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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려움은 여전히 대법제자 제고의 관건 요소

글/ 산둥성 대법제자

[명혜망] 나는 꿈을 거의 꾸지 않고 기억도 잘 하지 못하는데, 몇 달 전에 꿈을 하나 꾸었는데 매우 생생했다. 그 의미는 많은 수련생이 정념이 없고 두려움에 막혀있다는 것이었다.

꿈속에서 나는 말을 타고 전진하다가 교차로에서 두 갈래 길을 만났다. 왼쪽을 보니 많은 사람(수련생)이 그곳에 서서 움직이지 않고 있었는데, 그 이유는 앞에 많은 경찰이 총을 들고 서서 지나가려는 사람들을 막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사람이 너무 많아 지나가기 힘들어 보여서 나는 생각할 겨를도 없이 말머리를 돌려 다른 쪽으로 향했다. 얼마 달리지 않아 그곳에도 경찰이 지키고 있었지만, 이곳에는 거의 사람이 없었다. 경찰은 많지 않았지만 쪼그리고 앉아 사격 자세를 취하고 있었다. 나는 멈추지 않고 경찰이 막고 있는 곳에 도착해서 고삐를 당기며 몸을 날려 뛰어넘었다. 내가 뛰어넘자 총도 발사되지 않았고 경찰은 마치 가짜 인형처럼 그 자리에서 멍하니 서 있었다…

잠에서 깨어나 생각해보니, 왼쪽에 있던 그 사람들이 지나가지 못한 것은 바로 두려움 때문이 아니었을까. 그렇게 많은 사람이 거기에 서서 사람들끼리 밀치고 밀리며 서 있었다.

현지 상황과 연관 지어 개인적으로 느낀 점은 이렇다. 두려운 마음은 여전히 수련생이 제고하는 데 있어 관건 요소다. 그것이 직접적으로 가져온 결과로 이곳에는 ‘세 가지 감소’ 현상이 나타났다. 즉, 법공부 모임이 줄어들고, 자료점이 줄어들고, 진상을 알리는 수련생이 줄어든 것이다. 왜 그럴까? 두려움이 있는 사람은 의존심이 있고, 두려움이 있으면 책임을 회피하려 하며, 두려움이 있으면 책임지기를 원치 않기 때문이다. 이로 인해 많은 일이 장기간 소수의 사람에게 집중되어 전체적으로 대법제자가 마땅히 발휘해야 할 힘을 발휘하지 못하고 있다.

1. 두려움의 몇 가지 표현에 대해 말하고자 한다

1) 일이 생기면 정념을 내지 못하고 사악의 전령이 된다

때로는 사악이 행동하기도 전에 우리가 먼저 동요하는데, 이때 두려움이 상당히 큰 작용을 한다. 어떤 수련생은 사악을 대신해 ‘통지를 전달하고’, ‘소식을 전하는’ 것이 습관이 되어 계속해서 사악의 ‘전령’ 노릇을 하고 있다. 무슨 소문이 들리기만 하면, 사악이 또 무슨 활동을 하려 한다거나, 무슨 사악한 회의를 연다거나, 무슨 통지가 왔다는 등의 소식을 듣기만 하면 바로 가서 이런 소식들을 퍼뜨린다. 이유인즉슨 상대방을 위하는 것이고 전체를 위해서라고 하면서, 전달하지 않으면 박해가 생겼을 때 자신의 잘못이 될 수 있기 때문이라고 한다.

당신이 두려워하는 것은 그렇다 치더라도 다른 사람까지 두려워하게 만들면 안 된다. 여러분 생각해보라, 해마다 사악이 얼마나 많은 버전의 수법을 만들어냈는가. 올해는 ‘노크 행동’이라 하고, 내년엔 ‘제로화’라 하고, 후년엔 또 무엇이라 할지 모르지만, 천변만화해도 사악하고 악한 본질에서 벗어나지 못하며, 그 본질과 목적은 변하지 않고 단지 수법만 바꾼 것이다. 이렇게 해마다, 매번 이렇게 하는 목적은 바로 이런 지속적인 고압 방식으로 당신의 의지력을 무너뜨리고 두려운 마음이 생기게 하려는 것이 아닌가.

