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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법제자의 심태로 신문을 꾸리는 데 참여하다

글/리쇼우쿠이

[명혜망2004년 6월 21일] 1996년 신정, 나는 미국 캐나다에 오고가는 차에서 사부님의 9강의 설법을 다 들었다 후에 우리는 후에 토론토 CN타워에 올라갔었고 나이아가라 폭포에 갔었으며 차이나 타운에서 점심을 먹었다…

그때 당시 바깥 온도는 영하 20도 였으며 하늘에서는 눈꽃이 날리고 있었고 나뭇가지에서는 투명한 얼음이 걸려 있었다.

그때는 내가 처음으로 캐나다에 왔는데, 비록 그 당시 나의 생명에게 완전히 새로운 여정에 곧 진입하게 된다는 것을 의식하지 못했지만, 하늘 땅 사이의 일체가 나에게는 그렇게도 특이하게 보였으며, 나는 마음속으로 토론토 이곳을 좋아하게 되었다.

6년 후인 2002년 우리 온 가족은 싱가포르에서 이곳으로 이사 왔다. 그 당시 나는 이미 여러 해 동안 대법 중에서 많은 이익을 얻었었다. 싱가포르에서 남편, 시부모님, 부모님을 포함해서 온 가족이 모두 수련을 하였다. 평소에 나는 직장 일을 마치고 나머지 여가시간을 전부 현지 유명한 관광지에 가서 연공을 하고, 자료를 나누어 주고, 의원을 만나고, 이 메일을 보내고, 대법 싸이트에 원고를 보내는 등에 사용하였다. 연휴를 세계각지에 가서 법회에 참석하고, 인도에 가서 홍법하고, 아이스랜드에 가서 발정념 하였으며 동시에 평소 대법행사에 참여하거나 회사에서 출장 갈 때 여행도중에서 찍은 사진에 자신이 쓴 기행문과 함께 여행기로 신문에 투고를 하였다. 촬영, 문장 쓰기에서 편집, 판짜기, 교정에 이르기까지 모두 자신이 책임지었는데 대법제자가 마땅히 잘해야 할 일을 하였다.

캐나다 이 새로운 환경에서 나는 어떻게 새로운 수련생활을 시작해야 할지?
“뭇 신들이 모여 있는 곳” 이라는 뜻이 포함되어 있는 토론토에서, 나는 많은 정진하는 대법제자들과 함께 있을 수 있어서 매우 기뻤으며 동시에 자신의 잘 수련 되지 않는 것이 있어서 불안했다.

얼마되지 않아 나는 메스컴 팀으로 가입하였는데 진상을 하는 신문을 만드는 것이다. 처음 판을 짜는 일과 기자 일을 담당하였다. 익숙하지 못하는 대로부터 익숙해졌는데 나는 점차적으로 이런 업무를 감당할 수 있었으며 때로는 심지어 여유로운 느낌이 있었다. 그러나 신문에 대한 정황을 갈수록 많이 알게 됨에 따라 나는 우리 신문이 급히 해결해야 할 문제가 있는 것을 발견하였는데 그것이 바로 비용 문제였다. 나는 또 알게 되었다. 제자들은 지난 2년 남짓한 기간에 신문을 꾸리기 위하여 자신의 저축을 전부 다 썼으며 수련 생들의 지불은 극한에 근접하였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리하여 기왕 나에게 이 문제를 보게 한 것은 우연한 일이 아닌 것이 틀림이 없고 어쩌면 나는 한 대법제자로서의 사명 중에 하나로서 나는 있는 힘을 다하여 이 문제를 해결해야 할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싱가포르에서 나는 줄곧 큰 회사에서 순서와 규정에 따라 일을 하는 일을 하였는데 속인의 직업은 고급 엔지니어였다. 금방 와서 전문적인 일을 찾자고 해도 캐나다에서 일한 경험이 없는 장애에 직면하게 되었다. 그러나 나는 마음속에 강렬한 소원이 하나 있었다. 바로 대법이 나에게 부여한 사명을 완성하겠다는 강렬한 소원이 있었다. 나는 반드시 해낼 수 있을 것이다. 나는 자신이 수련 잘 된 그 일면, 그렇게 많은 바른 신들이 나에게 도움을 줄 것이라는 것을 확고히 믿었다. 나는 두 손을 합장하여 묵묵히 사부님에게 가지를 청했다.

