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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부님의 보호와 가지 하에 고비를 넘은 과정

글/ 중국 대법제자

[명혜망] 올해 5월 20일 아침, 평소 연공하던 자리에 서서 음악을 틀자마자 갑자기 왼쪽 다리가 떨리기 시작해 서 있기도 힘들었다. 나는 어쩔 수 없이 오른쪽 다리에 힘을 주어 균형을 잡고 버텼다. 거기다 통증이 있어서 ‘왜 이렇게 극도로 아프지?’라는 생각이 들었다. 바로 이 바르지 못한 일념 때문에 전체 소업(消業) 과정이 그토록 고통스러웠다.

이때 이틀 전의 사부님의 일깨움이 떠올랐다. 꿈에서 내 원신(元神)이 어떤 곳에 갔는데, 지폐 계수기와 비슷한 작은 기계에서 은행 통장처럼 생긴 카드들이 ‘솨솨’ 하고 하나씩 나왔다. 카드마다 년, 월, 일과 다른 글자들이 적혀 있었고 열 몇 장이나 됐다. 나는 기뻐하며 “무슨 통장이 이렇게 많지? 난 은행에 돈을 맡기지도 않았는데?”라고 말했다. 그때 한 목소리가 들렸다. “이건 네가 1년 동안 쌓은 업력이다.”

잠에서 깨어난 후 스스로 늘 정진한다고 생각했기에 자세히 생각해보지 않았고, 왜 이렇게 많은 업력이 쌓였는지 더욱 안으로 찾아보지 않았다. 지금 생각해보니 만약 제때 안으로 찾고 사부님께 가지해 달라고 청하며 강대한 정념을 내보냈다면, 구세력의 박해를 해체할 수 있었을 것이다. 설령 완전히 해체하지 못했더라도 이렇게까지 맹렬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나는 괴로움이든 시험이든 모두 정념으로 대하겠다고 스스로에게 다짐했다. 한 시간 반 동안의 동공이 마치 일 년처럼 느껴졌다. 그동안 여러 번 쪼그려 앉거나 벽에 기대어 쉬고 싶었지만, 오늘 그렇게 하면 이 게으름과 나쁜 습관이 계속될 것이기에 그럴 수 없었다. 나는 수련하고 싶었고 사부님을 따라 집으로 돌아가고 싶었다. 이 고비는 언젠가는 돌파해야 하니 오랫동안 고통받는 것보다 차라리 짧게 고통받는 게 낫다고 생각했다. 나는 계속해서 사부님의 법 “참기 어려운 것도 참을 수 있고, 행하기 어려운 것도 행할 수 있다”(전법륜)을 외웠고 반복해서 외우니 통증은 나아졌지만 마음은 여전히 고요해지지 않았다.

사부님께 도움을 청하고 싶었지만 곧바로 그 생각을 접었다. 사부님께서는 이미 제자들을 위해 너무나 많은 것을 감당하셨고, 남겨진 것은 제자의 제고를 위한 것인데 이마저도 사부님께서 감당하신다면 내가 어찌 수련인이라 할 수 있겠는가? 가장 좋은 방법은 고통을 느끼지 않는 것이라 생각했다. 말은 쉽지만 실제로 해내기는 정말 어려웠다. 하지만 진정으로 해냈을 때는 그리 어렵지 않았다.

