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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상을 알리는 과정에서 성숙한 수련으로 나아가다

글/ 중국 대법제자

[명혜망] 저는 1996년부터 파룬따파(法輪大法, 파룬궁)를 수련하기 시작했습니다. 청년에서 중년이 되기까지, 수련 과정에서 많은 시련을 겪으며 점차 이성적이고 성숙해졌습니다. 오늘 제 수련 경험의 순간들과 마음의 여정을 적어서 수련생 여러분과 공유하고자 합니다.

법을 얻다

저는 1996년에 법을 얻어 수련을 시작했습니다. 그때 저는 20대였지만, 이미 몇 년 동안 매일 약과 함께하는 오랜 환자였습니다. 그해 여름, 복부 팽만 증상이 다시 나타나서 병원에 가서 검사를 받았는데, 여러 병원을 다녀도 원인을 찾지 못했고, 결국 시내에서 가장 큰 병원에 갔지만 거기서도 찾지 못했습니다. 의사는 대장 내시경 검사를 권했고, 검사를 위해 공복 상태로 집에서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어머니의 동료 한 분이 제가 이렇게 젊은 나이에 중병을 앓고 있는 것을 보고 어머니께 파룬궁을 해보라고 추천해줬습니다. 어머니는 저를 위해 ‘파룬궁’, ‘전법륜(轉法輪)’ 등의 책과 공법 교육 비디오를 구해오셨습니다.

저는 이전에 기공을 수련한 적이 있고 치료를 위해 기공 진료도 받아보고 기공 보고회도 들어봤는데, 모두 병 치료와 건강 증진에 관한 것이었지만, 마음속으로는 고층차로 수련하고 싶었습니다. ‘파룬궁’을 펼쳐보니 “나는 수련대법(修煉大法)을 강의하는바, 이는 진정으로 고층차에서 수련하는 대법이다”라고 쓰여 있었습니다. 저는 정신이 번쩍 들어 ‘파룬궁’을 단숨에 읽었고, 초조하고 불안하던 마음이 평온해졌습니다. 제가 찾던 걸 발견했다는 것을 알았고, 제게 병이 없다는 것도 알았습니다. 병원에 가서 검사해 보니 정말로 모든 것이 정상이었습니다.

저는 서둘러 책과 비디오에 따라 동작을 익히기 시작했습니다. 동작은 빨리 배울 수 있었지만, ‘전법륜’을 읽고 나니 이해하기 어려운 부분이 많았고, 많은 곳에서 의미를 파악하기가 힘들었습니다. 무엇이 문제였을까요? 이해가 되지 않았지만, 그때는 다른 수련생들과 교류할 환경이 없어서 집에서 혼자 공부하며 동작만 연습했고, 법공부가 얼마나 중요한지 알지 못했기에 제고가 매우 더뎠습니다.

1997년에 사부님의 ‘시드니법회 설법’을 보고서야 깨달음이 왔습니다. 사부님께서 우주의 구조에 대해, 우주가 층층이 있고 무한히 크고 무한히 작으며 끝이 없다고 말씀하시는 것을 듣고 저는 문득 깨달았으며, 제 문제가 어디에 있었는지 알게 됐습니다. 저는 줄곧 자아의 관점에서 대법과 수련을 이해하려 했고, 늘 제가 이해할 수 있는지, 현대 과학이 인식할 수 있는지를 따지며, 실증과학의 관점으로만 바라보려 했기에 아무리 생각해도 이해가 되지 않았던 것입니다. 하지만 이 우주에서 제가 과연 무엇이겠습니까? 한 알의 먼지보다도 작은 존재인데, 어찌 감히 제 생각대로 옳고 그름을 판단하여 대법과 우주를 이해하려 했던 것일까요?!

이러한 이치를 깨닫고 나서 다시 ‘전법륜’을 읽어보니, ‘전법륜’에서 이미 우주의 구조에 대해 상세히 말씀해주고 계셨다는 것을 발견했습니다. 그동안 왜 이 내용을 제대로 읽어내지 못했던 걸까요? 이제 다시 책을 펼치자 더 이상 내려놓을 수가 없었습니다.

1998년, 연공장에서 사부님의 해외 설법 비디오를 상영했는데, 저는 단 한 번도 빠지지 않고 모두 시청했습니다. 그 결과 빠르게 제고가 이뤄졌고 수련에 대해 더욱 깊이 있는 이해를 하게 됐습니다. 그때 저는 반드시 끝까지 수련하겠다고 굳게 다짐했습니다.

