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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련 중에 표현되는 세 가지 종류의 사람 마음에 대해 말한다

글 / 대륙제자

【명혜망 2004년 8월 10일】 최근에 수련 중에서 표현된 문제점을 발견하고, 이 글을 올려 여러분과 교류하려고 하는데, 이것은 개인 차원에서 이야기하는 것이기에, 만일 타당하지 않은 부분이 있다면 자비로 지적해 주셨으면 합니다.

표현 1 : 갑 동수와 을 수련생을 비교한다

법공부를 비교하고 수련을 비교하는 것은, 상대방의 어떤 부분에서 잘된 점을 보고, 자신 이 정진할 수 있도록 독촉하고, 내심으로 수련하는 것이다. 그러나 수련하는 서로 다른 두 사람을 비교한다면 그것은 밖에서 찾는 것이며, 더욱이 수련하는 사람들을 이렇게 서로 비교할 수는 없는 것이다. 그것은 매 사람의 기초가 다르고, 내원(來源)이 다르며, 수련의 길이 다를 뿐만 아니라, 집착심을 제거하는 상태도 다르기에 조성된 차이점이 있기 때문이다.

또한, 이렇게 다른 사람의 장점과 다른 사람의 단점을 비교하는 그 자체가 수련생을 존중하지 않는 것이고, 다른 사람을 포용하지 못하는 것이며, 수련에 대해 엄숙하지 않은 것이다. 따라서 수련생 상호 간에 집착심을 불러 일으킬 수가 있다. 예를 들어 불평하는 마음, 질투심, 비기는 마음……, 이런 마음은 동수 사이에 간격과 모순이 생기게 하는 기회를 조성할 수 있다. 지금은 정법시기이고, 특히 중생을 구도하는 관건적 시각이라, 마침 대법제자 상호 간에 협조를 잘하는 것이 필요하므로, 최대한 인위적으로 환경의 복잡함을 가중시켜 수련생 사이에 이러한 마음이 생기게 해서는 안 된다. 우리는 마땅히 법을 책임지고, 수련생을 책임지는 기초 하에서, 선의적으로 동수의 부족한 점을 알려 주어야 한다. 뒤에서 다른 사람을 평가한다면, 이것은 정법에 좋은 작용을 할 수 없다.

표현 2: 자신의 수련이 잘 되었다고 인정하는 동수에 대하여 매우 부러워하고 크게 칭찬한다.

동수 사이에 잘된 부분들을 교류하는 목적은 여러분이 서로 법공부를 비기고 수련을 비기자는 것이며, 법에서 공동으로 제고되어 세 가지 일을 더욱 잘하자는 것이다. 그러나 부러워하는 마음은 곧 추구하는 마음이자 자신에 대한 집착으로 기점은 사(私)에 있다.

수련생이 만일 지나치게 부러워하거나 혹은 어떤 수련생이 어떠어떠한 방면에서 잘 하였다고 지나치게 칭찬한다면, 바로 강대한 집착이 형성될 것이다.
(물론, 수련생이 잘 한 일을 교류할 수 없다는 것이 아니며, 교류의 목적은 여러분들로 하여금 비학비수를 위함이며, 법에서 공동으로 제고하고, 세 가지 일을 더욱 잘하기 위함이다. 절대로 여러분에게 모 수련생이 잘한 것에 대해 집착하게 하거나 여러분에게 모범을 제시하고자 하는 것이 아니다.)

남이 잘하는 것에 대해 집착하는 이런 동수들은 자신이 사람의 마음으로 수련을 대할 뿐만 아니라, 또한 이런 잘하고 있는 동수들로 하여금 떨어질 수 있는 환경을 조성할 것이다.
”당신도 그를 해칠 수 있다. 그는 환희심이 생겨날 수 있어 최후에는 자신이 무엇이든 다 잃어버리며 닫혀버려 결국에는 떨어져 내려가게 된다.”(『전법륜』 —「과시심리」)

여러분 잘 생각해 보라. 이런 수련인 중의 이렇게 많은 집착이 일단 낡은 세력에게 구실로 잡힌다면, 박해는 정말 무정할 것이다.

표현 3: 담론하기를 매우 좋아하고, 어떤 일을 누가 했는지 알아보거나, 추측한다.

만약 이년 전에 이런 일이 우리 수련생들 중에서 발생했다면 그때는 여러분이 모두 성숙하지 않았고, 누가 무슨 일을 했으며, 얼마나 많이 했으며, 어떠어떠한 일을 누가 했는지…… 등등을 아주 집착했었기 때문에 나름대로 이해할 수 있었다. 그러나 현재까지도 이에 대해 흥미진진해 한다면 문제가 있다. 왜냐하면 여러분이 끊임없이 법에서 제고하며, 본성이 회귀(回歸)하는 가운데 정말로 모두들 성숙해졌고, 애초의 초등학생이 대학생으로 변모했기 때문에 더 이상 이런 유치한 문제를 생각하는 것은 타당하지 않기 때문이다. 생각해보라! 만약 한 사람이 어느 날 “아무개가 오늘 밥을 먹었대!”라고 한다면 사람들은 이 사람이 뭔가 정상이 아니라고 생각할 것이다. 왜냐하면 사람이 밥을 먹는 것은 당연한 이치로서 생명의 본능이기에 하찮은 일이며 놀랄만한 것이 전혀 없으며 제기할만한 일이 아니기 때문이다.

이것도 우리 대법제자가 현재 진상을 알리고, 중생을 구도하는 일과 마찬가지로, 이것은 바로 대법제자의 직책이며, 신의 본성이며 본능이다. 당신은 그에게 하기 어려운 일을 하라고 할 수 없는데, 이는 마치 당신이 다른 사람에게 밥을 먹지 못하게 하여 굶어죽게 만드는 것과 마찬가지이다. 매 사람은 모두 자신의 부동한 상황에 근거하여 하기에 뭐 희한할 것도 업다. 이것은 신의 본성의 각도에서 말한 것이다.

만약 대법의 각도에서 말한다면, 오직 자신을 법 속에 놓고, 자신을 대법 속의 하나의 입자라고 생각할 때라야만 비로소 자신이 한 법을 실증하고, 중생을 구도하는 일이 당연한 것이며, 본분이라고 생각하게 된다. 자신을 법 밖에 놓을 때라야만 비로소 자신이 대법을 위해 얼마나 대가를 치렀으며, 자신이 무엇을 했는가에 대해 매우 마음을 두며, 다른 사람은 무엇을 했고, 얼마나 했는가 하는 이런 것들을 계산하게 된다.

문장완성 : 2004년 8월 9일
문장발표 : 2004년 8월 10일
문장갱신 : 2004년 8월 10일 1 : 00 : 14 PM
문장위치 : http://www.minghui.org/mh/articles/2004/8/10/81410p.htm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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