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법을 최우선으로 보는 것’에 대한 얕은 깨달음
글/ 중국 대법제자
[명혜망] 최근 법공부와 명혜망 문장을 보면서 개인적으로 깨달은 바로는, 많은 경우 우리는 무의식적으로 ‘나를 최우선으로 보고(以我爲大)’ 있다. 이것이 바로 근본적인 집착을 내려놓지 못하고, 수련하는 법을 배우지 못하며, 아주 완고한 사람마음의 집착을 내려놓지 못해 심성을 제고하지 못하는 원인이 되고 있다.
사부님께서는 시에서 이렇게 말씀하셨다. “건곤의 일을 말하나니 만물은 법(法)이 우선이라네(道說乾坤事 萬物法爲大)”(홍음5-다도). 새로운 경문 ‘관건 시각에 사람 마음을 본다’에서 사부님께서는 또다시 두 번이나 ‘법을 최우선으로 보아야 하며(以法爲大)’, ‘법을 중히 여기며, 법으로 일체를 가늠하라(以法爲重,用法衡量一切)’고 말씀하셨다.
우리 대법제자 개인과 대법제자 단체가 정법 수련 중에서 나타난 문제들은 ‘법을 최우선으로 보지’ 못했기 때문 아닐까? 그래서 사부님께서 거듭 강조하시는 것이다.
처음 사부님의 경문 ‘원만을 향해 나아가자’를 배웠을 때는 이해하지 못한 부분이 많았다. “어떤 사람은 대법(大法)이 부패한 인류의 도덕을 구원할 수 있다고 여기며, 어떤 사람은 대법(大法)이 자신의 병을 낫게 할 수 있다고 여기고, 어떤 사람은 대법(大法)과 사부님이 바르다고 여기는 등등이다.”(정진요지2-원만을 향해 나아가자) ‘부패한 인류의 도덕을 구원하고, 자신의 병을 낫게 하며, 대법과 사부님이 바르다고 여기는 것이 왜 좋지 않은 것일까?’
지금 다시 읽어보니, 그러한 ‘생각들’의 기점이 모두 사람에 있고, 사람을 벗어나지 못했으며, ‘사람을 최우선으로 본 것’이었다. 사부님께서 원하시는 것은 우리를 이끌어 사람을 벗어나고 사람을 초월하여 더 높은 경지에 도달하게 하는 것이다.
다시 보니 “어떤 사람은 대법(大法)이 자신의 과학 관념에 부합한다고 여기고, 어떤 사람은 자신의 사람 되는 도리에 부합한다고 여기며, 어떤 사람은 자신의 정치에 대한 불만에 부합한다고 여기고”(정진요지2-원만을 향해 나아가자)는 전부 거꾸로 된 것이었다. 대법으로 자신의 ‘과학 관념’, ‘사람됨의 도리’, ‘정치에 대한 불만’이 대법에 부합하는지를 가늠하는 것이 아니라, 대법이 자신의 각종 관념에 부합하기 때문에 대법이 좋다고 하고 대법을 인정하는 것이다. 이것이 ‘나를 최우선으로 본 것’이 아닌가? 이렇게 소위 ‘수련’해 나간다면 ‘사람’을 벗어나고 ‘나’를 벗어나 사부님께서 요구하시는 대법의 표준에 도달할 수 있겠는가? 도달할 수 없다.
나는 자신이 어떻게 대법의 문에 들어섰는지 돌이켜보았다. 생명이 어렴풋이 수련에 대해 동경했기에 《전법륜(轉法輪)》을 한 번 본 후, 파룬궁이 수련이지 일반적인 기공이 아니라는 말을 듣고는 바로 그 ‘수련(修煉)’이라는 두 글자에 마음이 움직였다. 그래서 법을 얻은 후 한동안은 자신을 매우 자랑스럽게 여겼다. 병을 제거하고 건강해지려고 온 것이 아니라 수련하러 왔다고 생각해서 자신의 목적이 아주 순수한 것 같았다.
