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중국 대법제자
[명혜망] 대법 속에서 28년간 수련하면서 제 생명에는 천지개벽과 같은 변화가 일어났습니다. 이기적이고 자신감 없으며 가련하면서도 독선적이던 제가 선량하고 자신감 있으며 타인을 위하는 생명이 됐는데, 이는 대법의 위력과 은덕입니다.
1. 법 얻기 전의 비참했던 인생
제가 태어난 지 8개월 됐을 때 피부병에 걸려 머리에 종기가 났습니다. 가려움이 너무 심해 하루 종일 긁었고, 한번 긁으면 피가 나고 고름이 흐르고 누런 물이 흘렀습니다. 누런 물이 흐르는 곳마다 종기가 생겼고 물이 흐르지 않으면 딱지가 앉았습니다. 이 고질병을 30년간 매일 치료했지만 하루도 나아지지 않았습니다.
세 살이 됐을 때까지도 걸을 줄 몰랐습니다. 겨우 걸음마를 배웠지만 어디를 가든 대머리 상태였습니다. 학교에 다닐 때는 지식과는 담을 쌓은 듯 공부가 전혀 머리에 들어가지 않았습니다. 교과서를 베껴보라고 해도 베낄 줄도 몰라서 친구들의 사랑도 받지 못하고 선생님도 절 싫어하셨습니다.
11살이 됐을 때는 뇌수막염에 걸렸고 어머니가 며칠 밤을 지켜주셔서 살아났지만 이후로는 공부가 더욱 안 됐습니다. 12~13살이 되어서야 머리의 흐르는 종기가 나았지만, 이번에는 손으로 옮겨가 손에서 고름과 물, 피가 흐르기 시작했습니다. 산과 골짜기를 넘어 명의를 찾아다니고 각종 민간요법과 기이한 처방을 다 써봤지만 효과가 없었습니다.
이뿐만이 아니라 눈은 바람만 맞으면 눈물이 흘렀고, 황달성 간염, 류마티스, 심한 빈혈 등등의 병도 있었습니다. 이렇게 자신감 없고 소심하게 살면서 하루하루를 버티며 겨우 목숨을 이어갔습니다.
아가씨가 되어 공장에 들어갔을 때 다른 아가씨들은 하나같이 고운 손을 가졌지만 저는 손이 썩어들어가는 것 같았습니다. 감추고 숨기면서 매일 약을 바를 때도 남몰래 했고 사람들이 혐오할까 두려웠습니다. 결혼한 후에도 여전히 남편 몰래 매일 약을 발랐고, 남편은 약 냄새를 맡더라도 아무 말 없이 모른 척해주었습니다. 오랜 병고에 시달리면서 자신감을 잃었고 내성적이고 자신감 없고 괴팍한 성격이 됐습니다.
남편은 농촌 출신이었지만 학식이 있었고, 저보다 글재주가 있고 일 처리도 영리했습니다. 저는 원래 든든한 배경을 얻었다고 생각했는데, 뜻밖에도 제가 28살 때 남편이 교통사고로 세상을 떠났고 당시 아들은 세 살 반이었습니다. 교통사고 후 남편 직장 상사들도 최선을 다해 가해자 측과 협상했고 모든 의료비와 장례비를 부담해줬습니다.
저는 더 많은 도움을 받기 위해 남편 직장 가족동에 살게 해달라고 상사에게 요청했지만 거절당했고, 직장에 빈방이 있어도 저희에게 주지 않았습니다. 저는 남편 직장의 비어있는 방의 자물쇠를 부수고 들어가 아이와 시골에서 온 시어머니와 함께 강제로 들어갔습니다. 이 소동으로 남편 직장 사람들이 저를 매우 싫어하게 됐고 저는 혼자서 슬퍼하고 원망하고 분노만 하게 됐습니다. 그때의 저는 밤이면 혼자 가슴을 치며 발을 구르며 울곤 했습니다.
