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미국 대법제자
[명혜망] 사부님께서는 경문 ‘각성하라(警醒)’에서 말씀하셨다. “만약 慈悲(츠뻬이)가 모두 없어지고, 자신의 책임과 사명을 잊었으며, 심지어 자신이 수련인이라는 것조차 잊었다면, 그럼 속인과 같을 것인데, 대법제자를 속인과 혼동한다면 그럼 이는 어떤 단체인가?”
사부님께서 우리에게 물으셨다. “그럼 이는 어떤 단체인가?” 사부님께서 이렇게 심각하게 말씀하신 것은 처음이다. 하지만 수련생들은 여전히 공지를 기다리면서 대세를 따르려는 상태를 보이고 있다. 나는 오랫동안 고민하다가 대법을 수호하고 함께 제고하기 위해 교류하는 것이 좋겠다고 생각했다.
이 글은 진정으로 수련하는 수련생과 교류하는 글이다. 수련하는 수련생의 인식과 행위야말로 상황의 발전을 결정짓는 주체이기 때문이다. 특무(스파이)든, 대충 묻어가는 사람이든, 사악이든 모두 외부적인 요소일 뿐 큰 영향을 주지 못한다. 우리는 수련의 각도에서 여전히 자신에게서 더 많이 찾아야 한다.
이 글에서는 주로 미국 수련생들을 언급했지만, 미국 수련생을 겨냥한 것은 아니다. 다른 지역 수련생들은 오랫동안 떨어져 있어서 함부로 말하기 어렵다. 또한 나의 층차와 시야가 제한적이고 접촉한 수련생도 한정돼 있어서, 전체 미국 수련생의 문제를 말한 것도 아니다. 적절하지 않은 점이 있다면 이해를 바란다.
1. 경사경법(敬師敬法) 문제
수련생들은 각자 수련 단계와 선천적 특징, 생명의 근원이 다르기 때문에, ‘경사경법(敬師敬法)’에 대한 요구도 다르다. ‘경사경법’은 말로만 하는 것이 아니라 실제 수련 중에서 이에 대한 금강부동(金剛不動)함을 수련해 내야 한다. 예를 들어 이번 고소 사건을 알게 된 순간, 생각이 어떻게 움직였는가? 대법에 부합하는가? 부합하지 않는다면 왜 그런 염두가 생겼는가? 그것은 어디에서 왔는가? 법에 대한 어느 방면의 인식이 부족해서 조성된 것인가? 이 자체가 실수(實修)의 과정이다.
이 방면에 문제가 없었다면 이런 일이 발생하지 않았을 것임을 알아야 한다. 밀레르빠 부처의 수련 이야기를 보면, 그는 사부가 각종 방식으로 ‘때리고’ ‘괴롭혀도’ 자신의 업력이 너무 크다고 생각했을 뿐 사부를 원망한 적이 없었다. 그렇다면 생각해 보자. 우리가 이렇게 할 수 있는지?
사부님을 자주 뵙고 구체적인 문제를 여쭤볼 수 있는 수련생들은 ‘경사경법’의 마음이 점차 변하고 있지는 않았는가? 사부님께서 하신 일과 하신 말씀, 사부님께서 수련생의 질문에 하신 답변은, 사부님께서 수련생의 층차와 수련 상태, 집착에 근거해 수련생을 깨닫게 하려고 의도적으로 보여주고 들려주신 것이 아닌가? 이로 인해 잘못된 사상 상태가 생겨서는 안 된다.
2. 선택적으로 법공부하는 문제
사부님께서는 설법 중에서 종교가 부패된 원인과 표현, 불교에 법난이 일어난 원인, 장래 수련생이 난법하는 형식, 사회의 혼란상, 구(舊) 우주의 성주괴멸 과정, 서로 다른 시기에 생긴 생명의 각종 표현에 대해 많이 말씀하셨지만, 대부분 수련생은 다른 종교를 말씀하시는 것이고, 속인 사회를 말씀하시는 것이며, 구 우주를 말씀하시는 것이라고 여기면서 무의식중에 우리는 그 속에 있지 않다고 생각했다.
