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중국 대법제자
[명혜망] 한 해외 수련생의 교류 문장을 보니, 사부님의 경문 ‘관건 시각에 사람 마음을 본다’가 발표되자 매체를 둘러싼 파동이 갑자기 뚝 멈췄다. 구체적인 상황은 잘 모르지만 이는 중요하지 않다. 난법한 자가 수련생 중에서 파동을 일으켰다는 사실을 아는 것만으로 충분하다. 하지만 왜 늘 사부님께서 제지하시고, 명혜편집부가 통보를 내야 조용해지는가.
사부님의 신경문 ‘관건 시각에 사람 마음을 본다’를 공부하면서, 사부님께서 “누구도 대법 환경 속에서 파동을 일으킬 수 없는바, 이는 난법(亂法)이다!”라고 말씀하신 것을 보았는데, 매우 엄하게 말씀하셨다는 느낌이 들었다. 또한 최근 발생한 일에서 수련생들이 심하게 휩쓸려, 사부님께서 직접 제지하셔야 할 만큼 사태가 심각했음을 알 수 있었다.
사부님께서 또 말씀하셨다. “누가 했는가? 그럼 그 사람이 만회하라! 시간이 많지 않다!”(관건 시각에 사람 마음을 본다) 나는 이 말씀을 보고 사부님의 무량한 자비를 느꼈다. 우리는 지금 이 말씀의 무게를 모르고, 사부님께서 우리를 위해 또 얼마나 많은 것을 감당하고 희생하셔야 하는지 모른다. 여기서 ‘난법’은 우주 최고 대법을 어지럽히는 것인데, 이는 어떤 죄인가? 사부님의 보호와 감당이 없다면, 무지하게 난법에 참여한 수련생들은 얼마나 무서운 일에 직면하게 될지 모른다.
사부님께서는 우리가 법에서 벗어나고, 잘못된 일과 어리석은 일을 저지르고, 죄를 저질러도 한 번 또 한 번 우리를 위해 감당하고 희생하시며, 우리에게 잘못을 바로잡고 만회하고 새롭게 잘할 기회를 주시는데, 이는 어떤 자비인가? 이런 사부님을 어디서 찾을 수 있겠는가? 사부님께서 이토록 무량한 자비로 못난 우리를 대하시는데 소중히 여기지 않고, 감사할 줄 모르고, 시간을 다그쳐 잘못을 바로잡으려 하지 않고, 심지어 반발하고 불복한다면, 그래도 구원받을 수 있겠는가?
명혜편집부의 ‘통보’는 관련 수련생들이 오성을 높여, 풍파에 휘말리게 된 원인을 심성에서 찾으라는 것이었는데, 사태의 심각성을 설명하기 위해 모 수련생의 실체를 폭로하여, 그가 해외 수련생들 사이에서 여러 해 동안 유지해 온 ‘영웅’ 이미지를 깨뜨렸다. 이는 그 수련생에게는 깨어날 기회이고, 그에게 속아 시장을 제공한 수련생들에게도 정신을 차리고 안으로 찾을 기회다.
사악은 한 사람에게 추구하거나 애착하는 것이 있으면 그 사람을 손에 넣을 수 있다고 말하는데, 이번 사건에 휘말린 수련생들은 자신이 무엇을 추구했는지 찾아볼 필요가 있다. 아직 찾지 못했거나 찾을 줄 모른다면 사부님의 신경문을 참고할 수 있다. “관건 시각에 어떤 사심(私心)이나 사념(私念)을 섞어 넣는 것은 모두 사악이 원하는 작용을 일으키는 것이다.”(관건 시각에 사람 마음을 본다) 그렇다면 이 말씀에 따라, 자신이 어떤 사심과 사념을 섞어 넣었는지 각자 찾아볼 수 있다. 우리는 더 이상 습관적으로 밖을 보고, 다른 사람을 보며, 다른 사람에게 정의를 내려서는 안 된다. 이는 수련이 아니며 더 높은 층차로 올라갈 수 없다.
