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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으로 찾다

글 / 대륙대법제자

【명혜망 2004년 6월 8일】최근 우리 동수 사이에 비교적 뚜렷한 문제들이 나타났다. 호상 지적하고, 방조하는것은 본래 동수사이에 응당 있어야 할 자비심이지만, 무의식적으로 속인형식의 질책과 원망하는 그 마음을 끌어들여 동수 사이에 간격이 생기게 하였다. 우리는 이런 상태가 틀렸음을 누구나 다 알고 있다. 알고 있었기에 서로간에 “집착을 찾는” 이상한 울타리 안에 빠져 헤어나오지 못했다. 어떤 동수들은 문제의 심각성을 의식하지 못하고 수련생을 도와 무슨 “집착”을 버린다고 여겼다. 어떤 때에는 일부 방면에서의 표현이 비교적 격렬하였다.

아래는 나 자신이 그 중에서의 집착심 때문에 동수들에게 피해를 조성했던 교훈이다

1、마음 속에 유위(有为)가 있고 수구가 착실하지 못하다(修口不实)

어느 수련생이 다른 수련생은 이런 저런 집착이 있다,이것 저것 잘하지 못했다고 말할 때 처음에 나는 조용히 듣기만 하였다. 그러나 많이 듣고 난 후, 자신의 이 마음도 나도 모르게 이끌려 동수한테 존재하는 이러저러한 문제를 의논하기 시작했다. 언젠가, 어느 동수의 어느 방면에 대해 말할 때 나는 “대법제자 같지 않다”는 말을 하였던 것 같다. 후에 내가 지적한 이 수련생이 알게 되었고 그에게 상처를 주었다. 이 일로 하여 동수사이에 대질하는 행위까지 나타났었다.그 이후 나는 마음속으로 깊은 가책을 느꼈다. 이번 교훈은 자신의 마음 속에 유위적인 것이 있어 때때로 속인의 마음으로 수련중의 일을 대하면서 법의 요구에 따라 엄격하게 “수구”하지 못하여 조성한 것이었다.

한 올바른 각자(正觉)는 어떤 일을 대해도 그의 그 마음은 이런 일 때문에 전혀 이끌리지 않을 것이다. 그가 누가 좋거나 나쁘다든가, 누가 누구를 말했다 등을 중하게 보거나, 누가 자신에 대하여 여하여하 하였다고 마음을 움직이겠는가? 마음속에는 오로지 중생에 대한 자비만 있을 것이다. 우리모두가 대법 속에서 수련하는 제자이다. 누가 수련이 잘 되었는가는 사부님만 알고 계신다. 동수사이 누구도 정의를 함부로 내리지 말아야 하는바, 그렇지 않으면 일으키는 작용은 다만 파괴일 뿐이다. 언행이 법 속에 있지 않으면 동수지간에 원융불파한 정체를 형성할 수 없으며 동수사이에 간극을 형성하게 되고 사악이 빈틈을 타게 된다.

2、자아를 강조하고 관용이 부족하다

동수사이에서 항상 잘 수련 되었다고 스스로 느끼는 일면을 체현하려고 하는데 이것으로 자신의 어떤 집착을 덮어 감추고 자신이 어느 이치에서의 인식을 강조하고 수련생을 마음대로 평가한다. 수련생이 자신에 대하여 찬동(赞同)할 때에는 기뻐하고 반대인 경우 마음은 불편해진다. 한번은 한 수련생이 나에게 컴퓨터 기술 등에 대한 집착심을 지적해 주었을 때 표면으로는 고개를 끄덕이며 받아들였지만 마음은 오히려 들끓고 있었다. 법 학습하고 연공 할 때 입정이 안되고 늘 생각하였다. 컴퓨터 조작과정을 모르면 또 어떻게 진상알리는 내용을 더 많은 사람들이 볼 수 있는 것으로 빨리 변환하겠는가(사실은 동수 분이 나의 부단히 커진 “일”하는 이 마음을 본 것이다) 그러나 동수 분의 나에 대한 지적은 옳든 그르든 그의 기점은 ‘꼭 나를 잘 되게 하기 위함이다’라고 꺼꾸로 생각하였다. 나의 이 일념이 나오자 마음은 확 트인 듯 개운하였다. 다만 상대가 기타 수련생을 대할 때 자비로운 정도가 더 커야된다고 느꼈다. 그 후 우리가 함께 교류할 때 나는 어떠한 지적에 대해서도 정말로 태연하게 듣고 말할 수 있어 다시는 간격이 있는 감각이 없었다.