먼저 우리 지역의 한 노년 수련생이 생각났다. 그는 삼륜차에서 튕겨나간 후 한동안 4장 공법을 연마하기 힘들었던 경험이 있었다. 그 노년 수련생은 매일 꾸준히 연공했고 한 번도 쉬지 않았다고 했다. 연공을 마치면 발밑이 온통 땀으로 흥건했다고 한다. 또 ‘명혜주간’에 실린 한 교류문이 생각났는데, 미국에서 무술관을 운영하는 한 수련생이 배가 아파서 땅바닥을 뒹굴었던 이야기였다. 수련생들의 경험은 나에게 큰 격려가 됐다. 그들에 비하면 내 고통은 아무것도 아니었고 나도 반드시 이 고비를 돌파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한 시간 반의 동공을 마치고 나니 마치 일 년을 겪은 것 같았다. 온몸에서 땀이 많이 났는데 이는 업력이 배출되는 것임을 알았다. 연공이 끝나자 다리가 정상으로 돌아왔고, 낮에 법공부를 하거나 진상자료를 만들 때도 다리가 전혀 불편하지 않았다. 이는 사부님께서 제자를 위해 감당해주신 것임을 알았다. 사부님께서는 내가 매일 사람을 구하는 일을 한다는 것을 아시고 다른 시간에는 편하게 지내도록 해주셨다. 만약 사부님께서 나를 위해 감당해주시지 않았다면, 생생세세의 업력은커녕 이번 난관의 조그만 부분이라도 한꺼번에 밀려왔다면 나는 견디지 못했을 것이며, 소업은 더더욱 불가능했을 것이다.

저녁 정공 때 왼쪽 다리가 종종 아팠는데, 몇 초에서 몇 분까지 지속적으로 통증이 이어졌다. 나는 스스로에게 ‘이 고비들을 하나하나 넘어가야 해. 이것이 바로 수련이야’라고 일깨웠다. 마침내 두 시간의 정공을 견뎌냈고 온몸이 흠뻑 젖었다. 다리를 내리자 통증이 즉시 사라졌다.

새벽 12시 발정념을 마치고 침대에 누웠다. 30여 년간의 수련 생활 동안 나는 늘 반듯이 누워 잤다. 하지만 이번에는 몸이 침대에 닿자마자 통증 때문에 곧바로 튀어 올랐다. 이것 역시 한 고비구나 싶었다. “네가 아프든 말든 내 수면에 영향을 주면 안 돼. 내일도 할 일이 있으니까”라고 말하고는 잠이 들었다. 어떤 자세로 잤는지, 앉아서 잤는지 비스듬히 누웠는지 옆으로 누웠는지는 모르지만, 어쨌든 그 후 두 달 넘게 그랬다. 하지만 휴식에는 전혀 지장이 없었다. 이 모두가 사부님께서 제자를 가지해주신 덕분이라는 걸 알았다.

다음 날 알람 소리에 일어나 연공을 했는데 다리에 불편함이 없어서 ‘소업이 끝났구나’라고 생각했다. 세수를 마치고 연공 자리에 서서 음악을 틀자 왼쪽 다리가 즉시 떨리기 시작했고 전날보다 더 심했다. 쪼그려 앉거나 기대고 싶은 생각이 또다시 들었지만 절대 그러지 말아야 한다고 스스로를 다잡았다. 제1장 공법의 늘이기와 풀어주기, 제4장 공법의 몸 구부리기 같은 간단한 동작조차 왼쪽 다리로는 할 수 없었다. 오른쪽 다리에 중심을 두고 오른쪽 다리에 의지해서 해야만 했다. 평소에는 이렇게 간단한 동작도 왼쪽 다리로는 할 수가 없었다.

난생 처음으로 인간이 이토록 보잘것없고 무력하다는 걸 느꼈다. 평범한 일반인이 신불(神佛)의 보호 없이는 그 어떤 재난도 피할 수 없다! 수련인도 마찬가지로 사부님의 보호가 없다면 아무것도 이루지 못하고 평생 헛되이 보낼 것이다. 제자는 오직 감사할 따름이다! 감사함에 대한 최고의 보답은 쉼 없이 정진하고 더 많은 중생을 구하는 것이다.