이제야 진정으로 이해했다. 내가 무엇을 하고 무엇을 원하며, 내가 어떻게 어떻게 한다는 것, 그것이 바로 ‘나를 최우선으로 본 것’이 아닌가? 나는 누구인가? 사부님 대법의 깨우침과 제도가 없었다면, 무명(無明)의 미혹 속에서 업을 짓고 업을 갚고, 또다시 업을 짓고 또다시 업을 갚아야만 하는, 업력에 속박된 내가 무엇이란 말인가? 비록 당초에 수련하고자 했던 것이 불성(佛性)이 남아있었다 하더라도, 지금 보면 그것 역시 구(舊)우주 생명의 최대 지혜에 불과했다. 개인 수련과 자신의 성취를 만사의 으뜸으로 여기는 것은 결국 나를 위하고 사적인 것을 위한 것이었으니, 오늘날에는 사부님의 정법 요구에 도달할 수 없다. 사심을 갖고는 신우주에 들어갈 수도 없다.
사부님께서 말씀하셨다. “그러나 내가 바라는 것은 당신들이 진정으로 순정(純正)하고, 무사(無私)하여, 진정한 정법정각(正法正覺)으로 원만(圓滿)을 이루는 것인데, 그래야만이 비로소 영원한 불멸에 도달할 수 있다.”(스위스법회 설법)
우리는 오직 ‘법을 최우선으로 여기고’ ‘법으로 일체를 가늠해야만’ 진정한 법의 표준, 신우주의 표준에 도달할 수 있다.
이제 알았다. ‘나는 수련하고 싶다’는 것은 내가 입문할 때의 근본적인 집착이었다. 법을 잘 배우고 법에 동화되어 자신을 잘 수련하는 것이야말로 사부님을 도와 정법하고 사람을 구하는 기초다. 법을 배우면 배울수록 생명에 대한 사부님의 아끼심을 체득하게 된다. 사부님께서는 정법하여 중생을 제도하러 오셨고, 우리 이번 생의 생명의 근본은 사부님을 도와 사람을 구하는 것이다.
예전에는 세 가지 일 중에서 진상을 알려 사람을 구하는 것이 가장 어렵다고 생각했다. 지금은 인식했다. 우리 대법제자 각자가 마음을 다하고 힘을 다해 해야 할 일을 했고 잘했다면, 사람을 구하는 데서도 기적이 나타날 수 있다. 본질적으로는 대법이 사람을 구하는 것이기 때문에, 우리가 사람마음에 집착하지 않고 그곳에 방해받지 않는다면, 대법의 위력이 우리의 좋은 수련 상태를 통해 사람을 구하는 데서 체현될 것이다.
높은 것을 추구하는 문제
내 주변에 한 부부 수련생이 있는데, 외지의 한 여자 수련생 S를 알게 됐다. S는 점오(漸悟) 상태에 있다고 한다. 부부 수련생 중 남자 수련생 A가 S와 알게 되어 서로 교류하는 중에 역사상의 인연을 알게 됐다. 그래서 비록 다른 성(省)에 있지만 자주 왕래하고 있다.
A는 S로부터 사부님께서 소규모 비공개 설법이라는 것을 받아 주변 수련생들에게 전했다. 이는 이미 난법(亂法)한 것인데도 이것으로 자신을 실증했다.
A는 사부님 곁의 수련생에 대해 집착하고, 역사상 석가모니 부처가 법을 전할 때의 ‘상부좌(上部座) 제자’를 동경하면서, 마치 사부님 곁에 있거나 예전에 사부님 곁에 있었던 사람이 소위 ‘상부좌 제자’인 것처럼, 소규모 설법을 들을 수 있으면 높은 법을 들은 것이고, 마치 수련이 높아진 것처럼 여긴다.
그러나 수련인이 법으로 한번 대조해보면, 그러한 생각과 행동은 정말로 모두 법에 있지 않다!
이에 대해 사부님께서는 《전법륜》과 《정진요지》에서 모두 말씀하셨다. 사부님의 경문 ‘영원히 기억하라’를 우리는 아직도 기억하고 있는가? 또 어떤 수련생은 결가부좌를 3시간 하면서 동공(動功)을 연마하지 않는데, 이것 역시 자신이 수련이 높아진 것처럼 표현하는 것 같다.
이 수련생은 《명혜주간》을 보지 않고, 명혜망도 자주 보지 않으며, 위챗도 여전히 사용하고 있고, S와도 위챗으로 연락한다. 해외 수련생과 연락이 있어서 사부님께서 새로운 경문을 내리시면 해외 수련생이 알려준다고 한다. 명혜망만 열어보면 사부님의 모든 경문을 볼 수 있는데 왜 다른 사람이 알려주기를 기다리는가?
