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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어떻게 마도(魔道)에서 불도(佛道)로 되돌아왔는가

글/ 왕로(王璐, 미국)

[명혜망] 다음은 독자가 보내온 편지로 발신자는 ‘왕로’라고 서명했으며 인터넷 닉네임은 ‘우하염자(雨荷念慈)’이다. 편지 내용에 따르면, 저자는 안후이성 벙부시에 살고 있었고, 중국에서 파룬궁 수련으로 인해 중공(중국공산당)에 의해 불법 구금되어 양쪽 귀가 들리지 않게 되는 박해를 당했지만, 중공의 세뇌 술책에 완전히 속아 넘어가 오히려 ‘방교'(幫敎, 세뇌를 도와주는 사람)가 되었다.

그러나 중공의 거짓말이 모든 사람을 죽을 때까지 속일 수는 없으며, 속은 사람들 모두가 깨닫지 못하는 것을 바라는 것도 아니다. 예를 들어, 속은 사람들 중에는 강제 세뇌가 만연한 중국을 떠나 운 좋게 해외로 나가 진상을 접하고, 눈을 뜨고 마음을 열어 진상을 알게 되는 사람들이 있다. 왕로는 미국에서 ‘610사무실'(장쩌민이 불법적으로 설립한 파룬궁 박해기구)의 통제와 이용에서 벗어나 새롭게 법공부와 수련을 시작한 사람이다.

다음은 이 독자가 편지에서 자신의 이야기를 서술한 내용이다. 소제목은 편집자가 추가한 것이다.

1. 출옥, 방교 활동, 미국행

2015년 11월 6일, 언니와 조카가 감옥에서 날 데리고 고향인 푸양으로 갔습니다. 둘째 오빠 집에 도착해서야 절 가장 사랑하셨던 아버지께서 2년 전에 이미 돌아가셨다는 것을 알게 되었고 저는 너무나 비통했습니다!

벙부로 돌아와서는 각 정치법률위원회와 공안국은 저에게 ‘전향(수련 포기)’을 축하한다며 표창 깃발을 보내줬고, 저에게 현지 세뇌반에 가서 ‘체험담’을 말하게 했는데, 저는 아버지 생각만 하면서 눈물을 흘리며 울었습니다.

곧이어 여러 병원에 가서 귀를 검사했는데 의사들은 모두 이미 치료할 시기를 놓쳤다고 했습니다. 또 발치하려고 여러 병원에 갔지만 모두 뽑아주지 않았습니다. 결국 중의원에 가서 침을 맞고 탕약을 마셨는데 배가 아파 걸을 수도 없을 정도였고 이명과 난청도 좋아지지 않았습니다.

출소 후 아들이 저에게 미국에 와서 손녀를 돌봐달라고 했는데 감옥에서 경찰들이 하는 말을 들었던 게 생각났습니다. “미국은 음모가 있는 나라이고 미국에 유학 가는 학생들은 모두 감시를 받습니다.” 그래서 저는 가지 않겠다고 하고 오히려 손녀를 (중국으로) 보내면 제가 돌보겠다고 했습니다. 나중에 아들은 가족 모두가 병으로 쓰러졌다고 했지만 저는 여전히 가지 않겠다고 하면서 제 월급 통장에 있던 얼마 안 되는 돈을 모두 보내 그들이 입원해서 치료받게 했습니다. 그 후 아들은 손녀가 계단에서 굴러떨어져 구토가 멈추지 않는다며 제가 오지 않으면 목을 매겠다고 했습니다. 저는 이래서는 안 되겠다고 생각했습니다! 죽음을 보고 구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미국이 칼산 불바다라 해도 가야 했고 결국 아들의 요청을 받아들여 미국에 가기로 했습니다.

그런데 예상치 못하게 모든 과정이 순조로웠습니다. 미국 영사관에 가서 서명할 때 비자를 담당하는 젊은이가 웃으면서 뛰어왔고, 아무 질문도 없이 여권을 받아 갔습니다. 당시 저는 그가 아들의 친구인 줄 알았습니다. 공항에서도 마찬가지였습니다. 두 명의 젊은 여교수들을 만났는데 그들이 내내 저를 보살펴주며 마중 나온 아들 앞까지 데려다주었습니다. 지금 생각해보면 제가 그렇게 순조롭게 미국에 올 수 있었던 것은 자비로운 사부님께서 저를 포기하지 않으시고 아들을 통해 끌어당기고 밀어주신 것이었습니다. 만약 제가 미국에 오지 않았다면 매일 중공의 세뇌반에서 지내면서 파룬궁으로 다시 돌아오기는 매우 어려웠을 것입니다! 지금 제가 파룬궁으로 돌아올 수 있게 된 것은 정말 천만다행입니다!

2. 자녀들이 내게 파룬궁을 다시 수련하게 하고 망명 신청을 하게 하다

미국에 도착하자 아들은 저를 보고 전형적인 ‘스톡홀름 증후군’이라고 했습니다. 제가 무슨 뜻이냐고 묻자 그는 “강도에게 납치되고도 강도에게 감사하는 거예요”라고 말했습니다. 저는 “어떻게 그럴 수 있어? 나는 시비를 구분 못 하는 사람이 아니야. 당의 적시적인 구원이 없었다면 내 마지막 결과는 살인이나 자살, 아니면 정신분열증이었을 거야”라고 말했습니다.

