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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족 수련생을 구출했던 경험

글/ 중국 대법제자

[명혜망] 나는 1996년에 법을 얻었다. 한 수련생이 나에게 몇 년 전 가족 수련생을 구출했던 경험을 써보라고 제안했다.

2015년, 천리 밖의 A시에서 나의 여동생이 국보(국내안전보위대: 파룬궁 탄압 담당 공안기구) 경찰에게 납치됐다. 당시 그녀는 7년간의 억울한 옥살이를 마치고 집에 돌아온 지 5개월도 채 되지 않았다. 너무 갑작스럽게 일이 발생했고 사전에 어떤 징후도 없어서 우리 가족 모두는 무력하고 막막했다. 당시 나도 상태가 좋지 않아 완전히 사람마음이 범람했고 여동생이 너무나 안타까웠다. 그녀가 그동안 얼마나 고생을 했는지 생각하니 가슴이 아팠다.

우리집 윗층에는 우리집을 감시하는 어느 파출소 소장이 살았는데, 부모님은 당시 계단에서도 큰 소리로 말씀하시지 못했다. 부모님이 그럴수록 그 소장은 더 철저히 감시했다. 나는 수련자들이 만든 여동생이 납치된 내용이 적힌 스티커를 들고 계단에 직접 붙였다. 거기 서서 이웃들이 지나갈 때마다 “여기 쓰여 있는 게 바로 제 여동생의 일입니다. 감옥에서 갓 나왔는데 또 납치됐어요”라고 말했다. 나는 부모님께 “우리가 나쁜 짓을 한 것도 아닌데 숨을 필요 없어요. 누구를 만나든 이 일을 알리세요”라고 말씀드렸다. 그러자 오히려 그 소장이 숨어버렸다. 당시 나는 70세의 부모님이 보시지 못하시도록 화장실에서 몰래 울기도 했다. 울다가 문득 잘못됐다는 생각이 들어서 부모님께 “우리 정신 차려야 해요. 기운을 잃으면 잃을수록 사악이 더 날뛰게 돼요”라고 말씀드렸다.

당시 우리는 여동생이 어디로 끌려갔는지도 몰랐다. 그런 무력감은 사실 내가 사람을 데려올 능력이 없다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나중에 사부님께서 한 가지 생각을 주셨는데, 갑자기 진상을 알리는 것이 떠올랐다. 이 생각은 아마도 이전의 여러 차례 구출 과정에서 경찰을 구한 긍정적인 경험에서 나온 것 같았다. 나는 ‘반드시 경찰이 진상을 진정으로 알게 해야 해. 그가 스스로 선택하게 하고, 그가 진정으로 이해했을 때 자연스럽게 어떻게 해야 할지 알게 될 거야’라고 생각했다. 이렇게 생각하니 정념이 생기는 것 같았다.

여동생이 납치된 당일 밤, 한 경찰의 휴대폰으로 집에 전화를 했다. 다음날은 토요일이어서 이 전화의 단서를 따라 A지역의 어느 파출소에 갔지만, 근무하는 사람이 없었다. 여러 차례 수소문 끝에 사건 담당 부서가 A시 모 구 국보라는 것을 알게 됐다. 수련생을 통해 베이징의 정의로운 변호사 한 명과 연락이 닿았다. 변호사가 A시에 오기 전에 나는 먼저 국보에 가서 담당 국보 대장을 만났다. 나는 그에게 말했다. “대장님, 오늘은 제 여동생 일로 왔습니다. 저는 이해합니다. 이 자리에서 이런 일을 하시는 것이 바로 대장님의 업무니까요. 저는 ○○의 가족으로서 여동생의 권익을 지키는 것이 목적입니다. 만약 제 여동생이 정말 법을 어겼다면 할 말이 없지만, 만약 제 여동생이 법을 어기지 않았다면 저는 반드시 최선을 다해 여동생을 보호하고, 여동생이 다시 무고한 박해를 당하도록 놔두지 않을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 사이에는 대립이 존재하지 않습니다. 대장님은 법에 따라 사건을 처리하시면 되고, 우리 사이에는 원한이 없습니다. 저는 대장님도 굳이 제 여동생을 해치려고 하지는 않을 거라고 믿습니다.” 국보 대장은 매우 친절했고, 떠날 때 내가 전화번호를 달라고 하자 그는 잠시 망설이다가 “인터넷에 올리지 말아주세요. 저는 별로 두려운 건 없지만, 번호가 인터넷에 올라가면 제 휴식을 방해할 것 같아서요”라고 했다. 나는 잠시 생각해보니 인터넷에 올리지 않겠다고 약속할 수도 없고, 그를 자극하고 싶지도 않아서 “제가 전화 드리면 되죠?”라고 말했다. 그러자 그가 전화번호를 주었다.