이것이 법을 얻기 전의 제 모습이었습니다. 제 세계는 칠흑같이 어두웠고 살아갈 희망도 보이지 않았으며 사람의 도리도 몰랐습니다. 일이 있을 때마다 억지를 부리고 무턱대고 덤볐습니다. 저를 도와준 사람들에게도 전혀 감사할 줄 모르고 도리어 분노하며 생각했습니다. ‘나는 이렇게 순진한데, 이렇게 많은 병고에 시달리고 말도 제대로 못하는데 늘 다른 사람들한테 업신여김을 당하고 피해를 당하니, 나도 악랄해져야겠다!’ 아들이 아직 어린데다 의지할 사람도 없으니 괴롭힘을 당하지 않도록 스스로를 지키게 해야 했습니다. 손톱을 길게 길러서 싸우다 이기지 못하면 할퀴기라도 해서 이기라고 했습니다. 한번은 시어머니와 다투다가 시동생 직장을 찾아가서 그를 욕하며 대신 분풀이를 했습니다.
나중에 대법을 얻지 못했다면 이렇게 발전해나가다가는 신경병은 아니더라도 최소한 신경질적인 사람이 됐을 것이고, 아이도 제가 망쳐놨을 것입니다. 파룬따파를 수련하지 않았다면 친정과 시댁 양가와도 왕래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늘 저 자신이 얼마나 가련한지만 생각했고, 다른 사람들이 모두 저를 도와줘야 한다고 생각했지만 그들은 저에게 마땅한 도움을 주지 않았기 때문에 늘 원망했습니다. 지금 생각해보면 무섭기까지 합니다.
2. 사부님께서 더러운 심연에서 날 건져내 깨끗이 씻어주시다
1996년 초, 사촌 언니가 늘 제 귓전에 파룬궁에 대해 말했고 《파룬궁(法輪功)》이라는 수련서도 주었습니다. 저는 매일 밤 침대에 앉아서 책을 읽었고 읽을수록 이해가 되고 마음이 환해졌습니다. 인생에서 이해할 수 없었던 것들, 제 병고와 시련이 무엇 때문인지 모두 알게 됐습니다! 이 법은 어찌 이리도 좋을까요?! 사람의 지식 수준이나 귀천을 따지지 않고 모두 수련할 수 있고, 진정으로 수련하면 사부님께서 모두 책임지신다니, 이렇게 좋다니! 저는 무슨 일이 있어도 수련해야겠다고 생각했습니다.
법을 얻은 후 저의 모든 병이 다 나았습니다. 30년 동안 저를 괴롭혔던 피부병도 나았고 피부가 매끄럽고 고와졌습니다. 저는 완전히 새사람이 됐고, 진선인(眞·善·忍)의 기준에 따라 새롭게 사람이 되고 수련인이 됐으며, 매일 명랑하고 낙관적이 되어 마음속으로 노래를 부르기 시작했습니다.
한번은 시어머니가 저와 다투면서 제가 시어머니의 신발을 가져가 버렸다고 우기셨습니다. 저는 다투지 않고 직접 가서 새 신발을 골라 선물해드렸습니다. 나중에 시누이가 제게 말했습니다. “어머니 신발이 소파 밑에 있었어요! 찾았어요.” 저는 웃으며 말했습니다. “제가 공법을 연마하지 않았다면 이렇게 하지 못했을 거예요!”
저는 남편 직장 가족동에 강제로 들어간 것이 잘못됐다고 생각해서 그곳에서 나와 친정으로 갔습니다.
남편이 세상을 떠났을 때 남편 직장에서는 시어머니와 시할머니 명의로 위로금 두 건을 신청해서 저와 시어머니에게 매달 지급했습니다. 시어머니가 돌아가신 후 저는 자발적으로 남편의 상사를 찾아가 위로금 지급을 중단해달라고 요청하며 정치공작과 직원에게 말했습니다. “시어머니와 시할머니가 모두 돌아가셨으니 이 두 건의 위로금을 더 이상 받지 않겠습니다! 앞으로는 지급하지 말아주세요.” 그들은 제게 그해의 몫은 받고 그 이후부터 지급하지 않는 게 어떠냐고 권했습니다. 저는 그래도 그해의 몫도 받지 않겠다고 했습니다. 남편 직장에 이런 소문이 퍼졌습니다. “파룬궁수련생은 받지 말아야 할 돈은 받지 않는구나!”