아들은 말했습니다. “그건 불가능해요. 전 세계 100여 개국에서 많은 사람이 ‘파룬궁’을 수련하고 있는데, 중국을 제외하고 어느 나라에서 파룬궁 수련으로 자살하고, 살인하고, 정신분열증에 걸렸다고 말하는 것 보셨어요?” 저는 “감옥에서 녹화 영상을 많이 봤어”라고 했고, 그는 “어머니가 조사해보셨나요?”라고 반문했습니다. 이 반문에 저는 어리둥절했습니다. 그렇습니다! 저는 왜 조사해볼 생각을 못 했을까요? 저는 할 말을 잃었습니다.

나중에 저는 아들에게 물었습니다. “미국은 큰 음모가 있지?” 아들은 “말도 안 돼요. 미국은 다민족으로 구성된 나라이고 신을 믿는 사람이 많으며, 사람들은 모두 매우 친절해요”라고 말했습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저는 이 점을 확인했는데 중공 감옥에서 선전하던 것과는 전혀 달랐습니다. 미국인들은 아는 사람이든 모르는 사람이든 모두 자발적으로 열정적으로 인사를 나눴고, 경계할 만한 것은 아무것도 없었습니다. 우리는 비록 대학 캠퍼스에 살고 있었지만 사방으로 문이 통했고, 큰 문도 없었으며 담장도 없었고, 방범창이나 방범문은 더더욱 볼 수 없었습니다. 우편물을 문 앞에 며칠이나 놓아두어도 아무 문제가 없었습니다.

미국에 온 지 얼마 되지 않아 아들이 저에게 파룬궁을 다시 믿고 정치적 망명을 신청해서 미국에 남아 손녀를 돌봐달라고 권했습니다. 그때는 (중공이 선전하는 소위 살인, 자살 또는 정신분열증에 대해) 조사해보지 않아 할 말을 잃었지만, 파룬궁에 대한 오해는 아직 없애지 못했습니다. 저는 아들이 제가 아이를 돌보게 하려고 노모의 생사도 아랑곳하지 않는다고 생각해서 단호히 거절하며 “나는 더 이상 파룬궁을 믿지 않을 거야!”라고 말했습니다. 그는 또 손녀의 생일이 5월 13일로 사부님의 생신과 같은 날이라고 했습니다. 저는 “그건 나와 상관없어”라고 말했습니다.

미국에 온 지 3개월이 되어갈 무렵, 아들이 갑자기 매우 심각한 표정으로 말했습니다. “만약 어머니가 남아서 손녀를 돌보지 않으면 제 네 번째 석사 학위는 물거품이 되고 박사 학위도 따지 못할 거예요. 며느리도 졸업하지 못할 거고요. 만약 어머니가 남기로 했는데 정치적 망명 신청을 하지 않으면 신분이 없게 되고, 제가 보증인이라 체포될 거예요. 그때는 우리 가족 모두가 끝장나는 거예요.” 그 말을 듣고 저는 정말 마음이 괴로웠습니다. 아들이 저를 사람으로 여기지 않는다고 생각했고 그래서 마음을 굳게 먹었습니다. ‘죽으라면 죽겠다! 나 한 사람이 죽고 너희 세 식구가 살면 되지.’ 그래서 저는 파룬궁으로 다시 돌아가 정치적 망명을 신청하기로 동의했습니다.

3. 명혜망의 신기한 보도

바로 그때, 즉 2016년 2월 6일 설날, 현지 정법위원회 ‘610’ 직원이 제게 ‘안부’ 메시지를 보내며 언제 돌아오느냐고 물었습니다. 그들이 운영하는 ‘학습반’에서 내가 가서 ‘교육’을 도와주길 바란다고 했습니다.

(바로 그날) 출소 후 명혜망을 다시 볼 생각을 전혀 하지 않았던 저는 이때 누가 또 체포됐는지 보려고 명혜망을 열어보았습니다. 뜻밖에도 명혜망을 열자마자 가장 먼저 눈에 들어온 것은 저에 대한 보도였고, 상황이 매우 사실적이어서 당시 정말 놀랐습니다! 제가 전향된 후에는 어떤 수련생과도 개별적으로 접촉하지 않았는데 누가 감옥에서 저에 대한 박해 상황을 알 수 있었을까요? 더구나 저는 이미 ‘전향’되어 감옥에 대해 공덕을 찬양하기만 했고, 감옥에서 저에 대한 박해에 대해 말할 수 없었습니다. 또한 누가 제가 노동수용소와 직장에서 있었던 일을 알 수 있었을까요?

아들이 보고는 그도 매우 놀라며 “이건 정말 신께서 하신 거예요!”라고 말했습니다.