많은 수련생에게 한 가지 심각한 문제가 있는데, 바로 사부님께서 경문을 발표하여 제지하시고, 명혜편집부가 ‘실체’를 밝혀야만 이성을 되찾고, 난법하는 사람에게 휩쓸리던 것을 멈출 수 있다는 것이다. 멈추고 나서도 안으로 찾지 않고 여전히 밖을 본다. 이 문제를 우리는 확실히 반성해야 하며 이번 파동에서 우리의 어떤 ‘사심과 사념’이 드러났는지 진지하게 찾고, 사부님의 요구대로 손실을 만회해야 한다.
중국의 ‘연설 난법’의 심각한 교훈
아래는 최근 난법 사태에서 내가 본 몇 가지 문제와 생각인데, 참고가 되고 서로 촉진될 수 있기를 바라며, 부족한 점은 자비롭게 지적해주시길 바란다.
우리가 자기 공간장의 모든 난법 요소를 없애지 않으면, 같은 일이 조만간 다시 일어난다. 과거 중국에서 많은 수련생이 모두 연설 난법을 했고 ‘떠들썩하게’ 큰일을 하는 것에 집착했다. “우리는 큰일을 하는 사람이다!” 나는 연설 난법하는 수련생들이 이 말을 입버릇처럼 하는 것을 들었다.
그들은 ‘각지 수련생들을 이끌어 큰 범위에서 정체를 이루게 한다’는 명분으로 각지를 돌아다니며 연설하는 것을 좋아했는데, 정말 하늘 높은 줄 몰랐다. 이번 명혜편집부의 ‘통보’에도 이런 부분이 지적됐다. “수련생들 사이에서 ‘영웅’이 되기 위해, 늘 자신이 정념정행한 이야기를 선전하며 ‘빛나는’ 이미지를 내세웠다.” 이는 당시 연설 난법자들의 공통점이었는데, 그들은 사정을 잘 모르는 외지 수련생들 앞에서 자신을 완벽한 사람으로 만들어 추앙을 받았다.
이 과정에서 난법자들의 사람마음이 크게 드러났는데, 주로 명예욕, 금전욕, 체면, 허영심, 과시심, 새롭고 특이한 것을 구하는 마음, 자기 팽창, 자심생마(自心生魔)가 표현되었고, 듣는 사람들은 주로 사람을 숭배하는 마음, 수련에서 지름길을 찾으려는 마음, 새롭고 신기한 것을 추구하는 마음, 사람의 정, 법을 배우지 않고 사람을 배우는 마음이 있었다.
명혜편집부가 2013년에 ‘연설하는 것은 난법이다’라는 공지를 발표해 중국의 혼란을 제지한 후, 표면적으로는 연설 난법 현상이 사라졌지만, 많은 당사자들은 심각성을 인식하지 못했다. 그들은 자신은 수련생들을 도와준 것이며, 정체적인 제고와 더 많은 사람을 구하는 데 도움을 줬다고 생각하며 인정하지 않았다. 어떤 이들은 자신은 좋은 의도였고 잘못한 것도 없는데 너무 일률적으로 난법으로 치부한다며 억울해 했다. 연설 난법에 연루된 기타 많은 수련생들도 거의 자신과 무관하다고 생각하면서, 나중에 더 이상 반성하지 않았다. 하지만 강연을 하고, 강연을 들은 수련생은 물론, 이 일을 전해 들은 사람들까지 모두 수련해야 할 것이 있는데, 어찌 남의 일이겠는가! 특히 직접 강연을 하고, 강연을 들은 사람들은, 당신은 잊어버렸을지 모르지만 사악은 잊지 않았으며 모두 기록해 뒀다. 이는 그것들이 최후에 당신을 박해하는 구실이 된다(사실 당시 강연자들은 이후 대부분 모두 각종 심각한 마난을 겪었다).
