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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분한 관용을 수련해내야만 비로소 중생을 구도할 수 있다

[명혜망] “제공 여행기”에 이런 이야기가 나온다. 한 나쁜 사람이 모함을 해서, 한 여인의 남편을 죽게했을 뿐만 아니라, 그녀와 아들이 살고 있던 땅도 거의 잃게 만들었다. 그녀는 제공의 도움을 받아 땅이 임대되었다는 가짜 서류를 폭로하고, 결국, 땅을 되찾을 수 있었다. 나중에, 이 사건을 저질렀던 나쁜 사람이 죽게 되었고, 그는 사악한 행위에 대한 그의 업보를 받았다. 관리가 잘려진 대나무 돗자리로 그의 시신을 쌌기 때문에 그의 머리와 발이 덮이지 않은 채 묻혔다. 이 악인의 소행으로 아들이 고아가 되고 미망인이 된 여인이 그 시신을 보게 되었다. 남편을 죽인 원수가 그렇게 가련한 상태에 처해지자, 그녀의 가슴에 있던 미움이 좋지 않게 여겨지며, 오히려 그가 측은하게 생각되었다. 그녀는 얼마의 돈(은 2량)을 마련해서 일하는 사람에게 관을 사게 했다. ….. 옛날, 속인의 자비와 인내심은 정말로 감동을 준다.

비슷한 이야기로, 우리는 《전법륜》 에 나오는 한신의 이야기에서도 감동을 받는다. 유명한 일화가 있던 시절의 한신은 젊고 기운이 좋았다. 그는 무예를 잘 하고 무기를 갖고 다니기는 했지만 무슨 나쁜 일을 하지 않았다. 다른 한 편으로, 그에게 도전했던 사람은 지식도 재주도 없는 무례한 사람으로 알려져 있었다. 한신이 아니고 다른 사람이 이 같은 상황을 만났더라면, 그들은 그를 때렸거나 참지 못하고 분노를 이기지 못해 도전자의 목을 베었을 것이다. 그를 둘러싸고 구경하던 사람들도 아마 잘했다고 그에게 손벽을 쳤을 수도 있다. 그러나 한신은, 도전자와 싸우는 대신, 그가 요구하는 대로 정말 그의 다리 밑을 기어나갔다. 전설에서는 나중에, 한신이 고관이 되었다는 이야기를 들려준다. 악인은 한신이 복수하고자 그를 찾지나 않을까 두려워했다. 하지만, 한신은 그를 용서했고, 그에게 낮은 지위의 관리직을 제공하기까지 했다. 속인 중에서 그렇게 선량하고, 관용하며 용서하는 마음을 찾기란 쉽지 않다.

나는 중국의 옛말에 “관용을 베푸는 사람이 우월하다”라는 말을 기억한다. 파룬따파 제자들은 많은 해를 수련했기 때문에, 이 면에서 대부분의 사람들보다는 훨씬 더 잘 할 수 있어야 한다. 하지만 우리 중 많은 사람들은 잘 하지 못하며 때로는 수련하지 않는 사람들보다도 더 못하게 행동한다.

나 자신의 수련의 길을 뒤돌아 보았을 때, 바로 이러했다. 나는 내가 좋아하는 사람들만 만나고 싶고 듣고 싶은 것만 들으려 했다. 그러나 나의 눈과 귀가 어떻게 좋고, 나쁘며, 선량하고 악한 것을 가늠하는 표준이 될 수 있겠는가? 그 논리를 따른다면, 만약 누가 싸움에서 승리하는 집착을 제거할 수 없다면, 다른 사람들을 해치지 않는 것만으로 행복해 하고, 누가 다른 사람들을 못살게 굴지 않는 것만으로도 대단한 관용이라고 여길 수 있다.

박해가 시작된 후, 나는 사악한 박해자들에 대한 미움, 거짓말을 듣는 사람들을 향한 부정적인 느낌을 통제하기 힘들었다. 나는 매일 분노하며 나쁜 사람들이 그들의 악행에 보응받기를 소망했고, 그래서 이것이 당장에 상황을 바꾸어 놓기를 희망했다. 상황을 바꾸는 것이 정법이라고 간주했었다.