이어서 저는 안후이성 여자 감옥에 대한 두 편의 보도를 더 보았는데, 모두 완전히 사실이었습니다. 이것으로 인해 제가 세뇌당한 후 명혜망이 가짜 사이트라고 생각했던 것이 바뀌었습니다. 당시 저는 매우 놀랐습니다! ‘내가 틀린 걸까? 정말 내가 틀린 걸까?!’ 저는 급히 파룬궁 수련서 《전법륜(轉法輪)》을 보기 시작했고, 법리가 단번에 제 눈앞에 펼쳐졌습니다. 수련이란 무엇인가? 어떻게 수련자가 되는가? 어떻게 해야 진정으로 좋은 사람이 될 수 있는가? 모두 ‘덕(德)’자를 중심으로 하고 있었습니다! 저는 울면서 보았고 제가 틀렸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후회의 눈물이 멈추지 않고 흘러내렸습니다!

지금 생각해보면, 당시 (중공의 세뇌술에 완전히 속아 넘어가 세뇌 방교 역할까지 했던 제가) 어떻게 막 《전법륜》을 다시 읽고 법리를 볼 수 있었을까요? 바로 제가 생사에 대한 집착을 내려놓고 타인을 위하는 마음을 가졌기 때문에 이 점이 새로운 우주의 특성에 부합했던 것입니다.

4. 다시 수련하게 되자 610과 사오(邪悟)한 사람들에게 차단당하다

그 이후로 일이 생기면 안으로 찾았고 사부님께서는 저에게 오직 생사에 대한 집착을 내려놓고 자아를 완전히 내려놓아야만 본질이 드러나고 대법의 법리를 볼 수 있으며 진선인(眞·善·忍) 대법에 동화될 수 있다는 것을 깨닫게 해주셨습니다!

깨달은 후 저는 즉시 현지 수련생들을 만나러 갔습니다. 그들도 제가 제때 다시 깨달은 것을 보고 감동의 눈물을 흘렸습니다! 그리고 저에게 션윈(神韻) 공연을 보러 가라고 했습니다. 션윈을 관람할 때 (감금 기간 중 귀가 들리지 않게 되어) 들을 수는 없었지만 감동의 눈물이 멈추지 않고 흘렀습니다. 나중에 그들은 저에게 왜 그렇게 심하게 박해받았는지 반성해보라고 했습니다. 몇 년이 지났는데도 저는 그것을 써내지 못했고, 회상할 때마다 매우 짜증이 났습니다. 지금은 이해했습니다. 그것은 일 속에 빠져 있어서 인간의 인식에서 벗어나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지금은 한눈에 파악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깨닫자 법리가 매우 명확했고 저는 단번에 14장의 편지를 썼습니다. 저는 맹목적으로 대법에 돌아온 것이 아니라 법리에서 인식했다고 말했습니다. 사진을 찍어 위챗으로 저를 전향시킨 사오(邪悟)한 여성 판사에게 보냈습니다. 그녀는 처음 며칠 동안은 제가 미국에 간 것을 기뻐하며 어떻게 미국에 갔느냐고 물었습니다. 그녀는 작년에 미국 비자를 신청했다가 거절당했다고 했고 많은 ‘전향된 수련생들’이 저에게 위챗 친구 추가를 하게 하려고 했습니다. 하지만 그녀는 제가 보낸 편지를 받은 후에는 저를 직접 비난하고 저를 차단해버렸고, 다른 전향된 수련생들에게도 저를 차단하라고 알렸습니다.

그 사이에 저는 ‘610’ 직원 두 명에게도 메시지를 보내 전향은 잘못된 것이며 저는 다시 대법으로 돌아왔다고 알렸습니다. 그들도 저를 비난한 뒤 차단해버렸습니다.

5. 다시 수련하며 심성 고비를 넘기 시작하다

저는 그간 착실한 수련 방법을 몰라 법공부와 실제 수련이 분리되어 있었고, 자신을 수련할 줄 모르고 늘 다른 사람을 수련시키려고 했으며, 문제를 볼 때 법으로 대조하지 않고 오래된 사람의 관념으로 사물을 따져 보았습니다. 즉, 공부는 공부대로 하고 행동은 행동대로 했습니다! 아들과 장을 보러 갈 때마다 화가 났는데 제가 사고 싶은 것을 그는 사지 않았습니다. 또 며느리가 매우 게을러 보였습니다. 낮에는 자고 밤에는 휴대폰을 봤으며, 아이 돌보기와 집안일은 제가 모두 도맡아 했습니다. 입으로는 사부님의 법 “고생을 낙으로 삼노라”(홍음-마음고생)를 외웠지만 실제로는 그렇게 하지 못했습니다. 겉으로는 매우 잘 참는 것 같아 며느리에 대해 말하지 않았지만, 마음속으로는 넘어가지 못해 자주 뒤에서 며느리에 대해 말했습니다. 결과적으로 원래 제가 대법으로 돌아오는 것을 매우 지지하고, 저를 위해 대법 책을 사주고, 저를 연공장에 데려가고, 저에게 자료를 가져다주어 배포하게 하고, 돈을 들여 가장 좋은 자리의 표를 사서 저와 함께 션윈을 보러 갔던 아들과 며느리가 불과 2년 만에 저에게 떠나라고 하는 지경에 이르렀습니다. 만약 떠나기 싫으면 파룬궁을 포기하고 기독교로 개종해도 된다고 했습니다.