1999년 이전에 사부님께서 ‘정진요지(精進要旨)’의 경문 ‘변이(變異)’를 막 발표하셨을 때의 일이 생각난다. 사부님께서 말씀하셨다. “성직자들의 부당한 행위가 정결(貞潔)한 서약을 완전히 위반함으로 말미암아 신(神)의 부탁이 한 푼의 가치도 없게 변하여 인류와 신(神)을 모두 깜짝 놀라게 하였다! 선량한 사람들은 줄곧 그들을 자신이 구원받을 수 있는 유일한 의뢰자로 간주해 왔으나, 실망은 사람들로 하여금 더욱더 종교를 믿지 않게 했으며 최후에는 신(神)에 대한 신심(信心)을 완전히 상실하게 했다. 그리하여 아무 거리낌 없이 나쁜 짓을 다 한다.” 당시 보도소에서 신경문을 공부할 때 내가 말했다. “사부님께서 말씀하셨으니 우리는 그렇게 되지 않게 주의해야 합니다.” 하지만 당시 보도소장은 말했다. “이건 다른 종교를 말씀하신 것이지 우리와는 상관이 없습니다.” 지금 많은 시간이 지났지만 나는 대부분 수련생이 여전히 이런 생각을 갖고 있음을 보았다.
사부님께서 말씀하신 것은 우주대법으로, 정법과 제자들의 수련을 지도하기 위한 것이므로, 개별 종교나 인류 사회의 현상은 사부님께서 대법 속에서 말씀하실 필요가 없다. 개인적인 이해로는, 사부님께서는 이런 사례를 들어 우리 수련생 단체에 나타날 문제와 직면할 시련을 말씀해 주신 것인데, 우리는 대수롭지 않게 여겼다. 만약 우리가 모두 사부님의 이 방면에 대한 설법을 외면하지 않고 제때 바로잡았다면, 많은 일이 발생하지 않았거나 크게 약화되었을 것이며, 법난이 이런 방식으로 발생하지 않았을 것이다!
사부님께서는 일찍이 우리에게 암시하셨다. “만약 당신들이 진정하게 수련 중에서 사람의 그러한 근본 집착을 제거해 버릴 수 있다면 최후의 이 한 차례 마난(魔難)은 이렇듯 사악하지 않을 것이다.”(정진요지2-원만을 향해 나아가자)
자신이 왜 사부님의 이 방면의 설법을 직시하려 하지 않았는지 찾아보는 것도 바로잡는 과정이다. 개인적인 이해로는, 이는 우리의 수련 잘하지 못한 부분이 반영된 것이다. 즉 자신을 정법 속에 놓지 않고 정법의 ‘집행자’라고 망상했기 때문이다. 그것은 매우 미시적이어서 발견하기 쉽지 않다. 또한 그것은 ‘신’의 상태이기 때문에 사람의 사유에 반영되면, 일부 수련생은 정념인 줄 알고 잘못된 일을 하게 된다.
3. 법을 스승으로 모시지 못하는 문제
‘법을 스승으로 모시는 것’은 입문과 동시에 알게 되는 수련 원칙으로, 우리의 모든 생각과 행위는 최대한 법에 근거해야 하는데, 수련생들은 여기서 매우 큰 문제가 생겼다. 나는 현재 부딪힌 일을 예로 들어 ‘법을 스승으로 모시지 못하는’ 표현을 설명하겠다. 각종 외부 공격이 발생한 이래, 항목과 개별 수련생들이 발표한 각종 문장과 게시물들을 보면, 일부는 상대방을 지적하고 중공 특무를 비판한다. 진상을 알리려면 대량으로 이렇게 해야 한다. 현대인은 매체를 믿고 목소리가 큰 쪽의 영향을 받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는 속인에게 보여주는 것이고 속인을 구하는 데 쓰이는 것이지, 수련인의 기준이 되는 것이 아니다. 하지만 많은 수련생이 수련의 내포를 전혀 모르고 이것을 수련의 기준으로 삼고 있는데, 이 때문에 ‘시어머니도 할 말이 있고, 며느리도 할 말이 있다’는 속인식의 논쟁이 벌어졌다. 우리는 법리가 명확하고 마음이 움직이지 말아야 하는데 그렇지 못한 것이다.
