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중국 대법제자
[명혜망] ‘신의 삼위일체에 대한 약간의 인식’이라는 글이 ‘○○주간’에 실렸다. 글은 약 6천5백 자 정도이고, 글쓴이는 ‘중국 대법제자’다.
한 수련생이 나에게 그 글을 읽어보라고 재촉하면서 어떤지 물었다. 현재 우리 지역에서 이 주간지를 보는 사람이 많고 서로 돌려가며 보고 있다고 했다. 게다가 어떤 수련생은 다른 수련생에게 이 글을 읽으면 수련할 수 있게 될 거라고 말했다. 또 어떤 이는 이 글을 꼭 읽으라며 “오늘은 절대로 당신을 포기하지 않겠다. 내가 당신을 포기한다면 당신은 수련해서 원만에 이를 수 없다”(대의)라며 아주 큰소리를 쳤다.
평소 나는 ‘○○주간’을 보지 않는다. ‘명혜주간’을 보고 있고, 중대한 문제는 명혜망을 보면 충분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다른 사람들이 이 글이 그렇게 좋다고 해서 나도 다운로드해서 한번 읽어보았다.
글을 쓴 ‘중국 대법제자’는 ‘삼위일체’에 대한 체득이 사부님의 설법에서 온 것이라고 했다. 이 글을 읽는 과정에서 내 천박한 체득으로는, 그가 사존(師尊)의 각지 설법을 해석하고 있다고 느꼈고, 게다가 그는 사존의 설법에 근거해 대법의 일부 구체적인 내포를 말하고 있으며, 동시에 대법의 본뜻을 바꾸는 혐의가 있는데, 엄격히 말하면 이는 난법(亂法)이다.
글에서 작자는 이렇게 썼다. “간단히 이해하자면, 나의 신(神) 중 3분의 1은 인간 세상에 있고 3분의 2는 새로운 우주에 있다. 우리의 진신(眞神)을 인간 세상에 남기기 위해 사부님께서는 우리에게 극히 적지만 완전한 한 층의 사람마음을 남겨주셨고, 우리에게 인체와 인체의 천목을 가린 육안을 주셨다.”
나는 사존께서 이렇게 설법하신 것을 배운 적이 없다. 이것은 글쓴이 자신의 인식인데, 그는 아주 구체적으로 해석했다.
사부님께서는 말씀하셨다. “나는 올 때 층층이 아래로 내려오는 과정을 거쳤다. 아주 높은 신으로 놓고 말하면, 삼위일체(三位一體)가 있다. 삼위일체는 부동한 층차에서 부동한 개념과 부동한 인식이 있다. 유형(有形)적인 매우 높은 층차에서 삼위일체는 진신(真身), 진신(真神), 사상(思想) 이렇게 삼위일체이다.”(각지 설법2-2003년 캐나다 밴쿠버법회 설법)
글에서 작자는 이렇게 썼다. “구세력은 구원받기 위해 우주 층층의 20%를 삼계로 압박해 넣었다. 구우주 신의 진신(眞神), 즉 신의 진명(眞命)은 사부님께서 거두어가셨다… 삼계로 압박해 들어간 것은 바로 구신(舊神)의 삼위일체 중 두 가지, 즉 진신(眞身)과 사상이다.”
“구신의 삼위일체 중에서 삼계에는 진신(眞神)이 빠졌고, 우리는 새로운 우주의 신으로서 삼계에는 사상과 진신(眞身)이 빠졌다. 그래서 이 빠진 부분이 서로 보완되어 새로운 정체(整體)를 이루게 됐는데, 바로 우리의 진신(眞神), 즉 주원신(主元神)과 구신의 사상 및 진신(眞身)이 새로운 조합을 이룬 것이다. 우리에게는 업력이 없고 더욱이 집착도 없다.”
우선 말하자면, 이 두 단락의 글에 담긴 에너지는 매우 좋지 않다. 다음으로, 이 글의 작자는 실제로 수련하는 사람의 삼위일체를 해석했는데, 그것은 사존께서 말씀하신 법이 아니라 작자 자신의 인식이다. 게다가 우리 대법제자들은 구세력이 정법 중에 반드시 제거되어야 한다는 것을 분명히 알고 있는데, 우리는 이런 조합의 생명이 앞으로 어떻게 될지 이해할 수 없다.
사부님께서는 《전법륜》에서 말씀하셨다. “어떤 사람은 내게 묻는다. “그 밖에 종교 중의 책이나 기공서를 볼 수 있습니까?” 우리는 말하는데, 종교 중의 책, 더욱이 불교의 책은 모두 사람에게 心性(씬씽)을 어떻게 수련하라고 하는 것이다. 우리 역시 불가로서 마땅히 문제가 없다고 말한다. 다만 한 가지가 있는데, 많은 경서 중의 어떤 것은 번역 과정 중에 이미 잘못되었고, 게다가 아주 많은 경서의 해석 역시 부동(不同)한 층차에서 해석한 것으로서, 제멋대로 정의를 내리는, 이것이 바로 난법(亂法)이다.”