그때 저는 제 수련에 문제가 있다고 생각하지 않고 오히려 밖으로 보며 아들이 며느리를 위해 노모를 무시한다며 정말 불효자라고 생각했습니다. 저는 준비도 하지 않은 채 그들 말에 귀국하기로 했고, 그들은 제게 귀국 항공권을 사주었습니다. 뉴욕의 한 수련생과 작별 인사를 할 때 그 수련생은 “사부님께서 해외 수련생들이 귀국하는 것을 허락하지 않으셨어요. 뉴욕으로 오세요. 제가 당신께 집을 구해드릴게요”라고 말했습니다. 저는 그 말을 듣고 마음이 움직였습니다.

아들 부부에게 이 일을 말하자 그들은 듣고 나서 한목소리로 반대했습니다. 첫째, 이미 구매한 귀국 항공권은 환불이 안 되고, 둘째, 뉴욕은 비용이 매우 높다는 것이었습니다. 하지만 저는 가겠다고 고집했고 며느리는 제가 가서 아들에게 돈을 요구할까 봐 두려워 그녀가 쓴 서약서에 서명해 모자 관계를 단절하라고 강요했습니다. 저는 “언니가 나에게 돈을 보내줄 거야”라고 말했고, 며느리는 “더 이상 어머님을 믿지 않아요. 귀국 항공권은 어머님이 사달라고 하신 거예요. 이제 와서 말을 바꾸는 거예요”라고 했습니다. 그녀는 제가 다시 마음을 바꿀까 봐 두려워 제게 서명하라고 한 것입니다. 저는 단호히 거절했고 며느리는 몸을 돌려 위층으로 달려갔습니다. 제가 급히 달려가 보니 며느리가 제 대법 책을 찢고 있었습니다. 저는 달려가 필사적으로 빼앗으려 했고 그녀의 긴 머리를 잡고 놓아주지 않았습니다. 아들이 강제로 제 손을 놓게 했고, 제가 손을 놓자 그녀는 대법 책을 찢어 비닐봉지에 넣고 물에 담갔습니다.

저는 당시 극도로 화가 났는데, 한 고비를 넘지 못하자 또 다른 고비가 왔습니다. 며느리가 또 제 여권을 가져가 찢으려고 했고 저는 또 급히 그녀의 머리카락을 잡아 바닥에 넘어뜨렸습니다. 아들은 한편으로는 저에게 그만두라고 하고 다른 한편으로는 사진을 찍으며 경찰에 신고하겠다고 했습니다. 저는 더욱 화가 나서 큰 소리로 며느리를 악마라고 욕하며 동시에 그녀의 머리카락을 세게 잡아당겼고, 그녀는 그제야 여권을 놓았습니다. 저는 순간적으로 며느리의 안경을 빼앗고 그녀의 신분증도 가져갔습니다. 한편으로는 큰 소리로 욕하면서 다른 한편으로는 짐을 들고 그날 밤 그 집을 떠났습니다. 이웃에 미치는 영향도 고려하지 않았고 오히려 이웃들이 아들과 며느리가 노인을 학대한다는 것을 알게 하고 싶었습니다.

뒷산으로 달려가 숨어 있다가 다음 날 오후에야 아들과 합의에 도달했고 그날 밤 그들은 저를 뉴욕행 비행기에 태워 보냈습니다.

6. 갈등을 피해 뉴욕으로 가서 대규모 법공부에 참가하다

뉴욕 플러싱 숙소에 도착했을 때는 이미 밤이었는데, 수련생이 저를 데리고 대규모 법공부에 참가하러 가겠다고 했습니다! 저녁을 먹지 않은 채 갔는데, 가서 보니 정말 충격적이었습니다! ‘이렇게 많은 수련생이 있다니!’ 정말 감격스러웠습니다! 또한 저는 제가 뉴욕에 오는 것을 도와준 수련생의 어머니를 만났습니다. 법공부를 마치고 그녀의 어머니가 저와 함께 제 숙소로 돌아와 교류했습니다. 저는 마침내 가정의 진흙탕에서 벗어났다고 말했는데, 그녀의 어머니는 듣고 나서 깜짝 놀랐습니다. 제가 심득 체험이 있어 알려주고 싶다고 하자 뜻밖에도 그녀의 어머니는 매우 엄숙하게 말했습니다. “당신은 돌아가야 해요.” 제 마음은 철렁 내려앉았습니다. “무슨 일이죠?” 그녀의 어머니가 말했습니다. “사부님께서 우리에게 가정을 원만하게 하라고 하셨는데, 당신은 오히려 가정의 진흙탕에서 벗어났다고 말씀하시네요.” 당시 저는 이해하지 못하고 말했습니다. “뭐라고 해도 난 돌아가지 않을 거예요.”

지금 저는 이해했습니다. 그 수련생의 어머니는 법의 관점에서 인식한 것이고, 저는 자신의 관념으로 인식한 것이었습니다.