A는 《명혜주간》을 보지 않으면서 어떤 문장은 신수련생이 쓴 것이라고 한다. 당신이 ‘노수련생’이라고 수련하지 않고, 가짜로 수련하고, 성심껏 수련하지 않는다면, 시간이 아무리 길어도 소용없다!
명혜망과 《명혜주간》은 사부님께서 대법제자들에게 마련해주신 교류의 장으로, 자신의 체득은 다른 수련자들에게 매우 큰 도움이 된다. 보지 않는 것은 사부님께서 우리에게 이 특수한 시기에 마련해주신 수련 환경을 소중히 여기지 않는 것이 아닌가? 서로 일깨워주고, 서로 본보기로 삼고, 서로 구원하며, 공동으로 제고하는 기회를 소중히 여기지 않는 것이 아닌가?
휴대폰 문제
휴대폰 안전과 휴대폰 폐해에 대해 수련생들이 끊임없이 교류하고 일깨워주고 있고, 사부님의 법 속에도 명시되어 있는데도 여전히 중시하지 않는 수련생들이 있다. 어떤 수련생은 휴대폰 문제를 중시하는 수련생이 휴대폰을 두려워한다고 말한다. 어떤 수련생의 눈에는 휴대폰 안전에 주의하는 것이 ‘수련 층차가 부족한 것’이고, 자신이 수련한 층차는 이미 이런 문제가 없다고 한다. 이런 비이성적이고 오만한 태도는 매우 터무니없고 우스꽝스럽다.
내 절실한 체험으로 말하자면, 명혜편집부에서 ‘모든 대법제자들은 반드시 알아야 한다’를 발표한 후 나는 위챗을 삭제했지만, 한동안 여전히 가끔씩 휴대폰 뉴스를 보곤 했다. 아침 새벽 연공 때 일어나지 못해서 알람을 맞춰놓아도 듣지 못하고, 아주 오랫동안 5시가 넘어 6시 발정념 시간이 되어서야 일어날 수 있었다. 나중에 결심을 하고 더 이상 휴대폰 뉴스를 보지 않으니 아침에 알람 소리를 들을 수 있게 됐고, 일어나기도 쉬워졌으며, 수련인의 내면 경지가 청정해지는 것을 조금 체험하게 됐다.
법에서 우리는 알고 있다. 인터넷은 바로 마굴인데, 늘 마굴에 있으면 어떻게 되겠는가? 자신의 공간장이 무엇으로 채워지겠는가? 사부님께서는 우리가 발정념하기 전 5분은 모두 자신의 공간장을 청리하라고 하셨는데, 우리가 또 주동적으로 어떤 것들을 들여보내고 있는가? 이로부터 나는 어떤 수련생이 법공부를 해도 법을 얻지 못해 결국에는 대법을 이탈하게 된 것을 생각하게 됐다. 자신의 공간장이 깨끗하지 않고 청정하지 않은 것이 그 원인 중 하나일 것이다. 생각해보라, 업력장이 자신과 대법의 연계를 차단할 텐데, 마물(魔物)과 좋지 않은 패물(敗物)도 이렇게 하지 않겠는가? 수련자가 법을 얻으면 이런 마물과 패물이 소멸될 것이기에, 그것이 필사적으로 법을 얻지 못하게 하지 않겠는가? 그래서 수련인이 자신의 수련을 엄숙하게 대하는 것이 매우 중요하며, 이는 생각한 대로 되는 것이 아니다.
보게 된 문제를 써놓은 것은 수련생을 비난하려는 것이 아니라, 우리 모두가 진정으로 ‘법을 최우선으로 보고’ 법에서 수련하고, 법에서 제고하며, 법에서 정진하여, 자신을 잘 수련하고 서약을 이행하기를 바라서이다.
개인의 현 단계의 인식이라 편협할 수 있으니 부족한 부분은 자비롭게 지적해주시기 바란다.
[수련인들 간의 이성적인 교류는 일반적으로 개인의 당시 수련 상태에 대한 인식일 뿐이며, 선의적인 교류를 통해 함께 제고하려는 것입니다.]
원문발표: 2025년 2월 17일
문장분류: 수련교류
원문위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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