우리는 수련인으로서 문제에 부딪히면 대법에서 답을 찾고, 왜 이런 일이 발생했는지 원인을 찾아 자신 혹은 정체의 부족한 부분을 바로잡기 위해 노력해야 한다.
수련생 중에는 항목이나 책임자에게 문제가 있으면 사부님께서 바로잡아주실 것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이 있다. 그들은 잘못을 저지르지 않을 것이며, 설사 잘못을 저질러도 별일 아니라는 것이다. 또 어떤 수련생은 무슨 항목에 참여하고, 무슨 직책을 맡는지를 수련인인지 여부, 수련을 잘하는지 여부의 기준으로 삼는다. 항목 안에 있는 일부 수련생도 이런 느낌을 즐긴다. 말주변이 좋고 처세에 능한 것을 심성이 좋은 기준으로 삼는 사람도 있다. 또 항목에 들어가서 대세를 잘 따르면 미래가 보장되고, 원만이 보장된다고 생각하는 사람도 있다. 이는 모두 법을 스승으로 모시지 못하는 표현으로, 수련 환경을 타락시키고 있으며, 수련과는 거리가 멀다!
4. 이기심 문제
대략 2년 전에 한 수련생이 자주 나와 교류하면서 말했다. “우리가 미국이라는 생명을 위해 무엇을 했고, 얼마나 신경 쓰고 있을까요?” 나는 당시 그녀가 왜 늘 이 말을 하는지 이해하지 못했지만, 계속 기억하고 있었다. 그러다 최근 법공부를 하면서 매우 미시적인 이기심을 발견했는데, 바로 내가 수련하려 하고, 내가 진상을 알리려 하고, 내가 사람을 구하려 하고, 내가 제고하려 하고, 내가 무엇을 추진하려 하는 등이었다. 이는 모두 자신의 목적을 이루려는 것으로, 사실 일종의 이기심이며 다른 생명을 위해 고려하고 책임지는 요소가 없다. 이는 정법 수련에서 볼 때 기점이 비뚤어진 것이며, 속인 사회에도 반영되어 올 수 있다.
5. 속인 중의 좋은 사람 기준에도 미치지 못하는 문제
나는 당초 베이징 쯔주(紫竹)공원에서 법을 얻었는데, 그곳의 보도소장과 수련생들은 첫눈에도 매우 착하고 좋은 사람들이라는 걸 알 수 있었다. 나중에 대학교 보도소에 갔을 때도 마찬가지였다. 특별히 무슨 말을 하거나 행동을 하지 않아도 수련생들이 착하다는 것을 단번에 알 수 있었다. 기숙사 친구들도 우리를 좋은 사람들이라고 말했다. 많은 세월이 지났지만, 나는 당시 수련생들이 어떤 상태였는지 여전히 기억하고 있다.
그러나 미국에 온 후에는 달랐다. 많은 미국 수련생은 능력이 뛰어나고 장기간의 노력으로 사회적 지위를 얻고 돈도 많이 벌었지만, 한번 보면 속인 사회의 속인과 별 차이가 없어 보인다. 물론 20여 년간 계속 다른 수련생들을 도와준 아주 착한 수련생도 본 적이 있는데, 이런 사람은 매우 적다.