부모님은 아들 셋을 두셨는데 아들들은 모두 돈과 권세가 있었습니다. 하나뿐인 딸인 저만 가세가 기울고 의지할 데가 없었습니다. 친정에서 1년 남짓 산 후 형제들은 모두 제가 운이 없다며 싫어했고 아버지는 계속 재혼하라고 강요하셨습니다. 재혼하지 않자 2년 후 아버지는 저희 모녀를 내쫓았습니다. 친정에는 2층짜리 안채가 있고 방도 많아서 제가 월세를 내겠다고 제안했지만 아버지는 그것도 허락하지 않으셨습니다. 저는 법의 기준에 따라 자신을 요구하며 아버지와 다투지 않고 제 직장에 가서 복지주택을 구했습니다. 직장에는 저에게 제공할 집이 없었고 단지 아이를 데리고 단체 숙소에 살 수는 있지만 장롱은 가져올 수 없다고 했습니다.
베이징에 가서 파룬궁을 위해 청원한 후 직장에서 부당하게 저를 해고했고 저는 일자리를 잃었습니다. 그래서 보모, 간병인, 주방장 일을 했습니다. 사부님의 자비로운 보호 아래 생활은 비록 청빈했지만 늘 돈이 부족하지는 않았습니다. 어디서 일을 하든 저는 항상 자신이 수련인이라는 것을 생각하며 수련인의 기준으로 자신을 엄격히 요구했습니다. 손해 보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고, 모든 일을 할 때 다른 사람들이 마음으로 인정할 만큼, 뒷말이 나올 수 없을 정도로 최선을 다했습니다. 특히 일을 그만두기 직전일수록 더욱 완벽하게 일을 처리하려 노력했고, 구석구석 위생을 깨끗이 하고 빈틈없이 청소했으며, 짠지와 김치도 모두 준비해놓고 인수인계를 했습니다. 보통 사람들처럼 떠날 것을 알면서 모든 것을 팽개치거나 건성으로 하지 않았습니다. 시시각각 자신이 파룬따파가 좋다는 것을 실증해야 한다고 생각했기에 떠날 때는 고용주들이 항상 아쉬워했습니다.
상점에서 주방장으로 일할 때, 일용직 근로자들이 먹다 남은 밥과 반찬을 마음대로 버렸습니다. 저는 늘 아이들에게 음식을 낭비하면 안 된다고 충고하며 함부로 밥과 반찬을 버리지 말라고 하고 사람의 도리를 가르쳤습니다. 옆 상점 여사장이 쌀을 씻을 때도 늘 쏟고 흘려서 하얀 쌀이 물과 함께 흘러가곤 했는데, 저는 여러 번 선의로 충고하며 물건은 그 쓰임을 다해야 하고 사람은 복을 아껴야 한다고 말했습니다. 시간이 지나자 그들도 모두 바뀌었고, 진심으로 감사해 하며 “아주머니는 어떻게 이렇게 좋으신가요!”라고 했습니다.
한번은 남편의 옛 직장 동료 집에서 중풍으로 반신불수가 된 그의 아내를 간병하는 일을 했습니다. 이렇게 해서 저는 다시 전에 살았던 남편 직장 가족동에 오게 됐습니다. 저는 수련인의 기준으로 자신을 요구하며 고용주 집안일을 온 마음을 다해 했고, 관용으로 사람을 대하며 자신을 엄격히 단속했습니다. 당시 휴대전화는 아직 귀한 물건이었고 보통 사람들은 휴대전화로 전화하기를 아꼈지만, 제가 일이 있어 연락할 때는 늘 제 휴대전화로 통화했고 고용주 집 전화도 사용하지 않았습니다. 고용주 집에서 간병할 때는 여가 시간에 고용주 집 전체 건물의 계단과 가족동 내 지면까지 깨끗이 쓸었습니다. 남편의 동료는 제게 말했습니다. “모두들 당신이 어떻고 어떻게 나쁘다고 하던데, 제가 보니 당신은 참 좋은 사람이네요!”
이렇게 한동안 간병하고 나니 남편 옛 직장 동료들의 저에 대한 인상이 완전히 바뀌었고, 제가 대법을 수련해서 그렇다는 것을 알게 됐습니다. 저는 실제 수련으로 파룬따파가 좋다는 것을 실증했고, 수련하기 전의 비이성적인 행동으로 인한 나쁜 영향도 만회했습니다. 바로 이 집에서 제가 일을 그만둔 지 6년이 지난 후에도 여러 방법으로 사람을 통해 저에게 구두 전갈을 보내며 다시 와서 일해주길 원했습니다.
