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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만 법회] 사부님의 제도에 감사드립니다, 사부님을 도와 사람을 구하겠습니다

글/ 대만 대법제자

[명혜망]

사부님 안녕하십니까!
수련생 여러분 안녕하십니까!

저는 대만 진먼(金門)섬 파룬궁수련생으로 올해 70세이며, 2002년에 법을 얻었습니다. 저는 초등학교도 졸업하지 못했지만 자비로운 사부님의 제도로 수련과 정법을 도울 기회를 주셔서 감사드립니다. 아래에 저의 수련 체험을 여러분과 나누고자 합니다.

1. 고난의 인생에서 다행히 법을 얻다

법을 얻기 전, 저는 많은 시련을 겪었고 다른 공간의 교란도 심했습니다. 고향을 떠나 자녀들과 함께 대만섬으로 가서 그들의 직장이 안정된 후, 저는 혼자 절에서 자원봉사를 했습니다. 어느 날 청소를 하다가 재채기를 했는데 고름이 많이 나와서 깜짝 놀랐습니다. 절의 사람들이 빨리 병원에 가보라고 했습니다. 병원에 가니 의사가 매우 심각하니 수술해야 한다고 했습니다. 저는 평생 나쁜 일을 한 적이 없는데 왜 이렇게 됐을까 생각했습니다. 아마도 운명인가 싶었습니다. 그때 저는 생명이 끝난다 해도 하늘도, 땅도, 그 누구도 원망하지 않을 것이며, 나 자신도 원망하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다만 수련하고 싶었는데 하지 못해서 아쉽다고만 느꼈습니다.

깨어나서 무사히 퇴원하고 집으로 돌아왔습니다. 설날 전에 제가 집주인에게 집세를 받으러 오라고 했습니다. 그랬더니 집주인은 “다른 사람들은 집주인이 집세를 독촉하는데 당신은 집주인더러 집세를 받으러 오라고 하네요”라며 웃었습니다. 저는 설이 다가왔다고 웃으며 말했습니다. 집주인이 제 안색이 창백한 것을 보고는 파룬궁이 매우 좋으니 파룬궁을 연마해보라고 했습니다. 그때 저는 대법에 대해 오해가 매우 깊었고, 소문을 믿었으며, 그 시기에 사이비교가 창궐해서 함부로 배우기가 두려웠습니다. 하지만 매번 외출할 때마다 버스에 ‘파룬따파(法輪大法, 파룬궁)’, 뒷창문에 ‘진선인(眞·善·忍)’이라고 붙어 있는 것을 보았고, 나중에는 ‘진선인’ 세 글자에 감동해 대법 수련의 길로 들어섰습니다.

처음에는 두려움이 매우 컸습니다. 새벽 4시 50분에 연공하러 나가려고 하니 어둠도 무섭고 시간에 늦을까 봐 걱정돼 자주 울었습니다. 처음 연공장에 갔을 때 보도원이 저에게 같이 앉아서 교류하자고 했는데, 앉아서 보니 안개 낀 듯 점점이 작은 빛이 보여서 책임자에게 안개가 낀 것이냐고 물었더니 아니라고 했고, 비가 오냐고 물었더니 아니라고 했습니다. 책임자가 무엇이 보이냐고 물어서 제가 본 것을 말하니 모두들 웃었습니다. 그가 말하길 내가 본 것이 바로 파룬(法輪)이라고 했습니다. 저는 신경 쓰지 않았습니다. 나중에 가오슝(高雄)시의 대규모 퍼레이드에 참가했을 때 신기한 일을 직접 보았습니다. 그날 비가 매우 많이 왔는데 고속도로에서 차를 운전할 때 와이퍼로 빗물을 닦아내도 안 되어서 차를 빨리 몰 수 없었습니다. 그런데 와이퍼 앞에 파룬이 나타났고 수련생들은 모두 기뻐하며 사부님께서 보호해주시는 거라고 했습니다.