내가 막 미국에 왔을 때, 서부 한 대도시의 일부 수련생은 만나도 인사하지 않고, 내가 먼저 인사해도 무시했다. 한 대만 수련생도 그랬고 미국에 온 지 수십 년 된 수련생도 그랬다. 중부 대도시로 이사한 후에도 이런 수련생이 있었다. 그래서 나중에 나도 난처해지지 않기 위해 잘 아는 수련생 아니면 만나도 인사하지 않게 됐다. 미국에서는 길에서 낯선 사람을 만나도 우호적으로 인사를 나누는 것이 보통인데, 수련생들은 그렇지 못했다.
나는 미국에서 일곱 명의 집주인을 경험했는데, 그들과 잘 지낸 덕분에 그들도 모두 대법을 긍정적으로 생각했다. 또 다른 사람을 돕기 좋아하는 매우 착한 집주인을 본 적이 있는데, 매일 세입자들의 요리를 도와주고 주말에는 큰상을 차려 세입자들을 무료로 대접했다. 집주인은 평범한 계층이었고 돈이 남아도는 사람이 아니었다. 이는 집주인의 의무는 아니지만 수련생 집주인이 이렇게 했다는 말은 들어보지 못했다. 오히려 같은 사람인데 수련생 집주인과는 잘 지내기 어려웠고, 어떤 수련생 집주인은 손해를 봤다고 수련생 사이에서 여기저기 세입자의 나쁜 말을 퍼뜨렸다. 이는 개인 간의 상황이지만 항목에서도 마찬가지였다.
수련생을 책임지는 것은 힘들기만 하고 좋은 말을 듣지 못하는 일이지만, 속인 회사나 기관도 직원에 대한 책임을 매우 중시한다. 수련생을 책임진다는 것은 수련생에게 높은 대우를 해줘야 한다는 것이 아니라, 수련생을 진심으로 생각해주고 수련생을 존중하며 수련생을 위해 고려해야 한다는 것이다.
또 ‘특무’에 대한 언급하기 좋아하는 사람도 있다. 처음에 우리가 ‘특무’의 파괴를 막으려 했던 것은 완전히 대법에 책임지기 위해서였지만, 아무리 좋은 제도라도 인심에 의존한다(미국 사회가 현재 사법 제도를 남용하는 것처럼). 인심이 변이되면 많은 일이 달라진다. 우리가 늘 특무가 말썽을 피운다고 생각하면 그것을 추구하는 것과 같다. 밖으로 밀어내고 밖에서 추구하면 자신의 수련 문제를 영원히 해결할 수 없다.
속인 중의 좋은 사람 기준에도 미치지 못하는 표현은 너무나 많은데, 이 중 몇 가지 사례를 든 것은 단지 이 문제를 설명하기 위해서일 뿐 그 누구를 지적하려는 것이 아니다. 이 문제를 중점적으로 설명하는 것은, 속인 중의 좋은 사람 기준에 도달할 수 있는지 없는지가 수련생 앞에 놓인 큰 관문이기 때문이다.
물론 ‘동토(東土)’가 수련에 좋은 것이 아니냐고 생각하는 수련생도 있을 것이다. 말 밖의 뜻은 수련생 내부에서 이런 일이 발생하는 것이 옳다는 것이다. 아래 이 문제를 교류하겠다.
6. 인위적으로 사악한 마(邪魔)를 키우는 문제
나는 줄곧 우리 수련생 단체에 보편적으로 나타난, 일부 ‘정토(淨土)’에 부합하지 않는 현상을 인정하지 않았다. 정체 형성에 영향 주기 때문이다. 하지만 나는 정념이 강하지 않아서 올바르지 않은 환경에 직면하고도 확고하게 자신을 잘 수련하여 최대한 좋은 작용을 일으키는 것을 하지 못했다.
지금 수련생 단체에는 이익의 고리가 형성되어, 같은 무리에 있는 사람끼리는 서로 좋다고 하지만, 무리 밖의 사람은 함부로 대하는데, 핑계는 모두 그럴듯하다. 나는 법에 대한 이해가 투철하지 못해 수련생들의 이런 인식을 깨뜨리지 못했다.