불복하고, 반발하고, 억울해하는 마음은 난법하는 마(魔)의 ‘보호막’이 된다. 그것들은 이런 사람마음 속에 잠복해 있다가 시기가 성숙하면 뛰쳐나와 또 다시 당신을 조종한다. 당신은 그것들이 조종하기 적합한 ‘표적’이기 때문이다. 게다가 그것들은 당신이 법에 동화되고 진정으로 법에 용해되는 것을 심각하게 가로막을 것이다. 내가 아는 이런 수련생들은 법공부할 때 교란이 모두 매우 커서, 오랫동안 법공부가 마음에 들어가지 못했고, 법공부가 마음에 들어갈 때의 미묘하고 성스러운 상태를 체험하지 못했다.
그런데 이런 상태의 일부 수련생들이 현재 이미 해외로 갔다. 이런 수련생들은 반드시 자신의 언행에 신중해야 한다고 일깨워주고 싶다. 자유로운 해외에서 자신의 공간장의 모든 난법 요소를 철저히 없애지 않으면, 조만간 다시 난법할 수 있기 때문이다. 과거의 잘못을 인식하고, 진심으로 사부님께 참회하며, 실제 행동으로 손실을 만회하고, 확고한 정념으로 난법의 마를 제거해야만 그것들이 당신을 이용하지 못하고 망치지 못하게 할 수 있다.
그동안 해외에서 각종 난법 현상이 끊이지 않았는데, 나는 이 또한 반대로 중국 수련생들을 일깨워주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이 문제에 대한 인식과 심성이 제고되었는가? 과거의 연설 난법을 철저히 부정했는가? 자신의 공간장 속의 모든 난법의 마를 철저히 없앴는가? 아직 없애지 못했다면 반드시 중시해야 한다. 원만의 최후 순간에 사악이 이를 구실로 가로막는다면, 후회한들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중국 대법제자들이 과거 겪었던 것을 쓴 것은, 해외 수련생들도 주의하라고 일깨워주고 싶어서다. 반드시 이 일을 중시해야 한다. 이는 정말 작은 일이 아니다. 당시 본인의 의도가 어떠했든, 난법에 휩쓸려 참여했다면 이미 난법한 것이므로 요행을 바라지 말고, 반드시 사부님의 요구대로 자신이 했던 모든 것을 만회해야 한다. 이는 사부님께서 구해주시는 것이다.
명혜망을 존중하고 중시해 난법을 멀리하자
나는 그동안 여러 해의 정법 수련을 거치면서 수많은 일을 겪었고 교훈도 얻었는데, 한 가지 상황을 보았다. 명혜망을 중시하지 않고 존중하지 않는 지역에서 쉽게 난법 현상이 나타나고, 명혜망을 중시하지 않고 존중하지 않는 수련생도 쉽게 난법한다. 국내외 모두 마찬가지다. 절대적이지는 않지만 흔히 이러하다.
나는 이런 수련생들이 사실 모두 어느 정도 마난 속에 있다고 생각한다. 왜냐하면 명혜망을 중시하지 않고 존중하지 않는 표현 뒤에는 많은 사람마음이 있기 때문이다. 예를 들면 자만심, 강렬한 자아, 질투, 투쟁, 자심생마 등이다. 사부님께서 거듭 긍정하신 명혜망조차 중시하지 않고 존중하지 않는다면, 사람마음이 그만큼 강하다는 것인데, 마난 속에 있지 않다고 할 수 있겠는가? 사실 이는 또한 경사경법(敬師敬法)의 문제다.
여기서는 명혜망 접속이 어려운 중국 수련생들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주관적 선택으로 중시하지 않는 수련생들을 말하는 것이다. 왜 명혜망을 중시하고 존중하지 않는가? 여러 해 동안 나는 많은 상황을 보았는데, 아래 비교적 보편적이고 두드러진 사례만 말하겠다.
