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독일 대법제자 찡청(净铖)
【명혜망】2003년 6월에 독일에서 언어공부를 할 수 있는 비자가 2개월 밖에 남지 않게 되었을 때였다. 독일의 비자 정책으로는 독일에 와서 공부하고 있는 학생이 2년내에 대학 입학고시에 통과하지 못하면 비자 연기 자격을 주지 않는다고 규정되어 있다. 그때 나는 아직 한번 더 시험을 볼 기회가 있었지만 만약 통과하지 못한다면 나는 즉시 독일을 떠나야 할 상황이었다.
그때 나의 머리는 청성하게 깨어있지 못했다. 이곳으로 온 후에 ‘안일을 추구하는 마음’에 이끌리어 집에 있는 친인들을 몹시 그리워했으며, 또한 이국 생활에서 오는 여러 가지 곤난과 나자신의 관념속에 있는 독일어에 대한 반감들이 오래동안 나 스스로 감정의 지배를 받게 했다. 나는 집으로 돌아가는 구실을 만들기 위해서 심지어는 시험이 통과되지 않기를 바랬다. 그렇게 문제를 사고하는 기점이 모두가 위사 위아한 것이었으며 그러면서도 나자신이 너무도 현실과 내심에서 자아에 집착하는 것을 감히 정시할 수 없었다.
주위의 동수들이 나의 이러한 상황을 알고는 서로 나를 찾아와 교류를 했으며 내가 귀국하지 않기를 바랬다. 그러면서 나에게 독일에서 난민 신청을 하여 보호를 받을 것을 건의했다. 하지만 나는 난민 보호에 대해 마음 깊이 배긴 선입견이 있었다. 감정의 사유속에 빠져 버리다 보니 ‘난민’이라는 글자를 듣기만 해도 속이 불편했다. 어릴적부터 중공이 의도적으로 왜곡한 ‘애국’ 선전의 독해를 받았기에 설령 내가 국가가 박해를 받는다 하여도 다른 나라들에 보호를 청해서는 안 된다고 그릇되게 인식하고 있었다.
6월 하순, 때마침 독일에서 난민 신청을 하고 있는 동수A는 증인이 필요했다. 그의 서류검사를 맡은 청문관리는 ‘일반인 파룬궁 수련생은 중국에서 박해를 받지 않을 것’이라고 했다. 나도’일반인’ 수련생이지만 중국에서 학업, 사업을 모두 잃었으며 두 차례나 잡혀간 경력이 있었으므로 그 수련생을 도와서 증인이 되어 줄 것을 결심했다. 프랑크프르트에서 (法兰克福),독일어에 좀 능숙한 동수 B와 C는 나하고 함께 가서 동수 A와 함께 그 변호사를 찾아갔다. 나의 증언을 다 듣고나서 변호사는 내가 겪은 경험들에 많은 관심을 가졌으며, 이런 상황에서는 독일에 도착한 즉시에 난민 신청을 할 수 있다고 했다. 그러면서 나보고 난민 신청할 의향이 없느냐고 물으면서 자기가 나서서 도와주겠다고 했다. 나는 웃으면서 머리을 저었다. 동수 B가 옆에서 다시 생각해 보고 대답을 주겠다고 변호사에게 말했다.
동수 A의 안건 때문에 며칠 후 나는 또 변호사를 만나야 했다. 그때 B수련생은 자기가 마침 두 주일간 휴가를 가게 되었는데, 나더러 잠시 자기의 거처에 가서 있으라고 했다. 그렇게 하면 내가 먼 길을 다닐 필요가 없고 또 서로간에 교류도 할 수 있지 않느냐고 했다. 나는 동수의 요청을 받아 들였다. 두 주일동안 동수의 집에 있으면서 함께 법공부하고 정시 발정념을 하면서 서로간에 교류도 진행했다. 동수 B는 처음부터 나에게 독일어를 배워주면서 잘 배우라고 격려해 주었다. 그러면서 그는 ‘난민’ 문제에 대한 자신의 인식을 말했다. ‘난민’은 실제 세계적으로 민주국가들이 인권을 수호하기 위해 박해를 받았거나, 또한 박해를 받을 수 있는 사람들의 생존권에 대한 하나의 보호적인 조치를 제공해 주는 것으로서 정의로운 것이라고 했다.
사부님이 우리 더러 잘하라고 하신 3가지 일은 나의 사유에 계발을 주었으며, 나로 하여금 점차 ‘자아’ 의식이 잘못된 곳에서 빠져 나오게 했다. 또한 동수의 포용과 이해는 나에게 도움을 주었으며 내가 난민신청을 하기 전의 우려를 가셔 주었다.
