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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법 일을 하는 중에서 자신을 용련(熔煉)시키다

글 / 타이완. 타이난시 대법수련생

[명혜망] 수련생들은 종종 정법과정을 따르며 서로를 격려한다. 일이 증가함에 따라, 우리가 가진 능력을 최대한으로 늘려 대법과 관련된 더욱 많은 일에 참가할 것을 우리자신들에게 요구하며, 정법의 끝에 가까이 다가가고 있는 우리가 수련에서 뒤처지고 있는 것은 아닌지? 얼마간의 고난과 고험을 거친 후, 나는 내가 지나온 전체 수련과정을 되돌아 볼 필요가 있다고 느꼈다. 나는 어느 수련생과의 최근 교류에 감동을 받았다. 나는 다른 동수들이 어떻게 수련하고 있으며 그런 후 나는 어떻게 하고 있는가를 반영해보며, 내가 법공부와 수련에서 경험한 것들을 여러분들과 교류하고자 이 글을 쓰기로 결정했다. 부디 부족한 것이 있으면 지적해 주기 바란다.

조용한 마음으로 법공부하다

우리 모두가 현 단계에서 해야 하는 세 가지 일에 대해 알고 있으며 법공부의 중요성을 알고 있다. 그런데, 어떻게 법공부를 할 것이며 어떻게 우리의 마음속에 법을 받아들일 것인가? 최근 명혜망 기사, “이것이 빈말이 되지 않게 합시다: 사부님을 더욱 즐겁게 해드리고 걱정을 덜 끼쳐드립시다” (http://minghui.ca/mh/articles/2005/6/11/103648.html
http://www.clearwisdom.net/emh/articles/2005/7/4/62544.html)에서 이것을 분명하게 말한다. 이것은 우리의 문제이기 때문에 지금 이 점에서 더욱 분명히 하고 더욱 주의를 주어야 할 필요가 있다. 특히 많은 프로젝트의 일이 있고 일을 어떻게 잘할 것인가 하는 생각으로 마음이 꽉 차 있을 때 우리는 법공부에 집중하지 못한다. 종종, 법공부 후, 우리의 마음은 공백이며 무엇을 배웠는지도 모른다.

사부님께서는 《2002년 보스턴법회에서의 설법》에서 우리에게 말씀하셨다,

“지금 여러분은 확실히 아주 바쁘고 아주 많은 사람은 주동적으로 아주 많은 일을 분담하여 하고 있기에 법공부에 몰입하기가 몹시 어렵다. 사상 속에는 늘 정법(正法)의 일을 생각하고 법공부를 함에 있어서 조용히 하지 못하는데 실제로 헛배운 것과 같다. 당신이 이지(理智)적으로 똑똑하게 법공부를 하지 않으면 그것은 바로 헛배우는 것이며 또 시간을 지연시키게 되므로 이 면에서 여러분은 반드시 인식하여야 한다.”

진정하게 조용한 마음으로 법공부를 할 수 있고, 한 말씀 한 말씀 그리고 한 구절 한 구절을 읽어나갈 때, 법은 우리 내면에 정념을 만들어낼 것이다. 우리가 거대한 체구와 힘을 갖고 천상과 지구 사이에 서 있는 신들이라는 것을 느낄 수 있을 것이다. 그렇게 되면 우리는 발정념할 때 우주를 손상시키고 있는 사악들을 제거할 것이며, 더욱 나아가, 우리는 진상하는데 있어 무한한 지혜를 갖게 될 것이고, 그럼으로써, 중생이 구도 될 것이다.

노 수련생들은 그(녀)가 《전법륜》을 읽을 때마다, 마치 처음으로 책을 읽는 것처럼 읽는다고 교류한다. 사실, 그(녀)는 책을 천 번을 더 넘게 읽었을 것이다. 그의 말은 나를 감동시켰다. 《전법륜》을 읽을 때, 우리는 빨리 읽는 경향이 있다, 왜냐하면 우리는 이미 그 내용에 친숙해져 있기 때문이다. 그 결과는 종종, 우리가 무엇을 읽고 있는지도 모른다. 마치 처음으로 책을 읽는 것처럼, 우리는 우리 자신을 영점에 갖다놓고 최대의 관심을 주며 책을 읽어야 한다. 책을 처음 읽었을 때 우리가 어떻게 감동받았는가를 생각해보라. 만약 이러한 심태로 책을 읽는다면, 우리는 다른 생각들이 번잡스럽게 하는 것을 내버려두지 않을 것이다. 오직 이런 식으로 가슴에서 법공부를 한다면, 책 속에서 신들은 우리의 층차에서의 법의 내포를 밝혀줄 것이다. 그 이외에도, 조용한 마음으로 법공부하는 것은, 사부님께 그리고 법에 대해 우리의 존경심을 나타내는 것이다.

