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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빈치 코드’는 누구의 신경을 건드렸나

글/ 미국 대법제자

[명혜망] 너무 늦은 영화평이다. 원작 소설을 각색한 할리우드 영화 ‘다빈치 코드’는 19년 전 개봉 직후 기독교인들의 강력한 반발과 항의에 부딪혔고, 심지어 무슬림들도 거리로 나와 항의했다. 이것이 내가 이 영화를 보게 된 계기였다.

기독교 관련 소재의 영화가 왜 비기독교인들의 항의까지 불러일으켰을까? 게다가 많은 국가에서 이 영화의 상영을 금지했다. 영화를 다 보고 나서야 이유를 알게 됐다!

이야기는 예수 그리스도에게 아내와 후손이 있었다는 사실이 숨겨져 있었다는 내용이다. 영화에서 소피라는 여주인공과 랭던 교수는 성배의 진실을 찾아가는 과정에서 여러 교파의 살해 시도를 피하다가 뜻밖에 이 비밀을 밝혀낸다. 영화는 성배와 ‘최후의 만찬’ 명화를 통해 예수에게 후손이 있었다는 주장의 진실성을 논증하며 서스펜스물로 전개된다.

이 영화의 핵심은 역사적 사실이 어떠했는지, ‘최후의 만찬’에 대한 해석이 옳은지의 여부가 아니라 영화 말미에 남자 주인공이 한 말에 있다. “저는 저의 주님께서 아내와 자녀가 있었다고 해서 믿음을 잃지는 않을 것입니다.” 하지만 이 대사는 이후에 공개된 버전에서는 볼 수 없었는데, 아마도 할리우드가 교회와 타협한 결과일 것이다.

내 개인적으로 이 영화는 과거에 신께서 세상에 내려와 사람을 제도하실 때의 ‘신비한’ 출생과 ‘세속을 벗어난’ 수행이라는 기존 관념을 타파하려는 것으로 보인다.

예수님의 어머니 마리아는 하느님의 신성한 빛을 받아 잉태해 예수님을 낳으셨다. 예수님이 태어날 때 자색 기운이 솟아올랐고, 동방의 세 박사가 세상 사람들에게 신의 강림을 알렸으니, 이는 완전히 범인(凡人)과는 달랐다. 성경의 기록에 따르면 예수님은 결혼하지 않으셨다.

석가모니의 어머니는 큰 코끼리를 꿈꾸고 나서 겨드랑이로 석가모니를 낳았다. 석가모니는 태어나자마자 걸을 수 있었고, 발로 연꽃을 밟았는데 이 또한 완전히 범인과는 달랐다.

석가모니 역시 왕실과 가정을 버리고 세속을 떠나 법을 구했다.

이러한 ‘신의 기적’은 두 가지 결과를 초래했다.

첫째, 일부 사람들은 신께서 말씀하신 법과 도를 믿어서 수련의 문에 들어선 것이 아니라 기적 때문에 들어서게 된다.

둘째, 많은 사악한 자들이 이른바 기적을 지어내 세상 사람들을 속이며 각종 사이비 종교가 세상을 어지럽혔다.

그러나 대법 사부님께서 이번에 법을 전하고 사람을 제도하실 때는 평범한 가정에서 태어나 결혼해 자녀를 두셨다. 비록 매우 많은 기적을 보여주셨지만, 오직 일부 수혜자들만이 마음속으로 이해했고, 어떤 이들은 큰 혜택을 입고도 여전히 반신반의하거나 심지어 믿지 않았다. 이렇게 함으로써 세간의 미혹을 깨뜨리지 않고 사람들이 수련할 수 있도록 하셨으며, 수련하지 않는 사람들도 정념(正念)으로 도를 깨달을 수 있었다.

동시에 진선인(眞·善·忍) 우주 법리는 수많은 사람들을 신복시켰다. 중생들은 대법을 받아들여서 수련하게 된 것이지, 신기한 현상 때문에 수련하게 된 것이 아니다. 이것이 대법과 다른 종교의 형식상 가장 큰 차다.

종교인들이 ‘다빈치 코드’에 반발하는 것을 통해 오늘날 사람들이 종교를 어떻게 수호하는지 알 수 있다. 그들은 자신들 마음속의 신의 이미지를 지키고, 종교 조직을 지키며, 개인의 감정을 지키는데, 이러한 것들이 도(道)와 법(法), 신의 가르침을 지키는 것보다 더 중요시됐다.

많은 사람의 관념 속에서 세상에 내려와 사람을 구하는 신은 마치 석가모니처럼 동냥을 하고 탁발해야 하며, 예수님처럼 사람들의 죄를 대속하기 위해 결국 십자가에 못 박혀야 한다.

하지만 신께서 인간 세상에 와서 사람을 제도할 때 어떤 모습으로 나타나고 어떤 방식으로 사람들 속에서 생활할지는 신 자신이나 더 높은 신께서 결정하시는 것이지, 사람이 결정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어떤 생활방식이 신께서 제도하고자 하는 모든 사람을 제도하는 데 더 유리한가에 따라 그 방식을 선택한다. 신께서는 업력으로 가득한 사람처럼 고생하고 죄를 받으실 필요가 없다. 사람은 신에 대해 ‘마땅히 어떠해야 한다’는 생각을 가져서는 안 된다. 신께서는 사람에 대해 은혜와 사랑만 있을 뿐 사람에게 빚진 것이 없으시기 때문이다.

이상은 내가 대법 수련 과정에서 깨달은 인식으로, 개인적인 것일 뿐이며, 같이 대법 수련의 인연이 있으나 아직 대법 수련 형식을 이해하지 못한 수련인들과 교류하고자 한다.

사실 과거의 수련인들도 반드시 모두 절이나 산속으로 들어간 것은 아니며, 다른 형식도 있었을 것이다. 예수, 노자, 석가모니가 세상에 계실 때도 종교를 세우지 않았고, 모두 말씀과 몸소 실천으로 가르쳤으며, 경서는 후세 사람들이 개인적인 기억을 토대로 기록한 것이다. 그리고 천백 년 동안 번역과 의도적이거나 무의식적인 삭제와 수정을 거쳤다. 오늘날의 대법제자들은 어떤 환경에서도 수련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전법륜(轉法輪)》이 백지 위에 검은 글씨로 인쇄되어 있다. 사회를 큰 수련장으로 삼으니 편리하기도 하지만, 산속에는 없는 각종 도전도 있다. 속인의 사상과 학설, 명예와 금전, 욕망의 도전이 그것이다. 대법 서적이 있어 수고하지 않고도 얻을 수 있으니 어떤 이들은 소중히 여기지 않기 쉽고, 오성이 높아지지 않으며, 몇 번을 읽고 심지어 외웠는데도 정법시기 대법제자 수련의 진의(眞義)를 이해하지 못한다.

대법 수련 형식에는 법이 수련하는 제자들을 보호하기 위해 수련이 잘된 일면은 격리시키고 남은 부분은 여전히 사람의 것이어서 계속 수련하고 계속 위로 정진하는 것이 포함된다. 또한 출가하지 않고, 절에 들어가지 않으며, 산속으로 들어가지 않고 전 사회가 우리가 수련하는 ‘큰 절’이 되어 직접 사람의 마음을 가리키면서[直指人心] 동시에 정법시기 대법제자가 당초의 서약을 완성하는 것도 포함된다.

 

원문발표: 2024년 12월 16일
문장분류: 수련교류
원문위치:
正體 https://big5.minghui.org/mh/articles/2024/12/16/486154.htm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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