이때 나는 사부님께서 말씀하신 “참기 어려운 것도 참을 수 있고”(전법륜)를 실천해야만 이 고비를 넘을 수 있었다. 감격의 눈물과 고통의 눈물이 뒤섞여 눈가에 맴돌았지만 나는 스스로에게 말했다. “울면 안 돼. 난 대법제자야. 천상의 신들이 모두 지켜보고 계셔. 대법제자의 체면을 손상시켜선 안 돼. 나에겐 사부님이 계셔. 우리 사부님은 가장 위대하신 사부님이시다!”

사부님의 제자가 되어 사부님의 정법을 따르게 된 것이 얼마나 행운인지 모른다. 기쁨이 마음속에서 솟구쳤고 형언할 수 없는 속도로 온몸으로 퍼져나가 육체의 고통을 대신했다. 이는 사부님께서 제자를 가지해주시고 제자를 위해 감당해주시며 늘 제자를 보살펴주신다는 것을 깨달았다. 한 시간 반이 이런 상태로 지나갔고 연공이 끝나자 다리는 정상으로 돌아왔다.

계획대로라면 오전에 사람을 구하러 나가야 했기에 준비한 진상자료를 들고 나섰다. 십여 걸음을 걸었을 때 다리가 극심하게 아파오기 시작해 걸음을 멈춰야 했다. 몇 초간 쪼그려 앉거나 허리를 굽혔다가 좀 나아지면 다시 걸었다. 이는 모두 속인의 표현이고 나는 수련하는 사람이니 절대로 속인의 길을 걸어서는 안 된다고 생각했다. 왼쪽 다리에 힘이 없다는 것을 남들이 알아채지 못하도록 최대한 천천히 걸으며 균형을 잡았고 태연자약한 모습을 보였다.

처음부터 끝까지 사부님의 가지를 구했고 매 걸음마다 균형을 잡으려 노력했다. 그래서 이웃이나 가족, 친척, 심지어 수련생들조차도 내가 평소와 다르다는 것을 전혀 알아채지 못했다. 게다가 매번 사람을 구하러 나갈 때마다 사부님의 가지 하에 다리가 빨리 회복되어 사람 구하는 일에 전혀 지장이 없었다.

한번은 사람을 구하러 나갔다가 한 수련생의 일(수련과 관련된)을 도와주기 위해 친척 집에 가야 했다. 버스에서 내려 한참을 걸어야 했는데 십여 걸음을 걸었을 때 한 80대 노인이 내 곁을 지나가며 말했다. “아가씨, 왜 나보다도 천천히 걸어?” 나는 “잠시 그럴 뿐이에요”라고 대답했다. 말하는 사이에 또 노인에게 뒤처졌고 걸음을 떼기가 정말 힘들었다. 돌아와 법공부를 마친 후 마음을 가라앉히고 이 일 년 동안 내 심성에 어떤 문제가 있었기에 구세력이 빌미를 잡아 이렇게 박해했는지 안으로 찾아보았다.

어떤 사람마음인지 생각해보았다. 사부님의 법이 내 기억을 열어주셨고 한 가지 마음이 아닌 수많은 마음들이 영화처럼 한 장면 한 장면 내 머릿속에 떠올랐다.

1. 이기적인 일념

작년 7월의 어느 날이다. 진상자료 배포를 다 마친 뒤 버스를 타고 돌아오는 길이었다. 비가 많이 내렸고 나는 창문이 열린 좌석에 앉아있었다. 그때 뒷자리의 누군가가 “춥네요. 창문을 닫아주세요”라고 했다. 당시 나는 땀을 많이 흘려 더웠고 어차피 나만 향해 하는 말이 아니라고 생각해서 창문을 닫지 않았다. 그러다 어느새 잠이 들었고 정류장에 도착해서 내리려고 보니 왼쪽 다리가 움직이지 않았다. 그래서 즉시 사부님께 도움을 청했더니 다리가 움직였고 그제야 버스에서 내릴 수 있었다.

