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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유기 사타령 고비의 계시

글/ 중국 대법제자

[명혜망] 사타령(獅駝嶺)은 삼장법사(당승) 일행이 경전을 구하러 가는 과정에서 겪은 큰 고비였다. 이 고비의 특별한 점은 산마루에 있는 세 마리의 요괴가 무예가 뛰어나서 한 나라의 백성을 모조리 잡아먹고 자신들이 독차지하여 수년간 지배했다는 것이다. 즉, 이른바 ‘나라’에는 평범한 백성이 한 명도 없고 모두가 요괴였다. 이는 다른 곳처럼 한 나라에 요괴가 몇 마리밖에 없는 것과 비교하면 훨씬 더 위험했다.

더욱 중요한 것은 이 사타령이 영산(靈山, 경전을 구하러 가는 최종 목적지)과 매우 가깝다는 것이다. 보통 사람의 생각으로는 서쪽으로 가는 길에 이미 이렇게 많은 고비를 넘었고 영산에 거의 다 왔으니 요괴나 마귀가 거의 없을 것이라고 생각했을 것이다. 그래서 이 고비는 실제로 삼장법사 일행에게는 매우 큰 심성 시련이었다. 이는 우리가 이렇게 오랜 세월 난을 겪고 마지막 순간을 맞이하려 할 때 해외에서 이렇게 큰 풍파를 만나는 것과 매우 비슷하지 않은가?

법난(法難)이 발생한 원인은 많지만, 주로 우리 자신의 문제로 인한 것이며, 이에 대해 이미 많은 글에서 논의했다. 여기서 말하고 싶은 것은 법이 일체를 만들었다는 것이다. “대법은 우주의 법으로, 누구도 파괴할 수 없다. 대법이 세상에서 사람을 구하고 있다!”(관건 시각에 사람 마음을 본다) 진상은 대법이 사람을 구하는 것이지, 사람이 사람을 구하거나 어떤 사람이 얼마나 중요한가 하는 것이 아니다. 수련하는 사람으로서 당신이 법에 부합해야만 법이 당신을 통해 사람을 구하는 작용을 일으킬 수 있다. 하지만 사람을 구하는 위덕은 대법이 준 것이다. 이로 인해 자만하고 오만해진다면 이는 대법을 진정으로 이해하지 못했고 대법에 대한 경외심이 없다는 것을 의미하지 않는가?

앞으로 돌아가서, 사타령은 손오공의 자만심, 삼장법사의 두려움, 저팔계의 확고하지 못함과 게으름 등 삼장법사 일행의 사람마음을 겨냥한 것이었다. 하지만 마지막에 손오공은 육이미후(六耳獼猴, 손오공과 똑같이 생긴 원숭이)와의 힘겨루기 도전에서 마침내 자만과 야만성을 버렸고, 삼장법사는 아무리 많은 혼미한 순간이 있었고 아무리 비관적이고 절망적인 치명적 곤경을 만나더라도 서천에 가서 경전을 구해오겠다는 사명을 늘 굳건히 지켰다. 그들은 여래불의 가지(加持)가 늘 함께했다고 할 수 있는데, 가장 중요한 것은 삼장법사의 확고함이었다. 그는 영산에 거의 다 왔는데도 이렇게 큰 난관을 만났다고 해서 동요하거나 포기하지 않았고, 마침내 구구팔십일 난관을 통과했다.

경문 ‘법난(法難)’에서 사부님께서는 말씀하셨다. “사실 나는 우리가 사람을 구하고 있는 동시에, 아직도 15%의 업력을 없애지 못했음을 알고 있다. 이것은 중생구도 20여 년간 남겨진 것으로, 이는 매우 거대한데, 나는 알고 있다.”

이런 상황에서 우리에게 가장 관건이 되는 문제는 여전히 사부님을 믿고 법을 믿는 것이다. 진정으로 그렇게 했을 때 법이 우리를 통해 작용을 일으킬 수 있고 사부님도 우리를 도와주실 수 있으며, 그렇지 않으면 모든 것이 헛된 말에 그치고 말 것이다. 삼장법사를 예로 들면, 일단 저팔계의 말을 듣고 헤어져서 짐을 나눠 갖고 고향으로 돌아가 농사를 짓겠다고 했다면 여래불도 그를 도와줄 수 없었을 것이다.

[수련인들 간의 이성적인 교류는 일반적으로 개인의 당시 수련 상태에 대한 인식일 뿐이며, 선의적인 교류를 통해 함께 제고하려는 것입니다.]​

 

​원문발표: 2025년 2월 4일
문장분류: 수련교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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