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한 스승을 만나기 어렵다’는 말에서 시작하여
글/ 해외 대법제자
[명혜망] 《예기(禮記)·학기(學記)》에서 말했다. “무릇 배움의 도(道)에서 엄한 스승을 만나기가 어렵다. 스승이 엄해야 도가 존귀해지고, 도가 존귀해져야 백성이 배움을 공경하게 된다.”(凡學之道, 嚴師爲難. 師嚴然後道尊, 道尊然後民知敬學.)
주지하다시피 《예기》는 유가 경전 중 하나로, 선진(先秦) 시기 공자의 제자들과 전국시대 유가 학자들이 《예경》과 ‘예학(禮學)’을 해설한 문집이다. 이러한 글들은 대부분 작자의 이름과 신분을 확실히 알 수 없다.
‘선진 시기’는 좁은 의미로는 춘추전국시대, 즉 공자와 그의 제자들이 활동하던 시기를 가리킬 수 있고, 넓은 의미로는 진(秦)나라 이전(기원전 221년 이전)의 모든 시대, 즉 상고시대와 하(夏)·상(商)·주(周) 삼대를 통칭할 수 있다.
《예기》는 《예기집설(禮記集說)》이라고도 하는데, 전체가 산문 형식으로 되어 있으며, 내용은 주나라의 예악제도뿐만 아니라 군자의 도덕수양과 치세이상도 중시했는데, 그중 유명한 편장(篇章)으로는 〈대학〉, 〈중용〉, 〈예운(禮運)〉 등이 있다. 이 문집의 일부 편장은 문학적 가치가 상당히 높다. 어떤 것은 짧고 생동감 있는 이야기로 어떤 도리를 설명하고, 어떤 것은 기세가 웅장하고 구조가 엄밀하며, 어떤 것은 간결하면서도 깊은 뜻이 있고, 어떤 것은 심리묘사와 인물 묘사에 뛰어나다. 책에는 또한 철리가 담긴 격언과 경구가 많이 수록되어 있어 예리하고 심오하다.
《학기》는 《예기》 49편 중의 한 편으로, 중국 고대는 물론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교육 전문 논술서라고 한다.
선진 시기에는 예학을 논술한 글이 많았는데, 서한(西漢)의 관리이자 학자인 대성(戴聖)이 제련하고 삭감하여 49편을 세상에 전했으니, 바로 지금 우리가 보는 《예기》다. 후한(後漢)의 마융(馬融)과 노식(盧植)이 제가(諸家)의 이동(異同)을 고증하여 대성이 《예기》의 여러 편장들을 선별하고 취사선택한 것을 인정했다. 당나라 정관(貞觀) 연간에 조정에서 공식적으로 편찬한 《수서(隋書)·경적지(經籍志)》에서도 이 일을 지지했다. 대성은 평생 유가 경전 학습을 위주로 하여 숙부 대덕(戴德)과 함께 《예》학을 깊이 연구해 뛰어난 성취를 이뤘다. 사서에서는 대덕을 ‘대대(大戴)’, 대성을 ‘소대(小戴)’라고 했다.
‘엄사위난(嚴師爲難)’이라는 이 구절의 의미는, 개인적으로 이해하기로는, 모든 배움에서 엄한 스승을 찾기가 가장 어렵다는 것이다. 스승이 엄격해야 가르치는 지식과 도리가 존중받을 수 있고, 지식과 도리가 존중받아야 사람들이 비로소 배움과 학문을 공경하게 된다.
왜 엄한 스승을 찾기가 가장 어려울까? 엄한 스승이어야 뛰어난 제자가 나올 수 있지만, 스승이 되는 사람은 학생을 엄격히 요구하려면 우선 자신의 인정(人情)과 기호, 부모의 자식에 대한 편애와 교육에 대한 지지 정도, 학생의 인정(人情), 이해력과 수용력을 마주해야 한다. 이 외에도 더 복잡한 사회적, 경제적 요인이 있을 수 있다. 엄한 스승의 ‘엄(嚴)’은 가혹함이나 엄숙함이 아니라 인자함과 인재를 아끼는 마음에서 나오는 엄격한 요구다.
공자에게는 이런 명언이 있다. “멀면 소원해지고, 가까우면 불손해진다.(遠則疏, 近則不遜)” 이는 사람과 사람 사이의 거리가 너무 멀면 마음이 멀어지고, 너무 가까우면 마음에 불경(不敬)이 생긴다는 뜻이다. 이는 인지상정으로, 부모 자식 간, 친구 간, 동창·동료 간, 사장과 직원, 상급자와 하급자, 어른과 아이, 스승과 학생, 사부와 제자 간에도 모두 이런 문제가 있어서 잘 파악하기가 어렵지만, 잘 파악해야만 도(道) 가운데 오래 머물 수 있고 좋은 관계가 될 수 있다.
