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법을 선하게 활용해 박해를 반대한 이야기
글/ 중국 대법제자
[명혜망] 우리가 법을 선하게 활용해 박해에 반대하는 과정에서 협력했던 여러 사례들 중에서, 특히 기억에 남는 몇 가지 일화를 수련생 여러분과 나누고자 합니다.
1. 정념을 굳건히 하자 뜻밖에 이뤄진 소송
A 수련생이 납치된 후 불법적으로 구치소에 감금됐습니다. 조사 단계에서 A의 가족은 공안 분국에 면회 신청을 했습니다. 하지만 가족들은 법률에 대해 잘 알지 못했기에, 이 단계에서는 가족에게 면회권이 없다는 사실을 몰랐습니다. 그래서 당연히 면회할 수 있다고 생각하고 신청서를 제출했으나 공안 분국은 이를 완전히 무시했습니다.
이에 가족은 공안 분국이 법정 기한 내에 답변하지 않았다는 이유로 지역 법원에 ‘행정소송장’을 제출하여, 공안 분국의 ‘직무유기’ 행위가 불법임을 확인해달라고 청구했습니다. 그러나 지역 법원은 사건 접수를 거부하면서 ‘구치소 관리 조례’에 그런 규정이 없다며 속였고, 가족이 제출한 서류가 형식에 맞지 않는다고 비웃었습니다. 심지어는 가족이 사기꾼 변호사에게 속고 있다며 이간질까지 했습니다.
처음에 가족들은 크게 낙담하고 의기소침해졌습니다. 그러나 수련생들이 관련 법규에서 “사건은 반드시 접수하고, 소송은 반드시 처리해야 한다”는 조항을 찾아 상세히 설명해주자 자신감을 되찾고 다시 법원을 방문했습니다. 가족은 접수처 직원에게 “지난번에 저를 속인 사람이 또다시 거짓말을 하면, 제가 인터넷으로 그를 고발하겠습니다. 두 번만 고발당해도 그 사람은 해고될 것입니다”라고 단호히 말했습니다. 결국 접수처 직원은 기가 눌려 문서를 접수하고는 집에서 기다리라고 했습니다.
며칠 후, 지역 법원에서 소송이 접수됐으니 소송비용을 납부하라는 연락이 왔고, 사건이 정식으로 접수됐습니다. 한 달 뒤에는 법원으로부터 재판 날짜를 통보받았습니다.
이 기간에 공안 분국의 국보(國保, 국내안전보위대: 파룬궁 탄압 담당) 경찰들은 A 수련생의 가족이 사는 마을의 서기, 경찰, 촌장 등을 동원해 ‘위로’라는 명목으로 A의 집에 쌀과 밀가루, 아이들 문구류와 장난감을 보내기도 했습니다. 사건이 정식 접수된 후, 국보는 가족들에게 연락해 납치된 A의 변호사와 통화하고 싶다고 했습니다. 처음에는 “그 변호사 좀 데려오시오. 성씨가 뭐더라, 그 사람 말입니다”라며 오만한 태도를 보였습니다.
결국 이 재판은 열리지 않았습니다. 비록 재판까지 가지는 않았지만, 공안 분국은 이 사건을 결코 가볍게 처리할 수 없었고, 수 페이지에 달하는 답변서를 작성해 해명해야 했습니다. 주요 내용은 “수사 단계에서는 가족 면회가 법적으로 허용되지 않으며, 변호사만이 면회할 수 있고, 변호사 면회는 방해하지 않았다는 점, 그리고 가족들에게 여러 차례 구두로 면회가 불가하다고 통보했다”는 것이었습니다. 법에 밝은 수련생과 검토한 결과, 수사 단계에서는 실제로 가족 면회가 법적으로 허용되지 않아 더 이상 이 점을 추궁하지 않기로 했습니다.
하지만 이처럼 직접적인 관련은 없어 보이는 저항의 과정을 통해, A의 가족은 점차 정념(正念)을 갖게 됐고 자신감도 한층 강해졌습니다. 이후 이 가족은 그 지역에서 수련생을 변호한 최초의 가족 변호인이 됐습니다.