베이징에 가서 법을 수호하다

1999년 7·20 이후, 저는 단체 수련 환경을 잃었고 매일 TV에서 쏟아져 나오는 거짓 선전을 보며 마음이 무거웠습니다. 무엇을 해야 할지 갈피를 잡지 못한 채 그저 매일 법공부와 연공만을 꾸준히 이어갔습니다. 연말이 되어서야 점차 주변 수련생들과 연락이 닿았고, 수련생들이 베이징으로 가서 법을 수호하고 있다는 소식을 듣게 됐습니다. 저와 어머니도 베이징으로 가기로 결심하고 기차표까지 구매했으나, 앞서 베이징으로 간 수련생들이 납치되어 지금 송환되고 있다는 소식이 전해졌고, 숙소 입구에는 이미 감시하는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결국 우리는 어쩔 수 없이 기차표를 환불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하지만 제 마음은 쉽사리 가라앉지 않았습니다. 고민 끝에 저 혼자라도 베이징에 가기로 결심했습니다. 한 수련생이 제 짐을 숙소 밖으로 운반해 주었고, 저는 홀로 기차역으로 향했습니다. 여러 차례 갈아타면서 마침내 베이징에 도착했지만 수련생이 알려준 연락처는 어느 것 하나 연결되지 않았습니다. 결국 천안문 광장으로 직접 가기로 마음먹었고, 그곳에서 납치되어 천안문 파출소로 끌려갔습니다. 이후 베이징 주재 현지 사무소로 이송됐고, 거기서 다른 수련생들과 만났습니다. 얼마 지나지 않아 고향으로 강제 송환됐고, 하루 이틀가량 마약중독자 수용소에 갇혔다가 구치소로 옮겨졌으며, 15일이 지난 후에야 파출소로 넘겨졌습니다. 경찰은 제게 수련을 계속할 것인지 물었고, 만약 계속한다고 하면 다시 구치소로 보내겠다며 위협했습니다. 이런 식으로 저는 열 번 넘게 반복해서 구류됐습니다.

구치소에서 반복적으로 감금되어 있는 동안, 거의 매번 한두 명의 노수련생들과 같은 감방에 있게 됐습니다. 그때 저는 법공부가 많이 부족했습니다. ‘논어’는 베이징으로 가는 기차 안에서 처음으로 암기하기 시작했고, 경문은 단 한 편도 외우지 못한 상태였습니다. 반면에 노수련생들은 수많은 경문을 암송할 수 있었고, 저는 그분들을 따라 한 구절씩 암기해 나갔습니다. 집으로 풀려날 무렵에는 거의 한 글자도 틀리지 않고 암송할 수 있게 됐습니다.

구치소에 있던 사람들은 우리가 연공하는 것을 좋아했습니다. 구치소의 환경이 매우 열악해서 모두가 잠들기 힘들어했는데, 우리가 연공을 시작하면 방안이 조용해지고 그들도 편안히 잠들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때 저는 포륜(抱輪)을 하면 파룬이 도는 것을 느낄 수 있었고, 가부좌를 하면 몸이 커졌다 작아졌다 하는 감각을 경험했습니다. 하지만 한 번은 특별한 경우가 있었습니다. 제가 수련생들이 전혀 없는 2층의 독방에 혼자 감금됐는데, 그곳의 방장은 태도가 매우 불량했고 저속한 행동과 말을 일삼았습니다. 어느 날, 저는 방 벽에서 한 글자를 발견했습니다. 처음에는 잘 보이지 않았지만 점차 선명해졌는데, 바로 사람 키만 한 크기의 ‘忍(인)’ 자였습니다. 저는 그제야 제가 왜 혼자 감금됐는지 그 이유를 깨달았습니다. 사부님의 이러한 배치에 진심으로 감사드렸고, 그 기간 동안 저는 비약적으로 제고될 수 있었습니다.

