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중국 장쑤성 대법제자
[명혜망] 1999년 ‘7.20’ 이전 대법에 입문할 당시 40~50대 수련생들은 이제 70~80대가 됐습니다. 30년 가까운 수련 과정을 되돌아보면 한 사람 한 사람이 다 책 한 권을 쓸 수 있을 정도입니다.
중국에는 “시간이 지나면 사람의 속마음이 드러나므로 사람은 지내봐야 안다”라는 속담이 있습니다. 중공 악당의 박해가 시작된 이후 사악이 두려워 감히 수련하지 못한 많은 수련생은 즉시 도태됐고, 지금까지 견지할 수 있었던 대다수 사람은 성도(省都)나 베이징에서 청원해 사악에 의해 반복적으로 불법적인 괴롭힘을 당하고, 납치, 세뇌, 구금되는 등 생사를 넘나드는 시련을 겪었습니다. 전적으로 신사신법(信師信法)하며 끝까지 확고하게 금강부동하는 사람들은 정말 놀랍습니다! 그들 다수는 법 중에서, 자애로우신 아버지 같은 사존의 자비롭고 끊없는 격려와 방할 중에서 반복적으로 단련하고 비틀거리며 오늘에 이르렀습니다.
며칠 전 수련생에게 수련을 중단한 사람이 적지 않다고 하는 말을 들었습니다. 외지의 구체적인 상황은 잘 모르겠지만 우리 지역 상황을 살펴보면 그리 낙관적이지 않습니다. 비록 모든 사람이 산 정상에 오를 수는 없겠지만 이런 상황을 보면 마음이 조금 무거워집니다.
지난 몇 년 동안, 저는 사부님의 가호 아래에서 우리 모두가 대도무형(大道無形) 속에서 정체(整體)를 형성할 수 있도록 노력해왔습니다. 제가 만난 수련생들에게 인터넷으로 명혜망에 접속할 수 있는 다양한 환경을 만들어주고, 전 세계 대법제자들과 토론하고 교류하며 서로 격려하면서 자신을 수련할 수 있도록 도왔습니다. 많은 수련생들 또한 꾸준히 실제적인 수련을 하며 세 가지 일을 잘 수행하고 중생을 구했으며, 매년 열심히 심득 교류 문장을 작성했습니다. 저도 이 시기가 되면 여러 수련생들의 원고를 교정하느라 매우 바쁩니다. 컴퓨터로 전자 문서를 입력하는 연습을 한 후 인터넷을 통해 명혜망에 올려야 합니다. 바쁘지만 그 시간은 행복하고 보람찹니다.
그러나 사악의 간섭과 파괴로 인해 우리 지역의 전체적인 법공부 환경이 사라지고 자료점도 점점 줄어들고 있습니다. 수련생 중 일부는 반복되는 박해로 인해 차례로 세상을 떠났습니다. 작년부터는 사악이 인터넷을 심하게 봉쇄하고 있어서 원래 두려움이 많던 수련생들은 점차 사악의 봉쇄를 돌파하지 않고 명혜망에 접속하지도 않게 되었습니다. 심득 교류 문장을 쓰는 것은 말할 것도 없게 됐습니다. 이런 상황들을 보면서 저는 갑자기 저 자신도 점점 해이해지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법공부와 연공, 그리고 세 가지 일을 하는 것이 단순히 임무를 완수하는 것처럼 되어버렸습니다.
올해 6월, 사부님께서 두 편의 새로운 경문을 연이어 발표하셨습니다. 표면적으로 보면 중국 대법제자들과는 무관해보일 수 있습니다. 하지만 자세히 생각해보면 사부님께서 정말로 해외 대법제자들만을 위해 쓰신 것일까요? 사부님께서는 경문 ‘법난(法難)’에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사실 법난은 지역별로 끝나는 것이 아니고, 단지 표현이 다를 뿐이다. 법난 중에서 또 최후에 남겨질 생명과 도태될 생명을 선택하고 있는데, 또한 대법제자 중에 될 수 있고 될 수 없는 사람을 포함한다.”
