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한국 대법제자
[명혜망]
자비로운 사부님 안녕하십니까!
수련생 여러분 안녕하십니까!
저는 경남 김해에서 수련하는 대법제자입니다. 올해 2월에 39년 6개월간의 교직 생활을 마치고 퇴직했습니다. 2024년 11월이면 제가 법을 수련한 지 만 20년이 됩니다.
사부님께서 ‘싱가포르법회 설법’에서 “이미 당신들의 수련하는 이 일이 제1위가 되었는데, 그렇다면 어떠한 일도 이것을 교란해서는 안 된다”라고 하셨습니다.
저는 수련 초기부터 수련에 아무런 교란을 받지 않으려면 세상의 어떤 일보다 수련을 1위에 두고 무조건 사부님의 배치를 따라야겠다고 생각하며 수련했습니다. 하지만 최근 자신의 수련을 되돌아보니 정말 사부님께서 요구하신 기준에 도달하지 못했고, 이 체험문을 쓰려니 수련을 잘한 부분이 하나도 없는 것 같아 많이 망설였습니다.
1. 교사로서 학생들에게 대법을 전하다
저는 42세에 파룬따파(法輪大法, 파룬궁) 수련을 시작했습니다. 대법은 단번에 저를 속인에서 수련인의 삶으로 바꿔놓았습니다. 법을 얻은 후부터 늘 어떻게 하면 수련을 잘하고 이 좋은 법을 전할 수 있을까 고민했습니다. 직장에서도 마찬가지였습니다. 매년 새 학기가 되면 학생들에게 반드시 연공을 가르쳤습니다. 아이들은 총명해서 동작을 금방 배웠고, 어떤 아이들은 연공 음악이 나오면 사부님의 구령을 줄줄 따라하며 연공을 했습니다. 5세트를 모두 할 수는 없어서 처음에는 1장을 반복하다가 3장, 4장, 5장을 번갈아가며 연공했습니다. ‘파룬따파하오(法輪大法好-파룬따파는 좋습니다), 쩐싼런하오(眞善忍好-진선인은 좋습니다)’를 기본적으로 외우게 하고 한자로도 쓰게 했습니다. 저는 당시 우리 아이들이 수련을 견지하지 못하더라도 대법제자인 선생님을 만났으니 최소한 9자 진언 ‘파룬따파하오, 쩐싼런하오’를 심어주고 싶었습니다. 수련 후 12년여간의 교직생활 동안 한 번도 아이들에게 연공을 가르치지 않은 적이 없었고, 9자 진언과 신의 존재에 대해서도 가르쳤습니다. 감사하게도 제가 교사로 있을 때는 연공을 가르치거나 9자 진언을 외우고 쓰게 해도 민원이 발생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인지 반 아이들은 전염병이나 독감 발병률이 낮았고 큰 사고도 없었습니다.
사부님께서는 제가 교사생활을 하면서 아이들에게 짜증내는 습관을 제일 먼저 고쳐주셨습니다. 수련한 지 얼마 되지 않아 제가 화를 내는지 시험하셨는데, 저는 첫 번째 시험에서 고비를 넘었습니다. 그날 저녁 집에 돌아와서 ‘전법륜(轉法輪, 파룬궁 수련서)’은 진정한 경서라고 생각했습니다. 제 마지막 교직생활 해에는 마치 그동안 제가 아이들에게 쌓은 업을 모두 없애시려는 듯 우리 반에 마성이 심한 아이들이 많아서 하루가 멀다 하고 문제가 발생했습니다. 저는 계속 안으로 찾으며 마음을 다스리려 했지만 쉽지 않았습니다.
