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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법을 수호하기 위해 도보로 베이징에 간 경험을 회상하며

글/ 산둥성 대법제자

[명혜망] 저는 1998년에 대법을 얻은 대법제자입니다. 대법을 배우기 전에는 심장병을 앓고 있었습니다. 여러 방법으로 치료를 시도했지만 차도가 없었고, 매일 많은 양의 약을 복용해야만 했습니다. 어느 날 우연히 파룬따파(法輪大法, 파룬궁) 연공 음악을 듣게 됐는데, 말로 표현할 수 없는 친근함과 익숙함을 느꼈습니다. 그래서 마을의 연공장에 가보게 됐고, 마침 사부님의 설법 영상이 상영되고 있어서 30분 정도 들었습니다. 사람이 너무 많아 문밖에서 들어야만 했습니다. 그때 우리집에서는 닭을 키우고 있었는데, 갓 들여온 병아리들의 실내 온도를 잘 관리해야 했습니다. 그래서 집에 있는 병아리들이 자꾸 신경 쓰여 ‘이번 병아리들을 다 팔고 나서 수련을 시작해야지’라고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닭을 다 팔고 난 후에는 심장이 너무 심하게 뛰어서 가슴을 붙잡고 있어야 할 정도였고, 약을 더 많이 먹어도 효과가 없었습니다.

그때 문득 ‘병아리를 다 팔고 나면 수련을 시작하겠다’고 했던 약속이 떠올랐습니다. 그래서 그날 저녁 연공장에 가서 공법을 배웠습니다. 두 번째 공법인 포륜(抱輪)을 연습할 때 등 뒤로 무언가가 위아래로 움직이는 느낌이 들었습니다. 연공이 끝난 후 이런 상황을 이야기하자 수련생이 말했습니다. “사부님께서 몸을 정화해주시는 겁니다.” 그 말을 듣고 저는 정말 기뻤습니다!

그 후 저는 보서(寶書) 《전법륜》을 얻었고, 연공장에서 사부님의 설법 영상을 보았습니다. 저의 심신은 하루가 다르게 완전히 바뀌었습니다. 그 이후로는 시간이 날 때마다 수련생들과 함께 공원이나 장터에 가서 법을 널리 알렸습니다. 더 많은 사람들이 파룬따파를 알고, 이해하고, 배워서 혜택을 받을 수 있도록 하기 위해서였습니다.

어느덧 1999년 7·20 며칠 전이 됐고, 우리 현 소재지 연공장은 경찰의 방해를 받기 시작했습니다. 한 보도원이 무거운 표정으로 말했습니다. “이렇게 좋은 공법을 수련하지 못하게 하다니, 세상에 이런 법이 어디 있습니까?” 그래서 우리 수련생들은 상의했습니다. “계속 연공장에 가서 할 수 있을 때까지 연공하고, 못하게 하면 베이징에 가서 청원합시다.”

당시에는 수련생들이 하나둘씩 베이징으로 청원을 떠난다는 소식이 계속 들려왔습니다. 저는 간단히 갈아입을 옷과 약간의 여비를 준비했습니다. 7월 19일 새벽, 우리는 현 소재지의 연공장으로 갔습니다. 연공장에는 연공하는 수련생이 한 명도 없었고, 녹음기를 들고 음악을 틀던 수련생만 있었는데, 그는 수련생들이 모두 경찰에게 쫓겨났다고 했습니다. 그래서 저와 네 명의 수련생은 함께 자전거를 타고 베이징에 가서 법을 실증하기로 결심했습니다.

다음 날, 우리는 도중에 이웃 현에서 온 두 명의 남자 수련생을 만나 여섯 명이 함께 길을 떠났습니다. 허베이성 창저우의 칭현에서 길을 잘못 들어 고속도로로 올라갔다가 경찰에게 붙잡혀 파출소로 끌려갔습니다. 경찰이 우리의 출신지를 물었지만 우리는 대답하지 않았습니다. 나중에 그들이 가방에서 우리의 신분증을 찾아내 각자의 지역에 연락해 데려가게 했습니다. 그날 밤, 경찰은 우리에게 신문을 주며 바닥에서 자게 했습니다. 다음 날 아침, 용변을 보러 나갔다가 뒷문이 열려있는 것을 보고 저와 A 수련생은 서로 눈짓하며 ‘도망가자!’고 했습니다. 우리는 가방에서 돈을 꺼내 들고 담장을 넘어 뛰쳐나와 곧장 농지로 달렸습니다. 경찰차가 사이렌을 울리며 쫓아오는 소리가 들렸지만, 우리는 반대 방향으로 도망쳐 북쪽으로 계속 걸었습니다.