예전을 보면, 우리는 이 20여 년간 사악이 말하는 이런저런 활동을 얼마나 많이 겪었는가. 지금도 마음이 흔들린다는 것은 말이 되지 않는다! 사악이 어느 날 ‘민감’하지 않았는가? 언제 ‘민감’하지 않았는가? 이제는 민감한 문제가 아니다. 그것은 이제 날이 갈수록 불안해하고 있다. 민감한 날은 그것이 민감한 것이고, 그것의 정해진 운명이며, 우리와는 관계가 없다. 우리는 바로 자신을 수련하고 사부님이 안배하신 길을 걸어가면 되는 것이다.

2) 고비를 만나면 피하려고만 한다

고비는 돌파해야지 피해서는 안 된다. 하지만 우리는 어떠한가. 어떤 수련생은 다른 수련생의 말을 듣고, 사악이 자신에게 어떤 수단을 쓰려 한다거나 어떤 행동을 하려 한다는 것을 알고는 마음속으로 두려워하며 숨어버렸다. 내 주변에도 이렇게 숨어버린 수련생이 적지 않은데, 이유도 각양각색이다. 무슨 내가 사악에게 주목당했다느니, 또는 우리집에 새로운 고화질 감시카메라가 설치됐다느니 하는 등의 이유를 댄다.

교류를 통해 알게 된 것은, 이런 수련생들 중에는 지금까지도 스마트폰으로 위챗을 하고 비디오를 보는 것을 즐기면서, 법공부를 제대로 하지 않고, 일하는 것을 수련으로 여기고, 수련을 엄숙하게 대하지 않으며, 말을 가려서 하지 않는 사람이 적지 않다는 것이다.

이 공간의 사악에게 주목당했다면, 우선 우리는 생각해봐야 한다. 왜 주목을 받게 됐을까. 우리 자신의 마음이 초래한 것은 아닐까. 이른바 ‘상유심생(相由心生, 표상은 마음에서 생긴다)’이라는 말이 있다. 자신에게 물어보라. 장소를 옮기고 날짜를 피한다고 사람마음을 버릴 수 있겠는가. 만약 모두가 피할 수 있다면 그것은 너무나 쉬운 수련 아닌가. 모두가 함께 피하면 되는 않는가.

편안하고 안락하게는 제고할 수 없다. 그렇지 않으면 자신의 업력조차 소멸할 수 없는데, 하물며 심성 제고는 말할 나위도 없다! 수련하는 사람은 어려움을 만나도 앞으로 나아가야 하고, 역류를 거슬러 올라가야 하며, 자신을 제고할 어떤 기회도 놓치지 말아야 한다. 문제를 만났을 때 첫 번째 염(念)은 정념이어야지 사람의 생각이어서는 안 되며, 그래야만 시험을 이겨낼 수 있는 수련인인 것이다!

우리 이곳은 산간 도시라 본래 수련생이 적은데다, 박해로 인해 육신을 잃은 수련생도 있어서 남은 수련생이 많지 않다. 모두가 도망가 버린다면 누가 법을 실증하고 사람을 구하는 일을 하겠는가. 사부님께서 여러분을 이곳에 안배하신 의미는 또 어떻게 구현되겠는가. 수련생들이 깊이 생각해보기를 바라며, 이러한 수련생들이 하루빨리 돌아와 사부님을 도와 정법하는 데 동참하여 자신의 책임과 사명을 계속 이행하기를 바란다.

어떤 수련생은 안전에 문제가 있다고 생각하여 이사를 가려고 한다. 이사를 하면 장소도 바꾸고 환경도 바꿀 수는 있지만, 사람의 마음은 바꿔갈 수 있는가. 천애해각(天涯海角)으로 도망간다 해도 업력과 사람마음 뒤에 있는 박해 요소를 피할 수 있겠는가. 표면의 것은 영원히 가상이고, 내심의 변화와 충실함이 가장 실질적인 것이다! 우리가 수련하는 이 길은 이렇게 좁다. 자신을 엄격히 요구해야만 하는데 이 길은 대충 넘어갈 수 없을 만큼 좁다.