2. 집착을 내려놓자 결과가 자연스레 따라오다
오랫동안 우리 지역에서 가족·친지 변호인이 합법적으로 수사 기록을 열람하고 면회할 수 있도록 하는 것이 제 간절한 바람이었습니다. 그러나 이 바람이 집착으로 변해 두 건의 사건을 진행했음에도 돌파하지 못했고, 기록 열람조차 재판 단계에 가서야 가능했는데, 그때는 이미 최적의 시기를 놓친 후였습니다.
나중에는 제가 너무 집착하고 있다는 것을 깨달으면서도, 한편으로는 면회 문제를 돌파하는 것이 실제로 매우 어려울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B 수련생이 사법적 박해를 받아 검찰로 이송됐을 때, 우리는 정상적인 절차대로 기록 열람과 면회 신청을 했습니다. 당시에는 과정상 어려움이 있을 수 있다고 예상했지만, 결과에 집착하지 않고 해야 할 일을 차분히 진행했습니다. 그랬더니 뜻밖에도 검사는 가족들에게 약간의 까다로운 요구만 한 뒤 기록 열람을 허가해주었습니다.
저는 면회가 가장 어려운 단계라는 것을 알고 있었지만, 실제로는 기록 열람 과정에서 검사가 면회 허가서를 가족에게 직접 건네주었습니다. 저는 가족과의 소통이 부족해 이 사실을 모르고 계속 면회 문제를 어떻게 돌파할지 고민하고 있었는데, 가족이 우연히 이 면회 허가서를 보여주자 저는 너무 놀라 “이렇게 쉽게 성공하다니!”라며 기뻐했습니다.
이는 우리 지역에서 가족·친지 변호인이 합법적으로 구치소의 수련생을 면회할 수 있게 된 최초의 사례로 기록됐습니다. 가족은 여러 검사의 엄격한 심사를 거쳐 마침내 B를 성공적으로 면회했고, 이후로도 여러 차례 면회를 이어갈 수 있었습니다. 이는 중요한 돌파구였으며, 이전에 다른 가족 변호인들이 쌓아온 노력이 결실을 맺은 것이기도 했습니다.
이후 C 수련생이 감옥에서 박해받던 사건에서는 가족과 협력해 여러 차례 정보공개 청구, 행정심판 청구, 신고 등을 진행했습니다. 감옥 관계자들의 태도를 보면 그들도 상당한 압박감을 느끼고 있음을 알 수 있었지만, 당시 저는 조바심이 나서 ‘이 정도면 충분하지 않을까?’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 시기에 우리는 가족을 통해 감옥장과 대화를 시도해 박해를 중단하면 현재 진행 중인 절차도 중단할 수 있다는 의견을 전하려 했으나, 그와 전혀 통화가 되지 않았습니다. 그러다가 공의(公義) 포럼의 한 수련생에게 우리의 생각을 말했을 때, 그가 한 말이 저에게 깊은 인상을 남겼습니다. “협상에도 밑천이 있어야 합니다.” 이 말은 지금까지도 저를 격려하며 사건을 철저히 처리하는 원동력이 되고 있습니다. 저는 크게 부끄러워졌고, 아직 갈 길이 멀고 제가 한 일이 부족했음을 깨달았습니다. 이후 조급한 마음을 버리고 차분히 C 수련생 사건의 후속 절차를 진행하기로 했습니다. 지금 생각해보면 당시 일을 서둘러 끝내려 했던 것은 일종의 당문화(공산당 문화)적 사고방식이었습니다.
우리는 감옥을 여러 차례 고발했지만 접수 기관은 아무런 반응이 없었고, 감옥 관리국은 우리가 보낸 자료를 아예 접수조차 하지 않았습니다. 저는 다소 실망했고 이런 노력이 무의미할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지만, 곧 결과에 대한 집착을 내려놓고 신고서를 진상을 알리는 편지로 여기며 계속 발송하기로 했습니다.
저는 명혜망에서 C 수련생이 감옥에서 당한 박해 상황에 관한 모든 기사를 수집하고 분류·정리한 뒤, 이 모든 내용을 신고서에 담아 대량으로 발송했습니다. 물론 가족에 대한 책임을 다하기 위해 입증책임 전환의 원칙도 충분히 설명했습니다. 만약 누군가 가족에게 “C 수련생이 감옥에서 박해를 받았다는 것을 어떻게 증명할 수 있느냐?”고 묻는다면, 가족들이 이렇게 답할 수 있도록 했습니다. “신고자는 단지 신고의 단서만 제공할 책임이 있을 뿐, 구체적인 사실은 검찰이 조사하고 확인해야 합니다.”