어느 날 마성이 가장 심한 학생 하나가 SNS에서 저를 심하게 욕했다는 소식을 들었습니다. 법에서 “우리는 연공인(煉功人)으로서, 때려도 맞받아치지 않고 욕해도 대꾸하지 않으며, 높은 표준으로 자신에게 요구해야 한다”(전법륜)고 하셨기에, 저는 억지로 화를 참으며 그 학생을 불렀습니다. 불러낸 아이를 꾸중하려고 막 입을 여는 순간 얼굴 앞면 근육이 확 풀려서 저절로 웃는 얼굴이 됐습니다. 저는 바로 ‘사부님께서 더는 아이들에게 화내지 말고 업을 짓지 말라는 거구나’라고 깨달았습니다. 웃으면서 학생을 타이를 수밖에 없었고, 그 사건 후에 반 아이들의 마성도 많이 줄어들었습니다. 저는 그때부터 학생들에게 화를 내지 않았습니다.
2. 사부님의 배치에 따라 교장선생님과의 인연 관계를 잘 해결하다
“우리가 속인(常人) 사회 중에서 그가 출생한 후, 이 집에 그가 있고, 학교에 그가 있으며, 또는 성장하여 직장에 그가 있어, 그의 일을 통해 사회와 다방면으로 연계를 맺게 된다. 다시 말해서 전반 사회의 구성은 모두 이렇게 배치가 잘 된 것이다.”(전법륜)
저는 대법제자이기에 저의 모든 일은 늘 사부님께서 배치하신다고 생각하며 살았습니다. 제가 교감으로 승진할 때는 모든 승진규정이 하향조정되어 갑자기 승진하게 됐습니다. 당시 저는 대법 항목 중 교정 일을 막 시작했는데, 승진으로 인해 교정 시간을 충분히 확보할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집에서 80km나 떨어진 생소한 곳으로 발령이 났습니다. ‘퇴근 후 법을 실증할 시간이 필요한데 어찌 이렇게 먼 곳으로 발령이 났을까’라고 생각했지만, 분명 거기에 배치된 이유가 있을 거라고 생각을 바꿨습니다.
며칠이 지나자 함께 발령받은 교장선생님과 깊은 인연 관계가 있다는 느낌이 들었습니다. 저는 어떤 인연 관계가 있었든 그 인연으로 중생을 잘 구해야 한다는 생각이 스쳐 지나갔습니다. 그분은 당시 우리 지역에서 무서운 교장으로 평가받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2주 정도 지나자 교장선생님은 완전히 저를 신뢰하게 됐고, 원래는 선생님들이 무서워서 쉽게 결재받으러 가지 못했는데 무뚝뚝한 습관도 고쳐 좋은 교장선생님이 되셨습니다. 저는 환경미화원 할머니께 법을 전하고 연공을 가르쳐서 가끔 정자에서 연공을 했는데, 언제 보셨는지 어느 날 교장선생님께서 전교생을 데리고 연공을 가르쳐보라고 하셨습니다. 저는 20분 쉬는 시간에 소강당에서 70여 명의 학생과 교사들을 모아놓고 연공을 가르쳤습니다. 약 6개월간 연공을 가르쳤고, 매주 수요일 점심시간에는 이웃 노인정에 가서 연공을 가르칠 수 있도록 교장선생님께서 허락해주셨습니다. 연말에는 학교 남은 돈으로 학생과 직원들에게 션윈을 보여주자고 했더니 그것도 허락하셨습니다. 직원들, 학생들, 교사들은 다 갔지만 교장선생님은 당시 마음상태가 좋지 않아 션윈을 보러 가지 않으셨습니다.
그당시 학교 관리직은 1년 6개월 만에 이동할 수 있었는데, 그해 전보(교직원이 다른 학교로 근무지를 옮기는 것) 규정이 바뀌어 교감은 1년 만에 전보를 신청할 수 있게 됐습니다. 갑자기 전보 규정이 바뀐 것은 김해로 돌아오라는 사부님의 일깨움이라고 생각되어 교장선생님이 1년만 더 있다 가라고 부탁했지만 저는 바로 전보 신청을 했습니다. 제가 전보 신청하기 두 달 전쯤 5장 공법을 하던 중 갑자기 교장선생님과의 전생의 인연이 보였습니다. 그분과의 전생 인연도 이번만큼이나 짧았고 슬픈 인연이었습니다. 마지막으로 학교를 떠나 김해로 돌아오는 차 안에서 주체할 수 없는 눈물이 흘렀습니다. 하지만 다음날 아침 일어나니 그분이 마치 모르는 사람처럼 느껴져서 참 신기했습니다.