2003년 7월 중순에 나는 프랑크푸르트에 있는 그 변호사를 통해 정식으로 독일 연방국에 난민 신청을 제출하였다. 연방국에서는 나의 신청을 접수했으며 청문시간을 8월 5일로 정했다.
나는 독일어를 잘하지 못했기에 많은 일들을 나스스로 해낼 수 없었다. 그때 주변 동수들이 구원의 손길을 내밀었으며 나를 도와서 여러가지 자료들을 번역하고 변호사와의 연계도 도와주었으며 또한 법리에서 교류를 진행하였다. 전에 비해 법공부도 더 열심히하고 교류하는 과정에서 나의 머리는 갈수록 명석해 지는 감을 느꼈다.
한번은 사부님의 『2003년 정월 대보름날 설법』을 읽게 되었는데 “사악은 확실히 독일경찰들에게 많은 나쁜 것들을 부어 넣었는데 그때 우리를 아주 좋지 않게 대했다. 한 민족이 대법에 대하여, 사악과 정의(正義)의 앞에서, 그것은 어떤 태도인가? 내가 그들의 장래를 어떻게 대하여야 하겠는가?!”
나는 가슴에서 전율을 느꼈다. 내가 지금 있는 이 국가, 이 민족의 얼마나 많은 선량한 사람들이 사악에 의해 나쁜 것들을 머리속에 주입하었는가? 진상을 알고 있는 내가 그래 응당 최대한 자기의 능력을 발휘하여 이들의 머리속에 들어있는 대법에 대한 오해를 제거해야 하지 않겠는가? 수영할 줄 모르는 좋은 사람을 나쁜 사람이 물속에 밀어 넣었는데 수영할 줄 아는사람이 도리어 강가에 서서 내가 어떤 손실을 보겠는가를 생각한다면 이것은 그래 살인방화에 대한 무시와 부추키는 것이 아니란 말인가? 사부님의 대법제자로서 이렇게 해서야 되겠는가? 순간 나는 마음속으로 결심을 하였다. 내가 난민 신청을 한 것이 통과되거나 되지 않거냐가 중요한 것이 아니다. 중요한 것은 내가 보고 겪은 사악한 당이 어떻게 전반 국가기구를 동원하여 대법과 대법수련생들에 대해 잔혹하게 탄압한 사실들을 독일 국민들에게 알려주는 것이다! 이렇게 되어 나는 더는 내가 독일어에 능숙하지 못하다는 구실로 입을 다물고 있지 않았으며, 독일어에 능숙한 동수들의 도움하에 어디를 가던지 막론하고 주위의 독일 사람들에게 내가 국내에서 겪은 사실들을 알려 주었다.
한번은 열차에서 웹사이트를 경영하고 있는 독일인을 만났는데, 그는 내가 겪은 경력을 듣고 나서 이 사실을 웹사이트에 올려놓겠다고 하면서 더욱 많은 사람들의 지지와 관심이 있기를 바란다고 했다.
청문을 하루 앞두고 동수들은 나의 일을 가지고 전화회의를 가졌다. 여러 사람들은 청문하는 날 그 도시 중심에서 대법정보의 이벤트를 개최하여 사람들에게 대법의 진상을 알리는 한편 또한 나를 도와서 발정념을 하기로 했다.
8월 5일 나는 두 동수와 함께 연방국으로 갔다. 우리를 접대한 것은 청문관리 한 사람과 연방국에서 지정한 통역 한 사람이었다. 오전 8시 20에 우리의 대화는 시작되었다. 우리들이 이야기 한 모든 내용들이 기록되어 문자로 정리하여 연방국에 올려보내 보관하며 또한 많을 사람들이 이 자료들을 보게될 거라는 것을 나는 알고 있었다. 오늘의 청문은 원칙적으로 말을 중단시키지 못하게 되어 있기에 나는 내가 하려는 말들을 꼭 다하려고 작심했다.
앞에서 20가지 공식적인 문제에 대한 물음을 마친 후 청문 관리는 나에게 물었다. “당신의 출국을 초래한 직접적 원인은 무엇입니까? ” 나는 이 기회를 붙잡아서 먼저 간단하게 내가 어째서 파룬궁을 수련하게 되었는가를 이야기 한 다음, 99년부터 중공의 사악한 당이 파룬궁을 탄압한 것을 시작으로 하여, 내가 겪은 사실들을 보완해 가면서 이 사악한 당이 어떻게 국가의 모든 기구를 이용하여 파룬궁을 탄압했으며, 대법제자들을 치사한 그 장면들을 청문관리와 통역 앞에서 모두 이야기를 했다.