사람들의 가슴이 나쁜 감정으로 차 있을 때, 그 사람의 외관이 친절하고 평화스럽게 보일 수 있겠는가? 당신의 음성이 솔직하고 부드러울 수 있겠는가? 실제로, 사악은 온갖 수단을 써서 대법 수련생들에게 부정적인 쪽지를 이미 붙여놓았고, 사람들은 이미 대법제자들에 대해 결정적인 관념을 가지고 있다. 그런 상태에서 진상할 때, 우리가 어떻게 “파룬따파는 좋습니다”를 반영할 수 있으며 우리가 좋은 사람이라는 것을 어떻게 보여줄 수 있겠는가? 더구나, 진상할 때, 우리는 누가 옳고 누가 그른가를 겨루고 있는 것이 아니다. 더 많은 사람들에게서 강한 지지를 얻어내어 사악을 능가하려는 것도 우리의 목적이 아니다. 우리가 진상하는 진정한 목적은 사람들에게 긍정적으로 대법을 이해시키고 궁극적으로는 그들의 생명을 구도하려는 것이다.

그런고로, 우리는 관용과 용서하는 마음을 수련해 내야한다. 그런데 우리에게 있는 인내심으로는 충분하지 않다. 우리는 다만 좋은 것은 관용하고 나쁜 것은 관용하지 않으며, 선량한 것은 관용하지만 악한 것은 관용하지 않는다. 관용할 수 있는 것을 가늠하는 표준으로 대법을 잊어버리고 대신에 종종 우리 자신의 느낌을 사용한다. 실제로, 우주의 원리는 인내할 수 있어야 하고, 받아들일 수 있어야 한다. 사부님께서 인내하실 수 있는 일이라면, 우리도 그렇게 할 수 있어야 한다. 사실, 우리는 이 세상에 살려고 온 모든 생명들에게 기회를 주어야 한다. 우리는 친절해야 하고 그들을 구도하기 위해 노력해야 한다. 우리의 에너지 마당에 그들을 있게 하는 친절한 마음이 있어야 하고 법 속에서 아름다운 생명으로 향하도록 그들을 이끌어야 한다. 우리 역시 법 속에 있는 생명들이다. 원래, 우리도 그들처럼 이 세상에서 길을 잃었었고, 우리 역시 심각한 업력을 갖고 있었다. 다행이도, 우리는 대법을 얻었다.

아직도 길을 잃고 대법을 이해하지 못하는 그런 사람들을 위해, 우리의 뒤를 돌아보며 최선으로 그들을 구도해야 한다. 그들이 진상자료를 받는다고 해서 너무 행복해해서도 안 되고 진실을 들으려고 하지 않는다고 해서 괴로워해서도 안 된다. 우리는 사악한 짓을 하는 사람들을 미워해서도 안 된다. 대법을 파괴하려는 사악을 제거하기 위해 우리가 발정념을 하지만, 이것은 중생을 향하는 자비심에 기초한 것이다.

진정한 수련은 많은 정(情)과 많은 욕망을 포함한 각종 집착을 제거해야 하는 것이다. 당신에게 아직도 미워하는 마음이 있다면, 당신을 진정한 수련자라고 할 수 있는가? 좋던 나쁘던 수련생의 생각에는 에너지가 있다. 나쁜 생각은 구도될 수 있었던 한 생명을 지금은 구도될 수 없게 하는 나쁜 에너지를 내보내게 되는데, 그러면 우리가 나쁜 행동을 범한 것이 된다. 그렇기 때문에 사람들의 구도를 위해 우리는 용서하고 인내하는 마음을 가져야 한다.

사실, 과거 수년간 중국대륙과 해외에 있는 대법제자들이 해온 일은 모두 중생을 구도하려는 목적에서 나온 것이다.

사부님께서는 《2004년 미국서부법회에서의 설법》에서 말씀하셨다,

“우리가 관용할 수 있어야만, 우리는 비로소 사람을 제도할 수 있다. 만약 매 한 명의 대법제자가 모두 이렇게 생각할 수 있다면, 당신들이 생각해 보라, 이 자비의 힘, 그 좋지 못한 요소가 또 머무를 곳이 있겠는가?”

사부님의 법을 단단히 명심하고 관용을 수련해내어 중생을 구도할 수 있게 합시다. 이것은 또한 우리 대법제자 자신들을 제고하여 원만에 이르게 하는 과정이기도 하다

발표일자: 2005년 9월 8일
원문일자: 2005년 9월 8일
문장분류: [수련마당]
중문위치: http://minghui.ca/mh/articles/2005/8/21/108871.html
영문위치: http://www.clearwisdom.net/emh/articles/2005/9/8/64692.htm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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