며칠 후 교장선생님으로부터 메일이 왔는데, 션윈을 보지 않은 것은 저의 인생이 온통 사부님밖에 없어서 질투가 났기 때문이라며 그때 미안했다고 하셨습니다. 얼마 후 제가 드린 ‘전법륜’을 다 읽었다고 하셔서 저는 사모님과 함께 션윈 티켓을 사드렸고, 보고 나서 감동적이었다고 연락이 왔습니다. 저는 그렇게 사부님의 배치로 그분과의 인연을 해결하고 사부님의 중생 제도를 도왔습니다. 김해로 돌아온 저는 3년 6개월 만에 세 분의 교장을 모시고 그들과의 모든 업을 청산하자 바로 교장으로 승진했습니다.
3. 수련으로 승화한 교장직
2017년 3월에 양산 지역으로 첫 교장발령을 받았습니다. 그 학교는 학부모와 교사들이 굉장히 불만이 많은 학교로, 전교조 교사 몇 명이 교장의 비리를 감사원에 고발해 교장이 좌천된 자리였습니다. 저는 발령 나기 전에 이미 ‘진선인(眞善忍-진실·선량·인내)’으로 가늠하여 선타후아(先他後我, 자신보다 남을 먼저 생각함)로 학생, 학부모, 교사를 대한다는 교육 경영관을 가지고 있었기에 주변에서 저를 걱정했지만 저는 마음이 크게 움직이지 않았습니다.
부임 첫날 교장실에 갔는데 어느 누구도 저에게 차를 대접하는 사람이 없었습니다. 심지어 학부모회장이 오전부터 교장실에 찾아와서 여러 가지 요구사항을 이야기했고 모두 제게 냉정했습니다. 제가 교감 때 날마다 학교장을 모셨던 것과는 사뭇 다른, 정말 예의라고는 없었습니다. 저는 첫날부터 자신의 마음에서 끊임없이 권위의식을 찾아 버렸고 마음을 다스렸습니다. 대신 저는 모든 사람을 존중하겠다는 마음을 가졌고, 제가 학교장으로서 들어줄 수 있는 그들의 요구를 빨리 다 해결해주었습니다. 선생님들도 오로지 학생들의 수업에만 집중할 수 있도록 형식적인 업무는 챙기지 않았습니다.
얼마 후 제가 직접 훈화로 진선인 인성교육을 하고 싶어서 강당에서 조회를 한다고 했을 때 교사들은 말없이 따라주었습니다. 당시는 강당에서 조회하는 학교는 없었습니다. 한 달에 한 번씩 강당에 아이들을 모아놓고 인성교육 훈화를 했는데 아이들은 점점 얼굴이 밝아졌고, 제가 학교 교정을 거닐 때면 저마다 뛰어와서 인사를 했습니다.
시간이 흐르면서 교사들은 편안히 근무할 수 있는 학교가 됐다며 좋아했습니다. 학부모회장도 제가 다시 김해로 전출했을 때 고맙다고 축하 화분까지 보내주셨습니다. 2018년 봄에는 직원 25명 중 21명이 션윈 공연을 보았습니다.(숫자는 정확하지 않습니다)
제가 그 시기에 딱 맞춰 교장발령이 난 것도 사부님의 배치였다는 것은 3개월 후쯤에야 알게 됐습니다. 당시 매체에서 일하던 딸이 SNS를 막 시작했습니다. 현재의 사위(당시는 아님)가 미국에서 SNS가 굉장히 활성화되고 있는 것을 보고 몇 년 동안 한국에서도 했으면 하는 마음이 있었으나, 그동안 매체에는 젊은 사람이 없어서 그 일을 시도하지 못했습니다. 마침 딸은 막 매체에 들어갔는데 방송인으로서의 능력이 부족해 매일 퇴사하겠다고 저에게 전화가 왔습니다. 겨우 전화로 설득하며 붙잡아 두었는데, SNS는 업로드만 하면 된다는 말에 딸이 그 일을 하기로 했습니다.
