 것이다. 수련이란 바로 한 사람의 애초의 운명을 개변하는 것이다; 이것은 인연관계에서 해탈하는 것이며, 끝없는 업력윤보에서 벗어나는 것이다.

수련자는 과거의 인연, 세속의 인연을 똑바로 보아야 하지만, 그것에 집착하는 것이 아니며, 그것을 궁극적인 진리로 또는 일상생활에서의 길잡이로 사용하지 않는다. 또한 다른 수련생들과 인연관계를 지나치게 이야기해서도 안 된다. 이것은 의미가 없는 일이며, 이것은 행복과 슬픔 같은, 정(情)에 대한 집착이다. 만약 수련자가 인연을 일종의 공리(公理)로 삼는다면, 이것은 그가 이 물질세계를 떠나고 싶지 않다는 것을 지적한다. 명백하게 말하면, 그에게 진정하게 수련하려는 뜻이 없다는 것이다.

인연과 수련의 근원은 모두 정법과 관계가 있다. 정법을 포함시키지 않는다면 어느 것도 논할 의미가 없다. 정법시기 대법제자는 인연에 제한을 받지 않는다. 사람들을 구도하는데 인연을 사용할 수는 있지만, 강조해서는 안 된다.

넓은 각도에서 보면, 정법이 아니었더라면 낡은 우주와 이것의 법리는 이미 오래전에 파괴되었을 것이고, 긍정적이든 부정적이든, 인연은 지금쯤 모두 소멸되었을 것이다. 낡은 우주가 아직도 존재하고는 있지만, 그것이 생성해 낸 그런 인연들을 무엇에 끌고 갈 것인가? 낡은 우주의 법리는 성-주-괴-멸-공(成-住-坏-灭-空)에 기초한다. 만약 지금 이 법리를 따른다면, 낡은 우주는 지금 바로 멸의 단계에 있고 공의 단계로 들어가고 있다. 이 낡은 법를 따른다는 것은, 모든 것이 파멸되는 것이고 우주가 공(空)이 되는 것이다. 그렇다면, 우리가 왜 이 법리를 따라야 하겠는가? 왜 이 인연을 강조하고 믿어야하겠는가? 소위 인연을 강조하고 믿는데 무슨 중요성이 있단 말인가?

역사적인 각도에서 본다면, 낡은 세력의 배치는 역사 전체에 침투되어 있고 우리의 과거 생생세세에 충만 되어있다. 어려움과 행복이 있었고, 성공과 실패가 있었다. 우리는 사부님이 배치하신 배치인지, 낡은 세력이 배치한 것인지 또는 우리자신의 패괴가 촉성한 것인지 분명히 분별하지 못한다. 역사는 아주 길며, 우리자신은 이러한 것들을 알지 못한다. 말법시기의 세상은 너무나도 혼란스럽고, 괴멸의 가장자리에 와있는 우주는 열에 들떠 있고 무질서하며, 낡은 세력은 사악하고, 그것의 요소들이 우리의 삶 속에 가득 차 있다. 우리는 너무 많은 집착을 가지고 있고, 현명하지 못해서 때로는 사부님의 법을 극단적으로 단면적으로 이해한다.

정법시기 대법제자들이, 인연에 빠져드는 것은 위험하다. 어느 인연을 우리가 믿을 것인가? 낡은 세력 역시 오래 지속되어왔고 우리와 복잡한 인연을 가지고 있다. 한 때 우리의 긴 역사와 먼 과거는 낡은 세력의 요인들로 채워져 있었다.

인연이 있든 없든, 그리고 이것이 선한 것이든 나쁜 것이든, 대법제자 사이에는 은혜와 원한이 함께 존재한다. 은혜와 원한이 우리 수련생들을 통제하도록 해야 할 것인가? 은혜와 원한은 대법제자들과 속인들 사이에도 존재한다. 우리가 사람들을 구도하는데 이것으로 영향을 받아서야 되겠는가? 정법시기 대법제자는 이것이 얼마나 오래전의 일이었든, 얼마나 아름답게 또는 끔찍하게 보이든, 또는 이것이 존재했던 존재하지 않았던, 소위 인연관계를 보아서는 안 된다. 그렇게 한다면, 사부님의 법이 우리 삶의 기본이라는 것을 잊는 것이고, 우리 수련의 목적을 잊는 것이며, 이 정법시기의 대법제자라는 것을 잊는 것을 뜻한다.

인연은 존재하지만, 대법제자는 그것에 의해 통제되어서는 안 되며 그것을 수련의 이치로 삼아서도 안 된다. 개인수련의 각도에서도, 수련자들은 결국 인연의 해탈을 포함해서, 세속의 모든 것으로부터 해탈하는 것이다.

발표일자: 2005년 9월 11일
원문일자: 2005년 9월 11일
문장분류: [수련마당]
중문위치: http://minghui.ca/mh/articles/2005/8/16/108356.html
영문위치: http://www.clearwisdom.net/emh/articles/2005/9/11/64787p.html

ⓒ 2024 명혜망. All rights reserve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