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좋은 기회가 왔을 때 대법을 확고히 수련하다

글/ 중국 대법제자

[명혜망] 저는 1998년에 파룬따파(法輪大法, 파룬궁)를 수련하기 시작했습니다. 그해 6월 1일, 의사로 일하는 고향 선배 언니를 만났습니다. 언니는 제게 파룬따파가 얼마나 좋은지 이야기했고, 자신이 1996년에 대법을 얻었다고 했습니다. 그전에는 무릎 관절에 문제가 있었고 배에도 혹이 있었다고 합니다. 언니 남편(당시 시 공안국 부국장)의 친구가 언니에게 집 맞은편 운동장에서 공을 연마하라고 했는데, 그 결과 관절도 바꿀 필요가 없어졌고 배의 혹도 사라졌습니다. 언니는 제가 온몸이 아프고 성격도 좋지 않다는 것을 알고 함께 파룬궁을 연마하자고 했고, 저는 언니의 제안을 받아들였습니다.

다음 날 저는 언니 집에 갔고, 마침 언니가 사부님의 설법 비디오테이프를 빌려왔습니다. 우리는 매일 오후 6~7시에 사부님의 설법을 들었습니다. 저는 반쯤 자고 반쯤 깨어 있는 상태로 언니와 함께 TV 앞 바닥에 앉아 비디오를 보았고, 사부님의 설법이 끝날 무렵 완전히 깨어났습니다. 그 후 언니는 제게 한 세트의 공법을 가르쳐 주었고 매일 아침 우리는 밖에 나가 단체 연공에 참여했습니다.

대법을 얻은 후, 저는 남편, 시동생, 시누이와 하나씩 화해했고 생활 속에서 항상 그들을 배려했습니다. 서서히 그들은 제가 변했다는 것을 발견했고 모두 파룬따파가 저를 변화시켰다고 인정했습니다.

저는 이전에 류머티즘 관절염, 빈혈, 피부병을 앓았고, 두통도 매우 심했습니다. 수련 후, 머리부터 발끝까지 모든 통증이 사라졌고 성격이 온화해져서 마치 새사람이 된 것 같았으며, 완전히 예전의 제가 아니게 됐습니다. 비록 이미 칠순이 됐지만, 30대 때보다 더 정신적으로 활력이 넘친다고 느낍니다. 이것이 바로 파룬따파의 신기함이 제 몸에 나타난 것입니다.

병업(病業) 가상을 부정하고, 사부님과 대법을 믿으며 고비를 넘다

2002년에 제 딸이 출산했는데, 딸의 시댁은 농사일을 해야 했기에 딸을 돌볼 시간이 없었습니다. 저는 직장에 출근해야 했고 산후조리 중인 딸과 갓 태어난 외손녀도 돌봐야 했기에 법공부와 연공을 할 시간이 전혀 없었습니다. 그러던 중 제 오른팔이 너무 아파서 젓가락조차 들 수 없게 됐습니다. 의사 친구를 찾아가 진찰을 받았더니, 팔을 돌리는 운동을 하라고 했습니다. 저는 그것이 일반인의 방법이라 효과가 없을 것이라 생각했습니다. 침술 치료도 받아보았지만 역시 효과가 없었습니다.

A 수련생이 제게 찾아왔고 제 팔이 아프다는 것을 알게 됐습니다. 그녀는 제가 진흙탕 속에 있는 꿈을 꾸었다고 말했습니다. A는 우리가 함께 발정념을 하자고 제안했습니다. 30분 후 그녀는 손을 내리며 말했습니다. “한 마리 큰 보아뱀이 건물만큼 크게 감겨 있었어요. 사부님께서 원을 그리셨는데, 원 안은 불이 있었고 그 보아뱀을 안으로 빨아들여 녹여버리셨어요.” 그 며칠 동안 제 딸도 꿈에서 아파트 단지처럼 높이 솟은 거대한 보아뱀을 보았습니다.