우리는 ‘걸어갈수록 베이징에 가까워진다’는 생각으로 한 마을에 도착해 길을 물었습니다. 마을 사람이 이곳이 다윈허(大運河) 제방이라고 했습니다. 우리는 안도했습니다. 다윈허가 베이징까지 곧게 이어지지 않나요? 그래서 제방을 따라 걸었는데, 걷다 보니 발이 아프고 물집이 생겼습니다. 마침 한 농부가 옥수수 밭에서 김을 매고 있었고, 밭 가장자리에 발로 밟아 움직이는 삼륜차가 있었습니다. 우리는 상의한 뒤 300위안을 주고 삼륜차를 샀습니다. 서로 번갈아 타면서 힘을 아끼려 했지만, 20~30km쯤 갔을 때 앞바퀴 축이 고장 나서 더는 탈 수 없었습니다. 우리의 말투가 지역 사투리라 수리점을 찾아가기가 두려웠고, 결국 삼륜차를 버리고 다시 걸어서 베이징으로 향했습니다.

날씨가 너무 더워서 목이 마를 때면 도랑물을 마셨습니다. 물속에 벌레가 있었지만, 우리는 ‘우리는 대법제자이고 사부님께서 보호해주시니 아무 일도 없을 것’이라는 한 가지 신념만 굳게 지켰습니다. 검문이 두려워 큰길은 피하고 작은 길로만 다녔습니다. 그러다 밭머리에서 70대의 한 할아버지를 만났는데, 그분은 큰 참외를 들고 우리에게 먹으라고 건네주셨습니다. 당시 우리는 목도 마르고 배도 고팠습니다. “할아버지, 돈을 드리겠습니다”라고 했지만, 할아버지는 “내가 직접 기른 거니까 그냥 가져가요”라며 거절하셨고, 떠날 때는 작은 참외 두 개를 더 주셨습니다. 우리는 참외를 들고 걸으며 눈물을 흘렸습니다. ‘사부님께서는 우리가 목마르거나 배고프지 않게 해주셨구나. 사부님이 원하시는 건 바로 우리가 법을 실증하려는 이 마음이야.’

마침내 다윈허 제방 끝에 도착했을 때, 톈진으로 가는 큰 다리가 있었고 경찰이 다리 입구에서 경비를 서고 있었습니다. 이미 밤 10시가 넘은 시각이었고, 북쪽으로는 더 이상 갈 길이 없었으며 모두 옥수수 밭이었습니다. 그래서 밭 사이 작은 길을 따라가다 관개지역에 도착했습니다. 거기서 씻고 물을 마신 뒤 제방에서 보니 강바닥이 무척 넓어 보였습니다. 물을 건너 건너편까지 가려면 몇 키로는 걸어야 할 것 같았습니다. 우리는 풀숲 사이로 강을 건너며 이렇게 말했습니다. “사부님의 법신(法身)이 보호하시고 호법신(護法神)이 지켜주시니 우리는 안전할 거예요.” 강바닥 한가운데서 마른 풀더미를 발견하고 거기서 잠시 쉬었습니다. 큰 모기 소리가 윙윙거려 잠들지 못했고, 밤이 깊어 새벽 3~4시쯤 강 건너편에 도착했습니다. 그곳에서 어디로 이어지는지 모르는 길을 발견했습니다.