과거의 법문은 오직 그 문에서만 수련할 수 있었기에 ‘형식’에 따라 수련해야 했고, 이 ‘형식’을 벗어나면 수련할 수 없었다. 이번 정법 중에서는 법이 크기 때문에 우리는 다양한 수련 형식을 선택할 수 있다. 다시 말해서, 대법은 어떤 환경에서도 수련할 수 있고 모두 제고할 수 있다. 중국에서 중공 악당의 박해 하에서도 수련할 수 있고, 해외의 평화로운 환경에서도 수련할 수 있으며, 순수하고 바른 수련 단체에서도 수련할 수 있고, 그다지 순수하지 않은 수련 단체에서도 수련할 수 있다. 구세력이 어떻게 배치하든 대법을 따르기만 하면 모두 수련할 수 있다.
그렇다면 우리가 그 속에서 제고할 수 있다고 해서 구세력의 배치를 인정해야 하는가? 아니다! 왜냐하면 우리의 제고는 구세력과 아무 상관이 없고, 대법 자체의 위력이기 때문이다. 대법은 어떤 환경에서도 수련할 수 있기 때문에, 물론 구세력이 배치한 환경도 포함된다.
그렇다면 무엇이 정법 표준에 부합하는 인식인가? 션윈을 보면, 션윈은 순선순미(純善純美)한 방식으로 사람을 구한다. 지금은 정법 수련으로, 우리는 우리의 제고 외에 “사회에 대해 책임지고 수련생에 대해 책임”(전법륜)져야 한다. 따라서 다른 수련생을 위해 어떤 수련 환경을 만들어주고, 세인과 미래를 위해 어떤 참조를 남기며, 정체를 이룬다는 것이 어떤 표현인지, 그것들이 정법에 영향 줄 자격이 있는지 고려해야 한다. 따라서 우리는 절대 구세력이 우리의 수준을 끌어내리지 못하게 해야 한다.
나는 수련생 단체의 일부 바르지 못한 현상이 장기간 해결되지 못하는 것은 “인위적으로 사악한 마를 자양(滋養)하여 그것이 법의 틈을 타게 한 것”[정진요지(精進要旨)-도법(道法)]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법리에 대한 인식이 명확하지 않으면 그런 현상을 수치라고 생각하지 않게 된다. 제자의 길은 모두 사부님께서 배치하셨다고 말하는 수련생도 있을 것이다. 그렇다, 하지만 법리에 대한 인식이 매우 명확하여, 이른바 ‘남에게 제고할 기회를 주는’ 바르지 않은 현상을 인정하지 않아야만 사부님의 배치가 작용을 일으키고, 우리도 수련에서 끊임없이 제고할 수 있다.
7. 내부 수련생의 무의식적인 파괴를 직시해야 한다
발견하기 쉽지 않은 두 가지 난법 형식을 이야기하겠다.
1) 법불책중(法不責衆 역주: 법을 어기는 사람이 많아지면 처벌하기 어렵다는 뜻): 많은 수련생이 동시에 난법했지만, 많은 수련생이 참여했기 때문에 설사 어느 날 잘못을 알았더라도 대수롭지 않게 여기는 경우가 있다. 이러면 다음에 비슷한 일을 만나도 또 그럴 가능성이 매우 높다.
2) 큰 난법 사건이지만 매 사람을 볼 때 일으킨 작용이 크지 않은 경우가 있다. 이때 전체적인 결과가 매우 엄중해도 일으킨 작용이 작았다고 대수롭지 않게 여기게 된다. 또한 결과가 엄중하기 때문에 자신의 행위, 인식과 연관 짓는 것을 회피하거나 연관 짓고 싶어 하지 않는다.
이 두 가지 상황 모두 결과가 매우 엄중한 구체적인 사례가 있는데, 분쟁을 피하고 밖에서 추구하는 것을 피하기 위해 구체적인 사례는 들지 않겠다.