2. 두려움을 돌파하고 진상 거점을 세우다

대만에서 법을 얻은 지 3년이 되었을 때, 마침 진먼에서 소삼통(小三通)을 개방했습니다.(역주: 중국 본토와 진먼 등 대만 섬 간의 제한적인 교류를 허용함) 저는 보도원에게 고향에 가서 진상 거점을 세우겠다고 했고 보도원도 좋다고 했습니다. 처음에 거점을 세우기가 매우 어려웠습니다. 첫 번째 진상 거점은 타이우산(太武山) 위에 세웠는데, 저와 수련생이 20여 개의 진상 전시판과 대법 자료, ‘9평 공산당(공산당에 대한 9가지 평론)’ 현수막을 산으로 올렸습니다. 그때는 중국 관광객이 많아서 배포한 자료도 많았습니다. 나중에 신고당해 경찰이 단속하러 왔지만 우리는 정념으로 하나하나 극복했습니다. 심지어 경찰이 사진을 찍으려고 할 때 다른 경찰이 카메라로 찍을 수 없다고 말했습니다. 또 한 번은 이곳이 일방통행로인데 경찰이 단속하러 왔을 때 쓰레기차가 마침 와서 경찰이 쓰레기차에 막혔고, 며칠 후 경찰이 또 왔을 때는 경찰이 그냥 놔두자고 했습니다.

타이우산에 거점을 막 세웠을 때는 아직 안정되지 않았고 우리 내부의 협조가 잘되지 않아서, 어떤 수련생이 대만 수련생에게 지원을 요청하는 메시지를 보내 너무 많은 사람이 한꺼번에 와서 경찰이 놀라 매일 와서 관심을 보였고, 결국 그 후 이 거점은 없어졌습니다. 이후 쥐광러우(莒光樓)로 옮겼는데 역시 많은 교란에 부딪혔고 우리는 계속해서 경찰과 각 부서에 진상을 알렸으며 의원들에게도 알렸습니다.

당시 매일 신고하는 사람이 있었는데 한번은 환경보호국 간부가 저를 찾아와 철수하라고 했습니다. 저는 진상도 알리고 당신도 이해했으니 철수하지 않겠다고 했습니다. 그는 계속 저를 설득하려고 했고 저는 협조해야 하나 생각했습니다. 당시 저 혼자였습니다. 저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고개를 들어 그를 보았습니다. 그는 일어나서 말하길 “당신이 철수하지 않으려면 저도 어쩔 수 없습니다”라고 하고 갔습니다.

그 후 현장과 관광처장이 바뀌었는데, 새로 부임한 관리가 처음부터 파룬궁을 단속하려고 해서 우리에게 전시판을 치우라고 여러 차례 명령을 내렸습니다. 우리가 진상도 알렸지만 여전히 치우라고 했습니다. 한번은 처장이 직접 거점에 와서 저에게 전시판을 치우라고 했습니다. 그는 이곳이 자신의 관할 구역이니 반드시 치워야 한다고 했습니다. 저는 치우지 않겠다고 생각했고 그때 저는 말을 하지 않고 매우 강한 정념을 보냈습니다. 그를 바라보면서 마음속으로 치우지 않겠다고 생각했더니, 원래 매우 크게 보이던 그가 말할수록 작아져서 사람이 아주 작아 보였고, 잠시 후 그들은 떠났습니다. 저는 그들이 또 올 줄 알았는데 그 이후로 다시는 오지 않았습니다.

당시 소삼통이 막 시작되어 중국 관광객이 많았는데, 한 노인이 차에서 내리면서 계속 돌면서 “내가 드디어 왔다, 드디어 왔다…”라고 기뻐했습니다. 또 한 부녀가 매우 기뻐하며 거점에 왔는데 제가 인사하고 진상을 알리니 아버지는 “저는 그런 줄 알았습니다”라고 했습니다. 그의 딸은 원래 듣지 않고 쥐광러우에 올라갔다가 제가 아버지를 삼퇴(三退, 중국공산당의 3가지 조직 탈퇴)시키고 나서 그의 딸이 내려왔을 때 그녀에게도 진상을 알려 삼퇴를 시켰습니다.

