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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위스 법회] 안으로 수련해 근본적인 집착을 찾다

글/ 스위스 대법제자

[명혜망]

존경하는 사부님 안녕하세요!
수련생 여러분 안녕하세요!

저는 대법을 수련한 지 여러 해가 지나도록 진정한 수련에 대한 이해가 그리 깊지 않았습니다. 스웨덴에 살 때는 진상을 알리는 활동에도 많이 참여하고 연공장도 자주 나가며 나름 정진했습니다. 하지만 취리히로 이사한 후 수련 환경은 많이 변하면서 그리 정진하지 못했는데, 법공부를 깊게 하지 못하고 임무완성 식으로 했습니다. 특히 단체 법공부 때 더욱 그랬습니다. 발정념을 할 때도 정신을 집중하기 어려웠습니다. 평소 다른 사람을 잘 도와주고 다양한 대법 활동에도 참여했지만, 그건 단지 수련생들과 함께 있는 것이 좋아서였지 법을 이해하고 자신을 수련하기 위해서가 아니었습니다. 그리하여 중생을 구해야 한다는 선한 마음도 약해졌습니다.

돌이켜보면 저는 늘 남들의 시선이 있거나 시간에 쫓길 때만 마지못해 움직였습니다. 제가 연공을 시작한 것은 건강을 유지하기 위해서였는데, 체면이나 건강 문제로 인한 외부적 ‘압박’이 없었기 때문에 매우 수동적이었습니다.

이런 상태의 뿌리를 파보니, 인생과 고난에 대한 저의 진정한 자아 인식이 천박한 유물론과 무신론 교육 때문에 억제됐기 때문이었습니다. 더 높은 생명이 있다고 믿지 않고, 고통의 이면에 깊은 의미가 있다고 믿지 않은 겁니다. 이는 현실 도피와 비슷합니다.

저는 또 삶의 의미와 세상 만물의 가치를 느끼지 못하고 신이 실제로 존재하는지 확신하지 못했습니다. 저는 종교 교리와 영화를 통해 이와 관련된 것들을 알게 됐지만, 동화 이야기처럼 느껴졌고 신성(神性)과 사후, 그리고 생명에 대한 믿음이 부족했습니다. 이 문제를 깊이 깨달아야 진정한 수련 동기가 생길 수 있습니다.

저는 그동안 높은 법리의 지도가 없었기에 표면적인 좋은 모습에 만족했고, 좋고 나쁨은 사회와 가족, 친구들의 견해에 의해 결정됐습니다. 그래서 제가 겪는 질병과 고통을 불행으로 여겼고 제 잘못과 상관이 없다고 생각했습니다.

저는 어렸을 때부터 아버지께서 화를 내고 혼내는 걸 무서워했는데, 그러다 보니 실수를 두려워하게 됐고, 늘 다른 사람들에게 인정받길 원했습니다. 그래서 다른 사람에게 중시 받는 즐거움에 의존하면서 점차 자신의 주관이 없어졌습니다.

이런 두려움과 무의식적인 분노는 사실 가상이었습니다. 두려움은 사람을 위축시키고 자신을 하찮은 존재라고 생각하게 만듭니다. 열등감을 감추기 위해 저는 사회적으로 유행하는 것이나 남들이 좋다고 생각하는 것들에 편승하려 했는데, 그러려면 다른 사람들을 기쁘게 해줘야 하고, 자신을 바꿔야 했습니다. 하지만 사실 저는 다른 사람의 분노나 좋지 않은 감정을 마주하는 것이 두려워 무의식적으로 그런 것들을 피하려고 했던 것이었습니다.

저는 주로 스포츠, 공부, 그리고 좋은 행동거지로 다른 사람의 인정을 받으려 했습니다. 학교에서는 좋은 성적을 얻기 위해 지식을 배웠는데 그 이면에는 자신이 못나게 보여 친구들에게 배척당할까 봐 두려워하는 마음이 있었습니다. 이 때문에 저는 더 훌륭한 친구나 더 인기 있는 친구들을 질투했습니다. 하지만 이런 열등감, 실수에 대한 두려움, 다른 사람 눈치 보기는 갈수록 저를 힘들게 했고, 점점 더 소심하고 불안하게 만들었습니다. 저는 즐겁게 생활할 수 없었고 다른 사람을 신뢰하는 마음도 잃게 됐습니다.

사부님께서는 ‘전법륜(轉法輪)’에서 말씀하셨습니다. “왜냐하면 중국에서는 질투심의 표현이 극히 강렬하며, 강렬함이 이미 자연스럽게 형성되어 자신마저도 느끼지 못하기 때문이다.”