집에 돌아와서 그의 전화번호를 인터넷에 올려야 할지 고민했다. 이전의 경험으로는 반드시 사악을 폭로해야 했다. 하지만 인터넷에 올리는 것도 결국 그를 구하기 위한 것 아닌가? 만약 그를 구할 수 있다면 굳이 인터넷에 올릴 필요는 없을 것이다. 지난번 소통도 잘 됐으니 일단 올리지 말자고 생각했다. 이후 28일간 지속된 구출 과정에서 내가 언제 전화를 하든 그는 아주 흔쾌히 받았고, 직장에 없을 때도 대략 언제쯤 돌아올 수 있는지 알려주어서 내 일정에 한 번도 지장을 주지 않았다. 내가 변호사를 선임하겠다고 하자 그는 “누님, 변호사는 선임하지 마세요. 변호사를 선임하면 이 일이 커져버립니다”라며 거짓말을 했다.

두 번째는 변호사와 함께 A시에 갔다. 변호사가 구치소에 가서 여동생을 만나러 갔을 때 나는 ‘변호사에게 의지하지 말라’는 말을 전했다. 구출 과정에서 다른 공간의 방해가 매우 크다고 느꼈다.

세 번째로 A시에 갈 때는 수련생이 운전해서 갔다. 고속도로에서 안개가 너무 짙어서 뒤차가 앞차를 볼 수 없을 정도였고, 우리는 앞의 유조차 후미등만 보고 적당한 거리를 유지하며 앞으로 나아갈 수밖에 없었다. 몇몇 수련자들은 가는 내내 정법구결을 외웠고, 누구도 한순간도 방심하지 못했다.

나는 3일이나 5일 간격으로 A시에 갔고, 매번 수련자들이 동행해서 국보 대장을 만났다. 매번 그의 사무실에서 잠시 대화를 나눌 수 있었고, 매번 틈틈이 다른 측면의 진상을 조금씩 알릴 수 있었다. 그를 만난 후에는 매번 명혜망에 후속 소식이 올라왔다. 처음부터 그는 “인터넷에 올리지 마세요. 인터넷에 올리면 이 일이 더 커지지 않나요?”라고 말했다. 나는 그가 반감을 갖지 않도록 “저도 어쩔 수 없어요. 이렇게 큰일인데, 제가 여기서 돌아갈 때마다 다들 물어보니까 말할 수밖에 없어요”라고 말했다.

한번은 외지 수련생이 나와 함께 국보를 만나러 갔는데, 국보 대장이 따로 나에게 “당신이 데려온 사람이 누군지 아세요? 성(省)의 1호 요주의 인물입니다”라고 말했다. 그는 또 나에게 “어떻게 저분과 연락이 닿았나요?”라고 물었다. 나는 “이번 박해가 우리를 연결시켰어요. 사방에서 온 사람들이 다 함께 갇혀 있다 보니 서로 다 알게 됐죠”라고 말했다.

몇 차례 진상을 알린 후 국보 대장에게 변화가 생겼다. 한번은 우리가 그의 사무실에서 대화를 마치고 그가 일하러 나가야 할 때였는데, 우리도 함께 나왔다. 국보 마당에서 그가 차를 몰고 나가다가 우리와 마주쳤는데, 차창을 내리고 우리에게 손을 흔들었고 표정이 매우 편안해 보였다. 당시 나는 이 생명이 이미 선택을 했고, 내 여동생을 풀어주고 싶어 한다는 것을 느꼈다. 그는 이 결정으로 인해 해방감을 느꼈고, 그것이 바로 당시 그의 얼굴에 나타난 표정이었다.