하지만 그것도 업로드로만 되는 간단한 일은 아니었습니다. 좋은 기사를 고르고 번역하고 교정하는 등 부수적인 일이 아주 많았습니다. 무엇보다 영어로 올라온 글을 한글로 번역하여 교정을 본 후 올려야 하는데 매체에 그 일을 할 사람이 없었습니다. 그래서 저는 딸이 막 시작하는 일이니 다른 일을 잠시 멈추고 그 일을 돕기로 했습니다. 지역 수련생 중 영어 번역이 가능한 3명의 수련생에게 번역을 부탁하니 흔쾌히 허락했습니다. 세 사람이 번역하면 제가 혼자 교정을 보고 딸이 대충 오·탈자 수정하고 글을 올렸습니다. 번역도 교정도 어설펐지만 모두 마음은 지극정성이었습니다.
얼마 후 팔로워를 늘리기 위해 번역자를 더 찾아 번역 수가 많아지자 교정은 저 혼자 해야 해서 출근하면 업무 결재 외에는 고개도 들 수 없는 상황이었습니다. 교정자를 더 찾기 전에 어떤 날은 혼자서 8편을 교정해야 해서 밤이 늦어서야 겨우 끝날 때가 많았습니다. 팔로워 수가 점점 늘어나면서 광고수입이 들어왔습니다. 그러다 보니 일반 매체의 기사 수준의 기사가 필요했고, 회사에서는 일반 기자 3명을 뽑았습니다. 매체에 젊은 수련생도 들어왔습니다. 우리는 얼마 후 그만두었고, 그 당시는 SNS가 제법 성공적이었습니다.
그 1여 년의 시간은 저에게는 초범적인 능력을 발휘하는 시기였고, 우리 지역 수련생들도 힘들다는 말 한마디 없이 정체(整體)적으로 움직였습니다. 지금도 그때 몇몇 수련생들의 사심 없는 협조를 생각하면 마음이 따뜻해지고 감사할 따름입니다. 그곳에서의 사명을 완수하고 나니 2018년 9월에 김해 6학급으로 발령이 났습니다. 다음 해에 수련생인 교사가 우리 학교로 전근 왔고, 저는 인성부장을 맡겨 아이들에게 진선인 인성프로젝트를 하라고 했습니다. 인성부장의 다양한 아이디어와 노력으로 아이들은 하루가 다르게 변했습니다. 다음 해에 그 프로그램은 학부모의 만족도가 아주 높았습니다. 제가 마지막 훈화를 할 때 6학년 학생들이 갑자기 땅에 엎드려 저에게 큰 절을 올렸습니다. 그날따라 전교생의 얼굴이 반짝반짝 빛났습니다.
그곳에서 1년 6개월 근무했을 때 갑자기 한 선배 교장이 전화가 와서 자기 학교로 꼭 오라고 했습니다. 전혀 갈 생각을 하지 않은 학교였지만 꼭 오라는 말에 이유가 있을 거라 생각하고 그곳으로 갔습니다. 그곳 참모들은 마치 저를 형제처럼 다정하게 대했고 모든 것이 평화로웠습니다. 그 학교에서 신수련생도 한 명 들어왔고 주변에 연공장도 하나 개설했습니다. 그리고 한 가지 일이 있었는데, 대학 시절에 알게 된 분이 있었습니다. 그분에게 션윈을 몇 번 소개했지만 보러 가지 못했었는데, 갑자기 그분으로부터 우리 학교 근처로 발령받게 됐다는 전화가 왔습니다. 제가 다시 한번 션윈을 소개해 그분은 션윈을 보았으며, 발령받은 지 6개월 만에 바로 고향으로 돌아가게 됐습니다. 이번 일로 저의 모든 이동은 사부님의 배치이며 전생의 인연관계를 해결하기 위해 세밀한 배치를 하신다는 것을 다시 또 느꼈습니다.