처음에는 큰 기대를 하지 않았습니다. 다만 이 신고서를 통해 누군가가 대법제자들이 감옥에서 겪는 비참한 박해를 알게 되고, 사람들의 양심이 일깨워지기를 바랐을 뿐입니다. 그런데 예상 밖으로 검찰은 신고서를 받은 후 감옥에 조사를 나갔고, 감옥 측에서도 자체 조사팀을 구성했습니다. 이들은 C에게 신고서에 언급된 박해 내용을 하나하나 확인했습니다.
C의 상태는 매우 양호했으며, 자신이 당한 박해의 과정을 상세히 설명했습니다. 그 결과 C는 다른 감방으로 옮겨졌고 박해가 중단됐습니다. 가족이 C와 화상 면회를 하던 중, C는 안에서 일어난 상황을 자세히 전해주었습니다. 가족은 무척 기뻐하며 우리에게 “여러분이 하신 일이 효과가 있었어요”라고 말했습니다. 이전에는 가족도 협력은 했지만 “아무 소용이 없다”는 말을 자주 했었는데, 이제는 그런 말을 하지 않게 됐습니다. 이후 C는 비교적 나은 환경에서 남은 불법 구금 기간을 보내고 현재는 무사히 출소했습니다.
이후 우리는 같은 방식으로 같은 감옥에 불법 구금된 다른 수련생을 위해 박해반대 법적 절차를 진행했고, 결과는 매우 좋았습니다. 두세 달 후 감옥에서 소식이 전해졌는데, 해당 수련생은 더 이상 강제로 작은 의자에 앉혀지지 않았습니다. 이는 전 지역 수련생들이 함께 노력한 결실이었습니다.
3. 쟁투에서 제도로
D 수련생이 납치된 후, 우리는 가족과 함께 수사 단계에서 공안 분국과 시 공안국에 정보공개 신청을 했습니다. 특히 시 공안국의 ‘610 사무실’을 대상으로 한 정보공개 신청이 핵심이었습니다. 신청을 결정하기 전, 저는 많이 우려했습니다. 가장 큰 이유는 두려움 때문이었습니다. ‘610’을 건드리는 것이 무서웠습니다. 그러나 사악이 거기에 있다는 것을 알면서도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것은 마음이 허락하지 않았습니다. 고민 끝에 후속 절차를 진행하지 않더라도 일단 신청이라도 해보자고 결심했습니다.
가족들을 설득하기 위해 저는 법적 근거와 이전의 경험을 충분히 준비해서 설명했습니다. 결국 가족은 기꺼이 동의했습니다. 신청서를 제출한 후 사건은 곧바로 기소 단계로 넘어갔고, 그 시점부터는 검찰 단계의 서류 작성과 친인척 변호인의 기록 열람, 면회에 집중했습니다.
이 과정에서 저는 깨달았습니다. 제가 하는 이 모든 일은 단지 박해받는 수련생을 위한 것만이 아니라, 공안, 검찰, 법원 관계자들을 구하기 위한 것이기도 했습니다. 그들이야말로 가장 진상을 모르는 사람들이었기 때문입니다. 이 깨달음은 제 생각을 완전히 바꿔놓았고, 그 순간 두려움이 순식간에 사라졌습니다.
그 시점에서 저는 정보공개의 후속 절차를 반드시 진행해야 한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하지만 심사 기소 단계는 보통 한 달 정도로 짧고, 사건이 법원으로 넘어가면 가족이 공안 관련 절차에 더 이상 협조하지 않을 가능성이 컸습니다. 그래서 정보공개 후속 절차를 마무리할 기회를 잡아야 한다는 것을 알게 됐습니다.
생각이 명확해지자 저는 가족에게 검사를 만날 때마다 “이 사건은 범죄 사실이 불분명하고 증거가 부족하니 공안국으로 사건을 돌려보내 추가 수사를 요청해야 한다”를 꾸준히 요구하라고 당부했습니다. 그리고 매일 마음속으로 사부님께 청을 올렸습니다. “사부님, 저에게 한 번의 기회를 주십시오. 정보공개를 헛되게 하고 싶지 않습니다. 제 소망은 후속 절차를 끝까지 해내는 것입니다. 결과는 사부님의 안배를 따르겠습니다.”