중생들 중에는 욕하는 사람도 있고, 파이팅을 외치는 사람도 있고, 엄지손가락을 치켜세우는 사람도 있었으며, 보기를 두려워하는 사람도 많았지만 차에 타서는 다 같이 모여서 보았습니다. 한번은 진상을 알리고 있을 때 그날 중국 관광객이 매우 많았는데 저는 멀리서 한 사람이 오는 것을 보았습니다. 노란 옷에 빨간 바지를 입고 수염이 가득한 얼굴로, 손짓을 하면서 중얼거리며 이쪽으로 오고 있었습니다. 그가 이리로 오는 것을 보고 ‘당신은 방해하러 오지 마세요. 저는 사람을 구하고 있어요. 저를 방해하는 것은 죄를 짓는 거예요’라고 생각했습니다. 그가 점점 가까이 오는 것을 보고 정념을 발하자 그 사람이 펄쩍 뛰더니 돌아서서 순식간에 흔적도 없이 달아났습니다.

3. 아들의 교통사고가 빠르게 회복돼 사부님께 감사드립니다

진먼 수련생 수가 적어서 저도 자주 다른 홍법 활동에 참가했습니다. 한번은 이곳에서 진선인(眞善忍) 미술전과 사진전을 개최했는데, 막 준비를 마치고 다음날 개막을 앞둔 그날 저녁 8시가 넘어서 대만에 있는 딸이 전화를 걸어와 남동생이 교통사고를 당했다고 했습니다. 아들이 매우 걱정됐지만 밤에는 비행기가 없어서 조급해한다고 해결될 일이 아니었고, 이는 사악이 교란하는 것이라 인정하지 않겠다고 생각했습니다. 저는 아들에게 괜찮을 거라고, 모든 것을 사부님께 맡기자고 했습니다.

집에 돌아왔을 때 수련하지 않는 남편이 저를 보고 화를 내며 “지금 당신 일이 더 중요해?”라고 했습니다. 당시 남편은 매우 슬퍼했고 사실 제 마음도 매우 아팠지만 저는 대법과 사부님을 믿었습니다. 남편이 계속 울자 저는 괜찮을 거라며 사부님께서 아들을 잘 회복시켜주실 거라고 위로했습니다. 진먼은 그 계절에 안개가 자주 끼었는데 아침에 많은 수련생이 개막식에 와야 했고 어떤 수련생은 바로 대만으로 돌아가야 했습니다. 비행기가 정상적으로 운항할 수 있을지, 좌석이 있을지 걱정되다가 다시 생각하니 문제없을 것 같았고 사부님께서 안배해주실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결국 수련생들은 모두 순조롭게 자리를 잡았고 저와 남편도 자리를 잡았습니다. 병원에 도착했을 때 남편이 울면서 딸들에게 “너희 엄마는 동생을 신경 쓰지 않고 파룬궁 일만 신경 쓰는구나”라고 했습니다. 그러자 두 딸은 이구동성으로 “엄마는 동생이 괜찮을 걸 알아서 그래요”라고 했습니다.

밤에 중환자실에 들어가 아들을 보니, 아들이 자기도 모르게 마구 움직여서 손발이 묶여 있었습니다. 저는 아들에게 “줄을 풀고 싶니?”라고 물었더니 그러고 싶다고 했습니다. 제가 ‘파룬따파하오(法輪大法好-파룬따파는 좋습니다)’를 외우라고 하니 그가 좋다고 하면서 소리 내어 외우기 시작했습니다. 다음날 그를 보러 갔더니 한쪽 줄이 풀려 있었고 상태가 안정되어 있었습니다. 제가 다시 나가고 싶으냐고 물었더니 그렇다고 했고, 저녁이 되자 간호사가 일반 병실로 옮길 수 있다고 했습니다.

