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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법을 스승으로 삼고, 큰 방향은 명혜망을 보라’를 다시 깨닫다

글/ 랴오닝성 대법제자

[명혜망] 최근, 해외 법난(法難) 사건에 대해 발정념과 관련하여, 일부 수련생들이 어떤 사이트(역주: 정견망)에 게재된 일련의 글을 열심히 추천하고 있는데, 그 글에는 천목(天目)이 열린 수련생이 네 차례 정념을 발할 때 본 광경을 서술하고 있다. 무엇을 보았는지는 잠시 논외로 하고, 중요한 것은 저자가 자신이 정념을 발한 내용을 정리해 무려 500자나 되는 분량으로 작성했다는 점이다! 이런 종류의 간헐적으로 나타나는 난법 행위에 대해, 여러분은 법으로 대조하고, 법으로 선악(善惡)과 정사(正邪)를 분별하는 법을 배워야 한다!

수년간, 해당 사이트는 법에 있지 않은 많은 글을 게재해왔고, 정(情)도 상당히 강하다. 이것이 감성이 강하고 이성적이지 못한 많은 수련생들이 좋아하고 전파하는 이유가 될 수 있으며, 또한 여러분의 수련 제고를 위한 기회가 될 수도 있다. 하지만 정법수련이 이미 26년이 되었는데도 아직 식별하지 못한다면 수련의 관점에서 보면 큰 문제다. 강한 사람의 정(情)을 갖고 정념을 발하든, 무엇을 하든 효과가 좋을 수 있겠는가?

사부님께서는 우리에게 “법을 스승으로 삼아야 한다(以法爲師)”(창춘 보도원 법회 설법)라고 말씀하셨다. 그러나 수련 중에 일부 수련생들은 여전히 이 문제의 엄중성과 중요성을 인식하지 못하고, 맹목적으로 다른 수련생을 숭배하거나, 상대방이 수련을 잘한다고 인정하거나, 상대방이 법을 잘 외운다고 생각하거나, 상대방의 능력을 감탄하는 등, 상대방이 말하는 대로 행동하면서 법으로 가늠하지 않는다.

주변의 한 현상을 예로 들면, 우리 지역에 법을 잘 외우는 수련생이 있어 일부 수련생들이 부러워하고 숭배하지만, 법을 외우는 수련생은 명혜망을 보지 않고 명혜망을 받아들이지 않으며 “그것은 모두 낮은 층차 또는 층차가 제한된 수련생들이 쓴 글”이라고 말한다. 안으로 찾는 것에 대해 교류할 때, 그들은 또 말한다. “지금이 어떤 때인데, 아직도 안으로 찾습니까…”

사부님께서는 법 속에서 여러 차례 우리에게 “법을 스승으로 삼고”, 큰 방향은 명혜망을 보라고 알려주셨다.

개인적 체득: 수련 중에 우리는 법을 많이 배우고 법을 잘 배워야 한다. 목적은 자신을 수련하는 동시에, 문제에 직면했을 때 대법으로 가늠해야만 본질적인 정과 사, 옳고 그름을 분별할 수 있기 때문이다. 사부님께서 대법제자를 위해 명혜망을 만드셨다고 공표하신 이래, 우리는 사부님의 경문, 대법 소식, 그리고 우리의 정법 수련을 구체적으로 지도하는 신뢰할 수 있는 사이트를 갖게 됐다.

사실, 한 수련인의 명혜망에 대한 태도는 그의 수련 상태를 직접 반영한다. 법을 얼마나 잘 외웠는지와 상관없이 말이다.(당시 납치돼 구금된 일부 수련생들이 반면으로 갔는데, 그들도 처음에는 법을 유창하게 외웠지만 법을 마음에 새기지 못하고 이해하지 못했으며, 단지 표면적인 형식만 갖췄을 뿐, 결국 구세력에 의해 해를 입었다.)

사부님께서는 “중대한 문제는 반드시 명혜망의 태도를 봐야 한다”(명혜 편집부 글: 7월 22일 이후 두 번째 진정한 신경문이 곧 발표된다)고 말씀하셨다. 그러나 일부 수련생들은 여전히 명혜망을 중시하지 않고, 다른 사이트의 글을 다운로드하고 전파하는 것을 좋아한다. 여기서 다른 사이트의 글을 볼 수 없다는 것이 아니라, 사부님께서 우리에게 “중대한 문제는 반드시 명혜망의 태도를 봐야 한다”고 말씀하셨기 때문이다. 명혜망에서 발표되지 않은 글이 우리 손에 전해질 때, 우리는 먼저 법과 명혜망의 태도로 그것을 가늠하여 위배되는 부분이 있는지 살펴보아야 한다. 만약 있다면, 다운로드하거나 감성적으로 여기저기 전파하지 말아야 한다.

일부 수련생들은 명혜망의 ‘태도’가 무엇인지 전혀 이해하지 못한다. 사실 명혜망의 태도는 바로 박해에 반대하고, 진상을 알리며, 동시에 ‘법을 스승으로 삼아’ 심성을 제고하고, 착실하게 사명을 이행하는 것이다. 만 가지 변화도 근본을 떠나선 안 된다(萬變不離其宗). 그렇게 많은 수련생들이 매일 착실하게 자신을 수련하며, 법에서 법을 인식하는 이런 좋은 수련 환경이 오히려 일부 사람들이 명혜망을 보지 않고, 명혜망을 폄하하는 이유가 됐으며, 소위 “충분히 높지 않다”는 등의 이유를 들고 있다. 천목이 열렸다며 자신을 과시하고 선전하는 사람들이 정말 높은가? 만약 여러분이 그것이 높다고 생각하고 매우 흥분한다면, 이는 바로 여러분의 마음이 부평초처럼 떠다닌다는 증거가 아닌가? 착실하게 법 속에서 수련 제고할 수는 없는가?