그때 저는 문득 수련하는 사람은 병이 없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그 후 저는 낮에는 일하고 매일 밤 자정에 일어나 연공을 했습니다. 평소에는 가정을 돌보고 일요일에만 A의 집에 갈 수 있었습니다. 팔은 여전히 불편했지만, 저는 A와 함께 밖에 나가 진상 자료를 배포했고, 배포 후에는 함께 연공하고 법공부를 했으며, 이런 활동이 한동안 지속됐습니다. 점차 제 팔은 회복됐습니다. 이를 통해 저는 아무리 큰일이라도 수련보다 중요하지 않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2019년에 제 큰 손자가 중학교에 입학했고, 그를 더 편하게 돌보기 위해 아들네 가족이 모두 이사 와서 함께 살게 됐습니다. 아들네 가정부는 이사 후 자기 집에서 멀어져서 일을 그만두었기 때문에, 가족을 돌보는 일이 전부 제 책임이 됐습니다. 저는 문득 생각했습니다. ‘이렇게 되면 예전에 딸의 산후조리를 돌보느라 법공부와 연공을 할 수 없었던 상황으로 되돌아가는 것이 아닐까?’ 이런 생각이 스치자마자 교통사고가 발생했습니다.

그날 저는 교통 규칙을 준수하며 자전거를 타고 가고 있었는데, 갑자기 옆에서 음료수를 배달하는 큰 트럭이 나와 저를 쳤습니다. 당시 저는 전혀 두려움을 느끼지 않았습니다. 운전사가 차에서 뛰어내려 제가 차 밑에 있는 것을 보고 놀랐을 때, 저는 그에게 말했습니다. “두려워하지 마세요. 저는 괜찮습니다.” 그 순간 저는 그에게 삼퇴(중국공산당의 당·단·대 조직 탈퇴)를 하도록 도왔습니다. 운전사는 저를 차 밑에서 끌어냈고 저는 말했습니다. “차를 뒤로 빼서 자전거를 꺼내고, 우리 각자 집으로 돌아가면 됩니다.” 당시는 한여름이라 반팔 옷을 입고 있었는데, 제 왼팔이 자전거 핸들에 긁혀 피가 흐르고 있었습니다. 운전사는 사장에게 전화해 상황을 보고했고, 사장은 운전사에게 저를 병원으로 데려가라고 지시했습니다.

병원에 도착한 후, 운전사는 제 아들에게 전화했고 그 후 각 과를 다니며 검사를 받았습니다. 저는 그에게 말했습니다. “마음속으로 진심으로 ‘파룬따파하오(法輪大法好-파룬따파는 좋습니다), 쩐싼런하오(眞善忍好-진선인은 좋습니다)’ 9자 진언을 외우면, 당신과 제게 모두 좋을 겁니다.” 검사 결과 제 왼쪽 다리와 발목뼈에 금이 가고 왼쪽 팔꿈치가 골절된 것으로 나타났습니다. 병원에 있는 동안 저는 크게 아프다고 느끼지 않았는데, 자비로운 사부님께서 저 대신 고통을 감내해주셨기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당시 저는 수술을 원치 않았습니다. 경미한 부상일 뿐이고 연공만 하면 자연히 나을 것이라 믿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아들이 밤새 잠을 이루지 못하며 제가 수술받기를 간절히 원했고, 결국 저는 그를 설득할 수 없어 아들의 의견에 따라 팔 접골 수술을 받았습니다. 저는 28일 동안 병원에 입원했고 매일 병상에서 법공부를 하고 발정념을 했으며, 연공은 제5장 공법만 할 수 있었습니다. 퇴원 후에는 한 수련생의 집에 머물렀습니다. 수련생의 도움으로 저는 서서히 회복되어 동공을 할 수 있게 됐습니다. 3개월 후, 저는 정상적으로 세 가지 일을 다시 할 수 있게 됐습니다.

대법이 좋다는 걸 깨닫자 곳곳에서 기적이 나타나다

사부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당신이 정법을 수련(煉)하기 때문에 한 사람이 연공(煉功)하면 다른 사람은 이익을 얻는다.”(전법륜)

2011년 봄 어느 날, 집에 돌아왔을 때 어머니가 소파에서 경련을 일으키고 계셔서 급히 병원으로 모셔가 응급처치를 받게 했습니다. 어머니는 이틀 밤낮 의식이 없으셨는데, 작은 남동생이 제게 말했습니다. “어머니가 잠깐 깨어나셔서 손으로 흉부를 만지셨어. 또 한 번 깨어나셔서 다시 손으로 가슴 주머니를 만지셨는데, 도대체 우리 어머니 주머니에 무슨 좋은 것이 있는지 모르겠어.” 나중에 어머니의 옷을 갈아입혀 드릴 때 보니 대법 진상을 알리는 호신부(護身符)였습니다. 어머니는 단 9일만 입원하셨다가 퇴원하셨고 작은 남동생 집으로 돌아가 매일 신탕런(新唐人) 텔레비전을 시청하셨습니다.

