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산둥성 대법제자
[명혜망] 예전에 나에게는 한 가지 관점이 있었다. 아니 오히려 잘못된 인식이라고 할 수 있다. 그것은 바로 내가 현재 능력이 미치는 범위 내에서 접할 수 있는 일이나, 현재 내가 생각하기에 내 심성 수준에 맞는 일만을 하겠다고 결정했던 것이다. 이는 얼핏 들으면 별 문제가 없어 보이지만, 깊이 파고들어 보면 사실 이것도 사적(私的)인 자아 인식이었다. 왜냐하면 출발점이 자기 중심적이었고, 게다가 일을 처리하는 기준에도 이런저런 제한을 두었기 때문이다.
먼저 자신의 마음에 드는 것(사실 이것들은 모두 집착으로, 자신의 뜻에 대한 집착이다), 수련생들이 협력해 주리라 생각되거나 자신의 말을 들어줄 것 같은 사람, 또는 수련이 괜찮다고 생각되는 수련생과는 기꺼이 함께 일하려 했지만, 반대의 경우에는 하기 싫어하거나 미루기만 했다. 사실 어떤 일들은 수련생들이 처리하기에는 어느 정도 어려움이 있지만, 내게는 단 몇 분이나 짧은 시간이면 될 수 있는 일인데도, 그들을 위한 것이 아니라는 이유로 기준을 정해놓고 범위 밖으로 밀어내버려서 전체를 위해 즉시 해결하지 않았다.
또한 내 능력 범위나 심성 기준을 벗어나는 것은 모두 관여하고 싶지 않았다. 하지만 능력 범위가 무엇이며, 심성 기준이란 무엇인가? 수련하는 사람이 자신에 대한 요구가 높으면 높을수록 좋은 것 아닌가? ‘적게 하자’, ‘나중에 하자’라는 생각과 잠재의식 속에 ‘어떤 일이든 나를 찾지 말았으면’, ‘어떤 일이든 나와 상관없었으면’ 하는 바람이 있었으니, 이 또한 일종의 변형된, 회피하는 말이며 이기적인 행위다.
이렇게 수동적으로 하고, 양을 나누어 하고, 하기 싫어하고, 더 하기를 꺼리는 이면에는 모두 ‘사심(私心)’의 그림자가 있다.
작년에 나는 한동안 수련이 매우 어렵다고 느꼈고, 수련생들과 교류해보니 그들도 같은 느낌이었는데, 뭔가 따라가지 못하는 것 같았다. 무엇이 원인인지 찾아보았다. 나중에 한 가지 생각이 들었는데, 원인은 바로 사유방식이 여전히 예전의 수련방식에 머물러 있다는 것이었다. 다시 말해서, 기준이 여전히 예전의 기준이었고, 한 곳에 머물러 있으면서 더 높은 기준으로 대하지 않았기 때문에 제고되지 못했던 것이다.
수련의 길을 돌이켜보면, 1999년 7·20 이전에는 사부님께서 우리를 이끌고 수련하셨다(물론 지금도 그렇다). 그때는 법공부, 연공, 홍법을 했고, 사부님께서 우리를 정법 수련의 자리로 밀어주셨다. 박해가 시작된 후, 우리는 전면적인 중생 구도(救度)로 전환했고, 이는 법에서 성숙한 후 정법제자로서 마땅히 해야 할 반(反)박해, 구도 사업에 투입된 것이다. 실제로 대부분의 수련생들이 따라왔지만 낙오된 이들도 있었다.
법정인간(法正人間)의 과도기에 접어들면서, 남아있는 사람마음의 요소와 관념, 모든 바르지 못한 것들이 표면으로 떠올랐고, 그 근원인 ‘사(私)’를 철저히 제거해야 했다. 새로운 우주는 ‘사적이고 이기적인’ 생명을 원하지 않기 때문이다. 이 단계는 내가 이해하기로는, 남아있는 사심을 반드시 제거해야 한다는 것이다.
생각해보면 사실 매 단계마다 사부님께서는 우리에게 암시와 인도, 격려를 해주셨고, 우리에게 바로잡을 시간과 기회를 주셨으며, ‘경종’을 울리셨다. 다만 우리가 마음을 다해 귀 기울이지 않고, 마음을 다해 깨닫지 않고, 마음을 다해 바로잡지 않았을 뿐이다.
어느 단계든 잘하지 못하면 모두 손실이 있고, 사명을 원만히 완수하는 데 어려움을 가져올 것이다. 그렇다면 줄곧 수련하지 않고, 가짜로 수련하고, 그다지 마음을 쓰지 않고 수련한 수련생들은 어떻게 해야 하는가? 남들이 걸을 때 당신은 뛰어서 쫓아가야 하는데, 그래도 따라잡지 못할 수도 있다. 차이는 하루아침에 생긴 것이 아니다. 남들은 고층 건물을 지었는데 당신은 기초도 다지지 못했다면, 쌓인 업력을 갚지 않아도 되는가? 수련 중에 직면해야 할 사람마음을 하나하나 수련해 없애지 않아도 되는가? 사명과 서약을 이행하지 않아도 되는가?
이런 것들을 적으면서 약간 무거운 마음이 든다. 이런 일들에 대해 수련생들이 시간을 내어 잘 생각해보기를 건의한다. 책임과 사명은 단순히 몇 글자의 표면적 의미만이 아니고, 생명 또한 이번 생의 개념만이 아니다. 대법제자는 아무나 되고 싶다고 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가장 신성한 것이다. 신성함은 어떻게 구현되는가? 그 배후의 함의는 얼마나 심오한가? 잘 생각해봐야 하지 않겠는가?
‘사(私)’ 자가 앞서는 상태는 해결해야 한다. 사부님께서는 “관건 시각에 사람 마음을 본다”라고 말씀하셨다. 지금이야말로 진정한 관건적인 시각이다. 이 관건적인 시각은 단순히 사람마음이 향상되는 면만 드러내는 것이 아니라, 사람마음이 부족한 면도 폭로될 것이다. 그렇다면 수련생들이여, 당신의 눈은 무엇을 주시하고 있는가? 안으로 향하는가, 밖으로 향하는가? 출발점과 목적이 자아의 사심인가? 아니면 법을 위하고 세인을 위함인가?
[수련인들 간의 이성적인 교류는 일반적으로 개인의 당시 수련 상태에 대한 인식일 뿐이며, 선의적인 교류를 통해 함께 제고하려는 것입니다.]
원문발표: 2025년 2월 18일
문장분류: 수련교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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