어느 한 시기, 나는 일부 속인들의 그런 강렬한 자기만 위하는 행위에 대하여 아주 괴로웠고 그들이 너무 불쌍하다고 여겼다. 어느 날 나는 그들은 속인이라는 것이 갑자기 생각났다.그 전에 나는 늘 수련인의 표준으로 그들의 행위를 가늠하고 요구하였기에 자신도 괴로웠다. 이때로부터 라한의 경지는 어떠한가? 부처님의 경지는 어떠한가? 사고하기 시작하였는데, 그리하여 사부님의 설법이 생각났다.

“사실 당신들은 아는가, 그런 대각자(大覺者)들은 하늘에서 그들의 많은 일들에 있어서도 서로간에 협조하고 상의하는 것이다. 석가모니부처는 여래부처가 갠지즈강의 무수한 모래와 같다고 말한 적이 있다. 다시 말하면 천상의 법왕(法王)에는 단지 부처 이런 종류의 신(神)만 하더라도 마치 갠지즈강의 무수한 모래와도 같이 많다는 말이다. 이것은 그래도 하나의 적은 수이며, 그가 가리키는 것 역시 그의 경지 중에서 보게 된 것이다. 그렇다면 기타의 신은, 부처는 단지 우주 중의 신 가운데서 숫자가 매우 적은 일종이며, 무수한 각종 신이 있는데 많기로 그 수를 헤아릴 수 없으며 무량중생인 것이다. 그러나 그들이 무슨 일을 할 때 쟁론하기 시작한다면 이는 큰일이다. 왜냐하면 매 하나의 각자는 모두 자신이 우주의 법리 중에서 깨달은(證悟) 자신의 완전한 이치를 갖고 있으며, 우주에 대한 인식은 자신의 완전한 것을 형성하였기 때문이다. 마치 석가모니부처처럼 그 자신의 그 완전한 것을 “계•정•혜(戒•定•慧)”라고 부른다. 그렇다면 매 한 대각자(大覺者), 우주의 생명, 그들에게는 모두 우주에 대한 자신의 이러한 한 세트의 인식을 갖고 있다. 만약 쟁론하기 시작한다면 이 어찌 될 말인가? 그들의 그곳에는 이러한 일들이 존재하지 않는다.

그들은 어떠한 심태(心態)인가? 바로 관용(寬容)인바, 매우 홍대(洪大)한 관용(寬容)으로서, 다른 생명을 용납할 수 있고 진정으로 입장을 바꾸어서 다른 생명을 생각하는 것이다. 이것은 우리 많은 사람들이 수련과정 중에서 아직 도달하지 못하는 것이다. 그러나 당신들은 점차적으로 인식하고 있으며 도달하고 있다. 한 신(神)이 하나의 방법을 제출해내었을 때, 그들은 급급히 가서 부정하는 것이 아니고, 급급히 자신들의 것을 표현하지 않고, 자신의 방법이 좋다고 인정하지 않고, 그들은 다른 신(神)이 제출해낸 방법의 최후의 결과가 어떤 모양인지 가서 본다. 길은 같지 않으며 매 사람의 길은 모두 같지 않은바, 생명이 법 중에서 깨달은(證悟) 이치는 모두 같지 않으며, 그러나 결과는 아마 아주 같을 것이다. 때문에 그들은 그 결과를 보며, 그의 결과가 도달한 것, 정말로 도달하고자 하는 것에 도달할 수 있다면 여러분은 모두 동의하는데, 신(神)은 모두 이렇게 생각한다. 게다가 어디가 부족한 것이 있으면 또 무조건적으로 묵묵히 보완 해주며 그것으로 하여금 더욱 원만하도록 한다. 그들은 모두 이렇게 문제를 처리한다.”(《2002년 미국 필라델피아 법회에서의 설법 ))

매 개인의 상태가 부동하고 층차가 부동하며 수련의 길 또한 부동하다. 집착심을 나타내는 방면과 정도 역시 부동하다. 우리 일부 동수들은 늘 다른 사람의 이것이 안되고 저것은 아니라는 등 마음으로 상대방을 위해 조급해 하고 괴로워 한다. 사실상 관용정도가 너무 좁고 자아를 강조하는 것이 너무 많아 자비의 도량(度量)이 아직 그만큼 크지 못하기 때문이다.

우리 경상적으로 함께 있는 동수들이 이번 안으로 찾기를 통하여,꼭 호상간에 제고하고, 공동히 정진하리라고 믿는다.

문장완성 : 2004년 6월 7일
문장발표 : 2004년 6월 8일
문장갱신 : 2004년 6월 8일 3:00:14pm
원문위치 : http://www.minghui.ca/mh/articles/2004/6/8/76571.htm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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