어느 날 밤 같은 방을 쓰는 젊은 수련생 샤오위안이 제가 불평하는 마음이 크다는 것을 보고 주의를 주었습니다. “불평하는 마음은 사람을 죽일 수 있습니다!” 저는 당시 깜짝 놀랐습니다. ‘어떻게 사람을 죽일 수 있을까?’ 그녀는 자신의 어머니도 수련자인데 늘 아버지에게 불평했기 때문에 일찍 세상을 떠나셨다고 말했습니다.

다시 생각해보니 이 2년간 며느리에게 화가 날 때마다 두 번이나 심하게 기침했고 가래가 나오지 않아 여러 번 질식할 뻔했습니다. 한번은 꿈에서 가래 때문에 죽을 뻔한 그 순간, 한 목소리가 들렸습니다. “오직 며느리만이 당신을 구할 수 있다”면서 제게 며느리에게 무릎을 꿇으라고 했습니다. 저는 무슨 뜻인지 이해하지 못하고 필사적으로 “사부님 구해주세요!”라고 외쳤습니다. 그러다 갑자기 깼습니다.

지금에서야 깨달았습니다. 꿈속의 암시는 제가 며느리에게 사과해야 한다는 것이었습니다.

샤오위안의 말을 듣고 저는 두려워졌습니다. 절대 다시는 다른 사람을 원망하지 말아야겠다고 다짐했습니다.

이때 사부님께서 ‘홍음4-미혹의 올가미를 풀다’에서 말씀하신 “원한을 품지 말고 당신의 선(善)을 지켜야 할지니”가 머릿속에 들어왔습니다. 사부님께서 《전법륜》에서 말씀하신 “어떤 일이든지 모두 인연관계가 있는 것”이란 말씀도 머릿속에 들어왔습니다. 저는 사부님의 이 두 마디 법을 명심했습니다! 끊임없이 암송하며 머릿속에 새겼습니다.

특히 나중에 사부님께서 ‘정진요지2-원만을 향해 나아가자’에서 말씀하신 “그러나 사람이 이 세상에 오면 인연에 따라 인생의 길과 인생 중의 득실(得失)이 결정되는데, 어찌 사람의 관념으로 인생의 매 과정을 결정할 수 있겠는가?”를 보고 나서 마음 깊이 충격을 받았습니다. 저는 순간 깨달았습니다! 이해했습니다! ‘원래 인생의 득실은 사람의 관념으로 결정되는 것이 아니었구나!’

그 순간부터 저는 전남편을 용서했습니다. 저는 본래 중국으로 돌아가 법정에서 그와 소송을 해서 제게 속한 재산을 되찾으려고 했지만, 법리를 이해한 후에는 요구하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오히려 그를 뉴욕으로 초대해 제 돈으로 수련생에게 부탁해 가장 좋은 자리의 표를 사서 그가 션윈을 볼 수 있게 했습니다. 이로써 대법을 매우 증오하던 한 사람이 대법의 문에 들어오게 되었습니다.

저는 또한 한때 저를 집에서 내쫓으려 했던 아들과 며느리를 용서했습니다. 어떤 사람이 저에게 “이렇게 힘들게 일하는데 아들이 왜 당신을 부양하지 않나요?”라고 물었을 때 저는 “그는 내게 빚진 게 없어요”라고 대답했습니다. 그 이후로 저는 더 이상 아들과 며느리를 원망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아들이 다시 제게 아이를 돌봐달라고 했을 때 저는 기꺼이 동의했습니다.

저는 또한 조카를 용서했습니다. 한번은 언니가 제게 3000달러의 생활비를 보내줬습니다. 제가 돈을 찾으러 갔을 때 은행 계좌에는 24달러밖에 없다는 것을 발견했습니다. 나중에 알아보니 조카가 도박 빚 때문에 몰래 가져갔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지금 생각해보면 그때 사부님의 이 단락 법이 제 마음속에 뿌리를 내렸기 때문에 처음부터 끝까지 마음이 흔들리지 않았고, 오히려 그가 미국에 와서 대법이 그를 변화시킬 수 있기를 바랐습니다.

정말 우연의 일치입니다! 제가 뉴욕에 도착한 다음 날 오후, 마침 수련생들이 사부님께 새해 인사를 드리는 대규모 행사가 있었습니다! 풍성한 만찬과 공연이 있어 정말 즐거웠습니다. 저는 배불리 식사하고 행복하게 수련생들의 공연에 빠져들었습니다.

7. 영사관 앞 시위 현장에서 신기하게 건강이 회복되다

셋째 날 오전에 저는 중국영사관 앞 시위 현장에 배치되었는데, 거기에 가보니 깜짝 놀랐습니다. 대부분이 노년 수련생들이었는데 허리가 굽은 사람, 목이 비뚤어진 사람, 서 있기 힘든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당시 저는 수련생들의 정신이 가상하다고 생각했습니다. 바닷가 근처라 바람이 세게 불어 두꺼운 점퍼 세 벌을 입고도 추워서 덜덜 떨었습니다. 그들은 정말 대단했고 저는 존경의 눈물을 흘렸습니다. 나중에 날씨가 따뜻해졌을 때 책임자가 다리가 손상된 외국인 수련생을 시위 현장으로 데려왔습니다. 2018년 사부님께서 워싱턴DC 법회에서 설법하실 때 이 일을 언급하셨고, 그제야 병업이 있는 수련생들이 중국영사관 앞 시위 현장에 가지 않게 되었습니다. 이때 저는 생각했습니다. ‘병업 중의 수련생들이 이곳에 에너지를 구하러 온 것이었구나!’