중간에 작은 해프닝이 있었는데, 국보 대장이 변호사 선임에 얼마나 들었냐고 물었다. 한 수련생이 나에게 그가 돈을 달라고 암시하는 거라고 했다. 하지만 나는 그렇게 느끼지 않았고 그가 내가 변호사 선임비로 쓴 돈이 아까워서 그런 것 같았다.

원래 A시에서는 아는 사람이 아무도 없었지만, 구출 과정에서 사부님께서 항상 적절하게 협력할 수 있는 수련생을 찾게 해주셨다. 당시 한 수련생은 해외에서 여러 해 지낸 적이 있어서 말솜씨가 좋았고 정념도 충만했는데, 박해가 시작된 후에 법을 얻은 사람이었다. 그때 그녀가 나와 함께 국보에 갔는데, 그녀가 진상을 알릴 때 방 안의 경찰들이 모두 조용히 듣고 있었고, 나중에 들어온 사람들도 듣고 있었다. 수련생은 자비로우면서도 위엄이 있게 말했다. 나중에 수련생이 국보 대장에게 계속 박해하면 앞으로 심판을 받게 될 것이라고 상기시키면서 연달아 몇 가지를 물었다. “당신은 준비됐습니까?” 그 국보 대장은 듣는 내내 눈에 눈물이 고여 있었다. 국보 사무실을 나와서 나는 수련자의 손을 꼭 잡고 “말씀을 정말 잘하셨어요. 당시에 녹음했어야 했는데”라고 말했다.

여동생이 집에 돌아와서 말하기를, 7~8명의 경찰이 그녀를 집으로 데려다주는 길에 그녀를 납치할 때와는 완전히 다른 모습을 보였다고 했다. 휴게소에서 물건을 살 때도 경찰들이 모두 여동생 뒤에서 걸었고, 말하는 어조나 조심스러운 태도에서 존중이 묻어났으며, 납치할 때 납치할 때의 오만하고 경멸하는 태도는 완전히 사라졌으며, 진상을 알게 된 생명이 대법제자에게 보여야 할 경건함을 보였다고 한다. 여동생도 국보 대장이 나중에는 생각이 바뀌어서 마치 그녀를 풀어줄 구실을 찾고 싶어 하는 것처럼 보였다고 말했다.

수련생들도 구출을 도우면서 자신을 수련했다. 능력이 모두 뛰어난 두 수련생은 원래 자아를 실증하는 마음들이 있어서 협력하는 데 장애가 있었다. 그들은 나중에 모두 자아를 내려놓았다. 나도 큰 심성 고비를 넘었다. 구세력이 수련생의 입을 빌려 내 여동생을 비방했다. 나는 그 소문을 듣고 눈물이 하염없이 흘렀다. 나는 즉시 깨달았다. ‘난 속아 넘어가서는 안 되며, 이것은 구세력이 설치한 관문으로, 내가 이 관문을 넘을 수 있는지 악의적으로 시험하는 것이고, 이는 여동생을 구출해 낼 수 있느냐와 관련이 있다. 일의 진상은 나도 알고 사부님도 아시니, 나는 누구에게도 해명할 필요가 없다.’ 나는 이 일을 해명하려는 마음과 소문을 퍼뜨린 사람에 대한 원망하는 마음도 모두 내려놓아야 했다.

당시 여동생은 안에 있고 나는 밖에 있으면서 우리는 모두 안으로 찾았다. 하지만 나중에 생각해 보니 한 가지 문제에서 여동생이 분명히 깨닫지 못했을 것 같아서 현지 변호사 한 명에게 여동생에게 말을 전해달라고 특별히 부탁했다. 내가 다시 갔을 때 국보 대장이 여동생을 데리러 오라는 정확한 시간을 알려주었다. 하지만 데리러 간 날, 국보 대장은 하루 종일 모습을 보이지 않았다. 알고 보니 일이 달라졌고 그가 결정할 수 있는 일이 아니었다. 그의 상급 지도자가 새로운 결정을 내려 여동생을 세뇌반으로 보낸 것이었다. 원래 그들은 날 속이려고 했지만, 사부님께서 신묘하게 안배하셔서 내가 우연히 세뇌반의 위치를 듣게 됐다. 당시 나는 절대 포기하지 않겠다고 생각했고, 즉시 A시에 와서 집을 임대하기로 했다. 우리집에서 누군가는 A시에 상주해야 할 것 같았다. 하지만 2~3일 후에 국보 대장이 6~7명의 경찰과 함께 차를 몰고 여동생을 집으로 데려다주었다. 사실 보통은 가족이 데리러 가는데, 그가 왜 서둘러 사람을 데려다주려고 했을까? 우리는 나중에 이해하게 됐다. 그는 여동생을 풀어주고 싶었지만, 시간이 오래되면 일이 달라질까 봐 서둘러 천리 길을 운전해서 사람을 데려다준 것이었다.