2013년 여름, 막내 남동생이 전화해서 말했습니다. “어머니가 넘어지셔서 팔이 골절됐어. 병원에 가서 검사하고 엑스레이를 찍었는데, 의사가 고령이라 수술을 감히 할 수 없다고 했어. 수술대에서 내려오시지 못할까 봐 걱정된대.” 저는 전화로 말했습니다. “9자 진언을 염하게 해드려.”

두 달 후 고향에 돌아갔을 때, 이웃이 제게 말했습니다. “당신 어머니는 골절이 없으셨던 것 같아요. 골절되면 사람이 잠도 못 자고 밥도 못 먹잖아요.” 제가 말했습니다. “병원에서 엑스레이도 찍었고, 분명히 골절이 맞았어요. 우리 어머니가 몸에 ‘진상을 알리는 호신부’를 지니고 계셨고 마음속으로 진심으로 외우셨기 때문에 빨리 나으셔서 아프지도 않으셨던 겁니다.”

2015년 겨울, 여동생이 전화해서 말했습니다. “어머니가 많이 편찮으셔서 곧 돌아가실 것 같아. 이제 85세가 다 되셨으니 충분히 사셨다고 생각해.” 저는 고향으로 돌아가 열흘 넘게 정성껏 간호했는데, 어머니는 밥 드실 기운도 없으셨고 편안하게 세상을 떠나셨습니다. 장례식 날 막내 남동생이 천목(天目)으로 어머니가 빛 속에서 날아올라 떠나가는 모습을 보았다고 했습니다.

어머니 외에도 다른 가족들도 대법의 보호를 크게 받았습니다.

10여 년 전, 제 언니의 둘째 사위가 물건을 사러 가는 길에 심각한 사고가 났지만, 놀랍게도 전혀 다치지 않았습니다. 옆에 있던 사람이 말했습니다. “집에 가서 향을 피우세요. 집에 모시는 부처님이 당신을 보호해 주셨네요.” 사실은 그가 이미 삼퇴를 했고 몸에 대법 진상을 알리는 호신부도 지니고 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막내 남동생은 대법이 좋다는 것을 굳게 믿습니다. 한번은 공사장에서 일할 때, 앞사람이 수레를 끌고 남동생이 뒤에서 밀다가 수레가 갑자기 통제를 잃어 남동생의 손을 눌러 네 손가락이 모두 골절됐습니다. 그러나 남동생은 당황하지 않고 손가락을 바로잡았고 병원에도 가지 않았는데, 신기하게도 모르는 사이에 완전히 회복됐습니다.

환생은 진실한 일로, 보고도 믿지 않는 것은 정말 안타까운 일

장 씨인 제 남편은 젊은 시절 군인이었고 전역 후 줄곧 체제 내에서 당 간부로 일했습니다. 그는 공산당의 사악한 본질을 일찍이 간파했으며, 중공 체제는 ‘고기 분쇄기’와 같다고 생각해서 아들에게 자신의 사업을 시작하도록 격려했습니다. 남편은 부서의 서기였는데, 1994년 주택을 배정할 때 그는 “여러분은 번호를 뽑으세요, 남는 것이 제 것입니다”라고 말했습니다. 결과적으로 우리집은 시내 중심에 위치하게 됐고, 덕분에 어디에서 오든지 수련생들이 법을 배우러 오기 매우 편리했습니다.

남편의 근기는 매우 뛰어났습니다. 한번은 제가 남편과 함께 집에서 사부님의 설법 비디오를 보고 있었는데, 남편이 갑자기 말했습니다. “눈을 감으니, 당신의 사부님 몸은 빛나고 밝은데, 텔레비전은 오히려 어둡게 보이네.” 그는 또한 방 안에 신선들이 가득 모여 텔레비전을 함께 보고 있다고 말했습니다.

1998년 9월 어느 날 새벽 1시, 남편의 손이 갑자기 움직이지 않고 입이 한쪽으로 비뚤어졌습니다. 이른 아침에 급히 그를 병원에 데려가 검사했더니 의사는 뇌출혈이라고 진단했습니다. 입원 기간 중 저는 수액을 맞고 있는 남편 곁에서 ‘전법륜’을 읽어주었고, 그는 진지하게 사부님의 설법을 경청하여 회복이 놀라울 정도로 빨랐습니다. 병실을 순회하던 의사가 남편을 가리키며 실습 의사에게 말했습니다. “이 사례는 유난히 특별합니다.” 나중에 남편에게 들었는데, 병원에서 그의 병례를 성(省) 당국에 특별 보고했다고 합니다.