관할 파출소에서는 베이징에 청원하러 갔던 많은 수련생을 구치소로 반복해서 보냈고, 그 숫자는 계속해서 늘어났습니다. 하지만 모든 수련생이 확고부동하게 악과 타협하지 않았습니다. 구치소는 점점 더 큰 부담을 느끼게 됐습니다. 한번은 제가 구치소 문 앞에서 우연히 구치소 경찰이 파출소 경찰에게 하는 말을 들었는데, 이렇게 반복적으로 구류하는 것은 규정에 어긋난다고 했습니다. 파출소 경찰은 어쩔 수 없다며, 파출소장이 그렇게 하라고 지시했다고 대답했습니다. 이후에 두 명의 연로한 대법제자가 구치소에 들어왔는데, 그들은 모두 은퇴한 간부들이었습니다. 구치소 측은 문제가 생길까 우려하여 더 이상의 수용을 단호히 거부했고, 우리는 모두 집으로 돌아갈 수 있게 됐습니다.

이후로도 저는 여러 차례 베이징에 가서 법을 수호했습니다. 두 번째 베이징 방문 때는 열 명이 넘는 수련생들이 각자 다른 곳에서 출발하여 한 도시에서 만난 뒤 함께 베이징으로 향했습니다. 베이징에 도착해서 한 접대소에 갔을 때, 우리는 사부님의 신경문 ‘원만을 향해 나아가자’를 보게 됐고, 모두가 크나큰 행운이라고 느꼈습니다. 우리 스스로가 원만을 향해 나아가는 그 발걸음을 내딛은 것이었기 때문입니다. 함께 교류를 한 후, 우리는 천안문 광장으로 나아갔고, 그곳에서 현수막을 펼치며 진심을 다해 “파룬따파는 좋습니다! 파룬따파는 정법(正法)입니다! 사부님의 명예를 회복해 주세요!”라고 외쳤습니다. 우리는 천안문 파출소로 끌려갔지만, 그날은 당직 경찰들만 있었고 저는 악의 기운이 마치 썰물처럼 빠져나가는 것을 느꼈습니다. 경찰이 우리에게 어디에서 왔냐고 물었을 때, 우리는 아무 말 없이 하늘을 가리켰습니다. 그러자 경찰은 “알겠네요, 당신들은 하늘에서 온 사람들이군요”라고 말하고는 우리를 한 명씩 풀어주었습니다. 우리는 모두 크게 기뻐했고, 즉시 고향으로 돌아가 다른 수련생들과 교류하여 더 많은 수련생이 천안문 광장으로 나올 수 있도록 독려했습니다.

마지막으로 베이징에 간 것은 2001년 설날 전후였습니다. 그때는 상황이 매우 위험하다고 느껴졌습니다. 저는 수련생들과 헤어진 후 혼자서 천안문 광장에서 현수막을 펼쳤고, 곧바로 천안문 파출소로 끌려갔습니다. 그날은 이미 깊은 밤이었고, 많은 수련생이 큰 소리로 ‘홍음(洪吟)’을 암송하고 있었습니다. 경찰이 제 앞에 왔을 때 저는 잠시 망설였고, 경찰은 곧바로 제 뺨을 때렸습니다. 저는 제게 두려운 마음이 있었음을 깨닫고 큰 소리로 ‘홍음’을 암송했더니, 경찰은 아무 말도 하지 않고 그냥 지나갔습니다.

그날 밤 우리는 연장된 시내버스 두 대에 실려 교외의 한 구치소로 이송됐고, 다음날 아침에는 시청구(西城區) 구치소로 옮겨졌습니다. 그곳에서 노인과 아이들은 풀려났지만, 신원과 주소를 밝히지 않은 젊은이들은 모두 각기 다른 감방에 수감됐습니다. 제가 연공을 하려 하자 감방의 방장이 저를 때렸고 이에 저는 단식을 시작했습니다. 다음 날 강제 음식물 주입이 시작됐고 당시 저는 매우 화가 났습니다. 그들이 일부러 사람을 괴롭히려 한다고 느꼈기 때문입니다. 하루는 음식물 주입용 관이 제 폐까지 들어갔는데, 갑자기 한 의사가 나타나 청진기로 듣더니 잘못 들어갔다며 다시 삽입했습니다. 그날 급식이 끝난 후 온몸이 떨렸지만, 이상하게도 새로운 생명으로 태어난 듯한 느낌이 들었습니다.

어느 날 밤, 감방에서 불려나가 한 의사의 질문을 받았습니다. 제가 입소 시 심장병, 위염, 간염, 담낭염, 장염, 부비동염 등을 앓았다고 했던 것에 대해 의사가 사실이냐고 물었고, 저는 사실이라고 대답했습니다. 의사는 더 이상 질문하지 않고 저를 돌려보냈습니다. 약 일주일 후, 경찰은 우리 수련생 13명을 베이징역 밖으로 데려가 빨리 가라며 다시는 오지 말라고 했습니다.