3) 관계없는 일을 연관 지어 스스로를 겁먹게 한다

내가 사는 단지 주변에는 병원(자주 구급차가 지나감), 소방서, 특경(特警) 센터, 교통경찰 중대, 공안국, 법원이 있어서 매일 각종 경찰차가 수십 대나 지나간다. 만약 경찰차 한 대를 보고 어떤 연상을 한다면, 마음이 하루 종일 평온하지 않을 것이다. 그것이 소란을 피우고 소리를 지른들 우리와 무슨 관계가 있는가. 왜 꼭 우리와 연관 지어야 하는가. 우리는 전혀 그것을 생각할 필요가 없다.

기억하건대 한번은 내가 수련생의 집에 갔을 때 뒤에서 경찰차가 사이렌을 울렸는데, 수련생이 매우 긴장했다. 마침 그날은 비가 왔는데, 그는 잠시 기다렸다가 나와 함께 아래층으로 내려갔고 나는 떠났다. 나중에 알고 보니 경찰차는 신고를 받고 다른 동을 찾아왔는데, 그 동에 서지 않고 직접 수련생이 있는 동에 멈췄다고 한다. 상황이 이러했다. 이런 우연은 당신의 마음을 시험하러 온 것은 아닐까. 당신에게 사람마음을 보여주고 수련하라고 온 것은 아닐까.

우리가 하는 일은 모두 올바른 일이다. 관계없는 일을 연관 지어 생각하는 것은 자신이 스스로를 겁주는 것이다. 그럼 수련이 힘들고 피곤하지 않겠는가. 인위적으로 자신에게 장애를 만드는 것이다.

또 어떤 이는 수련생이 박해당했다는 말을 듣고 긴장한다. ‘나는 최근에 그녀와 연락했었는데, 우리가 만났었는데, 그녀가 나한테 전화를 했었는데, 그러니 날 찾아오지는 않을까, 나는 어떻게 해야 하나…’ 하는 등 연이어 많은 것들이 나온다. 수련인의 길은 서로 다르다. 전염병이 돌 때도 한 가족이 같은 냄비의 밥을 먹고 한 지붕 아래서 공기를 마시지만, 이 가족 모두가 감염되는 것은 아니다. 수련인으로서, 다른 수련생이 박해당했다고 해서 당신도 수련생을 따라 박해당해야 한다는 법이 있는가. 같은 일이라도 다른 마음가짐이라면 결과도 다르게 나타난다. 그 두려운 물질이 나왔다면, 왜 이 기회를 잡아 즉시 그것을 제거하지 않는가. 두려운 마음을 보면 즉시 정념을 발하여 자신을 청리(淸理)하고 일체를 청리하여, 진념(眞念)이 자신을 주도하게 해야 한다.

4) 두려운 마음이 만들어낸 간격이라는 요소

간격, 이것은 사악이 가장 좋아하는 방법 중 하나이다. 그것은 사람의 마음을 조종하고 갈등을 만들어 손쓰기 좋게 한다. 간격이 형성된 후에는 어떤 이는 홀로 수련하게 되고, 어떤 이는 스스로 고립되거나 고립당한다. 또 어떤 수련생은 누가 더 중요하다거나, 누가 특수 인물이고 중점 인물이며 공개 인물이라고 생각하여 왕래를 줄여야 한다고 하면서 주목을 끌지 않으려 한다. 이는 수련생들 사이에 서로 소원해지게 만들어 점점 가까워져야 할 것이 점점 멀어지게 되고, 서로 간에 간격이 생겨 사악의 계략에 걸려드는 것이다.

어떤 이는 “우리집에 새로운 감시카메라가 설치됐으니 이제 우리집에 와서 법공부하지 마세요”라고 하여 법공부 모임이 해산되었고, 어떤 이는 “전 감시당하고 있으니 우리집에 오지 마세요”라고 한다. 심지어 누구누구는 오지 말라고 지목하고, 누구는 무슨 요일에 와야 하고, 낮에 와야 하고 밤에 와야 하며, 며칠에 한 번 와야 한다는 등을 규정했다. 무형중에, 무의식중에 간격을 만들어내 어떤 이는 정말로 서로 왕래하지 않게 됐다.