우리는 두려움 없이 길가에서 차를 세우려 했습니다. 그 시간에는 대형 화물차들만 지나갔는데, 다섯 여섯 대를 세워보려 했지만 아무도 멈추지 않았습니다. 마침내 한 대형 트럭이 멈췄고 운전기사가 물었습니다. “뭐하는 사람들입니까?” 우리는 “톈진에 가야 하는데, 여기까지 걸어와서 더는 걸을 수가 없어서 차를 좀 얻어타려고요”라고 대답했습니다. 운전기사는 정말 친절한 분이었습니다. “올라타세요. 마침 집에 가는 길이라 같은 방향입니다.” 그는 자기 아이에게 화물칸으로 가라고 하고 우리 둘을 운전석에 태워주었습니다. 우리는 정말 감사했습니다. 목적지에 도착하자 운전기사가 말했습니다. “저는 이제 집에 도착했습니다. 여기서 버스를 타면 톈진 시내로 갈 수 있습니다.” 우리는 “감사합니다! 정말 좋은 분이시네요”라고 인사했습니다.

우리는 신분증이 없어서 어떤 차도 마음 놓고 탈 수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베이징으로 가는 버스를 뒤따라 걸었습니다. 그때 우리는 마음속으로 ‘걷지 못하면 기어서라도 베이징에 가겠다’고 다짐했습니다.

우리는 한 기차역에 도착했습니다. 그곳 사람들 말로는 화물열차를 타고 가면 베이징에 갈 수 있다고 했습니다. 그래서 어떤 열차가 베이징으로 가는지 물었더니, 한 친절한 사람이 “저기 석회를 실은 열차가 베이징으로 갑니다”라고 알려주었습니다. 우리는 화물칸 문을 열고 올라탔고 잠시 후 열차가 출발했습니다. 얼마나 갔는지도 모르는데 열차가 멈춰섰습니다. 잠시 후 차량 검사원이 “이쪽 화물칸 연결고리가 떨어졌네”라고 하더니 화물칸을 열어보고 우리를 발견했습니다. 그들은 우리를 꾸짖으며 작은 역의 마당으로 데려갔습니다. 한 관리자가 우리를 사무실로 데려가 물 한 대야를 주며 말했습니다. “씻으세요. 온몸이 흙투성이네요.” 우리가 탄 석회 화물칸 때문에 온몸이 먼지 범벅이 된 것이었습니다. 그는 잠시 나갔다가 돌아와서 말했습니다. “녹두죽을 한 그릇 끓였는데, 제가 안 마실 테니 더운 날씨에 당신들이 드세요.” 그리고는 잠시 생각하더니 물었습니다. “당신들은 무슨 공법을 수련하나요?” 우리는 “우리는 모두 좋은 사람들입니다”라고 했고, 다시 “어떤 공법이요?”라고 되물었습니다. 그는 뭐라고 딱히 말하지 못하고 “아니에요, 그냥 물어본 거예요”라고 했습니다. 그 관리자는 우리에게 밥과 반찬을 가져다주었고, 우리는 세 끼나 굶은 끝에 드디어 배부르게 먹을 수 있었습니다.

식사를 마치자 그 관리자가 다시 물었습니다. “왜 기차표를 사서 베이징에 가지 않나요? 화물열차를 타는 건 너무 위험해요!” 우리는 청원하러 간다는 말을 할 수 없었습니다. 베이징에 거의 도착했는데 우리의 소원을 아직 이루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대신 이렇게 말했습니다. “기차역에서 가방을 잃어버려서 돈도 다 없어졌어요. 지금이 방학이라 일자리를 구해서 아이들 학비를 마련하려고 하는 중이에요.” 그는 농담을 던졌습니다. “이 나이에 왜 사람이 아니라 가방만 잃어버렸는지 모르겠네요!” 기차가 출발하려는 참이었습니다. 그는 신문 한 뭉치와 찐빵 한 봉지를 주며 말했습니다. “올라타세요. 다음에 기차가 멈추더라도 절대 내리지 마세요. 거긴 작은 역이고, 큰 역이면 베이징에 도착한 겁니다. 반드시 기차가 완전히 멈추고 나서 내리세요.” 그는 여러 번 당부했습니다. 우리는 작별 인사를 하며 말했습니다. “우리는 정말 인연이 있는 사람들이네요. 나중에 인연이 있다면 다시 만날 겁니다.”