며칠 후 우리는 퇴원했습니다. 진료를 받으러 가서 실밥을 뽑을 때 의사가 흉터를 보고 매우 놀라며 매우 예쁘게 꿰맸다고 했습니다. 저는 마음속으로 그것은 사부님께서 도와주신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왜냐하면 상처가 매우 크고 길었으며, 게다가 매우 거칠게 꿰매서 마치 굵은 밧줄 같았는데 실밥을 뽑은 후에는 어떤 흔적도 남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아들의 상사가 그를 보러 와서 보험 신청을 도와줄 사람을 소개하겠다고 했습니다. 보험 직원이 와서 증빙용 사진을 찍으려고 했는데 제 아들의 상처가 찍히지 않아서 화장품으로 그려서 한 건을 신청했습니다. 그는 또 수십만 대만달러짜리를 한 건 더 신청할 수 있다고 하면서 도와주겠다고 했고, 게다가 장애인 수첩도 신청해줄 수 있다고 했습니다. 그때 저는 원하지 않는다고 생각했습니다. 제 아들은 장애가 없기 때문입니다. 첫 번째 것도 사실 신청하고 싶지 않았지만 남편이 속인이라 그가 이해하지 못할까 봐 걱정되어서였습니다. 하지만 매우 걱정돼 남편, 아들과 대화를 시도하며 “우리 신청하지 말까요?”라고 했더니 뜻밖에도 그들도 좋다고 했습니다. 제 마음속의 큰 돌덩이가 내려앉았고 저는 사부님께서 제 마음을 보시고 가지(加持)해주신 것에 감사드렸습니다.

4. 기회와 인연을 소중히 여기며 제주도에서 진상을 알리다

전염병 이후 중국 관광객이 없어져서 저는 거점 총책임자에게 거점을 치워야 하는지 물었습니다. 회의를 거친 후 총책임자는 치우지 말라고 했습니다. 이렇게 4년이 지났는데, 중국 관광객이 오지 않아서 진상을 알리는 데 힘이 부치고 불안정한 느낌이 들었습니다. 다른 진상 알리기 항목을 찾아서 하고 플랫폼 교육에도 참가했지만 매우 어렵게 느껴졌습니다. 평소에는 대면해 진상을 알리는 데 익숙해져서 다른 방식으로 진상을 알리는 것을 새로 시작하려니 매우 불편했기 때문입니다. 저는 모든 일이 시작이 어렵다는 것을 알고 조급한 것도 집착심이라는 것을 알지만 사람을 구하고 싶어 조급했습니다.

나중에 제 신체에 소업(消業) 상태가 나타났는데 매우 괴로웠습니다. 저는 제 수련에 틈이 생겨서 사악이 빈틈을 타서 그런 것이라 생각했습니다. 마음이 매우 괴로웠고 안으로 찾았지만 어디가 잘못되었는지 몰랐습니다. 저는 괴로워할 때 밖에 나가서 걸어 다니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갑자기 한 메시지를 보았는데 첫머리에 ‘존경하고 사랑하는 수련생 여러분, 제주도가 여러분을 부르고 있습니다’라고 쓰여 있었습니다. 저는 한국에 가야겠다고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마음속으로 ‘내가 갈 수 있을까?’라고 생각했습니다. 저는 사부님 법상을 보면서 “사부님, 제가 제주도에 갈 수 있을까요?”라고 여쭤보았더니 사부님께서 빙그레 웃고 계셨습니다. 마음이 여전히 불안해서 수련생에게 전화를 걸어 제주도에 가고 싶은데 어떠냐고 물었더니 좋다고 했고 수련생이 매우 적극적으로 바로 여권을 신청하러 갔습니다. 그 과정 중에 한때 한국에 갈 수 없을 것 같았지만 한국 불학회와 대만 불학회의 협조로 마침내 성사됐습니다.

한국에 도착하자 수련생이 우리를 맞이하러 왔고 저녁에 저희를 저녁 식사에 초대했습니다. 식당에 도착해서 여러 가지 음식을 보고 저는 멍해졌습니다. 김치는 대부분 매운데 어떻게 먹나 했고 게다가 김치를 먹는 데 익숙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당시 저는 우연이 아니라는 것을 깨닫고 ‘괜찮아, 나는 대법제자니까 뭘 먹어도 문제없어’라고 생각했습니다. 숙소로 돌아왔을 때 저는 몸에 아무 문제가 없고 위장도 전혀 불편하지 않다는 것을 발견했으며, 그제야 이것이 저에 대한 시험이었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거점에 도착하니 면세점 문 앞에 중국인 관광객들이 가득했고, 진상 전시판이 정문 앞에 놓여 있었으며 진상을 보는 사람이 많았습니다. 저는 사람이 이렇게 많은데 어떻게 삼퇴를 권유할까 생각했습니다. 한 중국인에게 직접 삼퇴했느냐고 물으니 그가 “아니요”라고 대답했습니다. 당원이냐고 물으니 “네”라고 했습니다. “행운을 상징하는 이름으로 평안을 빌어드릴게요”라고 하니 그가 “좋습니다, 감사합니다!”라고 했습니다. ‘이렇게도 탈퇴할 수 있구나’ 하고 기뻐했습니다. 몇 번이나 이런 식이으로 삼퇴시켰는데 집착심이 생겨서 “수련은 자신에게 달렸고(修在自己), 공은 사부에게 달렸다(功在師父)”(전법륜)는 것을 깨닫지 못하고 여전히 자신이 잘했다고 우쭐댔습니다.