우리가 입자를 확대해서 보면, 특히 표면 입자 중에는 매우 큰 공간이 있어서 좋지 않은 생명들도 들어올 수 있고 많은 요소들이 있는데, 그것들을 몰아내야 한다. 어떻게 몰아내는가. 법으로, 정념으로, 공(功)으로 몰아내는 것이다. 바로 일체 바른 요소가 일체 바르지 않은 것을 바로잡을 수 있으니, 그러면 이 한 층이 수련 잘 되어 넘어갈 수 있다. 위에서 아래로 내려올수록 나쁜 요소는 더욱 나빠지지만, 그것이 나쁘기는 나쁘나 또한 약하니 수련하기 쉽다. 그런데 왜 표준에 도달하지 못했는가. 본성의 한 면이 작용을 발휘하지 못한 것이 주요한 원인이다.

수련인 스스로가 자신을 느슨하게 하여 자신의 수련 의지를 약화시켰고, 여기에 각종 사람마음과 후천적인 관념이 뒤섞여 있어서, 사악한 요소가 아직 오지도 않았고 작용을 발휘하지도 않았는데 당신 스스로가 먼저 불안정해져서 어떤 관, 난을 추구했다. 그리고는 추구해 온 것을 다시 부정하고, 부정한 후에 또다시 추구하는 등 무의미하게 순환하면서 귀중한 시간을 낭비하여 수련인이 위로 올라가는 것을 저애하고 있다.

2. 어떻게 확고하게 신사신법하고 정념으로 문제를 보는가 하는 것은 수련인의 필수과목

1) 그것을 너무 크게 보지 말아야 한다

구세력은 마와 흑수(黑手)·난귀(爛鬼, 썩어 문드러진 귀신)를 조종하고, 난귀는 중공 각급 사악한 인원들을 조종하고 방해하여 하급 경찰과 지역사회 직원 등에 이른다. 우리가 한편으로는 “구세력을 부정한다”고 말하면서도, 한편으로는 여전히 경찰을 두려워하고 감시카메라를 걱정하는 것은 모순이 아닌가. 이렇게 해서 어떻게 구세력을 부정할 수 있겠는가.

물론 경찰은 육안으로 볼 수 있고 구세력은 육안으로 볼 수 없다. 하지만 이것이 무엇인가. 가장 기본적인 사악이 주입한 무신론 관념조차 뿌리 뽑지 못한 것이다.

나는 수련생에게 이런 예를 들어본 적이 있다. 사악한 중공의 전체 국가기구는 모두 우리를 위해 존재하는 것인데, 그 경찰은 심지어 하나의 ‘나사’도 되지 않는다. 왜 우리가 그 보잘것없는 것만 주목해 그것을 크게 보는가. 왜 자비로운 선념으로 그 생명에게 진상을 알려주고 그를 구하지 않는가. 우리가 자신을 속인으로 여기고 있는 것은 아닌가.

또 어떤 수련생은 나에게 무엇이 가장 안전한지 물었다. 내가 보기에 사부님께서 일찍이 이 문제를 말씀하셨다. 법을 잘 배우고 신사신법(信師信法)하는 것이 가장 강하고 가장 안전하며, 정념정행이 가장 안전한 것이다.

2) 수련생이 박해당할 때는 반드시 전체적인 각도에서 봐야 한다

몇몇 수련생이 계속 나에게 불평하기를, 현지에 협조가 없다고 한다. 모두가 소극적으로 기다리고 의존한다면, 효과적인 정체(整體)를 이루지 못한다.

단지 박해의 관점에서 말하자면, 수련생이 박해당할 때 외지 수련생들의 방법이 아주 좋았다. 명혜망에서 폭로하고 현지에서도 폭로하며, 제일 먼저 폭로한다. 민중들로 하여금, 심지어 수련생을 박해한 경찰의 가족, 이웃, 친구들까지도 그가 박해에 참여했다는 것을 알게 하고 모두가 이 일을 이야기하게 한다. 인심은 여전히 선념이 있어서, 이런 폭로 하에 어떤 수련생은 아주 빨리 석방됐다. 박해당한 수련생은 대법의 힘, 정체의 힘을 보았고 신념이 큰 영향을 받지 않아 아주 빨리 자신을 바로잡고 수련의 발걸음을 따라잡을 수 있었다.