시간이 점점 흘러 검찰 단계가 거의 끝나갈 무렵까지도 검사는 어떤 반응도 보이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법원 단계에서 더 수월하게 대응하기 위해 법원 절차와 대응 방안을 정리하여 친인척 변호인을 교육했습니다. 그러던 중, 갑자기 사건이 검찰로부터 공안국으로 보완 수사를 위해 반송됐다는 소식을 들었습니다. 그 순간 저는 너무 기뻐서 ‘사부님 감사합니다!’라고 마음속으로 감사드렸습니다.
이미 준비해둔 계획을 실행할 기회가 온 것입니다. 주말과 공휴일을 제외하면 실제로는 약 10일 정도밖에 남지 않았지만, 서둘러 후속 행정 심판, 행정소송, 고발 등 관련 서류를 작성하고, 포럼에서 법률에 밝은 수련생의 도움을 받아 수정을 거친 후 며칠 안에 모든 서류를 발송했습니다.
이후 경찰은 가족에게 파출소에서 자세히 이야기하자고 요청했습니다. 가족이 파출소에 갔을 때, 소장과 부소장을 포함한 모든 경찰의 태도가 전례 없이 친절해 보였습니다. 그들은 가족에게 행정 심판 신청을 철회해달라고 요청했지만, 가족은 당연히 이를 거절했습니다. 이후 경찰은 가족을 직접 찾아와 다시 행정 심판 문제를 논의하려 했습니다.
결국 가족은 파출소를 자유롭게 드나들 수 있게 됐고, 더는 이전처럼 방해받지 않았습니다. 가족의 말에 따르면, 이전에 파출소에 들어갈 때마다 ‘늑대 소굴’ 같았다고 합니다. 경찰들이 가족을 둘러싸고 소리치며 녹화하던 모습이 일상이었으나, 더 이상 악랄한 태도를 보이지 않았고, 오히려 윗선의 압박을 토로하며 자신들의 난처한 처지를 표현하는 일이 더 많아졌습니다.
이후, 검찰이 증거를 조작하려 할 때마다 사건 담당 경찰은 가장 먼저 가족에게 정보를 알리며 상황을 공유했습니다. 심지어 경찰이 하드디스크를 열어보려고 했지만, 기술이 부족해 열지 못한 상황까지도 가족에게 털어놓았습니다.
D의 사건이 불법적으로 기소되어 법원에 가게 된 후, 우리는 기소장에 언급된 모든 이른바 증거들과 경찰의 법 집행 과정에서 발생한 절차상 위법 사항들을 분류하여, 파출소, 공안 분국, 시 공안국에 여러 차례 고발하고 신고했습니다. 동시에 법원에 다수의 신청서를 제출하여 사건의 모든 세부 사항의 위법성을 명확히 설명했습니다. 아울러 고발서와 신고서를 지역과 시급 공안, 검찰, 법원 및 정법위원회에 대량으로 우편 발송했습니다.
이 과정에서 우리는 신청과 고발을 병행하고, 이유 설명과 책임 추궁을 결합하여, 이 모든 것을 통해 공안, 검찰, 법원 관계자들에게 한 가지 메시지를 전하고자 했습니다. “여러분이 주장하는 증거는 우리 수련생의 범죄 증거가 아니라, 오히려 여러분이 선한 사람을 모함하고 함정에 빠뜨리는 증거입니다. 더 이상 악행을 저지르지 마십시오. 여러분이 하나의 증거를 더 만들 때마다, 그것은 여러분의 불법 법집행과 직권남용을 고발할 증거가 됩니다.”
이 사건은 이후 두 차례의 수사 반려와 보충 증거 수집을 거쳤고, 법원은 두 번이나 재판 날짜를 정했다가 두 번 모두 연기했습니다. 이는 가족이 계속 협력하며 끊임없이 저항한 결과였습니다.