우리 중국 대법제자들 역시 그 속에서 ‘될 수 있고 될 수 없는 사람’으로 선별되고 있으며, 오직 ‘순금’같은 사람만이 남을 수 있다는 것은 매우 분명합니다. 사부님께서는 우리 제자들의 혼란스러운 상태를 정말 걱정하고 계십니다! 오랜 대법제자인 저 역시 반드시 각성해야 합니다!
저는 스스로를 성찰해 보았습니다. 왜 제 주변의 수련생들이 이렇게 좋지 않은 상태에 있을까요? 이것이 제 수련 상태와 어떤 관련이 있으며 지금 저는 어떻게 수련해야 할까요?
1. 과시심
사부님께서는 ‘전법륜(轉法輪)’에서 특히 ‘과시심리’에 대해 한 절을 따로 할애하여 설법하셨습니다. 이는 이 마음을 수련하는 것의 중요성과 이 마음이 반영되는 보편성을 보여줍니다.
‘7.20’ 사건 이전에 한 수련생이 저에게 일깨워주었습니다. “동작을 좀 보기 좋게 해도 과시하는 사람이 있다.”(전법륜) 당시 제3장 공법을 연마하는 중에 두 손의 동작이 조화롭지 못한 수련생이 있었습니다. 저는 그녀에게 여러 번 시범을 보여주었습니다. 또한 처음부터 제대로 하지 않으면 치지[氣機]가 왜곡될 수 있다고 설명해주었습니다. 단체 법공부 때 ‘동작 과시’ 부분에 이르자 누군가가 저를 쳐다보며 지적했습니다! 그때 저는 안으로 찾지 못하고 여전히 ‘이렇게 저렇게 그녀를 위해 한 것’이라고만 생각했습니다.
수년간 수련생들을 위해 봉사하면서 그들의 선망과 칭찬, 심지어 아첨을 받으며 저의 과시심은 계속 부풀어 올랐습니다. 처음에는 기분이 들떠서 누구의 집에 가든 ‘내가 도와주러 왔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수련생들이 저를 보고 똑똑하고 능력 있다고 하고, 나이가 많은데도 눈이 아직 좋다고 칭찬했습니다. 그런 말을 들으면 기분이 매우 좋았습니다! 최근 몇 년간 밤낮으로 기술을 배우고 익혀서 컴맹에서 벗어나 여러 수련생의 안전한 명혜망 접속을 도울 수 있게 된 것에 대해 큰 성취감을 느꼈습니다! 칭찬받는 것이 당연하다고 생각했죠! 심지어 으스대면서 처음에 얼마나 열심히 배웠는지 자랑하기도 했습니다. 이제는 많은 사람을 위해 봉사할 수 있는 능력을 갖추게 되었다고 여겼습니다.
하지만 사실 저는 수련 과정에서 사부님께서 지혜를 열어주신 덕분에 비로소 수련생들을 위해 봉사하는 능력을 조금 배우기 시작했을 뿐인데, 하늘의 공을 탐하고 자만하여 마치 제 것인 양 여기게 되었습니다. 이러니 어찌 수련 상태가 떨어지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헛되게 수련한 것이었습니다! 제가 지금 이 정도의 능력을 갖추게 된 것은 비록 제가 열심히 노력하고 배워서 얻은 것이기는 하지만, 이는 또한 기술을 가진 수련생과 현지 수련생들이 함께 이룬 성과입니다! 그런데 저는 오히려 자만심에 빠져 대법을 부차적인 위치에 두게 되었습니다.
최근 한 수련생이 「‘자대(自大)’에 점 하나를 더하면 ‘취(臭)’가 된다」라는 제목의 교류 문장을 통해 말했습니다. “나는 왜 그렇게 바빴을까? 태엽 감긴 것처럼 멈출 수가 없었는데, 단순히 일하는 마음 때문이었을까? 왜 때로는 환희심, 과시심이 들었을까? 무엇을 과시한 걸까? 자신이 유능하다는 것, 많이 하고 빨리한다는 것을 과시했다… 할수록 더 하고 싶어 했다. 일하는 과정에서 일하려는 마음, 허영심도 만족을 얻었고, 환희심과 과시심과 엉켜 서로 파생되어 결국 그 자만심과 이기심을 낳게 되었다. 자만심과 이기심에 이끌려 점점 더 바쁜 일상에서 벗어나지 못했고, 법공부 시간도 줄어들었으며, 발정념을 할 때도 머릿속에는 온통 일 생각뿐이어서 전혀 마음을 가라앉힐 수 없었다. 때문에 수시로 안으로 찾아 자신을 바로잡을 생각을 하지 못했다.” 이것이 바로 저의 이 좋지 못한 상태였습니다.