일부 사람들은 새로운 것을 듣기 좋아하고, 작은 소문을 듣기 좋아하며, 남이 자기 자랑하는 것을 듣기 좋아한다. 여러분 생각해 보라, 진정한 각자(覺者)라면 이렇게 할까? 이런 류의 ‘듣기 좋아함’ 속에 강렬한 ‘정(情)’이 섞여 있지 않은가? 감성적이고 이성적이지 못하며, 정을 방종하는 것은 바로 자신의 마음이 수련에 있지 않다는 증거다!

이번에 자체 편집한 발정념 요령 글을 추천하는 수련생은 노수련생으로, 이미 주변 및 농촌 수련생들에게 매우 큰 영향을 미쳤다. 이 일에 직면해, 주변 및 농촌 수련생들이 법으로 대조해 심성을 제고하고, 법과 수련에 대한 의혹을 제거하기를 바란다.

얼마 전 ‘신(神)의 삼위일체에 대한 작은 인식’도 그 사이트의 교류 문장이었다. 이에 대해, 명혜 교류글에서는 이렇게 말했다. “우리가 수련생의 글을 보는 것은 잘못이 없다. 보는 과정에서 법으로 가늠하여 법에 부합하는지 살펴본다… 또한 말하자면, 수련생의 글은 법이 아니다. 여러분은 대법을 20여 년간 배웠거나 매일 배우고 있지만 여전히 수련하는 법을 배우지 못했다. 수련생의 글을 보고 나서 여러분이 수련할 수 있을까? 수련생의 글이 법에서 벗어나지 않았다 하더라도, 그것은 그렇게 큰 힘을 가지고 있지 않다. 여러분은 사부님과 대법을 어떤 위치에 두고 있는가? 이것이 사부님을 믿고 법을 믿는 것인가?”

사부님께서는 《전법륜》에서 이렇게 말씀하셨다. “우리 이 우주의 특성이 불도 양가의 수련방법에 부합(符合)하는 것이 아니라, 불도 양가의 수련방법이 우주특성에 부합하기 때문에 비로소 정법(正法)인 것이다.”

관련 수련생들이 마음을 가라앉히고 명혜편집부의 ‘발정념 내용을 바꿔서는 안 된다’, ‘발정념 요령과 전 세계 동시 발정념 시간 (수정2)’과 명혜망의 관련 교류 ‘‘발정념 내용을 바꿔서는 안 된다’를 읽은 후의 생각’, ‘‘발정념 내용을 바꿔서는 안 된다’를 읽은 후의 깨달음’, ‘‘발정념 내용을 바꿔서는 안 된다’에 대한 깨달음’ 등의 글을 잘 공부하기를 바란다.

사부님께서 우리에게 “법을 스승으로 삼고”, “중대한 문제는 반드시 명혜망의 태도를 봐야 한다”고 말씀하셨을 때, 이미 우리에게 가늠할 표준을 정해주신 것이다. 다른 사이트의 글을 볼 수 있는가? 볼 수 있지만 신중해야 한다. 개인이 감정의 영향을 받아 생각하는 그 ‘좋음’은 무엇인가? 그 강렬한 자아가 두렵지 않은가?

사부님께서 말씀하셨다. “그러므로 일부 승려들이 일단 속인의 말과 그 자신의 견해로 불법을 말하거나 책으로 써낸다면 그는 즉각 사람을 그의 틀 속으로 끌어들이게 된다. 그는 불경의 함의(涵義)에 정의를 내렸다. 석가모니부처가 한 그처럼 높은 말과 그처럼 많은 함의를 그는 전혀 깨닫지 못했다. 수련됨이 아주 낮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가 한 말을 수불(修佛) 하는 사람이 믿게 된다면 그는 사람을 자신의 사상 틀 속으로 끌어들여 한정 짓게 된다. 이런 현상은 비록 그가 마치 여러 사람에게 부처를 배우라고 한 것과 같이, 표면적으로는 좋은 일인 것 같지만, 그것은 그가 불법을 파괴하고 있는 것이 아닌가? 불법을 파괴하는 데는 여러 가지 형식이 있다. 일부 파괴하는 사람은 불법을 좋다고 말하면서도 한편으로는 교란한다. 이러한 파괴야말로 가장 분별하기 어렵고 가장 간파하기 어려우며 가장 무서운 것이다. 이것이 석가모니부처의 법(法)이 인도에서 실전(失傳)된 원인이다.”[전법륜(권2)-불교 중의 교훈]

여러분이 마음을 가라앉히고, 마음으로 사부님의 설법을 체득하기를 바란다. 오직 법 속에서만 잘 수련하고 잘할 수 있다. 개인적 깨달음의 층차에는 한계가 있으며, 말씀드린 것도 수련생들이 잘하길 바라서이다. 법에 있지 않은 부분에 대해서는 수련생 여러분께서 원융하고 바로잡아주시길 바란다.

허스(合十)

[수련인들 간의 이성적인 교류는 일반적으로 개인의 당시 수련 상태에 대한 인식일 뿐이며, 선의적인 교류를 통해 함께 제고하려는 것입니다.]​

 

원문발표: 2025년 3월 22일
문장분류: 수련교류
원문위치:
正體 https://big5.minghui.org/mh/articles/2025/3/22/491885.htm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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