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대륙 대법제자
【명혜망 2005년 3월 9일】정법형세가 추진됨에 따라 우리는 더욱 법공부를 강화하여 정법노정을 따라 잡아야 한다. 곧 종결(結束)된다는 생각을 품어 우리 자신의 마음이 움직이게 됨으로써 대법과 자신에게 불필요한 손실을 가져다주어서는 안 된다. 우리는 곧 종결된다는 것을 알수록 더욱 시간을 다그쳐 우리가 마땅히 해야 할 일체를 잘 해야 한다. 왜냐하면 사부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셨기 때문이다. “원만(圓滿)은 대법제자의 수련의 결속이며, 법을 바로잡는 것(正法)은 대법제자의 사명이다. 대법제자를 두고 말한다면 원만이란 단지 회귀(回歸)하는 시간의 문제이지만, 법을 바로잡는 것(正法)은 미래에 남겨주는 것이다. 부동한 층차의 중생이 보게 되는 우주의 미래란 사실은 존재하지 않는 가상(假象)이다. 현재 인류의 매 하루는 모두 대법의 수요에 의하여 배치되어 나온 것으로, 대법제자의 인간에서의 표현은 바로 역사에 남겨주는 것이다. 미래의 부동한 역사시기의 우주 중에서, 만일 대법을 파괴하거나, 혹은 생명의 부동한 표현이 나타났을 때, 대법이 어떻게 법을 바로잡으며 일체로 하여금 원용불파(圓容不破)하게 하는 것은 가장 중요하다.” ( 『무엇이 공능(功能)인가? 』)
우리 정법시기의 대법제자는 이렇게 큰 책임이 있는 만큼 우리는 반드시 우리가 해야 할 매 한 가지 일들을 잘 해야 하지 않겠는가? 자신을 잘 수련하는 동시에 더욱 많은 중생을 구도해야 한다. 왜냐하면 허다한 우주의 왕이며 주(主), 심지어 상당히 방대한 더욱 고급의 생명들이 모두 사람으로 전생하였으며 아울러 매우 많은 사람들이 더욱 큰 천체 중생의 생명과 대응하고 있기 때문이다. 사부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셨다. “ 당신들이 우연히 만나게 되는 사람, 생활 중에서 만나게 되는 사람, 일하는 중에서 만나게 되는 사람에 대하여 여러분들은 모두 가서 진상을 알려야 한다. 바로 인간세상에서 총총히 한번 지나가는 중에서 미처 말하지 못하더라도 당신은 자비를 상대방에게 남겨주어야 하며 마땅히 제도 받아야 할 이를 잃어버리지 말아야 하며 인연 있는 이를 더욱 잃어버리지 말아야 한다. 사실 수많은 대법제자들은 진상을 할 때, 내가 지금 진상을 하러 간다고 말하는데, 마치 지금은 가서 진상을 하는 것 같고, 당신이 평소에는 곧 진상을 하는 것이 아닌 것 같다. 중생구도는 당신들 현재 생활의 매 한 가지 일 중에 관통되고 있다. 만약 여러분들이 모두 인식할 수 있고 그 중요성을 명백히 인식할 수 있다면 내가 생각하건대 그럼 가능하게 더욱 많은 중생을 구도할 수 있을 것이다.” ( 『2003년 애틀란타 법회에서의 설법』)
한번 지나가는 중에서 미처 말하지 못하더라도 당신은 상대방에게 자비를 남겨야 하는데 그러면 우리들의 집 식구, 우리와 일상생활에서 만나는 사람들은 우리와 더욱 큰 인연이 있는 것이 아닌가? 그렇다면 우리는 더욱 마땅히 그들을 구도해야 하지 않겠는가? 우리가 진상을 이야기하는 것이 그들을 구도하는 한 방면이라면 우리들 자신의 표현과 우리 일상생활 중의 모든 행위도 역시 그들이 능히 제도 받을 수 있는가 없는가 하는 한 측면이 아니겠는가?