저는 남부 캘리포니아에서 왔기 때문에 당시 적응하기가 매우 어려웠습니다. 매일 춥고 배고프고 서 있기가 힘들었습니다. 눈이 오고 비가 오는 날 그곳에서 포륜(抱輪)을 하면 소매에 눈과 물이 가득 찼습니다. 정말 고통스러웠습니다! 매일 숙소로 돌아오면 늦었고, 식사하고 나면 피곤하고 졸려서 법공부도 제대로 하지 못해 매우 힘들었습니다. 중국영사관 앞 시위는 최소 3개월 동안 해야 한다고 규정되어 있었습니다. 하지만 경제적으로 어려워 지하철표를 사는 것도 힘들어서 한 달이 다 되어갈 무렵 갑자기 이런 생각이 났습니다. 매일 2교대를 전부 맡으면 남은 두 달은 한 달만 서면 되고 한 달 치 지하철표만 사면 된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담당자에게 이 일을 말했는데 그들은 처음에는 제가 견디지 못할까 봐 걱정했습니다. 저도 그때는 하루의 1교대도 견디기 힘든데 하물며 2교대는 어떻겠냐고 생각했지만, 돈을 아끼기 위해 어쩔 수 없이 해야 했습니다.

담당자들은 제 귀가 들리지 않는 것을 고려해 제게 연공을 더 많이 하라고 하고 그들이 현수막을 들기로 했습니다. 이렇게 해서 저는 하루에 기본적으로 동공을 3~4번, 정공을 1번 연마할 수 있었습니다. 뜻밖에도 3일 후에 기적이 일어났습니다! 완전히 낫지 않았던 피부병이 갑자기 흔적도 없이 사라졌고, 피부가 매끄럽고 섬세해졌으며, 안색이 붉어지고 정신이 좋아졌습니다. 두 손의 손가락이 얼어서 아팠던 것도 괜찮아졌고, 귀에서 아무리 크게 윙윙거려도 괴롭지 않았습니다. 더 신기한 것은 집에 돌아와 식사하고 나서 법공부를 할 때 전혀 졸리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매일 3~4시간만 자도 제시간에 일어날 수 있었고 전혀 힘들지 않았습니다. 이는 사부님께서 말씀하신 “수련은 가장 좋은 휴식이다”(북미 제1기 법회 설법)를 진실하게 증명한 것입니다. 제 청력도 어느 정도 회복되었습니다. MP3를 샀는데 5가지 공법의 연공 음악을 모두 명확히 들을 수 있었습니다!

많은 수련생이 제 변화를 보고 연공의 중요성을 인식하게 되었습니다. 저는 그때 매우 활력이 넘쳐서 많은 수련생의 이사를 도와주었습니다. 특히 새로운 집주인 수련생은 제가 연공을 많이 하고 체력이 이렇게 좋은 것을 보고 곧바로 뉴욕 포레스트 파크에 연공장을 만들었습니다. 행사 현장 담당자도 제게 발언문을 써서 대규모 법공부 시간에 교류하라고 했습니다.

8. ‘연(煉)’ 앞에 ‘수(修)’가 있다는 것을 인식하다

하지만 지금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습니다. 지금은 예전보다 더 많이 연공을 하는데, 하루에 심지어 6시간씩 연공을 하고 일주일 동안 꾸준히 해도 몸에 큰 변화가 없습니다. 지금은 인식이 높아져서 사부님께서 말씀하신 “수련은 가장 좋은 휴식이다”에서 ‘연’ 앞에 ‘수’라는 글자가 있다는 것을 보게 되었습니다!

지금 돌이켜 보면 그때 저는 모든 것을 포기하고 자아를 내려놓았으며 심성이 높아져 사부님께서 저를 밀어주신 것이었습니다.

한 달이 다 되어갈 무렵 갑자기 중국 경찰에 의해 삐끗했던 오른쪽 무릎이 특히 아팠습니다. 집주인 수련생이 제게 매일 수련생들을 위해 밥을 해주는 것 때문이 아닌지 물었고, 저는 그럴 수도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수련생들이 제게 너무 잘해줘서 보답할 길이 없어 그들에게 먹을 것을 좀 해주는 것뿐이었는데, 이것도 정(情)이라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그날 저녁에는 아프지 않았지만 다음날 또 아팠습니다. 저는 또 생각했습니다. ‘내가 돈을 아끼려고 두 달 치 근무를 한 달로 합친 것은 내 마음대로 한 것이고, 여전히 개인적인 이익 계산이 있었던 것이구나.’ 수련인으로서 마땅히 책임자의 안배에 따라 3개월 동안 근무해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이렇게 생각하자마자 저는 즉시 담당자에게 다음 달에도 계속 근무하겠다고 했습니다. 또한 앞으로는 1교대만 서고 남은 시간에 법공부를 더 많이 하겠다고 했습니다. 말을 마치자마자 다리가 즉시 아프지 않았고, 그 후로 1년 가까이 근무했지만 다리가 다시 아픈 적이 없었습니다. 그러나 당시에는 이것이 제가 수련했기 때문이라는 것, 안으로 찾았기 때문이라는 것을 깨닫지 못했습니다. 안으로 찾아서 기적이 일어난 것입니다.