작년 7.20 법회 후 나는 광고를 찾기로 결정했다. 나는 아주 빨리 광고 학습 반에 등록할 기회가 있어서 현지 광고 정황과 광고에 관련된 기본 지식을 알게 되었다. 동시에, 나도 모색하면서 실제 작업을 하기 시작하였다.

나는 이전에 구비했던 능력이 모두 오늘날 정법시기를 위하여 준비 하였다는 것을 발견하였다. 나는 속인 동료와 비교하면 무엇을 배우거나 일을 할 때 비교적 빨라서 이전에 상사는 늘 내가 일을 너무 빨리 해서 팀과 보조를 맞추는데 있어서 영향을 끼친다고 자주 비평하였다. 그러나 지금은 바로 내가 빨리 착수해서 가장 짧은 시간 내에 일을 잘할 것이 필요하였다. 어렸을 때 모친과 광동어를 하였고 나는 싱가포르에서 공부하고 일하는 환경에서는 영어가 필요하였는데 물론 남편과는 중국어를 하였다. 그밖에 나는 또 다소 기타 사투리로 할 줄 알아서 내가 이런 모든 것이 광고 업무를 하는데 편리를 가져 다 주었다.

그러나 나는 여전히 극복해야 할 것이 그렇게 많았다. 아주 간단한 운전을 말하더라도 나는 어렸을 때부터 차를 좋아하지 않았다. 만약 내가 차를 운전하지 않으면 안 되는 북미가 아니라면 나는 아마 한 평생 운전하지 않았을 것이다. 나는 고속도로에서 운전하는 것을 무서워하여 공포심이 있어서 악셀타를 밟는 발은 늘 통제할 수 없이 떨렸고 어쩔 수 없이 고속도로를 달려야 하면 마음속으로는 여전히 고속도로가 막히기를 은근히 바랬다. 내가 우리 팀의 동수들에게 광고 경영 일을 하겠다고 선포한 이튿날 어떤 차가 뒤에서 내차를 심하게 박았다. 얼마되지 않아 측면에서 차문을 비뚤게 박아서 소음 파이프가 부러졌다. 나는 내자신이 차에 대한 공포가 이미 강대한 집착으로 되어 낡은 세력이 보아 그것들이 이런 것으로 나의 집착을 확대하여 교란하며 내가 대법을 실증하는 일을 교란하는 것을 발견하였다. 그것들은 내가 날마다 차를 운전하여 광고주를 만나러 가는 것을 보기 싫어할 것이다. 자신의 두려움이 바로 일종 물질이라는 것을 알았고 그것을 제거하려고 하였다.나는 확고히 그것을 부정하고 그것을 돌파해야겠다. ‘나는 해내야 하고 나는 반드시 해낼 수 있다’고 나는 정념을 확고히 하였다. 어느 한번 우연한 기회에 한 자동차 제조상인이 자신회사 상표의 모든 새 차를 나에게 시험운전 해보도록 제공해주었다. 그래서 나는 소형차에서부터 밴, 찝차 등 여러 종류의 차를 다 운전할 기회가 있었다. 이렇게 한 번 경험해 보고나니 나는 이미 여러 종류의 차를 운전한 경험이 있는 사람이 되어 차에 적응하지 못하는 것은 이미 까맣게 잊어버리게 되었다. 지금의 나는 항상 아침 일찍 차를 운전 하여 나가서 해가 진 저녁에야 비로소 집으로 돌아오는 이것이 보통 일이 되었다.

광고가 보기에는 펑범한 것 같지만 그러나 하기가 그다지 쉽지가 않다. 그것은 의지력과 인내력이 필요하며 꾸준히 해야 함을 필요로 한다. 우리는 여러 차례 연습을 하였는데 신청한 수련생은 20 여명이 있었다. 하다가 점차적으로 더 이상 하지 않는 것을 발견하였다. 나도 어떻게 해야 할지 몰랐다. 격려는 아주 많았지만 또한 일부 부면적인 의견도 자주 들을 수 있었다. 나는 마음 속으로 이렇게 생각했다. 설령 다른 사람이 다 안 하더라도 나는 여전히 견지해 나갈 것이다. 내가 기왕 이 일을 하겠다고 결정하였으니 그것은 나의 약속이므로 뭇 신들이 알고 있으며 사부님께서 알고 계신다. 한 수련생은 나와 교류 하면서 이렇게 말했다. 만약 내가 많은 광고를 딸 수 있다면 기타 동수들에게 신심을 북돋아 줄 것이라고 하였다. 맞다. 보기에 나처럼 적합하지 않는 사람도 해낼 수 있는데 기타 사람들은 어떤 이유로 더 잘 안 할 수 있겠는가?