수련을 시작한 후 이런 문제들이 얼마나 깊이 숨겨져 있는지, 그것이 저의 행동과 사고에 어떤 영향을 미치는지, 그리고 자신의 잘못을 인식하는 것을 어떻게 방해하는지 깨닫는 데 꽤 오랜 시간이 걸렸습니다. 이런 문제들은 여전히 진정한 저를 통제하고 있었습니다. 저는 질투심이 자신의 가치를 과소평가하게 하고, 자신의 신의 일면과 격리되게 한다는 사실을 알게 됐습니다.

제가 보기에 공산주의는 우리의 자존감과 긍정적인 삶의 자세와 신에 대한 신앙을 무너뜨렸습니다. 이보다 더 위험한 게 있을까요? 이는 또 원망, 고통, 분노와 같은 나쁜 감정을 불러일으킵니다.

여기까지 생각하니 물거품 같은 가상 속에서 살아가는 세상 사람들이 가련하게 느껴지는 동시에 사부님께 감사했습니다. 사부님께서 우리에게 사람들을 구하라고 하셨기에 우리는 파룬따파(法輪大法, 파룬궁) 수련자로서 반드시 사명을 완성해야 하며 포기하지 말아야 합니다.

헛된 법공부에서 벗어나다

저는 얼마 전부터 법공부를 더 진지하게 대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런데 법공부 팀에서 법공부할 때 늘 정확하게 읽는 것을 추구하거나 더 높은 깨달음을 추구하려는 마음이 있다는 것을 발견했습니다. 그 이면에는 실수를 두려워하는 마음이 있었는데, 이는 저를 진정으로 조용한 상태에 있지 못하게 만들었고, 이 때문에 법을 깊이 이해하지 못하고 헛되게 읽는 상태가 나타났습니다.

혼자 법을 읽을 때는 그런 두려움에서 벗어날 수 있었지만 자주 졸렸습니다. 하지만 자신에게 이런 집착심이 있다는 사실을 받아들이자 집중력이 높아졌고, 법공부를 하는 동안 법이 어떻게 제 수련을 지도하는지 더 잘 알게 됐습니다.

법을 읽을 때 정념을 갖지 못하면 법공부는 전혀 소용이 없으며 심지어 퇴보하게 합니다. 자기도 모르게 두려워하는 상태에서 법을 읽으면, 집착 속에서 집착을 없애려고 하는 것처럼 변화가 매우 느립니다. 과거 동굴에서 수련하던 그런 스님들처럼 말입니다.

사부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특히 법 공부 중에서, 여러분은 반드시 참답고 참답게 배워야 한다.”(각지 설법11-대법제자는 반드시 법 공부를 해야 한다)

제 이해로는, 이는 사부님께서 우리에게 법에 용해되라고 가르쳐주신 겁니다. 머리가 맑은 상태에서 존경하는 마음을 갖고 진심으로 법공부를 해야만 법이 드러나 반본귀진(返本歸眞, 진정한 자신의 본원으로 돌아감)하게 해줍니다.

속인 환경에 있는 딸을 이끌어주다

반년 전, 딸은 오른발 엄지발가락이 감염되어 학교에서 체조를 할 수 없었고, 고전무용 수업에도 참여할 수 없었습니다. 족욕과 약초로 치료하니 며칠 후 나아서 평소처럼 춤추고 뛰어놀 수 있게 됐습니다.

그런데 이 일이 수련과 무슨 상관이 있을까요? 제가 보기에는 딸의 불만과 관련이 있는 것 같았습니다. 딸은 늘 우리가 자신을 충분히 돌보지 못한다고 생각했습니다. 물론 염증은 업력 때문이고, 딸이 자신의 내면의 힘을 찾고 신과 연결될 수 있게 하려는 것일 수 있습니다. 하지만 겉으로는 부모의 관심이 부족한 데 대한 불만으로 표현되었습니다.

아내는 간호사여서 퇴근하고 집에 돌아오면 매우 피곤합니다. 한동안 고관절 통증도 심했습니다. 저도 일을 하다 보니 먼저 딸에게 다가가서 놀아주고 가르쳐주기 힘들었습니다. 그래서 늘 딸에게 동화 이야기 녹음을 틀어주고 혼자 듣게 했습니다.

가끔 제가 해야 할 일들을 말해주면 딸은 듣기 싫어했습니다. 그러면 저는 거절당하는 것 같아 기분이 나빴는데, 이는 제가 비판받는 것을 좋아하지 않고 존중받고 중시받기 좋아하는 것과도 관련이 있었습니다. 하지만 수련생에게 있어서 비판받는 것은 좋은 일입니다. 안으로 찾아 자신의 문제를 발견하는 데 도움이 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딸과의 문제들로 인해 저는 더 겸손해지고 다른 사람들의 비판에 귀 기울이는 법을 배웠습니다. 또한 타인에게 인정받고 싶어 하는 집착도 발견하게 됐습니다.