이렇게 우리는 기차를 타고 베이징 펑타이역에 도착했습니다. 그곳은 교외 지역이었습니다. 우리는 채소를 재배하는 비닐하우스로 걸어갔는데, 거기에는 채소를 씻는 커다란 물통이 있어서 간단히 세수를 했습니다. 비닐하우스 안에는 사람들이 있었고 개도 있었는데, 개가 짖자 주인이 잠에서 깨어 우리를 크게 꾸짖었습니다. 우리는 급히 “죄송합니다! 죄송합니다!”라고 사과했습니다. 정념이 강하지 않으니 어디를 가든 순탄치 않았습니다.

저와 수련생은 한 미용실에 들어갔습니다. 수련생이 머리를 자르는 동안 여자 미용사가 물었습니다. “어디서 오셨어요? 말투를 들어보니 이곳 사람이 아닌 것 같은데요.” 우리는 대답했습니다. “우리는 산둥에서 왔습니다. 여기 온 건 단지 한 마디 공정한 말을 하기 위해서입니다. 파룬따파는 사이비교가 아닙니다. 텔레비전 선전을 믿지 마세요. 우리는 직접 체험한 사람들입니다. 파룬궁은 사람들에게 선을 행하도록 가르치고, 좋은 사람이 되며, 더 나은 사람이 되도록 가르칩니다. 또한 병을 치료하고 건강을 증진시키는 데 기적적인 효과가 있습니다.” 저는 제가 예전에 어떤 병이 있었고 지금은 어떻게 나았는지를 이야기했습니다. “제 경험을 바탕으로 정부에 한 마디 공정한 말을 하고 싶습니다. 파룬궁은 사람들에게 선행을 가르치는 고덕대법(高德大法)입니다.”

우리는 “톈안먼에 가고 싶은데 어떻게 가야 할지 모르겠네요”라고 했습니다. 여자 미용사는 잠시 생각하더니 몇 번 버스를 타면 되고 한 사람당 6위안이면 첸먼(前門, 베이징 자금성 남쪽 상업거리)까지 갈 수 있다고 알려주었습니다. 우리가 “신분증이 없는데요”라고 하자 “신분증은 필요 없어요”라고 했습니다. 그렇게 우리는 순조롭게 첸먼에 도착했습니다. 지금 돌이켜보면, 그때 우리에게 정념이 생겨나자 사부님과 정신(正神)들께서 우리를 도와주신 것 같습니다.

톈안먼에 도착했지만 우리는 아무도 아는 사람이 없었습니다. 한 골목으로 들어갔을 때는 이미 밤이었습니다. 우리는 길가에 누워 잠을 청했습니다. 우리는 ‘사부님께서 우리와 함께 계시니 어디에서든 두렵지 않다’는 한 가지 신념을 굳게 믿었습니다. 그날 밤, 우리는 말없이 울기만 했습니다. 수련생도 울고 저도 울었습니다. 마치 어미를 잃은 아이처럼 ‘우리는 어디로 가야 하나?’라는 생각뿐이었습니다.

다음 날 아침, 우리가 길가에 앉아있을 때 한 부부가 다가왔습니다. 그 남자가 사부님의 법 ‘원만은 불과(佛果)를 얻나니’(홍음-마음 고생)를 읊었습니다. 드디어 가족을 만난 것 같았습니다. 우리도 울고 그들도 울었습니다. 그들은 “정말 쉽지 않았겠군요”라고 했습니다. 그들이 50위안을 주려고 했지만 우리가 사양하자 여자 수련생이 말했습니다. “사부님께서 우리에게 이렇게 하라고 하셨어요.” 이 두 수련생은 선양에서 왔는데, 지금은 어떻게 지내시는지 모릅니다.