나는 조금조금씩 하고 있었으며 점차적으로 방법을 모색하였다. 우리의 광고도 여러 사람들의 노력 하에서 양호한 추세를 보여 주었다. 이때 캐나다 동부와 서부판이 금년 5월 3일부터 주간지로부터 일간지로 바꾸기로 결정하였다. 이 소식을 선포해서부터 일간지로 발간할 기간을 2개월 시간밖에 없었다. 모두들 일간지로 발간하는데 대하여 압력이 있었으며 특히 곧 직면할 경제 압력이 있었다. 나는 이 압력을 감지할 수 있었다.

광고 따는 것, 우리는 정법이 막 맹렬하게 앞으로 추진되는 것을 감지 할 수 있었다. 많은 속인과 접촉하므로 수련과정에서 날마다 놀라운 기쁜 일이 있으며 날마다 이야기가 있다.

한국 국적인 제니는 우리 신문사에서 아주 뛰어난 광고 영업 사원이다. 그녀는 중국어도 할 줄 모르며 운전도 할 줄 모른다. 그때 그녀는 교통이 나쁜 곳에 있는 일부 광고주와 약속이 되었는데 나는 매주 하루이틀 선택해서 그녀에게 운전을 해주었으며 함께 광고주를 만나러 갔다. 우리는 여기에 있는 많은 유명한 한국 상인을 만났는데 대부분 그들은 한국어로 이야기를 나누었고 나는 다만 옆에서 발정념을 했을 뿐이다. 그러나 어쩌면 협력이 아주 잘 된 원인인지는 모르겠지만 아주 많은 광고들이 쉽게 체결되었다. 결국 우리의 신문에는 한국지역사회의 광고가 아주 많아서 한국지역사회에도 일정한 영향이 있다. 제니는 일부 중국인 광고주를 만난 적도 있는데 그녀는 영어로 우리 중국인들에게 중문신문을 소개한다. 그녀가 나에게 이야기 해줄 때 나는 참지 못하고 크게 웃었다.

우리가 딴 광고는 갈수록 많아져서 우리는 또 갈수록 많은 광고 설계 일에 직면하였다. 제니는 원래는 전문 설계사였는데 그녀는 우리를 위해 많은 광고를 설계해 주었으며 동시에 또 시간을 내어 나를 포함한 일부 광고 설계 인원들을 연수 시켜 주었다. 그녀가 중국어를 할 줄 모르기 때문에 많은 광고들은 내가 옆에서 통역해 주어야 했다. 이렇게 되자 “근주자적(近朱者赤)”이라 나도 점차적으로 광고설계를 배웠다. 제니는 설계에 있어서 전문적이었고 자기 일에 대하여 진지하게 책임을 지는 정신은 나를 감동시켰다. 제니는 항상 내가 일부 보잘것 없다고 여기는 설계에 대해서 반복적으로 다듬었다. 기억이 나는데 5월 3일 일간지가 정식 발행되기 일주일 전의 목요일 날 저녁에 그것은 일간지 창간호의 광고 설계의 마지막 날이었다. 제니는 우리집에서 줄곧 밤늦게까지 설계하였는데 후에는 시간을 아끼기 위하여 잠도 자지 않고 설계하였으며 새벽 5시부터는 발정념을 하고, 법공부를 하고 연공을 하였다. 그런 다음에는 마지막으로 남은 제1면의 4분의 1 크기의 광고설계를 완성하였다. 후에 고객은 이 광고 설계에 대해서 특별히 만족해 했다.

캐나다 동부판으로 발행된 주간지의 제일 마지막 한달에는 우리의 광고수입은 당월의 지출액보다 조금 남았다. 그 밖에 우리는 일간지를 위하여 상당한 수량의 광고를 땄다.

5월 3일 우리는 원래 계획대로 캐나다 서부판과 같이 토론토와 오타와에서 일간지를 동시에 발행하였다. 이것은 캐나다의 첫 번째 무료 중국어 일간지였다. 일시적으로 도와주는 수련생을 찾지 못했기 때문에 나는 날마다 광고의 협조(協調)와 안배를 책임져야 했다. 우리의 신문은 매일 심야 3시 반경에 인쇄를 하였다. 인쇄공장에 우리집 전화번호를 남겨두었다. 그래서 일간지를 발간한지 첫 한달에는 거의 매일 밤 2, 3시에 인쇄공장에서 걸려온 전화를 받아야 했는데 때로는 다만 나에게만 신문이 문제가 없다고 알려주며 나더러 집에 갈 수 있다고 하였다.

