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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련 마감일과 수련 표준에 관한 이야기

—천문을 세 번 지나며 성찰하다

글/ 미국 대법제자

[명혜망] 꿈속에서 저는 천문(天門)을 세 번이나 통과하는 경험을 했습니다.

첫 번째는 10여 년 전, 처음 천문을 통과할 때였습니다. 상대적으로 쉽게 통과했으며, 느릿느릿 걷는 수련생들을 보면서 다급한 마음에 “수련생 여러분, 더 빨리 움직이세요!”라고 외쳤습니다.

두 번째는 6~7년 전이었습니다. 천계 가장자리에 도달해서 성스러운 천국이 불광에 잠겨 있는 모습을 보고 막 발걸음을 내디뎌 들어가려는 순간, 갑자기 인간세상의 것이 머릿속에 떠올랐습니다. ‘왜 아직도 내가 인간세상의 것을 생각하고 있지?’라는 후회가 밀려왔습니다. ‘안 되겠다, 돌아가서 깨끗하게 수련하고 다시 와야겠다.’ 그래서 몸을 돌려 뛰어내렸습니다.

세 번째는 불과 몇 달 전의 일입니다. 모두가 줄을 서서 천문을 통과하고 있었습니다. 몇몇 수련생들은 이미 통과했는데, 제 차례가 됐을 때 제지당했습니다. 바코드가 오래되었다는 이유였습니다. 제가 “제 여권은 새 건데요”라고 말하자, 새 여권은 다시 스캔해서 새 바코드를 생성해야만 통과할 수 있다는 답변을 들었습니다.

잠에서 깨어난 후, 저는 문제의 심각성을 깨달았습니다. ‘새로 스캔’이라는 것은 제 표준이 충분히 높지 않다는 점을 일깨워주는 것이었으며, 제 수련 과정을 처음부터 끝까지 전면적으로 다시 검토해야 한다는 신호였습니다. 이번 검토를 통해 제가 깨달은 점들은 다음과 같습니다.

1. 마감일에 관해

일반 사회에서는 수많은 마감일이 존재합니다. 4월 15일 소득세 납부 마감일, 대학 지원 마감일 등이 그 예입니다. 이러한 마감일을 놓치면 과태료 부과, 대입 기회 상실 등 심각한 결과를 초래할 수 있기 때문에, 우리는 이를 절대 놓치지 않으려고 하며 마감일 전에 완료하기 위해 진지하게 노력합니다. 또 다른 예로, 저는 매년 4월에 당황하지 않도록 2월이나 3월 초에 소득세를 미리 납부하며, 결코 이 마감일을 가볍게 여기지 않습니다.

우리의 일상생활은 크고 작은 여러 마감일들로 구성되어 있으며, 월별 청구서까지도 그러합니다. 이렇게 많은 마감일이 존재하는데, 수련에도 마감일이 있지 않을까요?

사부님께서는 정확한 날짜를 언급하신 적은 없으시지만 “최후로서, 정말로 최후에 이른 것”(각지 설법9-2009년 워싱턴DC 국제법회 설법)이라고 여러 차례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나 이 말씀을 들을 때마다 잠시 놀라 깨어났다가도, 일이 바빠지면 곧 잊어버리고 다시 원래 상태로 돌아가곤 했습니다.

사부님께서 또한 말씀하셨습니다. “역사는 어느 날 종결될 것이며, 어떻게 하든 지연되지 않을 것이다. 다만 구체적인 일에서나 과정 중에서 변화가 나타날 뿐, 잘하지 못한 일은 뒤의 일에 영향을 미칠 것이다. 총체적인 그 시간은 지연될 수 없다. 이것은 사부가 慈悲(츠뻬이)하고 慈悲(츠뻬이)하지 않은 일이 아니다. 사실 최후에는 구도된 것이나, 조합된 일체가 내가 갖고자 한 것이 아니거나 표준에 도달하지 못했다면, 해도 헛되게 한 것으로 역시 모두 부숴야 한다. 이 시간을 뛰어넘을 수 없다. 구도 받지 못한 생명에 대하여는 단지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다.”(각지 설법11-20년 설법)

수련은 구체적인 마감 날짜가 정해져 있지 않기 때문에, 회사 제품처럼 모든 단계가 명확하게 정해져 있고 반드시 그 목표를 달성해야만 제때 출시할 수 있는 그런 방식과는 다릅니다.

