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쟁론과 쟁투의 이면

글/ 해외 대법제자

[명혜망] 파룬따파(法輪大法, 파룬궁)가 널리 전해진 지 33년이 됐고 법정인간(法正人間)이 임박했지만, 수련생들 사이에는 여전히 낙관적이지 않은 보편적인 현상이 있다. 많은 수련생이 자신의 의견과 맞지 않는 사람과 일을 만나면 첫 생각이 외부를 향해 강하게 질책하고, 자신의 인식과 관념을 기준으로 다른 사람을 규정하며, 상대방이 무시하거나 받아들이지 않으면 다투고 억지를 부리면서 그 일에 얽매여 끊임없이 논쟁한다.

다시 말해서, 심성 시험이 왔을 때 첫 생각이 상대방을 잘못이라고 단정 짓고 ‘나는 높고, 너는 낮다’고 다투는 것이다. 이것이야말로 자아를 실증하고 밖으로 추구하며 밖으로 미는 마음이 아닌가? 수련해서 제고할 기회를 세속적인 다툼으로 만들었는데, 이는 수련하지 않거나 가짜로 수련하는 것이 아닌가?

일이 생겼을 때 첫 생각이 이러하고 모두가 이것에 익숙해진다면, 수련 환경과 당사자의 수련 상태가 어떻게 될지 짐작할 수 있다. 어떤 어려움은 계속 해결되지 않고, 어떤 항목은 계속 법의 요구에 도달하지 못해 돌파할 수 없으며, 어떤 환경에서는 사람의 마음과 정이 범람하는데, 이는 바로 환경 속 모든 이의 수련 상태가 법에 있지 않음을 보여주는 거울이 아닌가?

‘수련에 소질이 있는’ 수련자는 어떤 문제를 만나더라도 법이 어떻게 요구하는지, 자신이 어떻게 해야 법의 요구에 도달할 수 있는지, 왜 내가 이 일을 만나게 됐는지, 이 일은 나에게 무엇을 수련하라는 것인지, 내가 버려야 할 어떤 좋지 않은 관념이 있는지를 생각하므로 시간과 노력을 들여 남과 다투거나 밖으로 찾는 데 쓰지 않는다. 어떤 이는 자신이 ‘매우 이치에 맞게 말한다’고 여기지만, 사실 모두 밖으로 찾고 억지를 부리며, 하는 말은 전부 다른 사람이 자신과 일치하고 자신을 인정하게 하려는 것이다. ‘내가 옳고 옳으며 가장 옳다’라고 하면서 발하는 것 또한 선한 생각이 아니다. 나쁜 사람들이 단체 채팅방과 항목을 대상으로 하는 선동과 이간질이 시장을 형성하는 이유가 무엇인가? 자신을 수련인으로 여기지 않기 때문이다. 수련하지 않고, 가짜로 수련하며, 마음을 다해 수련하지 않는 사람이 쉽게 걸려든다.

이런 말을 하는 것은 정법 수련이 25년이 됐는데, 줄곧 중국에 있었든, 중국에서 해외로 나왔든, 원래 해외에 있었든 간에 어떤 일이든 속인의 기준으로 가늠하는 것이 여전히 매우 보편적이기 때문이다. 99년 박해가 시작됐을 때부터, 나가서 법을 실증하고 진상을 알려야 하는지 하지 말아야 하는지, 진상을 알린다면 무엇을 어떻게 말해야 하는지, 악인에게 현세현보(現世現報)하게 하는 것이 선한지 선하지 않은 것인지, 이래야 하는지 저래야 하는지, 이 일을 해야 하는지 저 일을 해야 하는지, 누가 한 말이 나를 자극했다든지, 내가 생각하기에 무엇이 어떠해야 한다든지, 다른 사람의 한마디를 듣고 자신을 겨냥한 것 같아 즉시 변명하고 자신을 실증하려는 마음이 일어나 다투고 또 다투고, 자신의 인식과 다른 글을 보면 즉시 다른 사람을 반박하고 바로잡으려는 마음이 일어나며, 발정념 요령이나 단체 발정념 시간을 어떻게 선택해야 하는지 등… 마치 모든 일이 논쟁을 불러일으키는 것 같다. 통쾌한가? 수련인들이여, 수련은 ‘당신은 틀렸다, 틀렸다, 바로 당신이 틀렸다. 나는 맞다, 맞다, 바로 내가 맞다’는 것이 아니다!

사부님께서 전법륜(轉法輪) 말미 중에 말씀하셨다. “여러분은 금후 수련 중에서 자신을 연공인(煉功人)으로 간주하여 진정하게 수련해 나가기를 희망한다. 나는 신, 노(新老) 수련생이 모두 대법(大法) 중에서 수련할 수 있고, 모두 공성원만(功成圓滿)에 이르기를 희망한다! 여러분이 돌아가서 시간을 다그쳐 착실히 수련하기를 희망한다.” 이 세 마디 말씀을 어떤 사람은 별것 아니라고 생각하고 한눈에 이해했다고 여기지만, 실제로 해보면 어떤가? 어떻게 해야 자신을 연공인, 수련인으로 여기는 것인가? 어떻게 해야 대법 속에서 수련하는 것인가? 어떻게 해야 시간을 다그쳐 착실히 수련하는 것인가? 이는 정말로 수련하려는 사람이라면 매일 매 시각, 매 한 가지 일에서 자신에게 물어봐야 할 것이 아닌가? 비록 매번 깨닫고 해내지는 못하더라도 어쨌든 해냈을 때라야 수련이다.

반대로 수련인의 환경이어야 할 곳에서 사람들의 첫 생각이 속인 마음, 속인 관념이고, 두 번째, 세 번째, 마지막 생각까지도 속인 생각뿐이라면, 입으로는 아무리 그럴듯하게 말하고 자신을 아무리 대단하게 여기며 법 속의 용어를 아무리 ‘자유자재하게 운용’한다 해도 수련인의 체현이 아니다! 법 안에 있지 않은 것이다! 어떤 수련생은 다투는 데 익숙해져서 자신이 원하는 것을 얻지 못하면 패거리까지 만들고 ‘심판관’을 찾아 판결을 내리려 하는데, 이는 자신을 속세의 티끌 속에 가두는 ‘관성 열차’에 올라타서 내리려 하지 않는 것이 아닌가? 그리고 이런 열차의 종착역은 수련 원만도 아니고 대법제자가 사전(史前)의 큰 서원을 원만히 이행하는 것도 아니다.

며칠 전에 한 수련생의 교류문장을 보았는데, 경문 ‘도법(道法)’이 그녀에게 도움이 됐다고 언급했다. 만약 우리가 모두 ‘도법’과 ‘불성(佛性)’ 이 두 편의 경문, 나아가 ‘정진요지’ 전체를 외워서 언제나 자신과 대조하여 자신에게 요구하고, 특히 마음이 움직이려 할 때 그렇게 한다면, 우리의 심성 상태는 반드시 질적인 비약을 이룰 것이다!

 

원문발표: 2025년 2월 19일
문장분류: 수련교류
원문위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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