그때 다른 두 수련생도 다리가 아팠는데 저는 그들에게 연공을 많이 하라고 격려했을 뿐이었습니다. 하지만 그들은 연공을 많이 해도 오랫동안 좋아지지 않았습니다.

9. 아이들과 손녀에게 돌아간 후 심성 고비가 계속되다

애틀랜타에 도착해서 1년 만에 본 손녀를 보니 마음이 아팠습니다. 아들과 며느리가 이혼했고 겨우 4살 남짓한 아이가 엄마 곁에 없다니 정말 불쌍하다고 생각해서 그들을 화해시켜 다시 합치게 하고 싶었습니다.

당시 며느리가 이성을 잃고 대법 책을 찢었고 또 제게 모자 관계를 단절하라고 했는데, 결국 그녀에게 보응이 온 것이었습니다. 하지만 저는 여전히 사람의 관념으로 문제를 보고 있었고, 손녀를 데리고 뉴욕으로 돌아가지 않겠다고 아들을 협박했습니다(부부를 화해시키려고). 이 일 때문에 아들은 자주 제게 화를 내며 입을 다물라고 했습니다. 저도 자주 손녀에게 화를 내고 때로는 화가 나서 손녀를 방에 가두기도 했습니다. 아들도 내가 손녀에게 너무 심하다고 말했고 저 역시 화를 참을 수 없었습니다. 손녀도 자주 “할머니, 화내면 대법제자가 아니에요!”라고 말했습니다. 저는 “내가 화내는 건 너 때문이야!”라고 말했습니다. 하지만 매번 손녀는 계속 제게 사과를 원했고 “미안해, 모두 내 잘못이야. 날 용서해 줄 수 있겠니?”라고 말하라고 했습니다. 제가 손녀가 말한 대로 사과하기만 하면 손녀는 즉시 매우 기뻐하며 고개를 끄덕이며 저를 용서한다고 했습니다!

지금 생각해보면 사부님께서 손녀의 입을 빌려 제게 주의를 주신 것입니다. 진정한 대법 수련인이 되어야 한다고요!

이곳에 와서는 수련생들과의 접촉이 적어졌고 연공장도 없어서 매일 손녀를 데리고 대형 쇼핑몰의 놀이터에 갔습니다. 메이시스 백화점에서 옷을 입히는 장난감을 보고 저도 모르게 사게 되었습니다. 점점 더 많이 사다 보니 어느새 수천 달러를 써버렸고, 7번이나 벌금을 물었는데도 자신의 수련에 문제가 생겼다는 것을 깨닫지 못했습니다.

2019년 5월에 뉴욕에서 열린 법회에 참석했을 때 먼저 수련생들과 어떻게 제고할지 교류하는 것이 아니라, 수련생을 끌고 가서 은행에 가 벌금을 돌려받으려고 했습니다. 그 사이에 수련생이 식사를 대접해주자 또 수련생에게 보답하고 싶어서 많은 식재료를 샀습니다. (차를) 끌고 숙소로 가서 짐을 들고 계단을 오르다가 ‘쾅’ 하고 계단에 세게 넘어져 한동안 일어나지 못했습니다. 올라가서도 같은 방을 쓰는 천 언니에게 말하기가 미안해서 말하지 않았고, 더구나 자신의 문제를 찾지도 않았습니다. 오히려 만두를 빚고 닭다리를 삶느라 밤늦게까지 바빴습니다. 3일 동안 단체 활동에 참가한 것 외에는 나머지 시간을 모두 사람 일에 공을 들였고, 법도 공부하지 않고 연공도 하지 않았습니다!

그때가 천 언니를 마지막으로 본 때였습니다. 나중에 그녀를 떠올릴 때마다 마음속으로 매우 미안했습니다. 만약 일찍이 수련하는 법을 알았더라면 그녀를 좋은 사람이라고 칭찬만 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사실 그녀는 좋은 수련인은 아니었습니다! 천 언니는 대법 행사가 있으면 어디든 적극적으로 참가했지만 그녀는 그것이 곧 수련이라고 생각했습니다! 법공부도 매우 적게 했고, 대규모나 소규모 법공부에도 거의 참가하지 않았으며, 시간이 조금만 있으면 스타오(石濤, NTD 시사평론가)의 방송을 보느라 컴퓨터가 고장 났는데 화면이 깜빡거려도 계속 보았습니다. 자신은 베이징에서 퇴직금을 받고 있었지만 전부 40이 넘은 아들에게 주었고, 73세나 되었는데도 간호사 자격증을 따서 일하러 갔습니다. 그녀는 자신이 일자리를 찾을 수 있다는 것을 자랑스러워하며 다른 사람들을 무시했고 베이징에서 함께 온 하오 언니 등 많은 수련생과 갈등이 있었습니다.

