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 북미 대법제자
【명혜망2004년 8월 6일】지나온 몇 개월간에 파룬궁 수련생들이 혹형전시회(酷刑展)를 적지않게 했는데 전시회에 참가한 동수들이 경상적으로 표현하는 과정 중에서의 감수와 혹형을 당하고 있는 제자들의 형상을 어떻게 표현할 것인가 하는 연구 토론을 듣게 되는데 나는 여기서 자신의 감수를 말하려 한다.
절대 대부분의 혹형전시를 진행하는 가운데서 “혹형을 받는” 제자들 다수가 숨이 거의 넘어가는 것 같은 박해를 받는 형상이다. 내가 보건대 우리가 표현하는 것이 단지 여기에만 그쳐서는 안된다고 본다. 대륙에서 그토록 엄혹한 형세하에서도 우리 동수들은 혹형에 겁을 먹고 쓰러지지 않았다.
그 들 앞에는 늘 두 가지 선택이 놓여있었는데 보증서를 쓰고 수련을 포기하면 즉시 혹형에서 벗어날 수 있고 그렇지 않으면 신념을 견지하는 것이다. 제일 엄혹한 박해 앞에서, 이것이 옛날에 예수의 제자가 겪은 것과 무엇이 다른가?
”예수를 믿는다”는 말 한 마디 때문에 사자를 가둬둔 철장 속에 밀어넣어졌고, “믿지 않는다”고 한 마디만 하면 재난에서 벗어날 수가 있었다. 마찬가지로 오늘의 우리 동수들도 시시각각 생과 사의 선택에 직면하고 있다. 믿는가 믿지않는가 하는 사이에서 우리 동수들은 또 어떠한 심태인지? 이렇게 사람과 신(神)과의 선택에서 우리의 동수들은 또한 어떠한 형상인지?
매번 대륙동수들의 체험을 볼때에 나의 마음속에는 오직 “장엄하다”는 것 밖에 없다! 혹형을 받는 중에서, 정념으로 사악을 저지하는 중에서, 표면상에서 볼 때에는 우리 동수들이 혹형을 받고 있는 것 같지만 그러나 다른 공간에서는 그것이 바로 환골탈태(換骨奪胎)의 변화이며 그것은 사람이 신(神)으로 되는 거대한 변화이고 역시 또한 사악을 깡그리 소멸하는 과정이다.
한 이야기를 읽어본 일이 있다. 몇몇 대법제자들이 묶여 시위돌림을 당하고 있었는데 관중들 중에는 욕하는 사람 ,물건을 던지는 사람이 있었다. 그러나 얼마 안가서 한 사람이 갑자기 시위 돌림을 당하는 대법제자들 모두가 보살, 부처의 형상인 것을 보게 되었으며 욕하던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고 한다.
생각해 보라. 오늘날 우리가 묶인 채 시위돌림을 당하는 동수들의 모습과 박해를 받아 숨이 거의 넘어가는 형상들이 선량한 사람들의 동정을 자아낼 수 있지만, 그러나 그렇게 욕하는 소리를 제지할 수 있겠는가? 만약 신(神)이나 부처가 혹형을 받는다면 그들의 형상은 어떠하겠는가?
똑같이 연출(演出)에 참가했지만 그러나 나는 연출자의 상태가 다르므로 산생된 효과도 다르다는 것을 발견하였다. 워싱턴 혹형전시회에서 한 동수의 표현은 매우 심각했는데 그녀가 표현한 묶여 달아매인 형벌은 비록 “혹형”을 받고 있지만 그러나 그녀가 표현해 낸 평화로우면서도 의연한 존엄은 지나가던 많은 행인들의 심금을 울렸는데 기자들과 많은 사람들이 다투어 그녀를 향해 사진을 찍었다.
우리들은 박해를 받고 있는 것이 아니며 바른 요소들을 위해 책임을 지는 것이고 중생에 대해 책임을 지고 있는 것이다. 우리들은 용감하게 사악을 대하고 사람의 여기서는 박해를 받지만 다른 공간에서는 우리들이 사악을 소멸하고 있으며 바른 것과 사악이 겨루는 마당에서 우리들은 마땅히 대법제자의 존엄을 나타내야 한다.
문장완성: 2004년 8월 5일
문장발표: 2004년 8월 6일
문장갱신: 2004년 8월 6일11:38:05 AM
원문위치: http://minghui.org/mh/articles/2004/8/6/81158.html