밤이 되어 우리가 지하도 입구에서 쉬고 있을 때 또 한 명의 수련생이 왔습니다. 그는 먼저 ‘홍음’ 중 ‘소원을 풀다’의 “한 마음으로 세상에 내려와”라는 구절을 읊었고, 우리 둘은 “법 이미 얻었구나”라고 이어 읊었습니다. 이렇게 해서 우리는 또 한 명의 수련생을 알게 됐습니다. 이 수련생은 산둥 러링에서 왔는데, 그들도 차를 타고 오다가 검문에 걸려 작은 길로 걸어서 톈안먼까지 왔다고 했습니다. 그 수련생은 우리에게 100위안을 주었습니다. 제가 “우리는 돈이 있으니 괜찮습니다. 다들 어렵잖아요”라고 하자, 그는 “이 돈은 해외 대법제자가 기부한 것입니다. 산둥의 대법제자들이 어렵게 수련한다는 걸 알고 도와주신 거예요”라고 했습니다. 우리는 “지금도 충분히 잘 지내고 있어요. 찐빵만 있어도 배고프지 않아요”라고 답했습니다.

나중에 또 한 명의 대법제자가 100위안을 주었습니다. 그 수련생이 어디 출신인지는 지금까지도 모릅니다. 우리는 한 가족은 아니지만 한 가족보다도 더 가까웠습니다. 우리 모두가 같은 대법을 수련하는 사부님의 제자이기 때문입니다.

그때는 밤만 되면 여러 수련생들과 만나 교류를 했습니다. 그러다가 한 지역 청년 수련생을 만났는데, 20대 초반의 젊은이였습니다. 그는 우리에게 《전법륜》 한 권을 주며 말했습니다. “당승(삼장법사)이 경전을 구하러 11년이 걸렸으니, 우리는 대법을 소중히 여겨야 합니다.” 이어서 “시단(西單) 공원으로 가세요, 그곳이 조용합니다”라고 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그곳에 가서 작은 언덕 위에서 법공부를 했습니다. 돌아오는 길에 공중화장실 근처를 지나다가 우리를 포함한 20여 명의 수련생이 여러 경찰에게 포위됐고, 모두 차에 실려 파출소로 끌려갔습니다. 그곳은 떠돌이와 파룬궁수련생들을 전문적으로 조사하는 곳이었습니다. 경찰은 우리를 한 명씩 심문하고 가방을 뒤졌습니다. 우리 둘은 ‘어떡하지? 가방에 보서 《전법륜》이 들어있는데’라며 걱정했습니다. 우리는 상의한 끝에 벽 쪽에 있는 큰 돌을 발견하고 급히 책을 그 밑에 숨겼습니다. 그래서 경찰이 우리 가방을 수색했을 때 아무것도 찾지 못했고, 결국 우리를 풀어주었습니다.

나온 뒤 우리는 서로를 바라보며 “어떡하지? 대법 책을 잃어버린 건 목숨을 잃은 것과 같은데”라고 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그곳을 떠나지 않고 대문 앞을 서성이며 안에서 책이 보이는 곳을 지켜보았습니다. 오후가 되자 경찰이 또 한 차의 사람들을 데려왔고, 한 경찰이 말했습니다. “당신들 안 가고 뭐해? 다시 들여보내 줄까?” 우리는 속으로 기뻤습니다. 우리가 바로 보서 《전법륜》을 어떻게 가져올까 고민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안으로 들어가자마자 저는 책을 꺼내 옷 속에 숨겼습니다. 경찰은 여전히 한 명씩 가방을 뒤졌지만, 우리 가방에는 먹으려고 가져온 찐빵과 짠지밖에 없었습니다. 경찰은 “가라, 가! 다시는 내 앞에 나타나지 마”라고 했고, 우리는 “다시는 오지 않겠습니다”라고 했습니다. 이렇게 우리는 보서를 되찾았습니다.

그 후 며칠 동안 수련생들이 하나둘씩 보이지 않게 되었고, 우리도 집으로 돌아왔습니다.

그때부터 저는 더욱 굳건히 법을 실증하는 이 길을 걸어왔습니다. 풍파를 헤치며 20여 년의 수련 여정을 걸어왔습니다. 제 가정환경은 매우 좋은 편입니다. 남편과 아이들도 제 수련을 지지하며, 그들 또한 각자 여러 정도로 복을 받았습니다.

여기까지 쓰겠습니다. 부족한 점이 있다면 수련생 여러분께서 자비롭게 지적해주시기 바랍니다.

 

원문발표: 2025년 1월 6일
문장분류: 수련교류
원문위치:
正體 https://big5.minghui.org/mh/articles/2025/1/6/486255.htm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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