1999년 ‘7·20’ 탄압이 시작된 후 어느 날, 제가 막 집에 들어섰을 때, 몇 명이 소파에서 일어나 서둘러 나가려는 것을 봤습니다. 저는 “좀 더 앉아계세요”라고 말했습니다. 그들은 주민위원회 사람들이라며 이미 오래 기다렸으니 가봐야 한다고 했습니다. 나중에 알고 보니 그들이 우리집에 온 목적은 남편더러 저를 감시하게 하고, 제가 법공부와 공법 연마를 하지 못하게 하며, 제 월급 카드를 주지 않아 진상을 알리는 자료를 만들 돈조차 없게 하려는 것이었습니다.

예전의 저였다면, 분명히 목숨을 걸고라도 남편과 싸웠을 것입니다. 하지만 수련한 후에는 남을 위해 생각하는 법을 배웠고, 남편도 주민위원회의 압력 때문에 어쩔 수 없이 그렇게 한 것임을 이해할 수 있었습니다. 저는 방법이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남편이 제가 연공하는 것을 막으면, 저는 한밤중에 이어폰을 끼고 복도나 옥상에서 조용히 연마했습니다. 또한 저는 거실 소파로 나와 자면서, 남편이 코를 골기 시작하면 얼른 일어나 연공을 했고 침실에서 조금이라도 소리가 나면 재빨리 누웠습니다. 저는 이런 방식으로 조용히 저항했습니다.

남편은 제가 타협하지 않으려는 강한 의지를 보고, 수련생 언니(언니의 남편과 우리 남편은 오랜 동료였습니다)에게 전화해서 저를 설득하러 오게 했습니다. 뜻밖에도, 수련생 언니는 오히려 제 남편을 설득했고, 그 후로 남편은 더 이상 제가 법공부하고 공법 연마하는 것을 방해하지 않았습니다.

2005년, 삼퇴의 큰 물결이 시작됐을 때, 남편은 기꺼이 명확하게 삼퇴한다고 표명했습니다. 한번은 남편이 상급 부서에 회의하러 갔는데, 회의 전에 누군가 ‘천안문 분신자살’ 날조 사건을 언급했습니다. 남편은 용기 있게 그들에게 그것은 모두 배우들이 연기한 것이며, 일반 시민들을 속이기 위한 거짓이라고 분명히 말했습니다. 또 한번은 남편의 옛 전우가 세상을 떠나 저와 그가 함께 장례식에 참석했습니다. 식사 중에 남편은 저를 도와 그의 다른 전우들에게 진상을 알리고 삼퇴를 하도록 적극적으로 도왔습니다. 세상을 떠난 그 전우는 우리 지역 정법위원회 서기였는데, 1999년 7월 장쩌민 집단이 대법제자들을 박해하기 시작했을 때, 다른 전우들이 모두 이 서기에게 전화해서 상부에 보고할 명단에서 제 이름을 반드시 빼달라고 부탁했던 분이었습니다.

어느 날, 남편이 깊은 생각에 잠겨 제게 말했습니다. “우리 다음 생에도 꼭 한 가족이 되었으면 좋겠어.” 2014년 11월 난방을 설치하는 날, 아침에 일어난 남편은 라디에이터를 손으로 만지면서 “드디어 난방이 들어왔네”라고 말했습니다. 그리고 그는 의자에 앉아 잠이 들었습니다. 제가 잠시 외출했다가 돌아와서 그를 불렀지만 전혀 깨어나지 않았습니다. 저는 즉시 아들과 딸에게 전화해 남편을 병원으로 데려가 응급처치를 받게 했습니다. 병원에 도착하자 의사는 남편에게 뇌간 출혈이 발생했다고 진단했습니다. 저녁 8시, 의사와 아이들이 수술 가능성에 대해 심각하게 상의하는 동안, 저는 병원 복도의 딱딱한 의자에 앉아 애타게 소식을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바로 그때 C 수련생에게서 전화가 왔습니다. C는 제 고향 사람이고, 남편은 평소 자주 C의 가게에 들러 여러 가지 일을 도와주곤 했습니다. C는 시간이 날 때마다 남편에게 ‘전법륜’을 암송해 주었고, 남편은 매우 즐겁게 듣고 진지하게 경청했습니다. 전화에서 C는 제가 어디에 있는지 물었고, 저는 “병원에서 남편의 응급처치를 기다리고 있어요”라고 대답했습니다. 그러자 C는 놀라운 말을 들려주었습니다. “제가 막 가게 문을 닫으려고 할 때, 갑자기 누군가 제 이름을 부르는 소리가 들렸어요. 그리고 ‘나 갑니다!’라고 말하는 목소리가 들렸는데, 그게 바로 당신 남편의 목소리였어요.” 남편은 결국 세상을 떠났습니다.