대법제자 개개인의 길은 같지 않지만 우리는 중생구도의 공동책임이 있다. 어떤 집은 온 집안이 모두 수련하므로 어떤 일을 처리함에 있어서 비교적 쉬울 수 있다. 어떤 집은 한 사람만 수련하거나 한 사람이 수련하지 않는다. 그리하여 가정관계를 잘 처리하지 못하면 확실히 우리에게 불필요한 시끄러움을 가져올 수 있다. 내 기억으로 우리 일부 수련생이 법을 실증하다가 붙잡혔을 때, 어떤 집 식구는 말하기를, 우리 이 사람이 어떠어떠하게 좋으므로 우리는 방법을 강구하여 그를 구해내야 한다고 하고, 어떤 집에서는 오히려 말하기를, 그더러 거기서 살라고 하라, 그래야 우리도 좀 조용하게 살 수 있다고 한다. 뿐만 아니라 어떤 동수의 가정관계는 매우 긴장이 감돈다. 다 똑 같은 수련을 하건만 주변의 환경은 왜 그렇게 큰 차이가 있는가? 우리 자신의 마음에 문제가 있어 조성된 것이 아니란 말인가? 예를 들면 한 가정은 네 식구가 있는데 아버지를 제외하고, 두 아이와 어머니는 모두 수련한다. 그 해에 법을 실증하다가 붙잡혀 노동교양소에 들어갔을 때, 연로한 아버지는 그들에게 음식과 솜옷을 갖다 주었다. 자식들이 연이어 나온 후, 아버지는 여전히 자식들을 잘 보살폈지만 어머니가 나온 다음, 그들 셋은 매일 한 자리에 앉아 법공부를 하면서 아버지를 냉대하였다. 아버지는 필경 속인인지라 이해하지 못하여 고독감을 느꼈다. 게다가 자식들이 모두 30여세인데 가정을 이루지 않았다. 아버지는 점점 고립되어 나중에는 가정에 갈등이 생겼는데 오랫동안 지속되었다. 그 자신들은 그래도 아버지가 자식들을 잘 대하지 않는다고 말하면서 시끄러움이 자신들에게 문제가 있어 조성된 것이라는 것을 보지 못했다. 사부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신 적이 있다. “어떤 사람은 번거로움에 부딪히면 그는 그 번거로움 속에서 이렇게 말한다. 남이 어떻게 나에게 이럴 수 있는가? 어찌하여 안 되는 걸까? 사실 나는 여러분들에게 알려 주겠다. 남이 당신에서 잘 대해주지 않는 것이 아니며 우주의 법은 모두 순리로운 것이다. 만약 당신 자신이 틀어졌다면 당신은 주위의 일체가 당신에 대해 이상하게 되었음을 발견한 것이다. 당신이 당신자신의 원인을 찾아내서 순응한다면 그 일체가 또 잘 돌아가는 것을 발견할 것인데 흔히 이러하다. ” ( 『싱가포르 법회에서의 설법』)
사존께서는 여러 차례 설법 중에서 우리들에게 최대한도로 속인상태에 부합하여 수련하라고 말씀하시지 않았는가. 우리는 정(情)을 제거하는데 있어서 또 이유가 있지 않은가? 우리는 마땅히 부모에게 잘 대해야 하고 자녀들에게 잘 대해야 하는데 그들 역시 중생의 한 사람이 아닌가? 그들 역시 우리가 구도해야 할 대상이 아닌가? 중생들이 우리가 잘 하는 것을 보지 못했는데 어찌 우리를 좋다고 말할 수 있겠는가? 예를 들면 어떤 젊은 제자들은 자신이 수련하고 있다고 하여 배우자를 찾으려고 하지 않아 집의 수련하지 않는 사람이 이해할 수 없게 하여 적지 않은 시끄러움이 나타났다. 그 자신은 오히려 말하기를, 곧 종결될 것이므로 나는 배우자를 찾지 않겠다고 했는데, 왜냐하면 생각의 기점이 원용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많은 속인들이 우리 동수에게 당신들이 대법을 수련하면 결혼을 하지 않는 것입니까? 라고 묻는다.
젊은 동수들이여, 사실 다른 사람이 소개해준 사람도 역시 우리가 구도해야 할 중생이며 그들 역시 당신과 인연이 있는 것이 아닌가? 사부님께서는 우리 주변에서 발생하는 일들은 우연한 것이 없다고 말씀하지 않았는가? 어떤 젊은 제자들은 말하지 않았는가. 내가 만난 몇몇 친구들은 대법이 박해받고 있는 진상을 알고 있지만, 나의 가정형편이 좋지 않아서(이 수련생은 국가의 중점대학 학생이었는데 법을 실증함으로 인해 학적이 제거되고 당적이 제거되었으며 학위도 잃고 사람 중의 일체를 잃었다.) 사람들은 일반적인 친구로만 되려고 할 뿐이다. 나는 또 다른 사람을 찾아가 진상을 이야기할 수 있다….
동수들이여, 우리가 정말 어떻게 해야 맞는지 잘 모를 때, 자신의 사(私)적인 관념을 내려놓지 않으려고 하는 것이 아닌가? 수련상태가 조성한 것이라고 구실을 찾아 말하지 말라. (극히 개별적으로 표면의 개변이 빠른 것, 진정하게 수련상태가 조성한 것은 포함하지 않는다.) 사부님께서는 사람은 자신의 관념을 내려놓기가 가장 어렵다고 말씀하셨는데 그래도 늘 일부 구실을 찾아 자신을 설득하려고 하는가?
개인의 깨달음이니 타당치 않은 곳이 있으면 자비로 시정해주시기 바란다.
문장 완성: 2005년 3월 7일
문장 발표: 2005년 3월 9일
문장 갱신: 2005년 3월 9일 12:54:33
문장 분류: [수련마당]
원문 위치: http://www.minghui.ca/mh/articles/2005/3/9/96882.html