여러 해가 지난 후, 해외 언론에서 생체 장기적출에 관한 기사를 보았을 때, 그때 의사가 제게 질문했던 일이 떠올랐습니다. 신원을 밝히지 않고 건강했던 사람들은 결국 생체 장기 저장고의 일원이 됐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박해 속에서 성숙함으로 나아가다

이후 저는 여러 차례 구치소, 노동수용소, 세뇌반에서 박해를 받았습니다. 이 과정을 돌이켜보니, 이는 수련 중에 집착을 내려놓고 성숙해지며 자신의 서약을 이행하는 과정이었음을 점차 깨닫게 됐습니다.

처음 베이징 청원에서 돌아와 파출소에 있을 때가 생각납니다. 저는 경찰을 노려보며 눈도 깜빡이지 않았고 마음속에는 증오가 가득했습니다. 화가 난 경찰은 긴 대나무 막대기로 저를 때렸습니다. 그러나 열 번이 넘는 구류를 거치면서 증오심은 점차 사라졌고, 오히려 경찰들에 대한 연민이 생겨났습니다.

중국공산당(중공)은 연좌제를 실시했습니다. 파룬궁수련생 한 명이 청원을 하면 경찰의 상여금이 깎이고, 여러 명이 청원하면 경찰복을 벗게 될 수도 있었습니다. 그래서 경찰들은 우리를 매우 증오했고 어떤 진상도 듣지 않으려 했습니다. 하지만 청원하는 사람들이 계속 늘어나고 누구도 악의적인 보증서를 쓰지 않자, 우리는 베이징에서 신원을 밝히지 않은 채 당당히 마굴을 빠져나왔고, 그들의 연좌제는 실패로 돌아갔습니다. 그 후 경찰들도 우리가 전하는 진상을 듣기 시작했고 대법제자들과 접촉하면서 그들의 선량함을 느끼게 됐습니다. 우리 지역의 호적 담당 경찰은 조기 퇴직이 가능한 나이가 되자마자 퇴직했는데, 더는 대법제자들을 박해하고 싶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이후에 그 퇴직한 호적 경찰은 거리에서 제 어머니를 만나 “아드님은 정말 좋은 분입니다”라고 말했습니다.

초기에 저는 시간에 대한 집착이 매우 컸습니다. 하루빨리 법이 바로잡히고 박해가 끝나기를 바라는 마음에 일을 처리할 때 자주 극단적이었습니다. 이런 태도는 결국 제가 불법 강제노동을 받게 된 원인이 됐습니다. 노동수용소에서도 저는 경찰과 대립했고, 결국 심각한 박해를 받아 수용소 병원으로 이송됐습니다. 병원에서 저는 수련생이 가져온 사부님의 ‘북미 순회 설법’을 볼 기회가 있었고, 제가 이 박해를 단순히 사람 대 사람의 박해로만 여기고 개인의 원만을 최우선으로 두었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정법이 무엇인지 더욱 분명히 알게 됐고, 중생을 구하는 것이야말로 우리의 사명이자 책임이라는 것을 이해하게 됐습니다.

이 박해는 구세력이 배치한 것이었으나, 박해 초기에는 이 점을 인식하지 못했습니다. 다만 모든 것이 마치 미리 계획된 듯했습니다. 처음 베이징 청원에서 돌아와 반복적으로 구류됐을 때, 나중에 집에 와서 구류 기간을 계산해보니 구치소에서 불법적으로 사진을 찍을 때의 번호 끝자리(제 생일과 관련이 있어서 기억할 수 있었습니다), 불법 강제노동 날짜, 배정받은 중대, 심지어 노동수용소의 계좌 번호까지 모두 제 생일과 관련이 있었습니다. 돌아와서 구세력의 유래에 대한 사부님의 말씀을 보고 나서야 이것이 구세력의 배치였음을 알게 됐고, 대법제자는 구세력의 모든 배치를 전면 부정하고 사부님께서 안배하신 길을 걸어야 한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법리를 이해하고 나니 마음이 한결 안정됐고 이전의 충동적인 성향도 줄어들었습니다.