저는 어려서부터 신과의 연결이 끊겼지만 수련생으로서 비판에 대한 두려움을 내려놓자 자신감과 신성(神性)을 회복했습니다. 이와 동시에 덕을 쌓고 업력도 없앴습니다. 이 과정의 고통스러운 느낌은 제가 곧 제거될 ‘두려움’을 여전히 완전히 내려놓지 못했기 때문이었습니다.

딸은 학교에 다니면서 가끔 막막함을 느끼는데, 이는 제가 반드시 받아들여야 하는 현실입니다. 요즘 시대에 학교는 아이들 삶의 중요한 부분이 되었는데, 딸은 친구들과 학교 수업의 영향을 깊이 받아 경쟁심이 컸습니다. 또 여자아이라 외모를 꾸미고 예쁜 것을 갖고 싶어 하는 욕망도 큰데, 이는 질투심을 불러일으키기 쉽습니다.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우리는 자주 딸과 함께 법을 읽었습니다.

딸이 얼마나 이해할 수 있는지 모르지만 어느 날 집에 와서 학교 친구들이 모두 좋은 면도 있고 나쁜 면도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고 말했습니다. 저는 매우 기뻤습니다. 딸이 어떤 문제로 힘들어하면 저와 아내는 딸에게 마음을 가라앉히게 한 다음 어떤 집착이 있는지, 신체 어디에 반영되었는지 찾아보게 합니다. 우리는 자주 딸에게 덕과 업이 어떻게 전환되고, 딸의 행동이 덕과 업의 전환에 어떤 영향을 주는지 일깨워줍니다. 또 가끔 전통문화 이야기, 고전발레와 좋은 가치관이 담긴 옛날 영화를 보여주기도 합니다.

뿌리 깊은 관념을 타파하다

저는 ‘스위스법회 설법’을 읽고 학교에서 가르친 과학 자체가 종교이며, 또 매우 은폐적이고 사악한 세력이 인간성과 신에 대한 믿음을 파괴하려고 만든 것임을 깨달았습니다.

수련을 시작한 초기에 저는 사부님께서 밀어주셔서 앞으로 나아가는 것을 느꼈고, 대법에 매우 확고한 신념을 갖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과학의 관념이 너무 뿌리 깊어 그런 믿음이 점차 사라졌습니다. 사부님께서는 과학은 보는 것만 믿게 한다고 말씀하셨는데, 저는 이 말씀이 옳다고 생각합니다. 수련은 정반대이므로 반드시 보기 전에 먼저 믿어야 합니다. 저는 정념으로 법공부를 하지 않아 몇 년이란 시간이 걸려서야 대법에 대한 확고한 신념을 회복했습니다.

사부님께서는 ‘전법륜’에서 “사람은 가장 진귀한 것으로서 만물의 영장”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는 인간만이 만물의 영장이 될 수 있고, 신성을 지닌 창조자가 될 수 있음을 의미합니다. 이는 신의 자비의 체현입니다.

연공으로 건강해지다

연공을 할 때 어떤 상태여야 할까? 오랫동안 저는 병을 제거하고 몸을 건강하게 하겠다는 생각으로 연공했습니다. 이는 제 마음속 깊은 곳에서 병에 걸려 고통을 겪는 것을 두려워하고 죽음을 두려워하며, 여전히 신체에 집착했기 때문이었습니다.

저는 정신이 병을 초래한다는 것을 한동안 믿기 어려워했습니다. 그러나 이제는 병의 배후에 집착이 있으며, 집착의 배후에는 모두 고통에 대한 두려움이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습니다. 이 두려움은 집착 자체의 두려움이지 진정한 자아가 아닙니다. 제가 그것을 인정하고 믿었기 때문에 몸에 불균형이 생기고 일정 시간이 지나면 병이 생겼습니다. 몸은 항상 제 생각을 따르고 그런 생각을 반영하기 때문입니다.

사부님께서는 ‘전법륜’에서 말씀하셨습니다. “기공(氣功)은 곧 수련(修煉)이다”.

그러나 저는 수련은 몸을 치유하는 것이 아니라 마음을 닦는 것임을 깨닫는 데 오랜 시간이 걸렸습니다. 연공할 때는 마땅히 아무런 추구함이 없이 집착을 내려놓은 평온한 상태에 있어야 합니다.

병의 배후에 집착이 있음을 인식한 후 저는 병에 대한 두려움이 사라지고, 그것을 그저 업을 갚고 신을 향해 나아가는 과정으로 여겼습니다. 따라서 병업 현상은 사실 좋은 일이며, 사실 사부님께서 일깨워주시는 것입니다. 이 점을 제대로 인식해야 두려움을 떨쳐내고 심성을 높일 수 있습니다. 저에게 이런 불균형을 겪게 하고 집착을 제거할 수 있게 한 것은 대법입니다.

