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중국 대법제자
[명혜망] 처음 법공부를 시작했을 때는 법의 관점에서 법을 인식하지 못했으며, 이성적으로 대법이 무엇이며 자신의 인생에 어떤 의미가 있는지 이해하지 못했다. 그렇다면 무엇 때문에 기쁘게 법공부를 하러 갔던 것일까? 당시의 그런 생각들은 제거됐을까?
이전에 나는 자신의 근본 집착이 무엇이라고 생각했을까? 처음 법공부를 시작했을 당시 나는 기숙사 생활에 적응하지 못했는데, 사부님께서 다른 사람이 당신을 좋지 않게 대하는 것은 당신에게 덕(德)을 주는 것이라고 하시자 마음이 한결 가벼워졌다. 나중에는 장차 수련하는 가정을 이루면 분명 아주 좋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이것이 당시 법공부를 하게 된 동력이었다.
여러 해 동안 나는 이 점에서 계속 근본 집착을 찾았고, 행복하고 안락한 생활을 추구하는 집착을 찾았으며, 대법을 이용하려는 좋지 않은 마음을 찾았다. 그래서 나는 줄곧 자신의 근본 집착을 찾았다고 생각했고, 최소한 그 점은 제대로 찾았으니 단지 시기별로 인식의 문제일 뿐이라고 생각했다.
며칠 전 사부님의 설법을 공부하다가 이런 구절을 보았다. “어떤 사람은 대법이 이 면이 좋고, 저 면이 좋다고 여긴다. 하지만 오늘날 이 고험은 정말 무정(無情)한 것이다. 왜냐하면 그 어떤 사람의 마음이든지 모두 하늘로 갖고 갈 수 없기 때문이다.”(도항-미국서부법회 설법) 나는 깜짝 놀랐다. 대법이 이 면이 좋고 저 면이 좋다고 생각한다면 그것은 더 이상 한 가지 면의 문제가 아니며, 단순히 하나의 생각에 그치는 것이 아니었다. 그래서 나는 입문 초기 몇 년간의 생각들을 잘 정리해보았다.
1. 대법 공부가 가져다준 사람 중의 좋은 면을 찾다
나는 대학 교수님의 소개로 수련의 길에 들어섰다. 나는 먼저 대학 교수님에 대한 숭배와 경외심을 찾았다. 다시 말해서, 이성적으로 대법을 인식해서가 아니라 교수님을 숭배하는 마음에서 수련의 길에 들어선 것이다.
내 부모님은 모두 월급쟁이였지만, 내 대학 교수님은 그 시대 사람들 중에서 보배처럼 여겨지는 분이었고, 학식과 정신적 면모가 대부분의 학식이 낮은 사람들과는 달랐다. 또는 나는 다른 한 분의 교수님이 공법 동작을 가르치실 때 일부러 가서 보았는데 부러움이 가득한 표정을 지었다. 그때 나는 이미 동작을 알고 있었는데 왜 또 보러 갔을까? 나는 그 명예를 추구하는 마음을 찾았다. 교수님들이 남보다 뛰어나다고 생각했고, 나도 이렇게 남보다 뛰어난 단체에 들어왔다고 생각했다.
영화 ‘우리는 원래 신이었다(再次成爲神)’에서 조해봉(趙海峰)은 출세하지 않으면 헛된 인생이라고 생각했다. 나는 결코 내가 그런 사람이라고 생각하지 않았고, 수련하는 사람은 순리에 따라야 한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하지만 수련단체에서 나는 자신이 출세하려는 또 다른 표현을 보았다. 바로 내가 속인들과 다르다는 것, 나는 대다수 사람보다 고상하고 초연하다는 것, 나는 여러 사람들보다 위에 있다는 것이었다.
2. 사부님의 사람 중의 좋은 면을 보다
같은 사람의 마음으로, 나는 사부님에 대한 자신의 생각을 보았다. 사부님께서는 능력이 있으시고, 초고 없이도 설법하시며, 매우 문명적이시고, 말씀과 표현에서 정기가 넘치신다는 것이다. 이런 생각들은 단지 피상적인 인식일 뿐, 법의 관점에서 법을 인식한 것이 아니었지만, 나는 이것이 사람의 마음과 집착이라는 것을 의식하지 못했고, 더욱이 이것이 근본 집착의 한 가지 표현이라고는 생각하지 못했다.
3. 비교해보지 않으면 모른다
나는 사부님과 수련에 대해 기본적인 인식이 없었던 것은 아니다. 당시 나는 ‘밀레르빠의 수련 이야기’를 읽었고, 1999년 사악이 사부님을 비방하며 사부님이 사치스러운 생활을 하신다고 했을 때, 나는 매우 우스웠다. 왜냐하면 나는 사부님께서는 우리와 다르시고, 사람을 구하는 신과 구원받는 중생은 같은 개념이 아니라는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사부님께서는 이런 세상의 부귀영화를 원치 않으실 것이라고 생각했다. 나는 줄곧 이 문제에 대해 자신이 매우 냉철하다고 생각했다.