단체 숙소에서 1년을 살고 나서 한 수련생이 외지에서 일하러 가면서 그의 집을 저에게 빌려주어 저와 아들은 드디어 자기만의 공간을 갖게 됐습니다. 나중에 여직원의 소개로 낡은 단층집을 구입했습니다. 혼자서 아이를 키우는 여자는 살아가기도 힘든데 세태가 날로 험해지고 주위의 선량하지 않은 사람들이 저희 모자를 많이 괴롭혔습니다. 하지만 제 마음속에는 대법이 있어서 더는 외롭지도 두렵지도 않았고, 저는 늘 즐겁게 수련인의 마음으로 진심을 다해 사람을 대하고 일을 처리했으며, 원망하거나 미워하지 않고 계산하거나 보복하지 않았습니다.
낡은 집을 사서 막 이사 왔을 때, 이웃에 결혼한 남자 교사가 한 명 있었는데 제가 사람을 따뜻하고 선하게 대하는 것을 보고 여러 차례 밤에 제 집에 와서 제게 이상한 말로 유혹하며 밤에 단둘이 외출하자고 했습니다. 저는 좋은 말로 타이르며 그에게 사람 된 올바른 이치를 설명했습니다. 그는 제 인품을 이해하고는 나쁜 마음을 버리고 더는 제 집에 와서 성가시게 하지 않았습니다. 나중에 한번은 이 교사가 어떤 구실로 입에 담지 못할 더러운 말로 악랄하게 저를 욕했습니다. 저는 맞받아치지 않고 여전히 그와 이치를 얘기하며 좋은 말로 타이르기만 했습니다. 그 후 저는 그의 아내를 찾아가 물었습니다. “무슨 일로 당신 남편의 기분을 상하게 했는지 모르겠는데, 그분이 제 집에 와서 함부로 욕하고 저를 모욕했어요.” 그의 아내는 깜짝 놀라며 연신 부인했습니다. “그럴 리가 없어요?! 그 사람은 평소 집에서 당신이 좋은 사람이고 교양이 있다고 칭찬하곤 했는데요!” 저는 제가 법의 요구에 따라 바르게 행하고 단정하게 하기만 하면 악행을 저지른 사람도 마음속으로는 탄복한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아들이 대학에 다닐 때 저는 집에서 낡은 집을 새로 지었습니다. 집 오른쪽의 정 씨 이웃은 제가 낡은 집을 새로 짓는 과정에서 온갖 트집을 잡고 도발을 계속했습니다. 저는 수련인의 큰 인내심[大忍之心]으로 대했고, 무슨 일이든 그와 따지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마음속으로도 내려놓으라고 자신에게 요구했습니다! 새집이 지어진 후에도 저는 여전히 마음에 앙금이 없었고, 오로지 자신에게 정 씨를 선하게 대하라고 요구했으며, 일상생활에서 일이 있을 때도 여전히 먼저 그의 집에 이로운 일을 했고, 그도 가끔은 미안한 기색을 보였습니다.
법을 얻은 지 28년 동안, 저는 밖에서 얼마나 많은 괴롭힘과 억울함을 당했고 다른 사람들이 저를 얼마나 불공평하게 대했든 아들에게 말한 적이 없었고, 아들에게 원한과 악의 씨앗을 심지 않았으며, 오직 진선인으로 아들을 교육하고 이웃을 포함한 다른 사람을 선하게 대하도록 가르쳤습니다.
대법제자의 착실히 수련하는 언행도 세인들을 감화시켰습니다. 시누이는 시댁 형제가 많아서 시댁 사람들이 그녀를 업신여겼고, 그래서 그녀는 시어머니를 매우 원망했습니다. 저는 평소에 늘 그녀에게 사람의 도리와 업력윤보의 관계를 설명했고, 그녀도 시어머니에 대한 태도를 바꿨습니다. 어느 날 그녀가 갑자기 제게 말했습니다. “새언니가 저도 구해주셨네요!” 저는 말했습니다. “제 사부님께서 아가씨를 구하신 거예요.”