수련 중의 어떤 사람마음이라도 사악에게 이용당할 수 있습니다. 한번은 세뇌반에서 점심을 먹고 설거지를 하면서 ‘큰 문제만 잘 파악하면 되고 작은 문제는 그리 고집할 필요가 없지’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당시에는 경계하지 않고 그냥 지나쳤는데, 그날 오후 심문에서 어떤 사람이 와서 종이에 서명하라고 했고, 저는 큰 문제가 아니라고 여겨 서명했습니다. 세뇌반 사람들은 마치 큰 성과라도 이룬 듯 기뻐했고 저는 그제야 속았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나중에 무효 선언을 했지만 이미 큰 교훈을 얻은 뒤였습니다.

하루는 전직 무장경찰을 만났는데, 그는 동북에서 전국 각지로 중범죄자들을 체포해 신장으로 호송했던 과정을 이야기했습니다. 그는 파룬궁에 대해 알고 있었고, 신장의 감옥에도 중형을 선고받은 파룬궁수련생들이 수감되어 있다고 했습니다. 신장 감옥에서는 자주 중범죄자들을 총살했는데, 확고한 신념을 가진 파룬궁수련생들 중 일부도 총살됐다고 합니다. 이 말을 하면서 그는 계속 고개를 젓더니 “지난 일은 돌이켜보기도 힘들어요”라고 했습니다. 제가 진상을 이야기하려 하자 그는 듣기를 두려워하며 자신은 ‘내부 문건’을 볼 수 있다고 했습니다(물론 거기에는 많은 거짓말이 있었습니다).

진상을 알리고 사람을 구하다

자유를 되찾은 후, 저는 법공부를 많이 하고 ‘9평 공산당(공산당에 대한 9가지 평론)’, ‘해체 당문화’ 등을 읽으면서 대법제자가 ‘세 가지 일’을 모두 잘해야 한다는 것을 알게 됐습니다.

저는 컴퓨터와 프린터를 구입해 자료를 만들기 시작했습니다. 제가 직접 배포하기도 하고 주변 수련생들에게 공급하기도 했습니다. 평소에는 직장 생활을 해야 했기에 주말 휴식 시간을 이용해 인쇄했고, 일주일 동안 필요한 자료를 미리 준비했습니다. 매일 출근할 때 자료를 조금씩 가지고 가서 퇴근길에 배포했고, 업무 중에도 틈틈이 동료들에게 진상을 알렸습니다. 한동안은 자주 공장에 가야 했는데, 돌아올 때면 보통 공장에서 물건을 가지러 온 차를 얻어 탔습니다. 그때마다 운전기사와 단둘이 있으면서 진상을 알릴 기회가 있었고, 돌아오는 시간이 길었기에 일상적인 대화부터 시사 이야기까지 하면서 거리를 좁힌 뒤 진상을 알리면 대부분의 운전기사들이 이해하고 ‘삼퇴’(중국공산당의 3가지 조직 탈퇴)를 선택했습니다.

어머니와 함께 협력하여 친척들에게 진상을 알렸습니다. 선물과 진상자료를 준비하고 직접 방문하여 많은 친척이 진상을 받아들이고 ‘삼퇴’를 선택했으며, 호신부(護身符)를 몸에 지니고 다녔습니다. 제 작은외삼촌은 대법이 좋다는 것을 믿고 호신부를 지니고 다녔는데, 한번은 도시에 물건을 사러 가다가 차가 전복되는 사고를 당했지만, 차에 탄 모든 사람이 무사했습니다. 교통경찰들도 “정말 운이 좋네요. 틀림없이 큰 부처님의 보호가 있었을 겁니다”라고 말했습니다. 그 일이 있고 나서 작은외삼촌은 대법이 좋다는 것을 더욱 굳게 믿게 됐습니다.

법을 외우다

구치소에 있을 때 법을 외우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지 깊이 체험했습니다. ‘책은 필요할 때가 되어서야 부족함을 후회한다’는 말이 정말 맞았습니다. 돌아온 후, 저는 ‘정진요지’의 짧은 경문들을 대부분 외웠고, 이후 사부님께서 내놓으신 새로운 경문들도 거의 다 외웠습니다. 하지만 ‘전법륜’은 줄곧 외울 수 있다고 생각하지 못했습니다. 노동수용소와 세뇌반에서 돌아온 후 가장 큰 변화는 대법이 얼마나 소중한지 깨달은 것이었습니다. 사악한 환경 속에서도 매일 외울 수 있는 경문은 모두 외웠고, ‘전법륜’은 장절별로 한 단락씩 기억해냈습니다. 그때 가장 간절했던 소망은 ‘전법륜’을 손에 들고 조용히 법공부하는 것이었습니다.