모든 것이 평화로워 이제 세인들과는 마음 닦을 일이 없다는 생각이 들어서 명퇴를 하고 싶었습니다. 명퇴신청을 할까 망설이는 어느 날 꿈에 누가 저에게 빚을 진 카드 두 장을 주었습니다. 눈을 뜨고 가만히 생각하니 아직 업이 2년이 더 남았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래서 저는 김해에서 한 번도 근무해보지 않은 지역으로 옮겨 마지막 점을 찍어야 한다는 생각이 불현듯 올라왔습니다. 제가 가고자 하는 학교에 전화해보니 그 학교 교장선생님도 다른 학교로 가기 위해 전보 신청을 하신다고 했습니다. 또 우연히도 이전에 자신이 교감으로 승진하면 우리 학교로 오겠다고 했던 교무주임도 우리 학교로 전보 신청을 했습니다.
그 학교 학생들은 어느 학교보다 인성이 바르고 교사들도 한결같이 책임감이 강해 제가 특별히 신경 쓸 일이 없었습니다. 가끔 교육청이나 교장단들이 우리 학교에 오면 어떻게 이렇게 학교가 깨끗하고 환하냐고 부러워했습니다. 아침마다 참모들 4명이 교장실에 모이면 마치 한 가족처럼 화기애애하게 업무를 이야기했고 2년 함께 있는 동안 한 번도 서로 얼굴을 붉혀 본 적이 없었습니다. 퇴직 때 선생님들은 이런 날은 오기 힘들 거라며 아쉬워했고, 좋은 말을 많이 해주었습니다.
이번 교장단 퇴직 송별회도 특별했습니다. 평소에는 김해에서 송별회를 하는데 갑자기 함양에서 송별회를 한다고 했습니다. 그곳은 바로 저의 첫 발령지였고, 저는 그곳에서 21살 때 첫 교사를 시작했습니다. 그곳에서 송별회를 한다니 마치 제가 큰 선물을 받은 기분이었습니다. 저는 39년 6개월이라는 긴 세월 동안 요령 한 번 피우지 않고 오직 교사로서 아이들을 사랑하며 나름대로 최선을 다했습니다. 대법을 만난 후에는 대법제자로서 학교에서 법을 알려야 하는 사명을 잊지 않았으며, 직장에서 만난 인연 관계에 매듭이 생기지 않도록 좋은 관계를 맺으려 노력했습니다. 이제 직업이라는 업을 시작한 이곳에서 마무리할 수 있도록 사부님께서 배려해주신 것이라 생각하니 눈시울이 시큰해졌습니다.
저는 송별식에서 줄 상패 문구에 제가 가장 좋아하는 문구를 써달라고 해서 ‘파룬따파하오, 쩐싼런하오’를 썼습니다. 송별식 날 김해 교장단이 모두 앉은 자리에서 사회자가 아주 큰 소리로 ‘파룬따파하오, 쩐싼런하오’를 소리 높여 읽었고 그 뜻까지 해석해 주었습니다. 저는 그 순간 사부님에 대한 감사함으로 가슴이 뭉클했습니다. 송별식이 끝나자 교장들은 하나같이 지금까지 송별식 중에 가장 엄숙하고 장엄한 송별식이었다고 속삭였습니다. 그날은 함양 산야에 눈까지 펄펄 내렸습니다.
20년 수련의 길에 많은 누락이 있었지만, 이 방면에서는 조금 착실히 수련한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하지만 이 모든 일은 모두 사부님의 세심한 배치와 보호로 이루어졌습니다. 소심한 제가 대법을 수련하지 않았다면 담담하고 평화롭고 소신 있는 교장이 절대 될 수 없었을 것입니다. 이 자리를 빌려 영광스러운 퇴직을 할 수 있도록 일체를 배치해주시고 보호해주신 사부님께 다시 한번 감사드립니다. 또한, 20년 수련의 노정을 함께 해 준 수련생 여러분께도 감사드립니다. 감사합니다.
(2024년 한국 법회 원고)
원문발표: 2024년 11월 19일
문장분류: 수련교류
원문위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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