좋아요! 당신은 총명하고 유능하니 뭐든 당신이 하세요! 그래서 다른 수련생들에게 봉사하던 사람들 중 일부는 저에게 의지하며 ‘가르칠 사람이 없다’고 불평했습니다. 또 어떤 일들은 제가 앞장서서 전권을 갖고 조율하고 처리해야 한다고 했습니다. 저 역시 아무런 원망 없이 이리저리 바삐 뛰어다녔지만 결국 심신이 지치고 극도로 피로해졌으며 법공부와 연공이 지체되었고 자신을 되돌아보고 수련할 시간은 더욱 없었습니다.
이로 인해 일부 수련생들은 명혜망에 접속할 수 있는 조건이 갖춰졌음에도 불구하고, 사악의 인터넷 봉쇄로 인한 교란을 받아 스스로 해결할 수 없었습니다. 또한 컴퓨터 시스템을 업데이트하지도 않았고 법기(法器)를 높은 곳에 방치해 두었습니다. 인터넷에 접속하는 데 사용하는 컴퓨터가 바로 옆에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당당하게 근거 없는 이유를 대며 계속해서 제가 자료와 정보 등을 제공해주기를 요구했습니다. 만약 제가 그들에게 사부님께서 새로운 경문을 발표하셨다고 알려주면, 그들은 즉시 손을 내밀며 가져오라고 했고 저는 곧바로 잘 인쇄된 경문을 제공해야만 했습니다.
‘그는 왜 다른 수련생들을 위해 생각하지 못할까?’ ‘그는 지금 명혜망에 접속할 수 있는 조건이 있는데 왜 제때에 사부님의 새 경문을 볼 수 없을까?’ ‘수련생이 경문을 인쇄해서 집으로 가져다줄 때까지 기다리는 것은 다른 이에게 너무 많은 부담을 주는 것 아닐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저는 수련생들이 계속해서 수련하고 제고하는 데 방해가 되지 않도록 그들이 필요로 하는 경문 등을 계속 제공했고, 오디오 USB를 만드는 데에도 많은 시간을 할애했습니다. 대법과 대조해 자신을 점검한 후, 저는 제가 수련생들을 맹목적으로 따르고 모든 것을 대신해주면서 그들이 독립적으로 수련의 길을 걷는 기회를 막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누구나 수월하게, 게으르게, 편안하게 수련하고 싶어 하는 마음이 있습니다. 하지만 수련자로서, 다른 사람의 노력만으로 잘 인쇄된 경문과 자료를 얻으려 하고, 여건이 갖춰져 있음에도 스스로 봉쇄를 뚫고 인터넷에 접속하지 않는 그 배후에는 강력한 사람의 마음과 집착이 있는 것입니다!
사부님께서는 우리 모두가 이타적인 생명으로 수련하기를 바라십니다. 만약 모든 사람이 자신만을 위해 다른 사람에게 의지한다면, 누가 그를 위해 봉사할 수 있겠습니까? 이런 종류의 집착은 모든 수련생이 반드시 수련을 통해 제거해야 하는 것이기에, 명혜망에서는 오랫동안 ‘곳곳에서 꽃 피우기’의 중요성을 강조해왔습니다.
저 자신의 강렬한 과시심 표출로 인해 수련생들이 자신의 수련 길을 걷는 데 방해가 되어서는 안 됩니다. 이러한 과시심이 가져오는 심각한 결과를 깨달은 후, 저는 수련생들을 위해 봉사하는 과정에서 컴퓨터 시스템을 소중히 여기지 않는 사람들(사실 그들은 수련생의 노고를 소중히 여기지 않고 반복해서 부담을 가중시키며 방해하고 있습니다), 수련생을 위해 노력하지 않으려는 사람들, 기기를 ‘방치’하는 사람들을 위해 봉사하면서도, 다른 한편으로는 목적성 있게 하나하나 반복적으로 법리에 대한 교류와 토론을 했습니다. 이 또한 제가 앞으로 나아가는 데 도움이 되었습니다.