하지만 인지상정으로 많은 스승들이 학생들이 학업의 압박을 느낄 때 안쓰러움을 느끼지만, 교육적 요구 때문에 또 자신의 마음이 불편하다고 기준을 낮출 수도 없어서 이때 ‘어려움(難)’에 직면하게 된다. 만약 스승이 학생이 성장을 위해 고생하는 과정에서 묵묵히 지지하고 이를 악물고 견디면서 측은지심을 동요시키지 않는다면, 사리를 아는 학생은 스승의 좋은 뜻을 이해할 것이다. 하지만 사리를 모르는 학생도 늘 있게 마련이어서, 특히 자아(이기심)가 강한 사람은 쉽게 불만을 품고 심지어 원망하면서 스스로 스승을 멀리하게 된다. 서로 멀리함이 오래되면 학생과 스승 사이의 마음도, 덕(德)도 멀어지게 된다.
위에서 말한 《학기》의 이 구절을 원문의 앞뒤 맥락에서 보면 이렇게 이해할 수 있다.
군자는 배움의 어려움과 쉬움을 알고, 그 아름다움과 나쁨을 안 후에야 널리 깨달을 수 있다. 널리 깨달은 후에야 스승이 될 수 있으며, 스승이 된 후에야 장(長, 지도자)이 될 수 있다. 장이 된 후에야 군주가 될 수 있다. 그러므로 스승이라는 존재는 군주가 되기 위한 배움의 과정이다. 따라서 스승을 선택하는 일은 신중하지 않을 수 없다. 무릇 배움의 도(道)에서 엄한 스승을 만나기가 어렵다. 스승이 엄해야 도가 존귀해지고, 도가 존귀해져야 백성이 배움을 공경하게 된다. 군주에게는 신하를 신하로 대하지 않는 두 가지 경우가 있다. 첫째는 신하가 제사에서 신(神)을 대신하는 사람(尸)이 되면 신하로 대하지 않으며, 둘째는 신하가 스승이 되면 신하로 대하지 않는다. 대학(大學)의 예법에 따르면, 비록 천자가 조서를 내릴지라도 스승에게 북면(北面, 신하가 군주를 향해 머리를 조아리는 것)하지 않도록 한다. 이는 스승을 존중하기 위함이다.
인간 세상의 스승과 제자, 군주와 신하도 이러하거늘 하물며 수련 중의 사제지간이랴! 물론 엄한 스승과 뛰어난 제자는 단지 가장 얕은 속인 층차의 한 층일 뿐이다. 엄한 스승이 보고, 생각하고, 감당하는 것은 뛰어난 제자라 해도 일부분만 이해할 수 있을 뿐인데, 이는 졸업하기 전의 제자라면 필연적이기에, 고대 전통사회에서는 자신의 위치를 바로잡을 수 있는 학생과 제자만이 진정한 전수를 받을 수 있었다.
곡절과 어려움을 겪은 후에도 여전히 의심 없이 믿고 더욱더 이성적이 되는 것이야말로 지자(智者)의 굳건한 믿음이요, 진정한 신앙이다.
정법시기 대법 수련자로서 사부님을 굳게 믿고 법을 굳게 믿는 것이 기초이자 근본적인 보장이지, 사부님이 자신을 어떻게 제도해야 한다거나 사부님이 하시는 일을 자신의 관념으로 가늠해 보려 해서는 안 된다. 심지어 어떤 이는 사부님에 대한 악의적인 원망과 중상을 듣고서는 의혹을 품고 믿어버리는데, 그러고서 무슨 수련을 말할 수 있겠는가?! 오직 사부님을 굳게 믿고 법을 굳게 믿어야만 법의 지도를 받을 수 있고, 좁고 고생스럽지만 광명한 대원만(大圓滿)으로 통하는 큰길에서 끝까지 수련하여 전생에 신과 사부님께 드린 엄숙한 서약을 실천할 수 있다.
[수련인들 간의 이성적인 교류는 일반적으로 개인의 당시 수련 상태에 대한 인식일 뿐이며, 선의적인 교류를 통해 함께 제고하려는 것입니다.]
원문발표: 2025년 1월 22일
문장분류: 수련교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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