마음씨 고운 통역은 내가 말하는 범위가 너무도 큰것 같아 청문관리가 듣는게 귀찮아 할까봐 때때로 나에게 귀뜸했다. “당신의 일만 이야기 하면 됩니다. 다른 사람 이야기는 삼가하십시요” 나는 웃으면서 고개를 끄덕이고는 계속하던 말을 이어 나갔다. 나는 나 자신으로부터 시작해서 말하다가는 또 진상을 이야기 했으며 그러다가 나를 귀뜸해주면 다시 나 자신으로 돌아오곤 하면서 천천히 계속 말을 이어 나갔다. 또한 발정념을 하면서 내가 하는 말들을 진심으로 듣기를 바랬다.
이렇게 나는 연속 3시간 동안 말했으며 청문관리는 시끄러워 하는 기색이 없었으며 매우 진실되게 듣고 있었다. 나는 내가 말하려고 하는 말들을 모두 했으며 청문관리는 또 몇 가지 예를 들면서 “금후에도 계속 파룬궁 수련을 포기하지 않겠는가?” 하는 물음을 제기했으며, 12시 30분이 되어 나의 증언은 끝났다.
떠날 때가 되자 청문관리는 나와 악수를 나누었다. 나는 그가 나를 대하는 태도에서 나에 대해 신임하고 있다는 느낌을 받았다. 통역은 우리와 함께 걸어 나오면서 웃으며 말했다. 일반적으로는 시간이 많이 걸려도 반시간 정도면 끝난다고 하면서, 그렇지만 나는 4시간 동안이나 시간이 걸렸다고 했다. 땀을 흘리고 있는 그를 바라보면서 나는 갑자기 내가 독일어를 좀더 잘했으면 그를 이렇게 고생시키지 않았을 것인데 라는 미안한 감이 들었다. “정말 죄송합니다, 이렇게 오랜 시간을 말하다 보니 당신을 고생시켰군요 !” 그는 연신 괜찮다고 하면서 우리를 먼저 자기차로 역전까지 바래다 주겠다고 했다. 우리는 그에게 고맙다고 사양하면서 몇몇 친구들이 밖에서 우리를 기다리고 있다고 했다. 그제야 그는 인사를 남기고는 총총히 가는 것이었다. 그는 차를 꺼내서 나오던 중 대문어구에서 또 우리를 만났는데 차안에서 열정적으로 우리를 향해 손을 저었다. 대문 주위에 있던 몇몇 중국 난민들을 우리의 친구인 줄로만 여겼다.
대문을 나서니 우리를 기다리고 있던 동수들은 중국 난민들에게 진상을 하고 있었다. (연방국 바로 옆에 난민영이 있었다.) 난민 한 사람이 집으로 들어가더니 차물을 들고 나와서 우리에게 권했다. 후에 그 도시의 연공장에는 난민영에 거주하고 있는 중국난민 3명이 더 불어났다.
이어서 우리는 시 중심에서 이벤트를 개최하고 있는 곳으로 갔다. 그날 우리는 마지막 전단지를 나눠 주고서야 그 곳을 떠났다.
1개월 후 2003년 9월 6일 연방국에서는 나의 난민 신청을 승인했다.
이 일을 통해서 내가 알게 된 것은 정법시기 대법제자로서 중생들이 구도받으려고 애타게 기다리고 있는 시기에 어떠한 문제가 나타났을 적에 어느 기점에서 문제를 고려하는가 하 는것이 제일 관건인 것이다. 최대한 자기 득실을 따질 것인가, 아니면 중생을 구도하는데 최대의 대가를 바칠 것인가?
사부님께서 하신 말씀이 생각난다. “ 나는 최대한으로 나의 모든 것을 포기할 수 있기에, 그래서 이 모든 것을 해체할 수 있다. 『법륜불법-스위스법회에서의 설법』제자로서 일이 생겼을 때 어떻게 자아의 틀속에서 뛰쳐 나올 수 있으며, 자기로 하여금 사부님께서 요구하신 “무사 무아, 선타후아”의 경지에 도달할 수 있는가 하는 것이 우리 개개의 대법제자들이 응당 진정하게 사고해야 할 일이라고 생각한다.
문장완성:2005년 07월 02일
문장발표:2005년 07월 03일
문장갱신:2005년 07월 03일 00:52:48
문장분류: [제자절차]
문장위치: http://www.minghui.org/mh/articles/2005/7/3/105331.html