5. 모든 일에서 안으로 찾고 타인을 위해 생각하다

제주도에서 진상을 알리는 과정에서도 심성 시험이 있었습니다. 때로는 수련생이 어떤 일을 이렇게 저렇게 하라고 알려주면 저는 안다고 하면서 제가 거점에서 10여 년이나 있었으니 어떻게 해야 하는지 잘 안다고 생각했습니다. 사실 이 모든 것은 제 심성을 시험하는 것이었고, 이것을 인식하고서 저는 겸손해야만 심성을 제고할 수 있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저는 중국 관광객이 이렇게 많은데 삼퇴를 권하는 수련생이 너무 적다고 생각해서 수련생과 교류하며 사진을 보내 이곳의 상황을 알렸습니다. 한 남자 수련생이 이곳의 상황을 보고 난 후 집을 임대하고 삼퇴를 할 줄 아는 수련생을 초청해 권하게 했는데, 모든 것이 순조롭게 진행되어 지금은 수련생들이 순번을 정해 지원을 오고 있습니다.

한 수련생이 막 와서 제 심성을 제고하게 했습니다. 관광객들이 게시판 앞에 앉아있어서 제가 가서 인사를 했더니 한 중국 관광객이 “가, 가, 가!”라고 했습니다. 제가 한 걸음 더 다가서자 한 수련생이 힘껏 저를 끌어당기며 말하길, 사람들이 듣지 않으려 하면 말하지 말라고 하면서 저를 세게 밀어서 제가 넘어질 뻔했습니다. 그때 저는 온몸이 달아올랐으며 마음속으로 ‘내가 정말 잘못했다 해도 이렇게 대할 순 없지’라고 생각했습니다. 나중에 저는 마음을 가라앉히고 법공부를 하면서 안으로 찾아 제 부족함을 찾았고, 쟁투심과 환희심을 찾았습니다. 나중에 수련생이 와서 사과했고 저는 “괜찮아요, 제가 잘못했어요”라고 했습니다. 이 심성 고비를 넘은 후 그날 진상을 매우 잘 알렸고, 수련생들의 얼굴에 모두 상서롭고 빛나는 기색이 있었습니다. 수련생이 말하길 오늘 모두의 상태가 매우 좋았고 삼퇴를 권하는 수련생들도 모두 기뻐했으며 많은 사람이 탈퇴했다고 했습니다.

숙소에서 수련생들은 명혜 라디오 듣기를 좋아했는데 처음에는 시끄럽다고 느꼈습니다. 며칠 후 저는 명혜 라디오를 좋아하게 됐고 그것은 제 정념을 일으킬 수 있었습니다. 저는 듣기 싫어하던 그것이 제가 아니었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전에 저는 항상 시간이 없다는 핑계를 대면서 이 시간에 더 많이 법공부를 해야 한다고 했는데, 사실은 모두 핑계였습니다. 저는 지금 휴대폰을 보는 시간에 명혜 교류문을 듣습니다.

이상은 제 수련 체험 중 일부입니다. 부족한 점이 있다면 수련생 여러분께서 자비롭게 지적해주시길 바랍니다.

사부님 감사합니다! 수련생 여러분 감사합니다!

(2024년 대만 법회 원고)

 

원문발표: 2024년 11월 2일
문장분류: 수련교류
원문위치:
正體 https://big5.minghui.org/mh/articles/2024/11/2/484347.htm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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