돌아온 후 저는 ‘전법륜’ 암기를 시작했습니다. 처음 한 번을 암기하는 데 1년 넘게 걸렸지만, 제1강을 제외하고는 거의 다 잊어버렸습니다. 어느 날 명혜 라디오를 듣다가 한 수련생이 하루에 ‘전법륜’ 한 강을 암송하고 한 강을 읽는다는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저는 ‘나도 그 수련생처럼 할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다시 ‘전법륜’ 암기를 시작했습니다. 하지만 하루에 외울 수 있는 양이 매우 적어서 하루에 한 강을 외운다는 것은 정말 어려워 보였습니다. 나중에 한 가지 방법을 생각해냈습니다. 매일 한 강을 공부하면서 앞부분에서 외울 수 있는 단락은 외우고 외우기 힘든 부분은 읽기만 하되, 매일 외우는 단락을 조금씩 늘려가는 것이었습니다. 이렇게 하면 9일 만에 이전에 외웠던 것을 복습할 수 있어서 잊어버리지 않을 수 있었습니다. 시간이 흐르면서 외울 수 있는 단락이 점점 늘어났고, 1년 남짓한 시간이 지나자 정말로 ‘전법륜’ 전체를 암송할 수 있게 됐습니다. 저는 마침내 그 수련생처럼 하루에 ‘전법륜’ 한 강을 암송하고 한 강을 읽을 수 있게 됐습니다. 사부님의 자비로운 제도에 깊이 감사드립니다!

맺음말

‘사람의 성품은 본래 선하다(人之初,性本善)’라는 말은 모두가 아는 이치지만, 번잡한 속세 속에서 사람들은 점차 자신을 잃어갑니다. 수련하는 사람도 시행착오를 겪으면서 이성적이고 성숙해져 갑니다. 처음 노동수용소와 세뇌반에서 돌아왔을 때, 친구들과 동창들이 환영회를 열어주었고 저는 진상을 알리고 삼퇴를 권하고 싶었지만, 결국 논쟁만 벌어졌습니다. 친한 한 동창만 탈퇴했을 뿐 다른 사람들은 탈퇴하지 않았습니다. 마지막 박해에서 돌아왔을 때 친구들과 동창들이 다시 모였는데, 우리 회사 사장이 말했습니다. “이번에는 달라졌네요. 지난번에는 모든 사람과 논쟁했는데, 이번에는 평화로워졌어요.” 이전에 제가 사장에게 진상을 알렸을 때 그는 “내가 만약 공산당이라면 나도 당신들을 탄압했을 거예요”라고 했습니다. 하지만 이번에는 그도 달라졌습니다. 그는 션윈 공연 DVD를 보았고 제가 삼퇴를 권하자 흔쾌히 동의했습니다.

한동안 수련생들과 협력하는 과정에서 갈등이 생겨 서로를 비난하며 몇 달 동안 왕래하지 않았습니다. 마침 사부님의 신경문 ‘왜 인류가 존재하게 되었는가’가 발표됐고, 저는 매일 읽고 암송했습니다. 가장 깊이 느낀 것은 사부님께서 경문에서 여러 차례 사람은 선량해야 한다고 강조하신 점이었습니다. 그렇습니다. 갈등이 생길 때면 늘 다른 사람의 부족한 점만 보고 수련생의 빛나는 면은 보지 못했던 것입니다. 저는 수련생에게 긴 편지를 써서 갈등을 풀었고, 모두가 다시 서로 협력할 수 있게 됐습니다.

세월은 화살과 같이 빠르게 흘러 어느새 수련한 지 28년이 됐습니다. 박해가 처음 시작됐을 때는 자주 박해가 하루빨리 끝나기를 바랐지만, 점차 그런 생각은 하지 않게 됐습니다. 지금은 조용히 사부님께 시간을 좀 더 주시기를, 조금이라도 더 연장해주시기를 간청드립니다. 더 많은 중생이 구원받을 수 있기를 희망합니다.

 

원문발표: 2025년 1월 21일
문장분류: 수련교류
원문위치:
正體 https://big5.minghui.org/mh/articles/2025/1/21/486133.htm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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