2016년 3월 12일, 며느리가 산부인과에서 아들을 낳았습니다. 신기하게도 같은 날, C는 꿈에서 그녀가 우리집에 저를 찾으러 왔는데, 남편이 얼굴에 붉은빛이 가득한 채 활기차게 계단을 올라오면서 C의 이름을 부르며 “나 살아났어요!”라고 말하는 것을 보았다고 했습니다. C도 매우 기뻐하며 “당신은 정말 살아났군요!”라고 화답했습니다. 모든 정황으로 보아, 남편은 이번 생에 제 작은 손자로 환생한 것이 분명했습니다. 작은 손자는 어릴 때부터 대법을 인정하고, 자주 9자 진언을 외웠습니다. 남편은 이전 생에서 정법시기 대법제자가 되지 못했지만, 이번 생에는 법정인간(法正人間) 시기에 수련의 길에 들어설 수 있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사부님 말씀을 잘 듣고, 세 가지 일을 성실히 해나가다

2015년, 장쩌민을 고소하는 역사적인 활동이 시작됐고 저는 당시 천안문에서 법을 실증하는 기회를 놓쳤지만, 이번에는 적극적으로 참여할 수 있었습니다. 저는 최고인민검찰원과 최고인민법원에 두 장의 고소장을 정성껏 작성하여 우편으로 보냈으며, 용기를 내어 그 위에 제 정확한 주소를 기재했습니다.

2016년, 저는 아들 집에서 작은 손자를 돌보면서 우리집은 한 수련생에게 임대했습니다. 파출소에서는 세 번이나 방문하여 괴롭혔는데, 처음 두 번은 마침 제가 없었습니다. 세 번째로 그들이 문을 두드릴 때, 우리는 법공부를 하고 있었고, 경찰은 제게 문을 열라고 계속 요구했지만 저는 단호히 열지 않았습니다. 저는 문 너머로 말했습니다. “제가 며칠 동안 집을 임대해서 살고 있는데, 여러분이 계속 저를 방해하시네요. 이미 두 번이나 오셨어요. 제가 이사하는 것은 정말 번거로우니 더는 오지 마세요.” 그 후로 그들은 다시 찾아오지 않았습니다.

남편이 세상을 떠난 후, 저는 온 마음과 영혼을 세 가지 일(법공부, 발정념, 진상 알리기)에 온전히 쏟아부었습니다. 더 많은 자유 시간을 확보하기 위해 퇴직 연금으로 아들 가족의 도우미를 고용했습니다. 저는 혼자 살면서 매주 한 번 만두를 넉넉히 쪄서 세끼 식사 문제를 효율적으로 해결했습니다.

우리 지역에는 ‘명혜주간’을 보고 싶어도 구하지 못하는 수련생들이 많았기에, 저는 매주 성실하게 수련생들에게 ‘명혜주간’을 전달하는 책임을 자원해서 맡았습니다. 매주 월, 수, 금요일에는 ‘명혜주간’과 다양한 진상을 알리는 자료를 정성껏 전달하고, 화, 목, 토요일에는 단체 법공부와 연공에 적극 참여했습니다. 평상시 버스를 타거나 버스를 기다리거나 장을 볼 때도 어디를 가든 그곳에서 사람들에게 진상을 알리고, 소중한 진상 자료를 배포했습니다. 매번 외출할 때마다 중공의 당·단·대 조직 탈퇴를 결심하는 사람들이 있었고, 저는 이런 진상 알리기 활동을 십여 년 동안 한결같이 이어왔습니다.

모든 사람은 자신만의 사명이 있고 지켜야 할 신성한 서약이 있습니다. 26년의 수련 과정을 거치면서, 저는 제 사명이 마치 한 가닥의 실처럼 이 지역의 수련생들을 하나로 연결하는 중요한 역할임을 깊이 깨달았습니다. 우리 모두가 함께 정진하며 사부님을 따라 진정한 집으로 돌아가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원문발표: 2025년 3월 21일
문장분류: 수련교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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