해외 수련생들 중에는 잘난 체하고 자아가 강한 사람들이 있다. 내가 아는 한 중국 수련생은 여러 번 해외에 다녀왔는데, 그녀에 따르면, 학력이 높은 일부 해외 수련생은 명혜망 투고자들이 대부분 지식 수준이 낮고, 본인보다 깨달은 것이 못하다고 여겨 명혜망을 보지도 않는다고 했다고 한다. 또 해외 수련생들은 인터넷 접속이 자유로워 다른 각종 매체를 많이 보다 보니 명혜망을 볼 시간이 없다고 한다. 사실 ‘고학력’은 무엇인가? 현대 과학이나 이공계는 과거에 말하는 ‘술수(術數)’를 배우는 것이라 그리 대단할 것이 없다. 살아가기 위해 현대 사회에 부합해야 하지만, 전통적 관념과 수련의 관점에서 볼 때 정말 그리 대단한가?
어떤 해외 수련생은 각종 채팅방에서 교류하기 더 좋아한다고 한다. 하고 싶은 말이 있으면 바로 할 수 있고, 형식에 구애받지 않아도 되기 때문이다. 명혜망은 투고해도 게재될지 안 될지 모른다고 한다. 어떤 수련생은 이 때문에 명혜망을 중시하지 않고 존중하지 않는다. 하지만 나는 경험을 통해 느꼈다. 명혜망이 원고를 엄격하게 관리하는 것은 사실 우리에 대한 사부님의 자비와 보호이다. 왜냐하면 개인의 입장에서, 또는 일시적인 생각에서 나오는 관점은 법에 부합하는지, 난법을 일으키지는 않을지, 전체 국면에 어떤 영향을 줄지 모르기 때문이다. 박해가 지속되는 가운데 명혜망은 상상할 수 없는 수많은 어려움을 겪고 있으므로, 잘못을 할 수 있다. 하지만 우리 자신 역시 늘 모든 것을 정확히 꿰뚫어 볼 수 있는 것이 아니며, ‘절대적으로 정확하고’, ‘절대적으로 고명하지’는 않다. 더 중요한 것은, 교류 문장을 쓰는 것은 시비를 다투거나 인식의 높낮이를 비교하려는 것이 아니고, 자신을 실증하기 위해서도 아니며, 정체적 제고와 더 많은 사람을 구하기 위해서라는 점이다.
명혜망과의 20여 년의 협력에서, 나는 명혜망의 순정함과 엄숙함을 깊이 느꼈는데, 이는 다른 어떤 사이트도 비교할 수 없다. 20여 년 동안, 내가 투고한 원고 중에서 인식에 오류가 있거나, 법에서 벗어났거나, 정법의 요구에 부합하지 않거나, 극단적이거나, 불이법문(不二法門)의 요소가 있거나, 당문화(공산당 문화)가 심하거나, 수련생들을 오해하게 할 수 있는 원고는 모두 게재되지 않았다. 나는 이런 문제들을 당시에는 인식하지 못했지만, 나중에 인식하거나 사부님께서 일깨워주셔서 알게 됐다. 때로는 글 자체에는 아무 문제 없었지만, 강렬한 사람마음을 품고 투고하면 게재되지 않았다. 그러다가 일단 문제를 인식하고 사람마음을 제거하면 거의 모두 다시 게재됐다. 그래서 지금은 내 교류 문장이 게재되지 않으면 내 인식 어디가 잘못되었는지 생각해 보거나, 내가 맞다고 생각하는 인식을 완전히 포기한다. 왜냐하면 나는 점점 더 이런 인식이 있게 되었기 때문이다. 즉 무변(無邊)한 대법 앞에서 나의 인식은 먼지보다 못하며, 명혜망에 게재되지 않았다면 반드시 이유가 있다는 것이다. 사실 이는 끊임없이 자신을 바로잡는 과정이다.
