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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관성과 안일함

글 / 미국 수련생

수련에서 일관성을 갖는 일이 아주 중요하다는 것은 모두가 알고 있다. 하지만, “일관”된다는 것은 과연 무엇을 뜻하는 것인가?

이것은 사부님께서 우리에게 요청하신 세 가지 일을 잘하는 것을 뜻하는 것인가? 물론 그렇다. 하지만, 이 “일관된”이라는 단어에 더 깊은 뜻은 없는 것일까?

내가 보는 바에 의하면, 일관성을 갖는다는 것은 결코 보통 일이 아니다. 사실, 이것은 우리에게서 최상의 것을 요구한다 — 항상 — 우리의 꿈에서조차도! 그렇기 때문에 속인은 결코 일관성을 갖는 데 대한 깊은 뜻을 알지 못할 것이다. 왜? 그는 어떻게 수련하는 것조차도 알지 못하기 때문이다! 오직 수련인 만이 “일관적”일 수 있다 — 왜냐하면 오직 수련인 만이 어떻게 수련하는가를 알기 때문이다. 그처럼 “일관된다.”라는 것은 엄숙한 일이다.

일관된다는 것은 우리가 갖고 있는 어느 한 생각 아니 바르지 않은 모든 생각들을 정확하게 지적하고 그것을 뿌리째 뽑아버릴 수 있는 것을 뜻한다 — 하루종일 — 매초, 매분.

만약 우리가 바르지 않은 생각을 하고 있으면서 이를 그렇게 확인할 수 없다면, 우리는 바로 그 순간 우리가 가지고 있는 그 바르지 않은 생각의 영향하에 있게 되는 것이 아닌가? 만약 그렇다면, 우리는 또 부지불식간에 우리 자신을 낡은 세력의 영향하에, 따라서 그들의 배치에 우리 자신을 드러내 놓는 것이 아닌가?

그런 까닭에, 내게 있어 일관된다는 것은 매 순간, 순간 우리가 갖고 있는 아주 미시적인 매 인간적 생각, 충동, 욕망, 감정에 주의를 돌리는 것을 뜻한다. 이것은 우리가 갖고 있는 매 생각이 바른가 바르지 않는가를 즉시 주목하도록 우리 자신을 훈련하는 것을 뜻한다.

올바른 생각이 아니라면, 부정확한 생각이라면 이를 즉시 — 절대적으로 당장 — 정념으로서 밀어내야 한다! 우리가 일상생활에서 당면하는 많은 고난은 바로 그곳에서 우리의 생각이 교정되어야 하고, 그곳에서 우리의 바르지 않은 생각이 정념으로 바꾸어져야 한다는 방향표시판이 아니란 말인가? 더구나, 이런 바르지 않은 생각들을 우리의 생명체 속에 존재하게 했을 때, 그것들이 바로 우리 자신이 스스로 부과한 많은 고난의 근본 원인이 되지 않았는가?

수시로 우리의 바르지 않은 생각들 (또는 우리가 경험하는 교란들)은 우리가 내려놓지 못한 누락이나 집착의 직접적인 반영이다. 그런 까닭에, 우리에게 누락이나 집착이 적으면 적을수록, 우리의 마음은 더욱 순수해 질 것이고 내면에 남아있는 바르지 않은 요소들이 더욱 쉽게 확인될 것이다. 우리 자신을 순수하게 한다는 것은 우리가 아직 내면에 갖고 다니는 바르지 않은 생각들을 내려놓는 것과 같지 않은가? 그리고 우리가 바르지 않은 생각들을 내려놓았을 때, 낡은 세력에게 우리를 교란시킬 핑계가 있을 수 있겠는가?

사부님께서는 《“전법륜”》에서 이것을 아주 분명하게 말씀하신다:

“무릇 연공 중에서 이런 교란, 저런 교란이 나타나면 당신이 아직도 무엇을 내려놓지 못하고 있는지 당신 자신이 원인을 찾아야 한다.”

예를 들면, 만약 우리가 색에 대한 집착을 제거했다면 (마음이 그 정도로 순수해졌다는 것을 뜻한다.), 그러한 생각들이 우리 마음에서 일어났을 때, 색정적인 생각이나 충동을 확인해내는 것이 어려울 수 있겠는가? 다른 한 편으로, 만약 우리가 자신을 잘 관리하는 것을 우선으로 하지 않는다면, 즉, 우리가 순간-순간의 생각 과정을 주시하고 감시하지 않는다면, 그런 생각이 우리 마음에 나타났을 때, 우리의 안일함은 우리로 하여금 색정적인 생각에 빠져들게 하는 원인이 될지도 모른다.

