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워싱턴DC 대법제자
[명혜망] 어떤 수련생이 자신이 왜 파룬따파를 믿게 됐는지에 대해 교류했다. 내가 보기에 이런 이야기를 일반인에게 하는 것은 아무 문제가 없지만, 진정한 수련인이 수련한 지 얼마 됐는데도 여전히 머릿속에 이런 의문이 생긴다면 좋은 일이 아니다. 내가 이렇게 말하자 어떤 수련생은 내가 선종(禪宗)처럼 말도 못 하고 질문도 못 하게 한다고 생각했다. 이 문제에 대해 내가 설명해보고자 한다.
영화 ‘무간도(無間道)’에서 한 조직폭력배가 다른 형제가 경찰의 첩자인지 의심하면서 “우리는 아직도 형제인가?”라고 물었다. 이때 내레이션은 이렇게 말한다. ‘내가 그에게 우리가 형제인지를 물었을 때, 우리는 이미 형제가 아니었다.’ 왜일까? 증명하려고 하는 순간, 이미 의심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렇지 않다면 증명할 필요가 없다. 물론 이 비유가 그리 적절하지는 않다. 다만 이것이 인지상정이라는 것을 설명하기 위해서다. 한 사람의 신념은 감정에 기초한 사람과 사람 사이의 신뢰보다 훨씬 더 신성한 것이다.
즉, 증명하려는 생각이 들 때는 대개 의심이 생겼기 때문이다. 반대로 말하면, 만약 파룬따파에 대한 믿음을 다른 것으로 증명할 수 있다면, 본질적으로 당신이 믿는 것은 이 증거와 증명과정이지 파룬따파 자체가 아니라는 뜻이다. 다시 말해, 당신의 증명과정은 오히려 당신이 본질적으로 파룬따파를 믿지 않는다는 것을 증명하는 셈이다. 법 자체가 바로 표준인데, 다른 표준으로 이 표준을 증명해야 할 필요가 있을까? 인간 세상의 단편적인 부분으로 우주의 전체를 증명하고, 개인의 현재 인식 범위라는 낮은 표준으로 높은 표준(우주의 근본 법칙)을 증명하려 하는 이런 사고방식이 합리적일까? 이런 실증과학적 방법으로 ‘추론’해낸 결론을 당신은 과연 얼마나 믿을 수 있을까?
‘왜 파룬따파를 믿는가’라는 의문을 나는 한 번도 가져본 적이 없다. 그냥 믿었을 뿐이다. 수련생의 이야기 때문에 이틀 전에 다른 수련생에게 물어봤다. “‘왜 파룬따파를 믿는가’라는 문제를 고민해본 적이 있나요?” 그녀는 전혀 없다고 했다. 그러고는 자신이 어떻게 무신론자에서 신을 믿게 됐는지를 이야기해주었다. 사실 그것은 찰나의 순간이었다. 사부님의 설법을 들은 한 순간이었다. ‘아, 정말로 신이 있구나’ 하고 믿게 된 것이다. 하지만 그녀는 지금 그 순간 어떻게 믿게 됐는지 기억조차 나지 않는다고 한다. 다시 말해, 진정으로 믿게 되는 과정은 인간 세상의 과정이 아니다. 진정으로 믿는 사람은 ‘왜 믿는가’라는 의문을 갖지 않는다. 그래서 이런 질문은 흔히 믿지 않는 사람들이 하는 것이다.
사실 사부님을 믿고 법을 믿는다는 이 말조차도 그리 정확하지는 않다. 진정한 과정은 법에 동화되는 과정이다. 점차 그가 당신이 되고 당신이 그가 되는, 즉 점차 진아(眞我)로 돌아가는 과정인데, 자신을 믿지 않는다는 문제가 존재할 수 있을까? 믿지 않는 것은 모두 진아가 아닌 것들이므로, 배척하고 나아가 즉시 정념을 발하여 제거해야 한다. 마찬가지로 왜 파룬따파를 믿는지 고민할 때도 사실 파룬따파를 자신의 밖에 두었기에 이런 의문이 생기는 것이다. 물론 이것은 막 파룬따파를 접한 사람에게는 정상적인 것이지만, 한동안 수련한 사람이 여전히 이런 의문을 갖는다면 자신의 수련을 깊이 성찰해볼 필요가 있다.
개인적인 견해이니 참고만 하시기 바란다.
[수련인들 간의 이성적인 교류는 일반적으로 개인의 당시 수련 상태에 대한 인식일 뿐이며, 선의적인 교류를 통해 함께 제고하려는 것입니다.]
원문발표: 2025년 2월 12일
문장분류: 수련교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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