순수한 마음으로 대법의 일을 하다

대법 일을 하는데 있어서, 나는 항상 한 가지 원칙을 따른다, 즉, 대법 일에는 어느 한 개인이 없다. 그러므로 모순이 있을 때 나는 항상 나 자신에게 대법이 우선이라는 것을 상기시켜준다. 우주의 정법 과정에서, 개인과 관계된 것은 아주 하찮은 것들이다. 어느 모순에서든, 나는 내면을 들여다보며 나 자신을 옆으로 밀어 놓는 노력을 한다. 당장에 내가 어떤 특정한 집착을 제거하지는 못할지라도, 그리고 때때로 괴롭고 불편한 느낌이 있지만, 나는 모순이 대법 일에 영향을 주지 않게 한다.

정법 중에서 사부님을 돕고 중생을 구도하는 것은 우리의 신성한 서약을 이행하고 있는 것이다. 이것은 다른 누구를 돕고 있는 것이 아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대법 일을 순수한 마음으로 해야 한다. 실제 실행하는데 있어, 우리는 정말 그렇게 하고 있는가? 내가 잘못했다고 느낄 때 또는 일이 순조롭게 돌아가지 않을 때, 나는 불평을 하기 시작하고 다른 사람에게 책임을 전가하기 시작한다. 내면을 향해보면, 이것은, 단지 과시심에 대한 집착이라는 것을 깨닫는다. 한 마디로, 내가 대법을 실증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나 자신을 실증하기 위해 일을 하고 있다는 것을 발견한다. 그러한 집착은 깊이 숨어 있고 쉽게 발견되지 않을 수 있다. 하지만, 수련은 심각한 문제이다. 만약 한 사람의 개인 수련이 표준에 닿지 않을 때, 그렇다면 층층의 우주도 오래 지속할 수 없다. 우리가 대법 일을 하는 것은 우주에 대해 책임지는 것이다.

법을 실증하기 위해 일을 하는데서, 우리가 항상 너무 많은 인간의 관념을 잡고 있기 때문에 많은 중생 구도의 기회를 놓친다. 만약 각각의 매 대법제자가 순수한 마음으로 그들의 일을 한다면, 우리의 정념은 위대한 힘을 갖게 될 것이다. 하나의 단추를 누르던지, 한마디의 말을 하던지, 또는 전단 한 장을 나누어주던지, 이것은 위대한 힘을 갖게 될 것이다.

집착을 없애다

좋은 心性(씬씽)을 유지할 수 없을 때, 나는 《전법륜》에서 사부님의 말씀을 떠올린다,

“여러분이 알다시피 나한(羅漢), 그 층차에 도달하면 어떤 일에 부딪혀도 마음에 두지 않고, 속인 중의 일체 일을 근본적으로 마음에 두지 않으며, 언제나 싱글벙글 하면서, 얼마나 큰 손해를 보아도 싱글벙글하며 대수롭지 않게 여긴다. 정말로 해낼 수 있다면 당신은 이미 나한의 초급과위에 도달한 것이다.”

나는 종종 대법제자들은 더 높은 층차로까지 수련되었다고 생각한다. 초급 층차의 나한은 아무것에도 상관하지 않는다. 그는 그의 마음에 속인의 일에 대해 전혀 상관하지 않고, 그는 항상 싱글벙글할 것이다. 우리와는 얼마나 먼 거리인가! 우리의 마음이 움직이지 않을 때까지? 우리는 항상 밖에 있는 요인에 책임을 돌리거나 또는 모순이 있을 때 다른 사람을 탓한다. 만약 우리가 마음을 조용히 하고 우리의 매 생각을 검사한다면, 우리는 놀랄 것이다. 어떻게 내가 아직도 그런 나쁜 생각을 하고 있을 까? 왜 아직 이런 집착들을 제거할 수 없는 것일까?

사부님께서는 우리에게 집착을 제거할 수 있도록 배치해주셨다. 매번 테스트를 통과하기란 쉽지 않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 마음의 수용능력이 한계에 달하고 더 넓혀야 할 필요가 있을 때, 조금이지만 더 보태는 것은 정말로 도전이다. 그 순간, 셀 수도 없는 자신을 나무라는 생각들과 침울함이 불거져 나온다. 내가 잘 수련하지 못한 “나”를 미워하지만, 이 “나”는 그림자처럼 마냥 따라다닌다. 매 일 분이 고문이다. 하지만, 사부님께서는 제자들을 자비롭게 보살펴주신다.