그런데 어떤 이는 무관심하고, 어떤 이는 소극적인 마음가짐을 품고 우리가 무엇을 할 수 있느냐고 말한다. 또 어떤 이는 인맥을 통해 뒷문을 찾아다니며 속인의 길을 간다. 그것은 바로 자신을 속인으로 여기는 것이 아닌가. 속인은 위덕이 없는데, 어떻게 한 생명으로서 대법제자가 창세주에 대해 세운 서약을 이행할 수 있겠는가. 여러분은 정말로 속인이 되고 싶은가. 아니면 계속 주의식(主意識)이 강하지 않고 진념이 주가 되지 않아서인가.

3) 사부님 말씀을 들어야 한다

이 말이 나오면 어떤 이는 말할 것이다. “누가 사부님 말씀을 듣지 않는다는 말인가.” 그렇다. 오늘날까지 걸어오며 계속해서 세 가지 일을 잘하는 수련생이 많이 있다. 하지만 말씀을 듣지 않는 이도 한두 명이 아니다.

사실 나도 때로는 생각한다. 사부님 말씀을 누가 다 들을 수 있겠는가. 그것은 바로 신사신법 문제가 아닌가.

때로 우리가 매우 어렵다고 느낄 때, 사부님께서는 바로 곁에서 우리를 보시면서 우리가 한 걸음 더 나아가기를 희망하시는데, 그 한 걸음을 내딛지 못한다. 그때 우리가 생각하는 것은 ‘수련이 왜 이리 어려운가’이다. 하지만 그때가 바로 사부님께서 가장 괴로우실 때이다.

특히 일선에서 계속 진상을 알리는 대법도(大法徒)가 매일 마주하는 것은 중공에 의해 끊임없이 세뇌된 속인들이고, 또 그것이 끊임없이 만들어내는 공포 분위기, 거리마다 가득한 감시카메라, 시장과 정원 곳곳에서 볼 수 있는 붉은 완장들, 속인으로 가장한 사복 경찰, 거기에다 이익을 탐하고 진상을 모르는 고발자들이다. 만약 대법제자가 사부님과 법을 믿지 않고, 언제 어디서나 정념으로 대할 수 없다면, 어찌 인간 세상에서 이 거대한 책임과 사명을 완수할 수 있겠는가!

맺음말

사실 법에서 우리는 알고 있다. 사람은 매우 나약하여 작은 관념 하나도 당신을 좌우하고 통제할 수 있는데, 하물며 대천세계(大千世界, 우주의 모든 세계)의 전생과 현세의, 후천적인 것과 선천적인 것, 크고 작은 관념들이랴! 이 모두가 당신을 유혹하고 있다. 일단 걸려들면 사람은 마치 연이 실에 매달려 그 실에 의해 이리저리 끌려다니는 것처럼 된다. 그러므로 우리는 사람마음과 관념의 ‘노예’가 되어서는 안 되며, 우리는 대법을 지도로 삼아 반본귀진(返本歸眞)하는 대법제자가 되어야 한다. 사부님과 법을 믿고 진수실수(眞修實修)하여 하나하나의 사람마음이라는 자물쇠를 풀고, 하나하나의 정념으로 두려움과 사악을 이겨내 세상에 오기 전의 서약을 이행해야 한다.

이상은 개인적인 체득이니, 적절하지 못한 곳이 있다면 자비롭게 지적해주시기 바란다.

[수련인들 간의 이성적인 교류는 일반적으로 개인의 당시 수련 상태에 대한 인식일 뿐이며, 선의적인 교류를 통해 함께 제고하려는 것입니다.]​

 

원문발표: 2025년 2월 5일
문장분류: 수련교류
원문위치:
正體 https://big5.minghui.org/mh/articles/2025/2/5/490396.htm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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