부적절한 문장을 게재하지 않는 것은 사부님께서 우리를 보호하시는 것이다. 우리는 반드시 수련의 각도에서 정념으로 명혜망을 대해야 하며, 중대한 문제는 반드시 명혜망의 태도를 보아야지, 어떤 채팅방의 어떤 ‘영웅’의 태도나 속인을 위해 쓴 매체 논평을 보아서는 안 된다.
우리의 마음이 발랐다면, 각종 난법 현상이 나타날 수 있었겠는가? 예를 들면, 명혜망이 우리에게 특무(스파이)를 잡으라 하고 투쟁하라고 한 적이 있는가? 진정으로 명혜망을 존중하고 중시하는 수련생이라면 난법자의 언행에 휩쓸리겠는가? 그들에게 시장을 제공하겠는가? 알아보지 못하겠는가?
그동안 명혜망을 존중하고 중시한 대법제자들이라면 각지에서 나타난 각종 난법 행위가 모두 저능하고 황당하며 가소롭다고 느낄 것이다. ‘너무 명백하게 법에서 벗어났는데, 왜 그리 쉽게 휩쓸릴까’라고 생각할 것이다. 평소 마음을 써서 수련하지 않고, 문제가 생겨도 방관하거나 무시하면서 전혀 자신을 수련하지 않는다면, 자기 차례가 되어 관을 넘어야 할 때 정말 법에 따라 수련할 수 있겠는가? 최근 파동에서 이런 수련생들은 과연 어땠는가? 오만함과 잘난 체가 가소롭고 슬픈 결과를 불러오지 않았는가?
사실 대법은 줄곧 명혜망을 통해 우리의 지혜를 늘려주고, 비학비수(比學比修)하여 정체적으로 제고하도록 촉진하고 있다. 나는 개인적으로, 명혜망은 사부님께서 우리에게 내미신 손이라고 생각한다. 이 손은 우리가 바른 길에서 안정적으로 전진하도록 이끌어주고 있다. 만약 어떤 사람이 정말 자아와 각종 사람마음에 가로막혀 마지막까지도 명혜망을 중시하지 못한다면, 나중에 자신이 얼마나 어리석었는지 알게 될 것이다. 비유하자면, 마치 강을 건너는데 넓고 튼튼한 다리를 두고, 거센 물살 속에서 돌을 더듬으며 강을 건너는 것과 같은데, 이 사람이 이상하지 않은가? 어리석지 않은가?
전 세계 대법제자들이 모두 명혜망을 존중하고 중시하여, 매일 대법제자들의 가장 크고 가장 순정한 교류 환경에서 자신을 깨끗이 씻어내고, 손에 손잡고 정법수련의 길을 잘 걷고 바르게 걸어, 함께 사부님을 따라 집으로 돌아가기를 희망한다.
‘특무 잡기’로 분열을 조장하는 것은 사악이 가장 바라는 것이다
사부님께서는 그동안 설법하실 때, 항상 우리에게 사람마음을 수련하라고 하셨지 특무를 잡으라고 하신 적이 없다. 특무를 어떻게 알아볼 수 있을까 생각해 봤는데 쉽지 않다. 어쩌면 일부 대법제자들은 당문화가 심하거나 집착심이 강해 특무처럼 보일 수 있다. 반면 진짜 특무는 전문적인 훈련을 받았기에 교묘하게 위장해서 특무로 보이지 않을 수 있다. 심지어 중공 악당은 특무를 고를 때 이미 인간 세상에서 전문 기능을 가진 사람을 골랐기 때문에, 지금 우리 항목에서 중요한 역할을 맡거나 책임자가 되었을 수도 있으며, 사람마음이 중한 수련생들의 추앙을 받고 있을 수도 있다. 해외 소식을 보면 이런 가능성을 완전히 배제할 수 없다.