또한 구체적인 마감일이 없으므로 각자의 인식에 따라 자신의 발걸음 속도를 조절합니다. 우리는 모두 자신이 수련인임을 알고 매일 세 가지 일을 하고 있지만, 부유하든 가난하든 사람으로 사는 것은 비교적 고생스럽기 때문에, 사람은 의식적으로든 무의식적으로든 자신을 위로하고, 스스로를 편하게 해주려 하며, 핑계를 대고, 자신을 달래려 합니다.

따뜻한 물에 개구리를 삶는 상황을 상상해 보세요. 처음에는 매우 편안하여 천천히 즐기다가, 온도가 점점 높아져도 서서히 상승하기 때문에 아무것도 느끼지 못합니다. 점점 더 그 편안함에 빠져들어 익숙해지고 떠날 수 없게 된 것 같은데, 결국 완전히 익어버리면 끝장입니다.

많은 사람들은 정법이 언제 끝날지 모르니까 그냥 이대로 하면 된다고 생각합니다. 몇 년 전, 한 수련생이 저에게 물었습니다. ”정법이 언제 끝날 것 같으세요? 앞으로 20년은 더 걸리지 않을까요?“ 저는 모른다고 대답했습니다. 그녀는 자신의 재산을 계산해보니 20년은 충분히 견딜 수 있었고, 일이 너무 힘들어서 직장을 그만두고 더 이상 일하고 싶지 않다고 했습니다. 몇 년 후 그녀가 다시 찾아와 말하길, 정법이 앞으로 2~3년 안에 끝나지 않을 것 같다며 다시 돈벌이 문제를 고민하기 시작했다고 했습니다.

제가 이해하기로는, 정법은 내일 끝날 수도 있고, 어쩌면 30년이 더 걸릴 수도 있습니다. 사부님께서는 이를 말씀하실 수 없습니다. 소도(小道) 수련에서는 제자가 잘하지 못하면 스승이 몽둥이로 때리겠지만, 우리는 대도(大道) 수련이고 인간 세상에서 수련하는 것이므로 스스로에게 의지해 판단해야 합니다.

저는 대법제자들이 늘 표준에 도달하지 못하기 때문에 사부님께서 마감일을 계속 조정하신다고 이해합니다. 예를 들어, “대부분의 대법제자가 법으로 인간세상을 바로잡(法正人間)는 사부를 따르게 될 것이다”(깨어나라)라는 말씀은 대부분 대법제자의 수련이 아직 제자리에 도달하지 못했기 때문에 더 많은 기회를 주시려는 것이라고 이해합니다.

표준에 도달하고 느슨해지지 않기 위해, 저는 매년 초에 한두 가지 주요 집착을 찾아내 일 년 동안 그 부분을 집중해 수련합니다. 이렇게 하면 수련이 좀 더 견고해지는 것 같습니다. 이 방법이 저에게는 효과가 있지만, 과연 법의 요구에 부합할까요?

저는 1997년에 해외에서 대법에 입문했습니다. 입문한 지 얼마 되지 않아 한 수련생의 웹페이지에서 “하루하루를 지구의 마지막 날처럼 생각하라”는 글을 봤습니다. 당시 저는 그 수련생을 비웃으며 “지구의 마지막 날이라면 아무것도 할 필요가 없지, 어차피 소용없으니까”라고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지금의 저는 남은 매 분, 매 초가 얼마나 귀중한지 알기에 그렇게 생각하지 않습니다.

스스로에게 물어봅니다. ‘만약 내일 정법이 끝난다면, 나의 그 집착들과 잡념들이 여전히 남아있게 할까?’ 아마도 그런 집착과 사람마음을 최대한 빨리 버리려고 노력할 것입니다.

만약 내일 정법이 끝나는데 구세력이 오늘도 사부님을 비방하고 우리가 오랜 세월 노력해서 구한 중생들을 파괴하려 한다면, 저는 어떻게 해야 할까요? 가장 강한 정념으로 모든 사악을 멸하여 구세력이 성공하지 못하도록 할 것입니다.