여러 가지 원인 때문에 일간지는 자주 착오가 생겼는데 특히 광고분야가 그랬다. 흔히 심야가 되서야 휴식을 할 수 있었고, 새벽 일찍 또 전화가 와서 어디 어디에 문제가 생겼다고 알려주었으며, 때로는 아주 많은 경우에 조급함으로 책망하는 경우도 많았다. 그러나 나는 또 설계하는 사람이 없을 때에는 광고를 설계해야 했으며 또 광고 수주하는데 신경을 써야 했다. 광고를 수주하는 시간이 눈에 띄게 적어져서 계약한 광고도 많이 적어졌다.

이렇게 한 달이 지나자 나는 기진맥진하였다. 스스로 몸과 마음이 피곤하고 얼굴일 핼쓱해졌다고 느꼈다. 어느날 나는 반농담식으로 아이에게 “엄마는 벌써 할머니가 다 됐어.”라고 말했더니 4살된 아이는 “수련인이 어떻게 늙을 수 있어요. 수련하면 수련할수록 젊어질 수 밖에 없어요.”라고 말했다. 나는 이 말을 듣자 너무나 부끄러웠다. 누가 봐도 이것은 아이들의 말이 아니었다. 사부님께서 나에게 시시각각 수련의 근본을 잊지 말라고 일깨워 주신데 대하여 감사를 드렸다.

그래서 나는 사부님이 설법 중에서 말씀하신 안배한 그런 난은 모두 심성에 따라 안배한 것으로 당신이 넘기려고 한다면 반드시 넘길 수 있다는 말씀이 떠올랐다.

이 특수한 환경 중에서 곳곳마다 수련의 요소가 포함되어 있다. 기자의 신분으로 나갈 때, 정계 중요한 인물, 기업가, 속인 중의 유명 인사들이 모두 나에 대해서 특별히 공경하는데 광고회사원으로 바뀐 뒤에는 회사의 비서나 혹은 교환원마저도 나에 대해서 무례하게 대하였다. 그리고 또 자주 일부 고객들의 원망을 들어야 했다. 비록 때로는 고객이 우리에게 일할 기회를 제공해 주는데 유혹이 컸다. 그러나 무엇이 대법제자 자신들이 꾸린 매스컴의 일보다 비교될 수 있겠는가? 제이는 2개월 전에 우리 신문광고 회사원으로 들어온 수련생이다. 그는 매우 열심히 하여 아주 좋은 결과가 있었다. 첫달에 그녀는 광고수주 8개를 하였다. 속인의 회사원이 불가능한 기적을 만들어 냈다. 우리는 같이 광고일을 하는 수련생들이 자주 법에서의 인식을 교류하였는데 이렇게 하자 우리는 모두 진보가 매우 빠름을 느꼈다.

지난달, 다시 말해서 우리가 일간지를 발행한지 첫 한달, 우리의 일간지 수입은 수입과 지출이 평형을 이루었으며 양성순환에로 진입하기 시작했다.

미래의 사회는 우리의 이런 바르고 진실된 매스컴이 필요하므로 우리도 경제상에서, 사회상에서 디디고 설 수 있는 신문을 남겨둘 것이다. 사부님께서는 우리를 인도하여 한 걸음, 한 걸음 대법제자의 길을 걷게 하고 계신다. 사부님께서는 대법제자의 영예를 우리에게 주셨다.

그날 차를 운전하다가 갑자기 자신의 생명이 감당할 수 없는 수승(殊勝)한 영예를 향수하고 있다는 것을 느꼈다. 거시적인데서부터 미시적인데 이르기까지의 자상한 보살핌과 관심이 시공을 초월한 아득히 먼 옛날로부터 미래에 이르기까지 세밀한 안배, 이 일체를 제자는 영원히 보답할 길이 없다. 사부님에 대한 감격은 나의 매 하나의 세포에 충만되었으며 나는 눈물을 금치 못하고 온 얼굴을 적셨다.

자비하시고 위대하신 사부님께 감사를 드립니다!!
사부님 감사합니다. 여러분 감사합니다.

(2004년 캐나다 법회, 몬트리올에서 발표)

문장완성 : 2004년 6월 20일
문장발표 : 2004년 6월 21일
문장갱신 : 2004년 6월 22일 저녁 1시 58분 23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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