시동생도 제가 혼자서 아이를 데리고 사는데 그 부부보다 더 잘산다고 칭찬했고 저는 그에게 말했습니다. “제가 대법을 수련해서 받은 복이에요!” 저도 최선을 다해 시동생의 집안일을 도왔습니다. 그들 부부가 외지에 나가 일할 때 아이를 제게 1년 남짓 맡겼는데, 먹고 자고 쓰는 것에 모두 제가 돈을 냈고 그들이 돈을 주려고 해도 받지 않았습니다. 통장을 제 수중에 두고 필요할 때 마음대로 쓰라고 했지만 저는 건드리지도 않았고, 그들이 집에 돌아왔을 때 원래대로 돌려줬습니다. 사부님께서 저희 모녀에게 이렇게 좋은 몸을 주셨고, 28년 동안 저희 모녀는 약도 먹지 않고 주사도 맞지 않았으며, 경제적으로도 자급자족할 수 있었기에 저는 친척들과 일일이 따지지 않았습니다.
3. 속세에서 딸의 역할을 잘 연기하다
친정 부모님이 80세가 넘으신 후 모두 병상에 누우셨습니다. 형제 셋은 일찍이 개인 주택을 지어 따로 살았고 조건도 모두 넉넉했지만 누구도 가까이 하지 않았고 부모님을 돌볼 일에 대해 자발적으로 나서는 사람이 없었습니다. 마침 제가 퇴직하고 집에 있어서 자발적으로 친정에 가서 살면서 부모님을 간호하는 중책을 맡았습니다. 1년 남짓 동안 물과 밥을 떠 먹이고, 대소변을 받아내고, 정성껏 돌보며 태만하지 않았고, 때로는 밤잠도 이루지 못했습니다.
어머니가 중병으로 입원했을 때 의사는 2, 3개월밖에 살지 못한다고 했지만 대법의 복덕과 제가 정성껏 돌보아 1년이 넘어서야 돌아가셨습니다. 친척들도 대법의 신기함을 보았고 제가 안팎으로 혼자서 감당하며 두 분을 깨끗이 돌보고 집안을 정리정돈하는 것을 직접 목격하고는 모두 대법이 좋다고 인정했습니다. 이후 아버지의 장례식에서 사촌 오빠가 직접 큰오빠에게 제게 술을 따르라고 제안하며 두 분을 정성껏 돌본 것을 칭찬했습니다. 큰오빠는 술을 따르며 진심으로 제가 신앙이 있는 사람이라고 찬탄했습니다!
대법을 수련하지 않았다면 저는 그렇게 양친을 모시지 않았을 것입니다. 아버지는 늘 남아선호 사상이 있어서 저를 박하게 대하셨습니다. 형제들은 모두 부유했지만 아버지는 말씀하셨습니다. “손주들 중에서 대학에 합격하는 사람이 있으면 학비를 모두 내주겠다.” 손자 둘과 손녀 하나가 대학에 갈 때마다 매년 아버지는 돈을 주셨습니다. 하지만 제 아들이 대학에 합격했을 때는 간단한 선물만 보내셨습니다. 올케들도 아들들은 모두 아버지가 관여할 필요가 없으니 저만 관리해주시라고 직접 말했지만 아버지는 신경 쓰지 않으셨고, 매번 어머니를 감시하고 통제하며 저에게 돈을 보태줄까 봐 두려워하셨습니다. 제 아들이 중학교 다닐 때 사립학교에 다녔는데 아버지는 오빠에게 저를 말리라고 하셨고, 나중에 자신의 돈을 쓰게 될까 봐 두려워하셨습니다. 사실 저는 한 번도 다른 사람의 도움을 바란 적이 없었지만 아버지는 친정집 임대료도 제가 손댈까 봐 두려워하셨습니다. 친정에서 저는 일만 할 수 있었고 남은 밥과 반찬을 먹을 수 있었지만, 경제적으로는 전혀 기대할 수 없었습니다. 저는 전혀 따지지 않았고 많이 생각하지도 않았으며, 그저 대법의 기준에 따라 행동하고 진선인에 따라 자신을 요구했습니다.