저는 도대체 무엇을 기다리고 있는 걸까요?

2. 수련의 표준

“사실 최후에는 구도된 것이나, 조합된 일체가 내가 갖고자 한 것이 아니거나 표준에 도달하지 못했다면, 해도 헛되게 한 것으로 역시 모두 부숴야 한다.”(각지 설법11-20년 설법)

제가 알기로는 우리 모두 구우주에서 온 생명입니다. 그런데 신우주는 100% 순정(純淨)하므로 신우주에 진입하려면 100% 순정해야 합니다.

학생 시절에 이런 말이 있었습니다. 목표를 100점으로 설정하면 90점을 받을 수 있고, 목표를 60~70점으로 설정하면 50점을 받아 낙제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만약 우리가 ‘신우주의 정신(正神)’ 표준으로 우리 자신의 표준을 설정한다면, 어떤 일에 마주칠 때마다 ‘신우주의 정신이라면 어떻게 행동할까?’라고 먼저 생각하게 될 것입니다. 가끔 제가 이렇게 자문할 때 무엇을 해야 할지 즉시 알게 됩니다.

하지만 우리가 표준을 세우지 않고 수박 껍질을 밟듯이 어디로든 미끄러져 가거나, 혹은 자기 생각대로 ‘이 정도면 됐어’ 하면서, 그 일에서 표준에 도달하지 못할 수 있다는 식으로 계속 표준 미달의 것들이 쌓이면, 결국에는 반제품이나 불량품이 되어 천국으로 돌아갈 수 없게 되고, 우리 세계의 많은 중생들이 파괴될 것입니다.

1) 발정념을 예로 들자면, 우리가 표준에 도달하려면 어떤 정념을 가져야 할까요? 저는 평소에 강대한 정념을 지속적으로 유지하는 편은 아닙니다. 그러나 항목을 맡게 되면 책임감이 생기면서 정념이 더 강해지는 것을 발견했습니다. 예를 들어, 이번에 ‘션윈’ 공연장에서 경비원으로 일할 때 중공(중국공산당)의 극장 폭탄 테러 위협이 있었는데, 당시 제 정념은 상대적으로 더 강해져서 팀원 중 저 혼자만 있어도 해낼 수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렇다면 중공의 폭탄 위협이 왜 그렇게 자주 발생하고 근절되지 않는 걸까요? 그 사건을 겪은 후에야 발정념의 중요성을 깨달았는데, 제가 너무 수동적이었던 것은 아닐까요? 이런 수동적인 태도는 어떻게 형성된 걸까요?

약 20여 년 전, 꿈속에서 우리 몇몇이 구금산(舊金山)이라는 고대 도시에 왔는데, 지상과 공중에는 온통 귀신들이 가득했습니다. 저는 징그러웠지만, 함께한 수련생은 두려워하지 말고 이 도시를 지켜야 한다는 강한 정념을 갖고 있었습니다. 우리가 정념을 보내기 시작하자 귀신들이 즉시 집결하여 우리를 향해 다가왔습니다. 제가 눈을 감고 정념을 굳건히 지켰더니, 마침내 귀신들이 바람처럼 도망쳤습니다. 당시 신수련생에 불과했던 저에게 동료 수련생의 정념은 일종의 격려였습니다.

션윈과 사부님을 공격한 사건이 발생한 후, 한 수련생은 명혜망에 올린 글에서 “대법제자로서 어떻게 그런 일이 발생하도록 내버려 둘 수 있겠는가?”라고 언급했습니다. 그는 이 문제를 전적으로 자신의 책임으로 받아들였습니다. 하지만 저는 단지 ‘이건 옳지 않으니 발정념할 때 한 가지 염두를 더 추가해야겠다’고만 생각했습니다. 그게 전부였습니다.