얼마 전에 밀레르빠의 수련 이야기를 다시 들었다. 스승인 마르빠 상사가 계속해서 밀레르빠에게 법 전수를 거절하고 계속해서 어려운 과제를 내주었을 때, 상사의 부인은 어쩔 수 없어 하며 한탄했다. “당신의 스승은 너무 돈을 탐해서 당신에게 법을 전수하지 않으시는 거예요.”(대략적인 뜻) 여기에는 매우 중요한 세부사항이 있다. 바로 밀레르빠가 이에 대해 반박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그는 이 말을 묵인했지만, 그의 마음속에는 마르빠 상사에 대해 조금의 불만이나 편견도 생기지 않았다. 그는 자신이 너무 가난해서 공양을 하지 못해 상사께서 자신에게 법을 전수하지 않으신다고만 생각했다.
나는 이 말을 듣고 마음이 움직였다. 만약 내가 그 상황이었다면, 나는 상사께서 나를 시험하시는 것이고 상사께서는 결코 이런 공양을 개의치 않으실 것이라고 생각했을 것이다. 하지만 밀레르빠는 상사께서 자신에게 공양을 요구하시는 것 자체가 잘못된 것이 아니라고 생각했고, 스승의 동기를 분석하여 스승의 행위를 평가하지 않았다.
4. 사부님께서 근본 집착을 일깨워주시다
사부님께서는 내가 진지하게 찾고 있는 것을 보시고 나를 일깨워주셨다. 그날 내가 명혜망을 열었을 때, 한 편의 문장이 내 눈으로 달려들어 왔다. 그 문장에서 수련생은 자신의 근본 집착을 분석했다. “나는 내 근본 집착이 대법이 내 관념 속의 바른 이치[正理]와 보편적 가치관에 부합한다고 생각하는 것이라고 본다.”
나는 이것이 또한 내 근본 집착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나는 그 생각의 배후에 사람의 마음으로 사부님과 대법을 가늠하고, 사부님과 대법이 올바른지 아닌지 가늠하고 있었다는 것을 보았다.
밀레르빠와 비교해보고 나는 자신의 허점을 찾았다. 나는 자신의 사부님을 평가하고 있었지, 무조건적으로 사부님의 모든 것을 공경하지는 않았다.
몇 년 전 일이 생각났다. 나는 자신의 수련 상태가 좋지 않다고 느껴 하루를 내어 법을 외웠고, 법공부에 고생스럽게 공을 들였다. 밤에 꿈에서 사부님께서 오셨다. 사부님께서는 웃으시며 나를 보시고 법 외우기를 격려하셨고, 그런 다음 손가락으로 바닥에 쌓여있는 책들을 가리키며 보여주셨는데, 그것들은 모두 옛 성현들의 책과 영웅들의 전기였다. 나는 이것이 나에게 무엇을 일깨워주시는 것인지 찾아보았고, 세상의 이치를 중히 여겼다는 것을 알았지만 깊이 들어가서 찾지는 않았다. 왜냐하면 나는 이런 성현들의 책을 전혀 읽지 않았기 때문이다. 하지만 나는 그 세상의 이치가 자신에게 얼마나 큰 영향을 미쳤는지 의식하지 못했다.
5. 이 근본 집착의 배후에는 또 무엇이 있는가
나는 법을 얻었을 때 겨우 20살이었고, 인생과 세상에 대해 그렇게 많은 생각이 없었는데, 왜 이런 사람의 마음으로 사부님과 대법을 가늠하게 되었을까? 나는 또한 그런 세상의 큰 도리를 좋아하지 않았는데, 이것은 어떤 요소가 만들어낸 것일까?
나는 그것이 생생세세 형성된 사람의 이념, 사람의 외피라는 것을 깨달았다. 더 깊이 들어가서 찾아보니 바로 자아였다. 20여 년 동안 나는 계속해서 법공부를 하며 자신을 바로잡았는데, 왜 이 문제를 이렇게 늦게 인식하게 되었을까?
그날 내가 이 문제를 생각할 때 머릿속에서 사악한 당의 노래가 울리고 있었다는 것이 생각났다. 나는 과대망상적인 당문화(공산당 문화)가 사유 속에 숨어있어서, 이런 생각으로 사부님과 대법을 가늠하는 것이 불경스럽고 우스꽝스럽다는 것을 의식하지 못하게 됐다는 것을 찾았다.