속세에서 딸의 역할을 잘 연기하는 것은 제가 법을 세상에서 잘 원융하는 한 부분입니다. 진상을 알리고 중생을 구하는 것은 제가 대법제자로서 해야 할 사명이며 더욱 중요합니다. 저는 부모님 댁에서 법공부 팀을 만들었고, 제 가정 자료점도 부모님 댁으로 옮겼으며, 진상 알리기용 지폐와 진상 자료를 끊임없이 수련생들에게 공급했고, 평소에 기회가 있을 때도 직접 만나서 진상을 알리고 사람을 구했습니다.
아버지는 저를 박하게 대하셨지만 제가 친정에서 법공부 장소를 만드는 것은 반대하지 않으셨고, 오히려 사람이 많이 올수록 아버지는 더욱 기뻐하시며 마음속 깊이 다른 사람에게 인정하셨습니다. “딸이 하나 있어서 다행이야!” 돌아가시기 이틀 전, 병원에 계실 때 아버지는 외치셨습니다. “파룬따파하오(法輪大法好-파룬따파는 좋습니다), 쩐싼런하오(眞善忍好-진선인은 좋습니다)!” 의사가 물었습니다. “뭐라고 외치시는 거예요?” 아버지는 말씀하셨습니다. “나는 파룬따파가 좋고, 진선인이 좋다고 외치는 겁니다!” 모두가 크게 웃었습니다.
4. 정념정행으로 사부님의 은혜에 보답하다
저는 시댁 방면 수십 리에서 아주 좋은 평판을 얻었고 주민들은 저를 칭찬했습니다. 28살에 과부가 되어 그렇게 젊은 나이에 혼자서 아이를 키워 성장시키고 대학까지 보냈으며, 새 집까지 지었으니 정말 대단하다고 했습니다! 모두들 제가 파룬궁을 수련해서 그렇게 할 수 있었다고 인정했습니다.
1999년 7월 장쩌민이 중국에서 대법을 박해하고 사부님을 비방하기 시작했습니다. 2000년 말, 저는 수련생과 함께 베이징에 가서 대법을 실증했습니다. 돌아온 후 저는 현지 구치소에 3개월 남짓 불법 구금됐고, 3천여 위안의 벌금을 내고서야 풀려났습니다. 당시 제 월급은 500위안이 채 되지 않았습니다. 초기 몇 년은 제가 박해를 가장 심하게 당한 몇 년이었고, 악인과 악질 경찰들이 수시로 집에 들이닥쳤습니다. 하지만 저는 세인들에게 진상을 알리는 것을 한 번도 게을리한 적이 없었고, 진상자료를 배포하고 진상 현수막을 걸고 진상 스티커를 붙이는 등 대법이 사람을 구하는 항목이라면 제가 할 수 있는 것은 모두 잘하려고 노력했습니다.
2001년, 한번은 수련생들과 중생을 구하기로 약속했는데, 저는 집에서 등사기로 진상자료를 제작할 준비를 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한 수련생이 올 때 직장 당서기의 미행을 당했고, 파출소에서 경찰 몇 명을 보내 저를 집 밖으로 끌어내고 마대 두 개 정도의 진상자료와 현수막을 압수해갔습니다. 파출소에서 경찰들이 번갈아가며 불법 심문했고, 5일밤 동안 잠을 못 자게 했으며 제가 눈만 감으면 누군가가 곤봉으로 저를 때리며 욕설과 위협, 공갈을 했습니다. “너를 때려죽일 테다! 가솔린으로 태워 묻어버릴 거야!…너한테서 이렇게 많은 물건을 압수했는데, ○○는 전단지 한 장으로도 3년 형을 선고받았어!…네 아들이 더는 학교에 다니지 못하게 할 거야!” 저는 속으로 생각했습니다. ‘당신이 결정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불법 구금 기간에 저는 같은 감방의 수감자들에게 ‘홍음(洪吟)’과 ‘대법(大法)은 견고하여 파괴할 수 없다’ 등의 경문을 외우도록 가르쳤습니다. 제가 감방에서 연공하면 간수가 저에게 돌멩이를 던졌지만 저는 전혀 마음이 흔들리지 않았습니다. 불법 구금 한 달 후, 저는 구치소 악한 간수들에게 선을 권하는 편지를 쓴 후 단식으로 박해에 저항하기 시작했습니다. 5일 동안 먹지도 마시지도 않았는데, 7~8명이 저에게 강제로 음식물을 주입했고, 손을 붙잡고, 발을 밟고, 머리를 누르고, 배를 밟고, 이빨을 비트는 등의 행위를 했습니다. 같은 감방의 수감자들이 모두 구치소에 저를 집으로 돌려보내라고 했습니다. 나중에 제가 거의 죽을 지경이 되어서야 집으로 돌려보냈습니다.