다행히도 일부 수련생들은 법리를 이해한 후 행동을 개선하기 시작했고, 그들은 마음속 깊은 곳에서 우러나오는 기쁨으로 사부님께 감사드렸습니다!
저는 반드시 사존의 말씀에 귀 기울여야 합니다. 여러 차례 저는 아직도 집착이 많은 낮은 층차의 수련인임을 깨달았고, 항상 과시심을 배척하고 닦아내야 한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2. 내려놓을 수 없는 수련생에 대한 ‘정(情)’
저는 원래 동작이 빠르지 못하고 일을 처리하는 데 시간이 많이 걸리는 편입니다. 수련생을 위한 기술 서비스도 아직 능숙하지 못하고, 하면서 배우는 형편이라 많은 노력과 시간을 들여야 합니다. 아침 일찍 나가서 밤 9시나 10시가 되어서야 집에 돌아오는 경우가 많았습니다. 처음에는 수련생들에게 폐를 끼치지 않으려고 제 점심(때로는 수련생과 그 가족의 점심까지도)을 직접 준비해 갔습니다.
초기에는 빵이나 냉동 만두 같은 것들을 가져갔습니다. 경제적 여건이 조금 나아지자 집착이 생겨 여러 가지 반찬과 과일 등을 가져가는 것으로 바뀌었습니다. 원래는 시간을 절약해 더 많은 대법 일을 함께하기 위해서였습니다. 그런데 점차 상황이 조금 변질되어 수련하지 않는 수련생의 가족들은 제가 가져온 것을 선물로 여겨 바로 먹지 않고 자신들이 나중에 먹으려고 남겨두었고, 대신 시간을 들여 별도로 식사를 준비했습니다. 이로 인해 시간을 절약하기는커녕 오히려 수련생 가족의 부담만 늘어났습니다. 그리고 음식을 꺼내 함께 먹은 사람들은 무의식중에 어떤 요리가 맛있고 어떤 요리는 맛이 없다고 평가하곤 했습니다.
어떤 때는 너무 바빠서 전날 음식을 준비하지 못하고, 다음 날 아침에는 가게가 문을 열지 않아 음식을 가져가지 못한 적도 있었습니다. 그러면 수련생들끼리 무엇이 맛있고 무엇은 맛이 없다는 대화가 이어지곤 했습니다…… 이를 보니, 제가 수련생들을 음식에 집착하는 사람으로 만들어버린 것은 아닌지 모르겠습니다. 저는 제가 한 일이 적절하지 않았고 수련의 길을 비뚤게 걷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사부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수련이라, 무엇을 누락이 없다(無漏)고 하는가? 하찮은 일은 없다.”(각지 설법13-미국 서부법회 설법)
그렇다면 먹는 문제도 사소한 문제가 아닙니다. 이는 제가 다른 수련생에 대한 정(情)을 내려놓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저는 늘 생활이 불편한 곳에서 사는 수련생도 있고, 반복적으로 박해받아 감옥에서 많은 고통을 겪은 수련생도 있으며, 대법을 실증하느라 요리할 시간조차 없을 정도로 바쁜 수련생도 있다고 생각합니다. 가끔은 함께 모여 개선책을 마련할 수 있을 것이라고 여겼습니다.
돌이켜보니, 더욱 심각한 것은 혼자 사는 수련생을 방문했을 때 제가 닭고기, 오리고기, 생선, 육류로 식탁을 가득 채우고 미리 준비해둔 것까지 조리해서 차려놓았다는 점입니다. 모두가 맛있게 먹는 것을 보고, 그들이 끊임없이 칭찬하고 감사해하는 것을 들으며 제 마음속 허영심은 매우 큰 만족을 얻었습니다! 아이고! 일반인이 봤다면 우리가 수련하는 사람 같아 보였을까요? 게다가 대법제자가 이번 법을 실증하는 과정에서 한 모든 일은 미래를 위해 남겨두는 것입니다. 수련생들 사이에서 제가 한 이런 일들이 어떻게 미래를 위한 참고가 될 수 있을까요? 수련생에 대한 정(情)은 닦아 버려야 할 사람의 마음, 집착이므로 미래에 참고하도록 남겨두어선 안 됩니다.