그런고로, 방심하면 할수록, 우리는 더욱 교란을 받게 될 것이다. 왜 그런가? 왜냐하면, 우리가 생각하는 것은 그것이 무엇이든지 확장되기 때문이다: 뜻인즉, 하나의 바르지 않은 생각은 바르지 않은 더욱 많은 생각들이 번식하는 토양이 된다. 달리 말하면, 우리자신이 우리가 하루종일 생각하는 것으로 되어버린다는 것이다. 이 진실은 우리의 생명 전체에 걸쳐, 즉, 육체 내면에, 마음 내면에, 그리고 우리의 가슴 내면에서 반영된다.

그러므로 우리가 생각을 주시하는데 안일해진다면, 분명코 우리의 삶에 예기치 않은 어려움을 불러오게 된다. 우리가 내면에 존재하는 바르지 않은 생각들을 방치해둔다는 것은, 그것들이 우리의 바로 생명 속에서, 매 층차에서 뿌리를 내리도록 방치하는 것과 같다.

그리고 그것들이 뿌리를 내렸을 때, 우리는 저층의 생명과 저층의 물질이 연합해서 우리의 몸과 마음을 둘러싸도록 초청한 것이 아닌가? 우리는 자기만족에 빠져 불필요하게 우리 자신에게 시험과 고난을 만들어낸 것이 아닌가?

사부님께서는 《“전법륜” 제3장 》에서 말씀하신다:

“바로 자신의 사상이 바르지 못하므로 비로소 좋지 않은 것들을 초래하게 하였다.”

우리에게서 일어나는 매 생각, 충동, 욕망은 수련에서 우리가 위로 올라가는가 아니면 아래로 떨어지는가의 기회이다. 만약 우리가 바르지 않은 생각, 충동이나 욕망에 빠져있게 된다면, 그것들에게 압도되는 것이 아닌가? 알게 모르게 우리가 층차를 내려놓은 것이 아닌가?

사부님께서는 《 “전법륜” 》에서 말씀하셨다:

“매 한고비, 매 한 난은 모두 수련하여 올라가는가 아니면 떨어져 내려가는가 하는 문제가 존재한다. 본래 어려운데 또 인위적으로 이 난을 증가시키다니, 어떻게 넘길 것인가? 당신은 이 때문에 난과 번거로움에 부딪히게 될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본질적으로, “일관성을 가진다.”라는 것은 어떤 광대한 개념이 아니라, 이것은 우리가 살아있는 각각 매 순간을 수련하는 것이다. 이것은 우리 주위에 갖고 다니는 생각-마당의 고유성을 뜻하는 것이고, 거기에는 대량의 정신적 성장을 위한 굉장한 잠재성이 있든가 아니면 조금 또는 전혀 성장이 없게 된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가 어떻게 생각을 관리하는가가 결정적인 문제이다.

사부님께서 우리를 위해 선택해주신 길은 바른길이다. 그리고 이 바른길에 남아 있기 위해서, 우리는 정념을 가져야 할 필요가 있다. 바르지 않은 생각을 하는 것은 실제로 이 길에서 내려가는 것을 뜻한다. 그리고 모두가 알고 있듯이, 우리가 사부님께서 배치해 주신 길에 있지 않는다면, 낡은 세력의 길에 있어야 하는 것이다.

또한 우리가 바르지 않은 생각을 하는 곳이면 어는 곳에라도 태만이나 누락이 있게된다. 이것은 바로 우리 자신이 낡은 세력에게 우리를 박해하도록 핑계를 주는 것이 아닌가? 이것은 우리의 미래를 위태롭게 하는 것이 아닌가?

사부님께서 “전법륜”에서 지적하신 것처럼:

“…좋고 나쁨은 사람의 그 일념에 달렸다.”

그렇기 때문에, 일관성이란 우리의 길을 잘 걸으려는 우리의 서약에 충실한 것을 뜻한다, 즉 끊임없이 정념을 갖는 것이다. 정념을 견지하면 할수록, 아직 남아 있는 바르지 않은 생각들을 확인하는 것이 쉬워질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견정함은 우리가 길을 잘 걸을 수 있는데 중요한 역할을 한다.

그렇기 때문에, 진정한 의미에서의 일관성이란 하루종일 자신을 의식하는 것이고, 또는 적어도 자신을 의식하고자 진지하게 시도하는 것이다. 일단 어떤 생각이 우리의 것이고 어떤 생각이 우리의 것이 아니라는 데, 또는 어떤 생각이 바른 것이고 어떤 것이 바르지 않은 것인가를 주의하는 데 익숙해졌을 때, 우리는 삶이 얼마나 단순해지는지를 주목하게 될 것이다. 더구나, 우리는 과거에는 불평을 해왔던 것들을 포함해서, 우리가 하는 모든 것을 즐기기 시작할 것이다.