한 달 후, 저는 초등학생인 아이를 데리고 진상을 붙이러 갔다가 잠복해 있던 경찰에게 발각됐습니다. 아이가 제 다리를 붙잡고 외쳤습니다. “우리 엄마를 잡아가지 마세요!” 하지만 경찰은 여전히 저를 데려갔습니다. 아이는 혼자서 집으로 돌아갔습니다. 저는 지난번과 같은 감방에 갇혔습니다. 수감자들이 제게 말했습니다. “지난번에는 단식으로 나갔는데 이번에는 안 될 거예요!” 저는 속으로 말했습니다. ‘당신들이 결정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저는 여전히 생사를 내려놓고 단식으로 박해에 저항했고 13일 후에 풀려났습니다. 강제로 음식물을 주입할 때 제가 거부한 음식이 옷에 흘렸는데, 구치소에서 나올 때는 음식물에 모두 흰곰팡이가 피어있었습니다.
2003년 정월대보름, 수련생들과 함께 자전거를 타고 기차역에 가서 진상자료를 배포하다가 저 혼자 붙잡혔고, 철도 직원 20여 명이 저를 가두고 밤새 심문했습니다. 사진을 찍을 때 저는 협조하지 않았고 그들 몇 명이 제 머리카락을 잡아당기며 사진을 찍었습니다. 저는 그들에게 말했습니다. “당신들이 찍으세요. 이것이 바로 당신들의 범죄 증거입니다!” 그들은 이 말을 듣고 두려워서 더는 찍지 않았습니다. 사부님께서 저에게 지혜를 열어주셨고 사부님의 가지(加持) 속에서 제 말은 막힘없이 술술 나왔으며, 끊임없이 그들에게 진상을 알렸습니다. 그들 20여 명의 직원이 저 한 여자를 당해내지 못했고 마지막에는 제게 물었습니다. “당신은 어느 학교에서 교편을 잡으시나요?”
날이 밝자 저를 철도 파출소에 가뒀습니다. 같은 감방의 암표상들은 제가 파룬궁을 연마한다고 듣자 저를 매우 두려워했고, “파룬궁수련생들은 자살하고 살인한다!”고 했습니다. 한밤중에 새로 들어온 암표상들이 있으면 저는 제가 몸으로 데워놓은 자리를 그들에게 양보하고 제가 차가운 곳으로 가서 있었으며, 그들에게 끊임없이 진상을 알렸습니다. 날이 밝자 기회를 찾아 경찰에게도 진상을 알렸습니다. 철도 파출소에서 며칠간 불법 구금된 후 시 구치소로 이송되어 계속 불법 구금됐습니다. 저는 여전히 단식으로 박해에 저항했습니다.
네 번의 불법 구금에서 저는 오로지 대법에 대한 확고한 믿음으로 생사를 내려놓고 홀로 관문을 뚫고 나와 구세력이 배치한 시련을 끝냈습니다. 제자를 위해 감당해주신 사부님께 감사드리며, 또한 여러 번 정념으로 저를 도와 난관을 뚫고 나가게 해주신 수련생 여러분께도 감사드립니다.
수련이 날로 성숙해지면서 저의 정법수련의 길도 갈수록 넓고 평탄해졌습니다. 28년의 수련 과정에서 사부님께서 주신 것이 너무나 많아서 사람의 말로는 표현할 수 없습니다. 저는 끝까지 사부님을 따라 수련하겠습니다!
사부님께 절을 올립니다! 수련생 여러분께 감사드립니다!
원문발표: 2024년 11월 10일
문장분류: 수련교류
원문위치:
正體 https://big5.minghui.org/mh/articles/2024/11/10/484403.html
简体 https://www.minghui.org/mh/articles/2024/11/10/484403.html