“진정한 부처인 그는 우주의 보위자(保衛者)이다. 그는 우주 중의 일체 바른 요소를 책임질 것이다.”[도항(導航)-미국 서부법회 설법] 저는 자신의 부족함을 보았습니다. 우리는 책임이 있고, 능력도 있으며, 우리의 정념으로 이 모든 것을 막을 수 있습니다. 다만 우리가 그것을 인식하지 못할 뿐입니다.

또 다른 예를 들자면, 항목을 진행하다 보면 이전에 해보지 않은 일들이 많고, 때로는 머리를 많이 써야 하지만 해결하기 어려운 문제들도 있습니다. 한번은 밤새 작업했는데도 결과가 나오지 않았고, 다음 날 컴퓨터를 켜면서 생각했습니다. ‘이렇게 힘들게 일하는데 내가 여기서 뭐 하는 거지?’ 그런데 ‘사람을 구하기 위해 한다’는 일념이 떠오르자마자, 전날 풀리지 않았던 문제의 답이 즉시 떠올랐습니다.

또 한번은 2주 동안 어려운 문제를 풀었지만 해결되지 않다가, 마음가짐을 바로잡고 정념을 내보냈더니 바로 그날 결과가 나왔습니다. 그때 저는 ‘매 순간 이런 정념을 유지한다면 매우 빠른 속도로 항목을 완성할 수 있겠다’고 생각했지만, 실제로는 그렇게 하지 못했습니다.

2) 선(善)과 자비를 예로 들면, 우리가 어떤 자비심을 가져야 표준에 도달할 수 있을까요? 사부님께서는 ““慈悲(츠뻬이)는 속인사회 중에서 선의와 사랑하는 마음으로 표현되어 나오는데”(각성하라)라고 하셨습니다. 개인적으로 저는 회사의 친한 동료, 선후배, 친구, 가족을 제외하고는 얼굴을 맞대고 진상을 알릴 기회가 많지 않기 때문에, 실제로 얼마나 많은 자비심을 가지고 있는지 모르겠습니다. 다양한 세상 사람들, 가난한 사람, 부유한 사람, 총명한 사람, 우둔한 사람, 선한 사람, 악한 사람이 모두 저와는 멀리 떨어져 있는 것 같고, 매일 제 머릿속은 항목 일로 가득 차 있습니다.

좋지 않은 사람과 일을 보면, 그저 ‘이 사람이 이렇게 변했구나’ 하는 생각만 할 뿐입니다.

그래서 저는 제가 무관심을 수련한 것 같아 조금 걱정스럽습니다.

어느 날, 제 생명 깊은 곳에서 한 염두가 솟아올라 온몸이 진동했습니다. ‘사람은 너무나 고통받고 있다. 누가 나에게 빚을 졌더라도 나는 아무것도 요구하지 않겠다. 사람이 고난을 극복하는 것은 결코 쉽지 않다!’ 당시 저는 이 염두가 일종의 자비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명혜망의 교류문장에서 중국 수련생들이 만나는 모든 사람을 구하려 열망하며, 자신들이 처한 위험한 상황에 대해 생각조차 하지 않는 모습을 보았습니다. 저는 그것이 진정한 자비라고 생각하며, 제 자신의 부족함을 보았습니다.

“마음이 비워지고 선념(善念)이 이네”[홍음3-성경(聖境)에 들어가다]. 마음을 비워 사람 마음의 집착이 사라질 때 비로소 진정한 자비가 생겨난다는 것을 알게 됐습니다. 저는 수련이 아직 충분하지 못합니다.

3. 표준에서 멀어지게 하는 안일한 마음

저는 어렸을 때부터 뭔가를 반드시 달성해야 한다며 스스로에게 높은 기준을 세운 적이 없습니다. 그저 본성과 취향에 따라 하고 싶은 일을 할 뿐입니다. 뭘 하든 큰 차이가 없으면 그냥 괜찮다고 생각하지, 꼭 1등을 해야 한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가지게 되면 갖고, 못 가져도 상관없다는 태도입니다.

1) 대학 시절, 시험을 마친 한 학생이 어느 문제를 틀렸다며 매우 상심해 있었습니다. 저는 반나절 동안 “괜찮아, 아주 작은 실수일 테니 크게 감점되지 않을 거야”라며 그녀를 위로했습니다. 결국 저는 87점, 그 여학생은 97점을 받았습니다.