집에 돌아와서 안으로 찾아보니 이는 내 이기심이 초래한 것임을 깨달았다. 대법제자라면 마땅히 자신보다 타인을 먼저 생각하고 무사무아(無私無我)해야 하는데, 오늘날까지 수련해왔으면서도 여전히 타인을 위한 배려를 소홀히 했고 실천하지 못했다. 이 점이 너무나 부끄러웠고 그래서 구세력이 틈을 노린 것이었다. 그 후 한 달여간 매일 양쪽 무릎에서 발가락까지 여러 차례 맥이 뛰듯 통증이 있었다. 때로는 몇 초, 때로는 몇 분간 지속됐고 통증이 매우 심해 견디기 힘들었다. 집에서는 한 걸음 한 걸음이 힘겨웠지만, 문밖을 나서면 즉시 좋아져서 다리가 마치 날개라도 달린 듯 가벼워졌고 사람을 구하는 일에는 전혀 영향을 주지 않았다.

이로 인해 계속해서 안으로 찾고 발정념하는 것을 소홀히 했다. 당시 다리 통증은 사라졌으나 쪼그려 앉을 때면 여전히 무릎이 뻣뻣했다. 하지만 사람을 구하는 데 지장이 없었기에 이런 작은 업력은 끊임없는 정진 과정에서 자연스레 해소될 것이라 여겼다. 이제서야 깨달았다. 이기적인 마음이 수많은 사람 마음을 파생시킨다는 것을, 특히 ‘방심하는 마음’은 알아차리기 쉽지 않다는 것을 알았다.

2. 자비심 부족

작년 6월, 우리 시의 많은 수련생들이 사악에게 납치됐는데 한 수련생은 위험 속에서 다행히 벗어날 수 있었다. 한 달이 지난 후, 나는 이 수련생이 이제는 그 그늘에서 벗어났을 것이라 생각했다. 7월 초, 나는 그에게 편지를 보내 내가 목격했던 것, 알고 있던 것, 그리고 다른 수련생들이 지적했던 몇 가지 문제점을 적어 보냈다. 그리고 안으로 찾아보라고 조언했다. 그러나 그 수련생은 “왜 제가 안으로 찾지 않았다고 생각하시나요?” 등의 답장을 보내왔다. 이때 나는 마땅히 자신을 돌아봤어야 했다. 왜 그 수련생이 그런 마음가짐을 가졌는지, 분명 나 자신에게 이 방면의 문제가 있었기에 수련생이 그런 반응을 보였을 것이다. 그러나 나는 이 점을 소홀히 한 채, ‘수련생에 대한 책임감’이라는 그럴듯한 명분을 내세워 “부족한 점을 지적하지 않을 수 없다”고 했다. 가장 눈에 띄는 문제는 내가 너무 독선적이었다는 것이고, 거기에다 수련생에 대한 정(情)까지 섞여 있었다는 점이다. 이제야 깨닫게 됐다. 수련생에 대한 정도 결국은 정이 아닌가? 정이라면 당연히 수련을 통해 버려야 할 것이 아닌가? 하지만 당시에는 이를 깨닫지 못했다.

이런 사람의 마음과 사람의 정에 이끌려 한 달 후 나는 그 수련생에게 두 번째 편지를 보냈고, 더욱 명확하고 날카롭게 몇 가지 문제점을 지적했다. 지금 돌아보니 나는 처음부터 끝까지 단 한 번도 그 수련생의 입장에서 문제를 바라보지 않았고, 자비로운 대처는 더더욱 하지 않았다. 여기서 그에게 한마디 하고 싶다. “동수님, 죄송합니다!”

사부님께서는 법에서 매우 분명히 말씀하셨다. 어떤 사람의 변화나 제고, 승화도 다른 이의 질책으로 이뤄지는 것이 아니라, 모두 법공부를 통해 스스로 법의 표준에 따라 안으로 찾고 변화하고 승화함으로써 이뤄지는 것이다. 하지만 나는 이 가장 중요한 점을 소홀히 했다.