만약 우리가 특무 색출에 마음을 쓰느라 스스로 혼란을 초래하고, 항목에 있는 대법제자들이 주의력을 다른 데 돌린다면, 사악의 이간책에 넘어가는 것이 아닌가? 이러면 누가 가장 기뻐할까? 설령 정말 특무를 잡아내어 쫓아내거나 스스로 떠난다 해도, 대법 환경이 파괴되고 중생구도에 손실을 보게 되는 것은 기정사실이 되며, 잃어버린 시간도 되찾을 수 없다. 그런데 항목 내부에서 스스로 이런 상황을 초래한다면 어떻게 만회하겠는가? 대심판 때 이런 손실을 어떻게 계산해야 하는가? 당신이 결정할 수 있는가?
사부님께서는 모든 것을 알고 계신다. 어떤 특무가 사부님을 속일 수 있겠는가? 진정으로 수련하는 대법제자들은 수시로 사부님 법신의 보호와 점화를 느낄 수 있다. 천목이 열렸거나 점오 상태에 있는 대법제자들 중에서 사부님의 법신을 본 사람이 적지 않다. 사부님께서는 모든 문제의 본질을 꿰뚫어 보시고, 우리에게 착실하게 수련하여 각종 사람마음을 버리게 하신다. 개인적인 이해로는, 특무가 우리 대법제자들 중에 장기간 숨어 있을 수 있는 것은 우리의 사람마음이 은신처를 제공했기 때문이며, 우리의 사람마음이 그들로 하여금 근본적인 변화를 일으키지 못하게 했기 때문이다. 이것이 바로 문제의 본질이다.
그렇다면 어떤 사람 마음인가? 예를 들면, 나를 중시하고, 인정을 중시하며, 좋은 말을 듣고 싶어 하고, 칭찬받기 좋아하며, 소능소술(小能小術)에 집착하고, 질투심, 원망, 명혜망을 중시하지 않고, 발정념을 중시하지 않거나 발정념을 잘하지 않는 등이다.
우리는 수련 단체이지 속인의 정치 조직이 아니다. 수련은 사람마음을 버리는 것이며, 모든 마난과 문제는 우리의 사람마음 때문에 오는 것이다. 따라서 모든 혼란은 우리가 사람마음을 제거하면 사라진다.
진정한 대법제자는 속인에게 없는 초상(超常)적인 능력이 있다. 우리에게 사람마음이 없고 정념이 강하면 자비롭고 순정한 에너지장이 사람을 조종하는 사악을 해체할 것이며, 특무도 여기에 머물지 못하거나 좋게 변해 진정으로 수련을 시작할 것이다. 우리가 수련 중에서 표준에 도달하면, 사부님 법신과 바른 신들도 특무가 계속 존재하는 것을 허용하지 않고 그들을 떠나게 할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자신을 잘 수련하고, 사부님께서 요구하신 세 가지 일을 잘하면 된다. 사악이 일을 꾸밀까 두려워하는 마음을 철저히 내려놓고, 모든 것을 수련의 각도에서 보아야 한다.
우리 모두 사부님의 말씀을 기억하자. “말후(末後)에 정법(正法)이 사람을 구하는 이 중대한 역사적 시각에, 나타나는 모든 문제를 더더욱 수련인의 심태로 대해야 하고, 법을 최우선으로 보아야 하며, 대법 항목을 잘 수호함으로써 그것이 사람을 구하는 작용을 잘 발휘하도록 하는 것만이 유일하게 생각할 것이고 해야 할 것이다.”(관건 시각에 사람 마음을 본다)
[수련인들 간의 이성적인 교류는 일반적으로 개인의 당시 수련 상태에 대한 인식일 뿐이며, 선의적인 교류를 통해 함께 제고하려는 것입니다.]
원문발표: 2025년 2월 12일
문장분류: 수련교류
원문위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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