예전에는 재판 과정에서 가족·친지 변호인이 검사에게 다소 거친 말을 한 적이 있었고, 이로 인해 검사가 법정에서 기존의 양형 제안을 변경하여 형량을 두 달이나 늘린 일이 있었습니다. 그 후 우리는 안으로 자신을 돌아보며 성찰했고, 적어도 제 마음속에는 이 검사에 대한 큰 원망과 쟁투심이 있었음을 발견했습니다. D가 납치된 날, 그는 강압적인 심문과 폭력을 당했는데, 이 검사는 이에 대해 매우 냉담한 태도를 보였습니다. 저는 속으로 생각했습니다. ‘여자가 어떻게 이렇게 동정심이 없을 수 있지? 정말 너무나 악독해.’ 그때부터 마음속에는 이 검사에 대한 원한이 자리 잡았습니다.
이 교훈 때문에, 그 이후로는 쟁투심에 대해 특별히 주의를 기울였습니다. 우리가 많은 신고와 고발을 할 때, 저는 계속해서 자신에게 물었습니다. ‘내가 이 모든 것을 하는 이유가 정말로 사람을 구하기 위해서인가?’ 마음속의 대답은 ‘중생들을 구하기 위해서라면, 나는 두려울 것이 없다’였습니다. 마음의 두려움이 사라지고, 더 이상 누구를 미워하지 않고, 오직 ‘나는 당신을 구하기 위해서’라는 생각만 가졌을 때, 결과는 매우 좋았습니다.
우리는 그토록 많은 고발과 신고를 했지만, 마음속에는 조금의 주저함도 없었습니다. 고발되고 고소된 대상들도 가족을 위협하거나 겁주지 않았습니다. 공안, 검찰, 법원 관계자들이 가족과 접촉할 때의 태도를 보면, 사악한 기운이 많이 사라졌음을 느낄 수 있었습니다. 이는 우리가 사람을 구하려는 마음으로 행동했기에 얻어진 결과였습니다.
잘 알려진 바와 같이, 사악한 중공(중국공산당)은 법치를 따르지 않습니다. 제가 모든 법률 문서를 한 통 한 통 제출할 때, 표면적으로는 이것을 공안, 검찰, 법원, 정법위원회에 속한 중생들에게 진상을 알리는 편지로 여겼습니다. 이는 그들에게 진상을 알리는 하나의 방법이었습니다. 왜냐하면 진정으로 사람을 조종하여 대법과 대법제자들에게 범죄를 저지르게 하는 것은 다른 공간의 사악한 요소들이기 때문입니다. 이 점을 저는 분명히 해야 합니다. 다른 공간에서 보면, 구세력이 중생을 조종해 대법과 대법제자들에게 죄를 저지르게 하고, 그로 인해 많은 중생을 훼멸하려 하고 있습니다. 사부님께서는 대법제자들이 중생을 구해야 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우리는 그저 우리가 해야 할 일을 할 뿐이며, 나머지 모든 것은 사부님께서 주관하십니다.
4. 사부님의 보호와 나의 성장
저는 책임을 스스로 맡는 유형의 사람이 아니었습니다. 오히려 다소 나태하고 전형적인 ’90년대생’처럼 무언가를 할 때 쉽게 흥미를 잃곤 했습니다. 제가 처음으로 수련생을 구출하는 데 본격적으로 참여하게 된 것은 우리 팀의 수련생이 납치된 사건 때문이었습니다. 당시 저는 법률 지식도 없었고, 오직 열정만으로 무작정 부딪혔습니다. 우왕좌왕하며 많은 실수를 했습니다.
그때는 다른 수련생들과의 협력이 부족했습니다. 제 생각을 충분히 공유하지 못했고, 많은 아이디어가 실행되지 못한 채 남아있었으며, 경험으로 삼을 기회도 놓쳐버렸습니다. 결국 그 수련생은 불법적으로 판결을 받고 감옥에 보내졌고 이는 저에게 큰 충격이었습니다. 첫째는 제가 하고 싶었던 일들을 시도조차 하지 못해 아쉬웠기 때문이고, 둘째는 많은 시간과 노력을 들였음에도 받아들이기 어려운 결과였기 때문입니다.