3. 오만한 마음가짐

그 어떤 사람마음이든 모두 구세력이 박해하고 박해를 가중하는 주요 원인이 된다. 그중에서도 오만함은 더더욱 구세력이 박해하는 구실이 된다. 꿈에서 나는 회색빛 큰 산을 오르고 있었다. 산이 매우 가파른데다 힘겹게 위로 올라가야만 했다. 산정상에 거의 다다랐을 때 잠에서 깨어났는데, 식은땀이 흘렀다. 그제야 나는 내 누락이 작지 않고 문제도 결코 적지 않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래서 업력이 산처럼 쌓인 것이다.

연공할 때 다리를 떠는 현상에 대해: 오랫동안 나는 마음속으로 포륜(抱輪)과 다섯 번째 공법이 내 강점이라고 자부했다. 매우 편안했기 때문이다. 스스로 ‘강점’이라고 생각한 것은 오만한 심리이자 사람마음이다. 연공이 ‘편안하다’고 여기는 것 역시 사람마음의 표현이다. 더 높이 말하자면 이는 불법(佛法)에 대한 불경이자 모독이다. 불법은 사람을 편안하게 하기 위해 세상에 전해진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잠을 잘 수 없는 현상에 대해: 수련 후 나는 잠을 잘 때 ‘편안했다’. 매우 편안한 느낌이었다. 법을 얻은 후 사부님께서 매번 나에게 소업해주실 때마다 나는 늘 수면 중이었고, 거의 아무것도 감당하지 않았다. 그 이후로는 몸이 침대에 닿기만 하면 곧바로 잠이 들었다. 또한 원신(元神)이 육체를 떠나 다음날 새벽 연공할 때 침대에서 일어나야만 원신이 돌아오곤 했다. 점차 호기심이 생겼고 이 호기심은 내가 ‘능력’이 있다는 오만한 마음으로 변질됐다.

사람을 구하러 밖에 나갈 때 걷기 힘든 현상에 대해: 작년 7월 그때의 소업 시에, 나는 수련생과 교류하면서 이렇게 말한 적이 있다. “어떤 일이든, 내 자신의 일이든 집안의 대소사든 사람을 구하는 데 영향을 준 적이 없고, 나는 시종일관 수련하고 정진했습니다.” 구세력은 바로 이 마음을 노린 것이다. 내가 “대소사가 구원에 영향을 준 적이 없다”고 했기에 ‘한 걸음도 걷기 힘든’ 가상을 만들어 준 것이다.

나는 언제든 말을 너무 단정 지어서는 안 된다는 것을 깨달았다. 말을 너무 단정 짓는 이런 마음가짐은 명백히 겸손함이 부족한 것이고, 잠재의식 속에는 ‘나는 할 수 있고, 나는 능력이 있다’는 오만함이 있는 것이다. 이런 마음가짐은 대법이 요구하는 심성 표준에 전혀 부합하지 않았고, 게다가 호시탐탐 노리는 구세력까지 있다.

여기까지 쓰고서야 나는 구세력의 음험함을 똑똑히 알게 됐다. 구세력은 사실 이상의 세 가지 측면, 즉 ‘연공할 때 다리 떨림, 잠을 이루지 못함, 사람 구하러 나가기 힘듦’이라는 세 가지 큰 고비를 통해 내가 스스로 수련을 포기하게 만들어 대법제자를 망치려 한 것이다. 만약 내가 연공도 하지 못하고, 휴식도 취하지 못하고, 사람도 구하지 못한다면 어찌 대법제자라 할 수 있겠는가!