법을 그다지 공부하지 않으면서도 신이 되고 싶어 하는 어떤 수련생들이 이 수련 체득문을 보고 이렇게 심취한 것은 이상할 것이 없다. 자신은 이미 업력도 전혀 없고 집착심도 없어서 바로 진신(眞神)이니 수련할 필요가 없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그들은 이미 사부님께서 《전법륜》에서 하신 말씀을 잊어버렸다. “사람의 전반 수련과정은 바로 끊임없이 사람의 집착심을 제거하는 과정이다.”
수련생이여, 당신은 이미 법에서 벗어났다! 우리의 업력은 생생세세 좋지 않은 일을 해서 생긴 것이다. 마음을 차분히 하고 《전법륜》의 ‘업력(業力)의 전화(轉化)’ 부분을 다시 잘 공부하기 바란다.
작자는 글 말미에 이렇게 썼다. “나는 미래에 무슨 일이 일어날지 모르지만, 내 생명이 필요할 때 언제 어디서든 어떤 방식으로든 나는 담담히 죽음을 맞이할 것임을 안다. 단지 인간의 생명만이 아니라 신의 생명으로도 그렇게 할 것이다. 이것은 인간 세상의 용맹과 대담함이 아니라 대법제자가 우주 중생에 대해 지닌 자비와 위엄이며, 더욱이 사부님께 드리는 깊은 참회이다.” 우리 수련의 최종 목적은 원만이지 죽음을 맞이하는 것이 아니다! 나는 작자가 무엇을 ‘참회’하려는 것인지 이해할 수 없다.
글에는 이런 류의 문장이 더 많이 있지만 더 이상 자세히 말하지 않겠다. 어떤 수련생은 아마도 이렇게 말할 것이다. 그도 우리에게 안으로 찾으라고 말하고 정법시기 대법제자는 세 가지 일을 잘해야 한다고 말하고 있지 않느냐고… 만약 그가 이런 내용(안으로 찾기, 세 가지 일 하기 등에 대한)을 쓰지 않았다면 당신은 그가 법에 있지 않다는 것을 한눈에 알아볼 수 있었을 것이다. 난법하는 어떤 사람들은 바로 이렇게 자신의 인식을 말하다가 다시 대법 속의 말을 하면서 진진가가(眞眞假假)로 당신의 사상을 혼란스럽게 하여 자신을 믿게 하려는 목적을 달성한다. 자신이 수련을 잘했고 인식이 높다고 여긴다.
사부님께서는 최근 ‘관건 시각에 사람 마음을 본다’에서 우리에게 “그러므로 어떤 상황에서도 수련인의 표준에 따라야 하고, 법을 가장 중요시하며, 법으로 일체를 가늠해야 한다”라고 당부하셨다.
수련생이여, 우리가 수련생 글을 보는 것은 잘못이 없지만, 보는 과정에서 법으로 가늠해 법에 부합하는지, ‘배움을 견주고 수련을 견주’(比學比修)‘(홍음-착실한 수련)되 우선 어떻게 법으로 자신에게 요구하여 심성을 제고할 것인지 알아야 한다.
또한 수련생의 글은 법이 아니다. 당신은 대법을 20여 년 동안 배웠거나 혹은 매일 배우고 있는데도 수련하는 방법을 배우지 못했다가 수련생의 글을 보고 나서야 수련할 수 있게 됐다니, 설령 수련생의 글이 법에서 벗어난 부분이 없다 하더라도 그것은 그렇게 큰 힘이 없는데, 당신은 사부님과 대법을 어떤 위치에 두고 있는 것인가? 이것이 사부님을 믿고 법을 믿는 것인가?
당신이 곳곳에서 수련생 글을 선전하는 것은 대법 환경 속에서 동요와 교란을 일으켜 사부님께서 다른 대법제자들에게 안배하신 수련을 방해하는 게 아닌가? 만약 이 작자가 법을 어지럽히고 있다면 당신은 참여한 게 아닌가?
여기서는 질책의 뜻이 없고, 다만 이 관건적인 시각에 사부님께서 ‘관건 시각에 사람 마음을 본다’에서 우리에게 “시간이 많지 않다!”라고 말씀하신 것이 느껴졌을 뿐이다. 이 네 글자[時間不多]에 느낌표 하나, 거기에는 얼마나 많은 사부님의 기대가 담겨 있고, 얼마나 많은 사부님의 당부가 담겨 있고, 얼마나 많은 부탁이 담겨 있는가… 세 가지 일을 잘하고 “어떤 상황에서도 자신을 잘 수련하고 대법을 수호하는 것이 제 일위이다.”(관건 시각에 사람 마음을 본다) 수련생이여, 우리는 법을 스승으로 삼아 마지막 길을 잘 걸어 사전(史前)의 서약을 실현해야 한다!
이상의 제언에서 법에 있지 않은 부분이 있다면 수련생 여러분의 지적을 바란다.
[수련인들 간의 이성적인 교류는 일반적으로 개인의 당시 수련 상태에 대한 인식일 뿐이며, 선의적인 교류를 통해 함께 제고하려는 것입니다.]
원문발표: 2025년 2월 16일
문장분류: 수련교류
원문위치:
正體 https://big5.minghui.org/mh/articles/2025/2/16/490780.html
简体 https://www.minghui.org/mh/articles/2025/2/16/490780.html