그 사건이 끝난 후, 저는 몇 달 동안 우울증을 앓았습니다. 동시에 사건의 전 과정을 되짚어보며 무엇이 잘못됐는지를 계속해서 고민했습니다. 그러다 마침내 깨달았습니다. 이제는 다른 수련생에게 의존하지 않고 제가 원하는 일을 스스로 실현해야겠다고 마음먹었습니다. 그 이후로 저는 수동적인 태도를 버리고 능동적으로 변했습니다. 변호사나 법률에 정통한 수련생들과의 대화와 교류 기회를 소중히 여겼습니다.
저는 마치 어린 나무처럼 모든 뿌리와 가지를 뻗어 햇빛과 영양분을 흡수하며 빠르게 성장하려 했습니다. 그러다 마침내 제가 계획을 세우고 법률 문서를 작성하는 일을 맡게 됐습니다. 사부님의 가호와 수련생들의 도움 덕분에 저는 짧은 시간 안에 성숙해질 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저에게 가장 어려웠던 것은 수련생들과의 협력이었습니다. 특히 의견이 다를 때는 소통조차 쉽지 않았습니다. 사건 자체는 순조롭게 진행되더라도, 수련생들과 협력하는 과정에서 부딪히는 심성(心性) 문제는 저를 괴롭게 했습니다. 몇 번이나 ‘차라리 내가 이 일을 그만두는 게 낫지 않을까? 정말 협력이 안 되는구나’라는 생각을 했습니다. 그럴 때마다 사건에 새로운 문제가 발생했고, 그러면 저는 다시 다짐했습니다. ‘그만두더라도 지금 닥친 이 문제만큼은 해결하고 나서 그만두자.’
하지만 수련생들이 모두 자아를 내려놓고 사람을 구하는 항목을 최우선으로 여길 때, 우리는 조화롭게 협력할 수 있었습니다. 각자 적합한 역할을 찾아 자발적으로 책임을 맡았습니다. 수련생들이 하나의 조화를 이루면, 아무리 큰 난관도 무사히 넘길 수 있었습니다. 이 과정에서 저는 수련생들이 보여준 헌신과 책임감에 깊이 감동받았습니다. 다른 사람의 장점을 볼 수 있게 되면, 저 또한 자연스럽게 저의 안에서 문제를 찾아 해결하려 했습니다. 모두가 자신의 내면에서 찾아 문제를 해결할 때, 갈등은 사라지고 오히려 대법(大法) 안에서 함께 성장할 수 있었습니다.
법률을 활용해 박해를 반대해나가는 몇 년간의 수련 과정을 통해, 저는 더욱 인내심을 기르게 됐고, 조급함을 버리고 차분히 일을 할 수 있게 됐습니다. 비록 많은 어려움과 좌절을 겪었지만, 제가 얻은 것은 훨씬 더 많았습니다. 그 과정에서 가족들과 중생의 변화 또한 감동적이었습니다. 비록 분량 문제로 모든 이야기를 담을 수는 없지만, 이 모든 과정은 사부님께서 우리를 지탱해주셨기에 가능했던 것입니다.
문서를 작성하는 데 막혀 고민할 때, 저는 컴퓨터 앞에서 마치 제 주변에 변호사들이 둘러앉아 있는 것 같은 느낌을 받았습니다. 문서를 만족스럽게 완성하면 그들의 존재감이 여전히 실재하는 것처럼 느껴졌습니다. 또한, 수련생이 1심에서 불법 판결을 받고 좌절했을 때, 꿈에서 수련생들이 변호인을 이끌고 지역 법원으로 돌진해 사악한 세력과 치열하게 싸우는 장면을 보았습니다. 과정은 위험천만했지만, 결국 악의 소굴에서 탈출하는 꿈을 꾸었습니다. 이를 통해 저는 우리가 기울인 모든 노력이 절대 헛되지 않았음을 깨달았습니다.
우리는 정법시기 대법제자입니다. 우리가 정념을 견지하면, 많은 ‘불가능’이 ‘가능’으로 바뀔 것이라고 믿습니다. 왜냐하면 우리에겐 사부님과 대법이 있기 때문입니다!
원문발표: 2024년 12월 22일
문장분류: 수련교류
원문위치:
正體 https://big5.minghui.org/mh/articles/2024/12/22/486503.html
简体 https://www.minghui.org/mh/articles/2024/12/22/486503.html