4. 경지의 차이

예전에 수련생과 교류할 때가 생각난다. 어떤 수련생이 나에게 “당신은 두려운 마음이 있나요?”라고 물은 적이 있다. 나는 이렇게 대답했다. “나는 두려움이 있는지 없는지 생각해 본 적이 없습니다. 나는 단지 사부님께서 우리에게 세 가지 일을 잘하라고 하신 것, 즉 법공부와 수련, 사람 구하기만 기억하고 있고 우리는 그저 가서 하면 됩니다. 정법시기 대법제자는 두려운 마음이 있든 없든 사람을 구해야 하고, 이는 우리의 서약을 이행하는 것입니다.” 이 말은 틀리지 않았다. 하지만 이후에 있었던 한 차례 교류에서 나는 이렇게 말했다. “내가 두려움이 있는지 없는지를 생각하지 않는 이유는, 있기를 바란다고 해서 있는 것도 아니고, 없기를 바란다고 해서 없는 것도 아니기 때문입니다. 두려운 마음은 생각으로 만들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사실 그렇다.

관건은 내가 “두려움이 없다”고 말한 것이 올바르지 않은 생각이었고 당당하지 못했다는 점이다. 잠재의식 속에 두려움이 있었는데, 구세력이 날 괴롭힐까 봐 두려웠고 이는 더욱 은밀한 두려움이었다. 다른 수련생들처럼 그 경지에 있어 정정당당하고 태연자약한 것이 아니었다. 마치 작년에 수련생들이 납치된 후에 내가 자주 감히 태만해서는 안 된다고 생각한 것과 같은 이치다.

‘태만하지 않는 것’과 ‘태만하지 못하는 것’은 한 마디 차이지만 경지의 체현이다. 태만하지 않는 수련생은 그 경지에 있어 법의 표준에 부합되지만, 태만하지 못하는 것의 배후에는 두려움의 요소가 있는 것이다. 어느 한 층차에서 보면 틀리지 않았지만 승화 후의 표준, 즉 높은 표준으로 가늠하면 그것은 경지의 차이다. 이것을 깨달은 후 나는 수련생과 교류할 때 이런 체득을 얘기했다. 대법제자는 두려움이 없어야 하는데 우리에게는 사부님과 대법이 있기 때문이다.

내 왼쪽 다리는 아홉 번의 아침 연공 시간 동안 떨렸고, 연공이 끝나면 다리는 즉시 좋아졌다. 셋째 날 아침 연공 때는 마음속으로 포륜하는 것이 조금 겁이 났다. 당시 나에게 한 시간은 너무나 길었고, 그래서 두 시간 동안 제1장, 제3장, 제4장 공법만 연마했다. 연공을 마친 후에는 포륜하지 않은 것이 너무나 후회됐다. 난관이든 시험이든 감당해야 할 것은 감당해야 하는데 어찌 피할 수 있겠는가? 잘못을 만회하기 위해 그날 하루 동안 다섯 번, 총 다섯 시간 동안 포륜을 했다. 나중에 생각해보니 좀 두려웠는데 한 번 할 때마다 점점 더 견디기 힘들어졌기 때문이다. 매번 연공을 마칠 때마다 나는 사부님 법상 앞에 무릎 꿇고 절을 올리면서 견뎌낼 수 있도록 가지해주신 사부님께 감사드렸다.

대법을 수련하기 전에 나는 류머티즘성 심장병과 류머티즘성 관절염을 앓았다. 수련 후에는 사부님께서 모두 없애주셨고 나는 거의 아무것도 감당하지 않았다. 현재 나는 내가 마땅히 감당해야 할 부분만 감당하고, 구세력이 강요한 것은 일절 인정하지 않으려 한다. 그 후 사람을 구하러 나갈 때 얼마 걷지 않아 다리가 아프기 시작했다. 나는 멈춰 서서 마음속으로 사부님께 청했다. ‘사부님, 제가 사람을 구하러 나갈 때는 다리가 아프지 않게 해주시고, 밤에 잠잘 때는 아무리 아파도 괜찮습니다.’ 그러자 다리가 크게 호전됐고 사람을 구하러 계단을 오르내릴 때도 아무런 불편함이 없었다. 나는 사부님께서 소업을 도와주고 계신다는 것을 알았고 사부님의 자비로운 보살핌에 감사드렸다.