우리가 구출하러 갈 때도 자주 수련자들이 발정념으로 협력했다. 여동생도 계속 안으로 수련하고 자신을 찾았으며, 국보 대장이 이른바 ‘심문’하러 올 때마다 그에게 진상을 알려서, 나중에 그는 여동생에게 “내가 이런 일에 그렇게 여러 해 동안 참여했는데, 내가 당신을 풀어준다면 이전의 일들은 모두 없던 일이 되는 건가요?”라고 물었다. 이는 그가 여동생을 납치할 때 우리 어머니에게 “파룬궁을 박해한 지 9년이 됐는데도 보응을 당하지 않았습니다”라고 오만하게 말했던 태도와는 전혀 다른 사람 같았다. 여동생은 그에게 “칼을 내려놓으면 바로 부처가 될 수 있다고 말하기는 어렵지만, 첫 걸음은 어쨌든 먼저 칼을 내려놓는 것이어야 합니다”라고 말했다. 세뇌반에서 여동생은 이른바 ‘도우미[幇敎]’들을 자비로 대했고, 한때 법을 얻었던 ‘도우미’는 자신이 대학 교수라고 하면서 여동생과 대화할 때 “저는 당신이 저를 자비롭게 대하고 있다는 것을 압니다”라고 말했다. 세뇌반 사람들은 여동생을 협박하면서 보증서를 쓰지 않으면 8~10년을 더 판결하겠다고 했다. 여동생이 확고한 정념을 내자 사부님께서 가짜 증상을 연출해 주셔서 경찰이 그녀를 집으로 데려다주었다.

원래 이번 박해는 A시 국보의 말에 따르면 공안부에서 감독하는 사건이었는데, 자비로우신 사부님의 보호 아래 이렇게 해결됐다.

1년 후, 우리 지역의 새로 부임한 국보 대장이 미친 듯이 대법제자들을 납치하자 우리는 또 몇 차례 구출에 나섰다. 한번은 우리가 변호사를 만나러 갈 때 파출소 경찰이 집으로 찾아왔고, 곧이어 국보 부대장이 직접 내 휴대폰으로 전화를 걸어왔다. 가족들이 우리에게 나가서 피하라고 했지만 나는 유랑하는 길을 선택할 수 없다고 생각했다. 우리 모두가 다년간 박해를 당했고, 어렵게 정상적인 생활 상태로 돌아왔는데, 다시 유랑하게 되면 주변 사람들이 이전에 이미 갖고 있던 대법에 대한 긍정적인 인식이 흔들릴 것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안으로 찾기 시작했다. 나는 오랫동안 법공부를 제대로 하지 않았다는 것을 찾았고, 여동생은 변호사를 선임하는 기점이 충분히 바르지 않아서 변호사가 대법제자를 위해 말해주기만을 바랐고, 현지의 사악한 박해 국면을 제지하기만을 바랐을 뿐 경찰을 구하려는 마음은 별로 없었다는 것을 찾았다. 나는 앞으로 잘 법공부하고 오랫동안 불안정했던 법공부 상태를 바꾸기로 결심했다. 박해당하지 않기 위해서가 아니라 나쁜 일을 좋은 일로 바꾸고 자신을 올바르게 하기 위해서였다. 나의 법공부 상태는 정말로 변화가 생겼다. 그 후 우리는 단체로 법을 외우는 환경도 갖게 됐다.

사부님의 세심한 보호에 감사드리고, 제자를 성취시켜 주신 사부님께 감사드립니다.

 

​원문발표: 2024년 12월 25일
문장분류: 수련교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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正體 https://big5.minghui.org/mh/articles/2024/12/25/486626.htm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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