정념을 갖게 된다면, 우리가 법 속에 있는 것이고 법에 따라 행동하는 것이다. 그런고로, 낡은 세력의 배치 하에 사는 것이 불가능해질 것이다. 실제로, 법에 따라 행동하는 것은 저절로 우리의 생명 속에서 낡은 세력의 그 존재 자체의 출현을 완전히 부정하는 것이다. 법은 정념을 강화시키고 일관된 정념은 법 속에서 우리를 시종일관 지켜줄 것이다. 그렇다면, 낡은 세력이 더 이상 어떻게 우리의 삶을 좌우지할 수 있겠는가? 이것이 바로 진정하게 그들의 존재 자체를 부정하는 것이 아닌가?

사부님께서 우리에게 하라고 하신 세 가지 일을 잘할 때, 사실 우리는 한 생명이 행동할 수 있는 가장 정의로운 방법으로 생각하고 행동하는 것이다. 우리가 더욱 정의로워질수록, 우리 자신의 내면에 남아있는 바르지 않은 요소들을 확인하는 것이 더욱 쉬워지고, 사부님께서 우리에게 하라고 하신 세 가지 일을 더욱 부지런히 잘하게 될 것이다. 전체 과정은 완전한 순환이 된다.

그런고로, 하루종일 연속적으로 정념을 가지는 것이, 나의 의견으로는, 우리가 길을 잘 걷는 데 있어 가장 중요하다. 그리고 그것을 정말로 잘할 수 있다면, 우리는 우리 자신에게 그리고 우리의 일상생활에서 최대의 자신감을 가질 수 있다. 내가 여기서 말하는 자신감은 속인의 자신감이 아니다 – 이것은 정법시기 대법제자의 자신감이다. 속인은 그의 성취, 그의 직함, 명예, 신분, 재산에서 그의 자신감을 끌어낸다. 수련자는 하루종일 정념에서 그의 자신감을 끌어온다, 뜻인즉, 그의 자신감은 법에 따라서, 법 속에 있음으로 해서 오는 것이다.

어떤 사람은 논쟁할 것이다, “우리가 아직 인간 세상에 있고, 끝에 이를 때까지 인간의 생각을 갖고 있을 것이 확실한데, 그렇다면 우리는 항상 정념을 가질 수는 없다.”

나도 이 말에 동의한다, 하지만, 수련이란 정확하게 우리가 인간적인데서, 바르지 않은데서 걸어 나오는 것이 아닌가? 그것이 수련의 목적이 아닌가? 더구나, 우리의 수련의 길 마지막까지 우리와 함께 남아 있게 될 바르지 않은 생각들도 맨 마지막 바르지 않은 생각을 뿌리뽑겠다는 우리의 굽히지 않는 의지를 어떻게 방해하지 못한다. 최선에서 모자라는 것이 바로 안일이라는 형태이다.

결론은: 우리가 수련에서 일관적일 때, 사부님께서 우리에게 하라고 하신 세 가지 일을 할 때, 우리의 삶은 법을 실증하게 될 것이다. 예를 들면, 나는 혼자서 생각하곤 했었다, “오, 지금 나는 오늘 저녁 《전법륜》 중 두 강의를 읽어야 한다,” 또는, “오, 지금 나는 내가 하고 있는 것을 멈추고 정념을 발해야 한다.” 사실, 나는 우리가 잘해야 하는 세 가지 일을 (연공을 포함해서) 인간의 관념, 바르지 않은 생각으로 들여다보고 있었다. 수련과정 자체가 내게 있어 하나의 일, 사부님께서 (나의 상관) 내게 세 가지 일을 맡기셨고 나는 그것들을 의무적으로 실행하는 충성스런 직원과 같았다.

실제로, 나는 전혀 법에 의해서, 법의 내면으로부터 나 자신을 수련하지 않았다. 나는 단순히 이기적인 의무라는 의미로서 나 자신을 수련하고 있었다. 예를 들면, 항상 이러했다, “참, 지금 연공을 해야 할 것 같은데!”, 그 대신에 “이건 대단한데! 나는 어떻게 이런 다섯 가지 연공을 알게 되는 상서로운 행운을 가졌지! 믿기 어려운 특권을 가졌단 말이야!”라고 했어야 했다.

지금은 다르다. 나는 다음날 일어나서 발정념을 하고, 연공하고, 《전법륜》을 읽고, 그리고 진상하는 하루가 시작될 것을 기대하면서 잠을 자러 간다. 하루하루가 진정하게 그 전날보다 더욱 유망한 하루가 된다 – 그리고 나의 시야는 끝이 보이지 않는다! 만약 한 짧은 문장으로 내가 사부님께서 배치해주신 길을 어떻게 느끼는가를 말하라면, 나는 이렇게 말할 것이다: “나는 삶의 시간이 있습니다!”

부디 여기에 쓴 글에서 제가 잘못 이해한 것이 있다면 지적해 주십시오.
사부님 감사합니다!
여러분 감사합니다.

발표일자: 2005년 6월 14일
원문일자: 2005년 6월 13일
영문위치: http://www.clearwisdom.net/emh/articles/2005/6/14/61841.htm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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