수련생이 해외에 있어도 당문화의 영향이 있을까? 사부님께서는 말씀하신 적이 있다. “중국은 형식적으로는 공산 사악주의를 하지만 사실상 그것은 깡패집단에 사교를 더한 것이다. 서방사회는 형식적으로 공산사악주의를 반대하지만, 사실상 공산사악주의를 하고 있다.”(각지 설법7-미서국제법회 설법) 게다가 해외의 극좌 사상, 공산주의 마귀가 전 세계를 통치했으며, 표면적으로 우리는 모두 좋지 않다는 것을 알고 배척하지만, 그 사유방식과 환경은 이미 무의식중에 우리의 사유에 영향을 미쳤다. 예를 들면 악념, 고조(高調), 이기심, 부자를 약탈해 가난한 자를 돕는 것, 높은 세금, 높은 복지, 노동하지 않고 얻으려는 것, 난잡한 성관계, 억지를 부리는 것, 도덕과 상식 및 전통을 존중하지 않는 것 등등이다.
션윈이 이 몇 년간 공연한 노래들은 대부분 무신론과 진화론이 인류에게 가져온 파괴를 노래했다. 나는 《홍음6》에서 사부님께서 반복해서 이 사악한 당문화의 해악을 말씀하시는 것을 깨달았다. 정법 말기에 사부님께서 왜 이 일을 간곡히 말씀하시는지, 나는 이 당문화가 우리의 수련에 미친 영향이 너무나 크고, 정진하는 발걸음을 교란하고 방해했기 때문이라고 이해했다.
6. 근본 집착을 제거하지 않으면 생기는 위험
수련생 문장에서 언급했듯이, 수련하는 사람이 이 근본 집착을 제거하지 않고 자신이 신봉하는 세상의 이치를 가장 근본적이고 최종적인 가늠의 기준으로 삼는다면, 어느 날 자신이 수련 중의 어느 한 층의 법이나 어떤 일이 자신이 인정하는 사람의 이치에 부합하지 않는다고 여길 때, 수련인은 아마도 법을 배반할 수 있다.
1999년 7·20 때, 나는 사부님과 대법이 올바른지 아닌지 생각할 때 마음이 불편했던 것이 생각났다. 왜냐하면 나는 대법 수련이 나에게 가져다준 명예를 잃었고, 더 이상 파룬 배지를 달고 사람들에게 나도 이 우수한 단체의 일원이라고 말할 수 없게 됐기 때문이다. 이 배후에는 사부님과 대법에 대한 불경이 있었다. 비록 나는 최종적으로 계속 수련하기로 결정했지만, 이 마음은 자신을 사부님과 대법 위에 놓은 것이었다. 나중에 나는 이 마음도 찾았지만(자신이 대법을 이용해 명예를 추구한다는 것), 그 근본이 사람의 마음으로 사부님과 대법을 가늠하고 있다는 것은 찾지 못했다.
또 막 법을 얻었을 때, 나는 사부님께서 하신 한 가지 말씀에 동의하지 않았다. 나중에 나는 이 생각이 잘못됐다는 것을 의식했는데, 그것은 내가 형성된 관념으로 기준을 삼아 사부님의 언행을 가늠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관념 속에서 나는 사부님을 내 마음속에서 생각하는 그런 완벽한 우상으로 만들었다. 그래서 현실과 사람 마음이 형성한 올바른 이치가 충돌할 때 나는 마음속으로 받아들이기 어려웠는데, 이는 매우 위험한 것이다.
이 근본 집착을 제거하지 않으면 사부님과 대법에 대해 불경하게 된다.
대법에 대한 불경을 초래하는 것은 사람의 마음뿐만이 아니라, 사람 마음 속에는 또한 당문화가 있다. 냉정하게 생각해보면, 이 우주 속에서 만들어진 생명이 우주를 만드신 사부님과 대법을 가늠한다는 것은 얼마나 불경스럽고 얼마나 자만한 것인가!
대법을 이용해서 자신을 실증하고, 자신이 인식한 어떤 이론을 실증하며, 자신을 사부님과 대법 위에 놓는 것이다. 이런 사유방식은 단지 사부님과 대법을 가늠하는 데만 있는 것이 아니라, 주변 사람과 일을 가늠하는 데도 있으며, 특히 주변 수련생을 가늠하는 데도 있다.
나는 이번 법난에서 가장 큰 문제가 바로 우리의 근본 집착을 제거하지 않은 것이며, 이는 직접적으로 사부님과 대법에 대한 불경과 불신으로 이어졌다는 것을 깨달았다.
사부님의 최신 설법 《관건 시각에 사람 마음을 본다》에서, 나는 “사람 마음을 본다”는 것이 단지 한 가지 방법만이 아니라, 그것이 수련인의 근본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어떤 갈등 앞에서도 자신에게 어떤 사람의 마음과 관념이 있는지 보아야 하는데, 하물며 법난 앞에서는 어떻겠는가!) 자신의 모든 것을 순정(純正)하게 해야만 사부님께서 요구하시는 새로운 우주의 표준에 도달할 수 있다.
[수련인들 간의 이성적인 교류는 일반적으로 개인의 당시 수련 상태에 대한 인식일 뿐이며, 선의적인 교류를 통해 함께 제고하려는 것입니다.]
원문발표: 2025년 2월 7일
문장분류: 수련교류
원문위치:
正體 https://big5.minghui.org/mh/articles/2025/2/7/490461.htm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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