저는 목에 업력이 많아서 연공할 때 목 근육에 힘이 많이 들어가고 가끔은 숨이 막히기도 합니다. 이는 아마 제가 자기 생각을 말하는 것을 두려워하고, 다른 사람에게 상처를 줄까 봐 두려워하며, 말을 잘못하여 체면이 깎일까 봐 두려워하기 때문일 것입니다. 제가 두려워하면 몸도 거기에 반응하여 호흡이 원활하지 않습니다. 이런 반응은 제가 두려움을 찾아 없앨 때까지 지속됐습니다.

제가 실수는 수련의 일부라는 걸 받아들이면 긴장이 풀리고 호흡이 정상으로 돌아오곤 합니다. 자신의 집착과 잘못을 깨닫는 것은 또 타인에게 동정심을 갖게 했습니다. 우리는 모두 실수할 수 있다는 것을 알게 됐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저는 다른 사람들을 이성적으로 이해해주고, 평등하게 대하려고 노력합니다.

자비에 대한 이해

진정한 수련인은 어떤 상태일까? 사부님께서는 최근 신경문에서 “선의와 사랑하는 마음”[각성하라(驚醒)]을 언급하셨습니다. 저는 이것이 우리의 진정한 자아의 본성이며 자연스럽게 드러나는 상태여야 한다고 이해했습니다.

사부님께서는 ‘정진요지-누구를 위하여 존재하는가’에서 말씀하셨습니다. “사실 사람은 선천적인 순진(純真)을 제외하고 일체 관념은 모두 후천적으로 형성된 것이지 자신이 아니다.”

이런 ‘순진’은 사람의 타고난 본성이지만 우리는 오늘날 사회의 부패한 가치관과 도덕에 오염되어 어린 시절의 순진함에서 멀어졌습니다.

저는 재택근무를 하므로 딸과 함께 있는 시간이 많은 편인데, 저는 딸의 순진한 본성이 친구들과 밖에서 놀거나 학교에 다녀온 후에 사라질 때가 많다는 걸 발견했습니다. 그래서 딸을 보호하기 위해 최선을 다했지만 가장 좋은 방법은 스스로 순진한 본성을 찾는 것입니다.

아버지로서 저는 딸을 매우 사랑합니다. 이런 사랑은 순수하고 무조건적이지만, 저의 집착과 관념 때문에 사람의 정이 뒤섞여 있습니다.

수련 초기에는 가족에 대한 사랑을 포기해야 한다는 오해가 있었는데, 그것은 법을 잘못 이해한 것이었습니다. 사실 우리는 모든 사람에게 부모가 자녀를 대하는 것과 같은 무조건적인 사랑을 줘야 합니다. 사부님께서도 우리에게 적을 사랑해야 한다고 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저는 이런 사랑의 대상을 모든 중생으로 확장하려고 노력합니다.

사부님의 법은 제가 딸과의 관계를 바로잡을 수 있게 했고, 사람들을 선하게 대할 수 있게 했습니다. 저는 제가 딸을 더 잘 대해주면 딸도 저를 좋아할 거라는 생각을 자주 합니다. 하지만 사실 저는 딸을 화나게 하거나 속상하게 할까 봐 두려워하는 마음이 있다는 걸 깨달았습니다. 제가 여전히 다른 사람의 감정을 마주하는 것을 두려워하고, 화를 낸 결과를 감당하지 못하는 집착을 버리지 못했지만, 늘 충돌이 일어난 다음에야 이 점을 깨달았습니다.

저는 힘든 일에 부딪혀서야 수련을 떠올리는데 이는 잘못된 것입니다. 늘 외부적 압박이 있어야 수련하려고 한 건데, 다른 사람과 갈등이 생기는 것은 ‘방할(棒喝)’과 같기 때문에 자발적으로 자신의 집착심을 찾아야 합니다.

저는 이 특별한 시기에 수련하게 되고 법을 통해 자신의 많은 집착심을 똑똑히 알게 되어 다행이라고 생각합니다. 집착심은 항상 두려운 마음과 관련 있기 때문에 저는 그것들을 내려놓으려고 합니다. 수련에는 지름길이 없으며 집착심을 내려놓는 것은 신을 향해 나아가는 유일한 길입니다.

저를 구원해주신 사부님 감사합니다!
친애하는 수련생 여러분 감사합니다!

(2024년 스위스 독일어 법회 원고)

 

원문발표: 2024년 10월 30일
문장분류: 수련교류
원문위치:
正體 https://big5.minghui.org/mh/articles/2024/10/30/484369.html
简体 https://www.minghui.org/mh/articles/2024/10/30/484369.htm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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