법공부를 하다가, 사부님께서 《뉴질랜드 법회에서의 설법》에서 하신 말씀을 읽었다,

“그러므로 다시 말하여 여러분들은 수련 중에서 모순이 있을 것인즉, 관을 넘기는 일이 있을 것이고 당신이 속인의 사상을 내려놓지 못하는 이런 일이 나타날 것인바, 이것이 바로 수련이다. 대법 중에서의 수련은 한층 한층씩 사람의 사상을 제거한다. 여러분들이 알다시피 그 양파처럼 한 층 한 층씩 그것을 벗겨버리는데 최후에 모두 벗겨서 없어졌을 때가 바로 본질이다.”

모든 사람들이 집착, 특별히 깊이 뿌리내리고 있는 집착을 제거하는 아픔을 알고 있다. 제거하기가 더욱 어렵기 때문에, 그들은 더욱 큰 아픔을 조성한다. 나는 그러한 관념들이 나의 것이 아니라고 나 자신에게 계속 상기시킨다. 나는 그것들로부터 나를 분리시키는 확실한 선을 긋고 싶다. 집착을 제거하는 경험 중에서, 나는 이것이 자비로우신 사부님께서 산처럼 높은 집착을 제거하기 위해 나를 돕고 계시다는 것을 느낄 수 있다. 때로는 법공부를 한 후, 때로는 연공을 한 후, 어떤 집착을 포기하지 못하도록 괴롭히던 마음속의 상처가 치유된 것을 본다. 나는 더 이상 아픔을 느끼지 않으며 떠 있는 것처럼 가볍게 느껴진다. 내가 집착했다는 것조차 잊는다.

사부님께서는 《2004년 시카고법회에서의 설법》에서 말씀하셨다,

“…많은 일을 당신들은 해낼 수 없지만 사부는 할 수 있는데, 그러나 사부가 어떻게 하는가? 내가 당신과 접촉하기만 하면 떼어주는 것이 아니다. 당신이 정념을 확고히 할 때, 당신이 그것을 배척할 수 있을 때, 나는 조금 조금씩 당신에게서 떼어 내준다. 당신이 얼마만큼 해낼 수 있으면, 나는 당신에게 그만큼 떼어 내고 당신에게 그만큼 제거해 준다. (박수) 그러나 수련하는 사람으로서 말할 때, 당신은 진정으로 수련하는 사람처럼 그렇게 자신에게 요구할 수 있어야 하며, 비록 당신이 어떤 때 아직도 그렇게 하지 못하더라도, 최소한 당신은 이러한 정념이 있어야 하는데, 당신은 자신을 수련해야 한다.”

우리는 정법의 마지막 단계에 와있다. 모든 것들이 우리의 근본적인 집착을 표적하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이것은 다른 수련생들에게도 역시 그와 같다는 것을 발견했다. 모두가 일치하게 수련을 잘하는 것으로 인정받고 있는, 어느 수련생들까지도, 그들이 수련을 시작한 이래, 일에서 그리고 가족생활에서 그러한 모순을 마주친 적이 없었다고 인정한다. 나는 방금 그 과정을 걸어 지나왔고 그래서 그 고통을 충분히 인식한다.

법공부를 더 하고 강한 정념을 가졌을 때, 이것을 넘겼다고 느끼지만, 얼마 후, 모순이 다시 돌아온다. 때로는 내가 하나의 수련생처럼 행동하지 못했다고 느껴져 감히 사부님을 마주 대하지도 못한다.

사부님께서는 (《미국서부법회에서의 설법》, 1999년 2월 21-22일, 로스앤젤레스)에서 말씀하셨다,

“그럼 다시 말해서 수련은 반드시 진정하게 사람의 마음을 개변시켜야 한다. 만일 당신이 높은 경지에 도달하려 하고 그 神의 경지 중에 도달하고자 한다면 당신은 반드시 神의 그 사상경지에 도달해야만 한다. 만약 단지 당신의 표면만 개변시키고 당신의 본질이 움직여지지 아니하면 그것은 가짜이다. 일정한 때가 되고 관건적 시기가 되면 그것이 여전히 반영되어 나오게 된다. 때문에 사람의 마음을 개변하지 않는다면 다만 일종 가상의 덮어 감춤에 불과하다. 반드시 본질적으로부터 변화가 발생하여야만 비로소 진정하게 자신을 개변시키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당신의 수련은 자신에 대하여 책임져야 하며 당신은 진정하게 자신을 개변시키고 당신의 심령의 심처로부터 당신이 집착하는 좋지 못한 것을 내려놓아야 만이 그것은 비로소 정말로 내려놓은 것이다. 당신이 표면적으로는 그럴듯하게 하지만 당신 심령의 심처에는 당신이 아직도 자신의 내려놓지 못하는 것을 보수하고 있고 고수(固守)하고 있다면 그것은 절대로 안 된다.”