다리를 위해 발정념을 할 때면 다리가 매우 아팠지만, 예전에 다리를 위해 발정념을 하지 않았을 때는 아프지 않았다. 이는 사부님께서 “그 업력은 살아있는 것”(미국동부법회 설법)이라고 하신 말씀이 생각나게 했다. 내가 그것을 소멸시키려 하자 그것은 정말로 반항했다. 나는 생각했다. ‘네가 반항한다는 것은 내 정념이 아직 부족하다는 뜻이구나.’ 그래서 네 번의 정각 발정념 시간을 연장했다. 며칠 연속 발정념을 한 후에는 구세력이 강요한 극심한 통증이 해체됐고, 연공할 때 다리도 눈에 띄게 좋아졌다. 왼쪽 다리도 점차 펴고 이완할 수 있게 됐으며, 쪼그려 앉는 것도 그렇게 견디기 힘들지 않았다.

한 달이 지나자 양쪽 다리로 기본적인 균형 잡기가 가능해졌다. 며칠 후 사부님께서는 내 오른쪽 다리를 정화해주기 시작하셨고, 연공할 때는 중심이 왼쪽으로 쏠리기 시작했다. 하지만 오른쪽 다리의 통증은 완전히 감당할 만했고 정상적인 소업 상태였다. 이 모든 것이 사부님께서 제자의 제고를 위해 체계적으로 안배하신 것이라 생각한다.

사부님의 가지가 있었기에 소업이 시작된 그때부터 끝날 때까지 내 마음은 늘 즐거웠다. 내 마음속에는 ‘병’이라는 개념이 전혀 없었기에 자연스레 병으로 인한 고통스러운 감정도 없었다. 그 기간에 수련생들과 교류할 때 어떤 수련생은 그것이 신경통이라고 했다. 나는 말했다. “그런 문제가 아닙니다. 속인은 신경통이지만 나는 수련인이라 이는 소업이고 고비를 넘는 것입니다.” 소업 초기에 나는 무의식중에 두 번 “아이고”하고 한숨을 쉰 적이 있었다. 그때 바로 자신에게 ‘너는 대법제자답게 행동해야 한다’고 일깨워줬고 그 후로는 다시는 그런 잘못된 상태가 나타나지 않았다.

수련생들과 교류하면서 알게 됐다. 어떤 수련생은 이전에 매우 정진했지만 지금은 집에서 법공부와 법 외우기, 연공과 발정념만 하고 사람을 구하는 일은 하지 않는다고 한다. 법공부와 법 외우는 것은 잘못이 없다. 법공부는 기초이기 때문이다. 그렇게 할 수 있다는 것은 법을 배우고 얻었다는 의미다. 법을 얻으면 머리가 맑아져서 거짓에 현혹되지 않고 외부 환경의 영향을 받지 않게 된다. 법리를 깨닫게 되면 정법시기 대법제자의 사명이 중생을 구하는 것임을 알게 되는데, 이는 의심의 여지가 없다.

대법제자는 절대로 단순히 법을 배우기 위해 배우거나 외우기 위해 외우는 것이 아니다. 법은 우리의 일사일념과 일언일행을 지도하는 것이다. 자신의 생각과 언행이 법에 부합하는지, 제대로 했는지, 정법시기 대법제자의 사명을 완수했는지, 이것이 바로 법을 배우고 외우는 목적이다. 길을 바르게 걸으면 고비와 난관 앞에서 정진하는 수련생들처럼 가볍게 뛰어넘을 수 있다.

개인적인 체득으로 법에 맞지 않는 부분이 있다면 수련생 여러분께서 자비롭게 지적해주시기 바란다.​

 

원문발표: 2024년 10월 16일
문장분류: 수련교류
원문위치:
正體 https://big5.minghui.org/mh/articles/2024/10/16/482801.html
简体 https://www.minghui.org/mh/articles/2024/10/16/482801.htm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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