8. 대법을 이용해서는 안 된다
수련생들은 자주 이런 말을 한다. 어느 어느 항목은 사부님께서 직접 이끄시는 것이고, 어느 어느 것은 사부님께서 직접 디자인하신 것이며, 어느 어느 것은 사부님께서 어떠어떠하게 하신 것이다. 또 어떤 항목 관리층은 사부님께서 항목의 어느 어느 부분을 맡으셨고, 어느 어느 항목이 정법 노정에 필요한 것이라고 한다… 하지만 들어보면 수련생들이 이렇게 말하는 목적이 매우 불순함을 느낄 수 있다.
1) 다른 수련생이 재력과 물력, 인력을 투입해 항목을 지지하게 하려고 하거나 물건을 사게 하려는 것이다. 2) 자신이나 항목의 언행을 위해 ‘뒷배’를 찾으려는 것이다. 3) 자신이나 항목을 높이려는 것이다.
속인 사회에서 이렇게 하는 것은 괜찮지만, 사부님의 명의와 대법의 명의를 내세워서 한다면 작은 일이 아니다! 사부님께서는 수련생이 이용하는 것을 개의치 않으시지만, 수련생으로서 이렇게 해도 되는가?
다른 한 면에서 보면, 사부님과 대법의 명의를 내세워 일을 하면서 잘하지 못한다면, 나중에 모든 갈등과 문제가 모두 사부님과 대법을 향하게 된다! 게다가 일부 수련생은 사부님과 대법에 대한 정념과 바른 믿음이 부족하여 법난에 부딪히면 뒷걸음치거나 수련을 포기할 수 있다. 이런 결과를 초래하면 어떻게 갚을 수 있겠는가? 최후에는 모두 사부님께서 감당하셔야 한다.
9. 법난의 원인과 업력의 전환에 관한 토론
여러분은 생각해 보았는가? 자신은 왜 수련하러 왔는가? 왜 이 단체에 남아있는가? 자신이 이 단체에서 좋은 작용을 일으키는가, 아니면 나쁜 작용을 일으키는가, 아니면 두 가지 모두 있는가?
우리 이 한 문에서 소업의 관건은 심성 제고다. 그렇다면 이처럼 거대한 업력 앞에서 다 함께 심성 수련에 많은 공을 들여야 하지 않는가? 문제에 직면하면 자발적으로 바로잡고 제고해야 하지 않는가? 늘 밖을 보지 말아야 하지 않는가? 밖을 보면 업을 없앨 수 없고, 기껏해야 표면적인 문제를 억누를 수 있을 뿐이다. 그러면 다음번에는 더 맹렬하게 오거나 다른 파괴 형식으로 전환될 것이다.
위에서 많이 교류했지만, 근본적인 문제는 매일 조용히 법공부하고 마음에 와닿게 배워 심성을 제고하는 데 쓸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만약 정말 조용히 법공부할 수 있다면 자신의 상태가 끊임없이 변화하고, 심성이 끊임없이 제고되고 있음을 발견하게 될 것이다.
법을 스승으로 모시고 일마다 법에서 답을 찾아야 한다. 이렇게 하면 갈수록 법에서 많은 답을 찾을 수 있고, 갈수록 도(道)에 들어갈 수 있게 될 것이다.
이 세상에는 재능이 뛰어난 사람도 많고, 착한 사람도 많고, 정직한 사람도 많다…하지만 그들에게는 ‘사부님을 도와 정법하는’ 기연(機緣)이 없고, 오직 우리만이 이런 기연이 있다. 이는 우리의 행운이기 때문에 우리는 더욱 서로 일깨워주면서 이후의 길을 잘 걸어야 한다.
[수련인들 간의 이성적인 교류는 일반적으로 개인의 당시 수련 상태에 대한 인식일 뿐이며, 선의적인 교류를 통해 함께 제고하려는 것입니다.]
원문발표: 2025년 1월 14일
문장분류: 수련교류
원문위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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