참으로, 이것은 나 자신에게 본질적으로 변화가 오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렇게 되기 위해서, 나는 대법에 동화되고 법에서 나 자신을 바로 잡아야 한다.

대법제자들의 관점에서 일에 있는 장벽을 보다

우리는 대법 일을 하고 있는 대법제자들이기 때문에, 처음 대법 일과 관련된 인터넷에 참가했을 때 나는 정념을 갖고 대법 일을 다뤘던 것을 기억한다. 당시, 나는 컴퓨터에 대해 많이 알고 있지 못했다. 나는 종종 어떻게 사악이 인터넷을 봉쇄하며 어떻게 그들이 돌파하는가 하는 것을 듣느라고, 컴퓨터 전문 수련생들과 접촉했다. 나는 기술적인 정보와 관계된 것에 더욱 마음을 쓰는 경향이 있었고, 기술이란 대법제자의 정념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라는 것을 잊고 있었다. 기술이 있는 많은 수련생들은 정말로 열심히 일했다. 그들은 인터넷봉쇄를 돌파하느라고 굉장한 시간과 노력을 썼기 때문에 귀중한 중국인들이 대법에 대한 진상을 알 수 있었다. 그들의 노력은 분명코 인정되어야 하고 그들은 더욱 많은 중생이 구도 되는 것을 도왔다.

최근, 한 수련생이 우리에게, 《전법륜》에 나오는 사부님의 말씀, “기와 기 사이에는 제약 작용이 없다.”를 상기시켜주었다. 그는 우리에게 우리가 인터넷에 관계된 일을 하는 대법제자들이라는 것을 잊지 말라고 요청했다. 문제에 부딪힐 때마다, 항상 우리는 그것들을 기술적인 방법에서 찾는다. 만약 우리가 우리의 모든 주의를 기술적인 것에 쏟는다면, 우리는 사악과 기술상에서 싸우는 것이다. 그렇다면, 우리가 그들과 같은 층차에 있다는 것이 아닌가? 만약 우리가 기술상의 테크닉들을 배우는데 초점을 두고 법공부를 게을리한다면, 이 누락은 아주 가능하게 이용당하게 될 것이다. 결과적으로, 이것은 우리가 중생을 구도하고 우리 자신을 수련하는 것은 물론, 대법 일에 영향을 줄 것이다

나는 컴퓨터 기술이 있는 수련생들의 노력을 부정하는 것이 아니다. 다만 수련생들에게 우리가 기술적인 문제에 부딪힐 때, 일을 잠시 옆으로 치워놓으라고 상기시켜주고 싶은 것이다. 얼마나 급한 일일지라도, 당신은 법공부를 해야 하며 이것은 당신에게 지혜를 가져다줄 것이다.

곧 문제들이 해결될 것이다, 왜냐하면, “心性(씬씽)이 얼마 높으면 공이 얼마 높다” 그리고 “수련은 자신에게 달렸고 공(功)은 사부에게 달렸기” 때문이다. 《전법륜》. 당신의 층차가 올라가면, 당신이 하는 일도 이 인간 층차에 제한되지 않으며 당신은 신성한 상태에 있게 될 것이고, 무엇이든 할 수 있다. 누가 당신을 멈추게 할 수 있겠는가? 만약 대법제자들이 안을 향해 들여다보는 것을 기억하고 법공부와 수련을 제 일 순위에 놓는다면, 우리의 정념은 그의 힘을 발휘할 것이다. 그렇게 되면 우리는 진정하게 수련하지 않는 사람들이 할 수 없는 일들을 할 수 있을 것이다.

이 기사를 쓰는데 일주일이 넘게 걸렸다. 여러 번 손을 보았다. 이것은 처음 원고와는 완전히 다르게 나타났다. 글을 쓰는 과정은 정말로 수련의 과정이며, 한 껍질씩 벗겨내는 일이다. 나의 글에는 특별한 테마가 있는 것은 아니며, 그저 내가 이해한 것들을 모았을 뿐이다. 감사하다.

발표일자: 2005년 7월 19일
원문일자: 2005년 7월 18일
중문위치: http://www.minghui.org/mh/articles/2005/7/6/105553.html
영문위치: http://www.clearwisdom.net/emh/articles/2005/7/19/63030p.htm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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