저는 제가 먹는 것에 집착하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사부님께서도 이와 관련하여 저를 깨우쳐주신 적이 있습니다. 예를 들어 저는 땅콩과 밤 먹는 것을 좋아하는데, 소화가 잘 되지 않는다는 것을 알고 있어서 한 번에 조금씩만 먹으면 괜찮았습니다. 하지만 수련한 지 몇 년이 지난 후, 특히 최근 몇 년 동안은 조금만 먹어도 위는 물론 복부 전체가 부풀어 오르고 참을 수 없을 정도로 쓰렸습니다. 최근에는 화장실을 자주 들락거려야 할 정도여서 그 이후로는 더 이상 이런 음식을 함부로 먹지 않게 되었습니다.
지금은 집에 있는 음식은 무엇이든 먹고, 가족들이 먹기 싫어하는 남은 음식이나 조금 오래된 음식은 제가 먹습니다. 수련생들에게 봉사할 때는 가는 길에 간단한 마른 음식을 가져다 먹습니다.
우리가 사악의 박해 속에서 우여곡절 끝에 오늘에 이르렀음을 상기해보면, 모두 서로 도와가며 오늘에 이르렀습니다. 정말 자신의 모든 것을 내려놓았고 사부님께서는 “서로 구조(救助)”[험악(險惡)을 멀리하라]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예를 들면, 제가 사악에게 구금된 몇 년 동안, 제가 살던 마을에서 집에서 수련을 견지하던 수련생들은 단 한 명도 저를 찾아오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당시 박해가 창궐한 가운데서도 자신의 안위를 돌보지 않고 저를 찾아오는 수련생들이 있었고, 그들 중 일부는 사부님 경문까지 보내주었습니다. 사부님의 대법이 없었다면 저는 걸어 나오지 못했을 것입니다! 저는 사부님의 경문을 볼 수 없다는 것이 가장 고통스럽다는 것을 압니다……. 그래서 저는 절대로 안주하거나 포기하지 않고 계속해서 기술을 배워나갈 것입니다!
최근 들어 제 수련 상태가 다소 느슨해졌고, 또한 신체가 장기간 소업 상태에 있었기에 지금은 제 모든 노력을 다해야 할 때입니다. 지난 몇 년 동안 신체의 특정 부위에서 반복적으로 나타난 소업 현상으로 인해 체력과 활력이 저하되는 듯한 느낌이 들었지만, 저는 이러한 가상을 인정하지 않기로 했습니다. 대신 생사의 갈림길에서 저를 도와주었던 수련생들과 다른 수련생들을 계속해서 지원해 그들이 정상적으로 인터넷에 접속할 수 있도록 돕겠습니다.
우리 ‘오래된 수련생들’은 모두 사부님께서 ‘7.20’ 사건 이전에 이미 우리를 제자리로 밀어올려 주셨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습니다. 사부님께서는 우리를 매우 소중히 여기십니다. 법을 얻기 위해 이 세상에 내려오지 않은 천상의 생명들은 우리를 부러워하고 있으며, 우리 각자의 천국 세계에 있는 중생들은 그들의 왕인 우리가 수련을 원만히 마치고 돌아오기를 간절히 기다리고 있습니다. 우리는 사부님의 정법을 돕는 이 과정에서 결코 멈춰서는 안 됩니다.
사부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천난만난(千難萬難)의 길을 다 걸어 지나왔는데, 마지막에 걸려 넘어지지 말라.”(깨어나라)
우리 모두 인내심을 가지고 함께 노력해 천상으로 돌아가는 길을 방해하는 여러 가지 집착을 제거합시다. 그리하여 우리의 위대한 서약을 이루고 사존의 마음을 편안하게 해드립시다!
원문발표: 2024년 10월 2일
문장분류: 수련교류
원문위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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