2) 오래전, 션윈 경비원으로 일할 때 경비 책임자와 함께 차를 타고 다녔습니다. 한번은 한 수련생이 그녀와 카풀할 수 있느냐고 물어서, 책임자의 차에 아직 자리가 남아있으니 함께 타자고 제안했습니다. 그러자 그녀는 책임자가 항상 가장 일찍 도착해서 가장 늦게 돌아가기 때문에 따라가기가 너무 피곤하다며 그 차는 타지 않겠다고 했습니다. 저는 어느 쪽이든 괜찮았습니다. 경비 업무가 많아서 일찍 가고 늦게 돌아오는 편이 더 도움이 될 수도 있고, 수련생처럼 그렇게 피곤한 것을 꺼리는 것도 이해할 수 있었습니다. 함께 카풀하면 조금 더 잘 수도 있었습니다. 그래서 물 흐르는 대로 그냥 그녀와 카풀하기로 편한 쪽을 선택하며 ‘고생을 즐거움으로 여기는’ 태도를 잊고 말았습니다. 이를 통해 저는 자신의 부족함을 깨달았습니다.

3) 처음 수련을 시작했을 때, 학교 연공장의 한 친구가 매일 새벽 2시에 일어나 2시간 동안 가부좌를 한다고 했는데, 매우 고요하고 편안하다고 했습니다. 무척 부러웠지만, 20년이 넘도록 저는 그렇게 하지 못했습니다. 이를 통해 저는 제 자신의 부족함을 보았습니다.

4) 어떤 사람들은 ‘사람이 되는 것은 이토록 고생스러운데, 수련을 완성하면 더 이상 고생할 필요가 없으니 반드시 수련을 완성하겠다’고 생각합니다. 저도 일찍이 ‘천국에 돌아가면 가장 먼저 푹 잠을 자고 싶다’고 생각한 적이 있습니다. 그런데 명혜망 교류문장에서 한 수련생이 “이것도 일종의 안일함을 추구하는 마음”이라고 지적한 것을 읽었습니다. 진정한 각자(覺者)는 타인을 위하며, 마음속으로 생각하는 것은 오직 중생뿐입니다. 그들은 자신이 어떻게 하면 조금 더 편안해질지, 혹은 자신이 고통받고 있지는 않은지에 대해 생각조차 하지 않습니다. 이를 통해 저는 제 자신의 부족함을 보았습니다.

모든 항목에서 일손이 부족하다고 합니다. 그런데 참여하는 사람들의 대부분은 전공이 맞지 않습니다. 사실, 저는 이에 대해 충분히 이해하고 있습니다. 사부님께서는 높은 곳에서 모든 것을 훤히 꿰뚫어 보고 계십니다. 사부님께서 모든 일을 안배하셨고 분명 충분하다고 생각하셨기에 이렇게 안배하신 것입니다. 제자들이 그 상태에 도달하기만 하면 일손은 충분할 것입니다.

‘각성하라(驚醒)’라는 제목의 사부님 신경문이 발표된 지 9개월이 지났는데, 저는 스스로에게 묻습니다. 정말 제가 깨어났을까요? 아니라면, 깨어났다가 금세 잊어버린 것은 아닐까요? 우리는 혼란스러울 여유도 없고, 안일할 여유도 없다고 생각합니다.

결론적으로, 우리가 표준에 도달하지 못하는 이유는 법의 광대함과 진귀함, 우리가 처한 중대한 순간의 긴박함, 중생의 존망에 대한 우리의 책임을 진정으로 깨닫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저는 우리 모두가 허둥지둥, 어리둥절하며 대세를 따라 천국으로 돌아가는 것이 아니라, 당당하고 이성적으로 각성하여 천국으로 돌아가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수련인들 간의 이성적인 교류는 일반적으로 개인의 당시 수련 상태에 대한 인식일 뿐이며, 선의적인 교류를 통해 함께 제고하려는 것입니다.]​

 

원문발표: 2025년 3월 18일
문장분류: 수련교류
원문위치:
正體 https://big5.minghui.org/mh/articles/2025/3/18/491737.htm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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