10. 천 언니의 대법 책

하오 언니, 쉐 언니가 세상을 떠났다는 소식도 천 언니가 제게 알려주었습니다. 천 언니는 한번 행사 현장에서 기절했다가 다른 공간을 보았는데, 그것도 그녀가 3일 동안만 정진하게 했을 뿐입니다. 그녀는 뼈가 부러진 적도 있고, 치통이 심해서 한 번에 다섯 개의 이를 뽑았고, 나중에는 모든 이를 뽑았지만 그녀는 자신의 수련에 문제가 있다고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2020년에 그녀가 세상을 떠났다는 말을 들었을 때 정말 안타까웠습니다!

제가 천 언니에게 보관을 부탁했던 반 세트의 대법 책을 찾아달라고 다른 수련생에게 부탁했는데, A4 양장본이 매우 무겁고 우편 요금도 비쌀 것 같아서 그냥 다른 수련생에게 주려고 했습니다. 그런데 누구에게 주려고 해도 아무도 원하지 않았고, 나중에야 알고 보니 천 언니가 우한 폐렴으로 세상을 떠났다고 해서 옷가지는 모두 불태워버리고 대법 책만 탈당 사무실에 남아 있다고 했습니다. 어떤 수련생은 제게 그 책들을 공용으로 내놓고 탈당 사무실에서 다른 사람에게 주도록 하자고 제안했습니다. 저는 당시 이런 생각은 옳지 않은 것 같다고 말했습니다. 나중에 탈당 사무실 책임자가 자발적으로 제게 책을 보내주었는데, 받아보니 제 양장본 대법 책이 아니라 모두 천 언니의 대법 책이었습니다! 저는 최근 몇 년간 법공부를 할 때 거의 천 언니의 대법 책을 사용했는데 아무 일도 없었습니다.

11. 평탄하지 않은 다시 수련하는 길

그 후 우리는 메이시스 백화점에서 매우 먼 곳으로 이사했지만 마음속으로는 때때로 여전히 그곳을 잊지 못했습니다.

‘7·20’ 워싱턴DC 박해 반대 시위에 다녀온 다음 날, 아침 일찍 세수하러 갔을 때 목구멍에서 매끄러운 분홍색 작은 살덩이가 나왔는데, 손톱만한 크기였습니다. 당시 저는 제가 꽤 잘했다고 생각했기에 담당자가 저에게 지역 법회 발언문을 쓰라고 했을 때 즉시 수락했습니다. 그날 밤 오랫동안 생각했지만 아무것도 쓰지 못해서 내일 다시 쓰기로 했습니다. 그러나 다음 날 아침 연공할 때 갑자기 귀에서 연공 음악이 아주 약하게만 들리는 것을 발견했고, 순간 매우 의기소침해졌습니다. 그래서 담당자에게 쓸 수 없다고 알렸습니다. 지금 생각해보면 그때 듣지 못해서 쓰지 않은 것이 다행이었습니다. 만약 썼다면 어떤 발언문을 썼을까요?

그곳에서 매번 대규모 법공부에 참가할 때마다 수련생들과 법에서 교류하려고 생각하지 않았고, 항상 수련생들에게 제가 만든 녹두 과자나 케이크 같은 것을 가져다주려고만 생각했습니다. 지금 생각해보면 정말 너무 속인 같았습니다.

위챗 항목을 시작한 이후로 더욱 일하는 데만 바빠졌고 이후로 밤 12시 전에 잠든 적이 없었으며, 새벽 2~3시에 자는 일이 많았습니다. 점점 성격이 조급해져서 가족들에게 매우 짜증을 냈습니다.

시애틀로 이사 와서 미국 동부 시간보다 늦춰졌으니 이제 좀 일찍 쉴 수 있겠다고 생각했는데, 미국 정부가 위챗 사용을 중단시킨다는 소식을 듣고 저 스스로 또 한 가지 항목을 추가했습니다. 그룹 친구들에게 해외의 다른 프로그램 사용법을 지도하는 것이었습니다. 이렇게 해서 더 바빠졌고 새벽 3~4시에 자는 일이 흔했습니다. 매일 법을 첫 자리에 두려고 했지만 법공부를 하려고 할 때마다 이 일을 끝내고 공부하자고 생각했습니다. 이렇게 한 가지 일이 끝나면 또 다른 일이 이어져서 밤늦게까지 바쁘다 보니 피곤해서 법도 공부하지 못하고 공법도 다 연마하지 못했습니다. 저는 슬퍼서 울고 싶었습니다. 나중에 심각한 병업이 나타나서야 깜짝 놀라 깨달았습니다. 자신도 어려운 상황에 처해 있는데 어떻게 사람을 구할 수 있겠습니까?

마침 그 이틀 동안 수련생이 명혜망 문장 두 편을 전해주었는데 저에게 큰 도움이 되었습니다. 저는 모든 것을 내려놓고 법 한 강을 마음을 다해 공부하지 않으면 아침 식사도 하지 않기로 했습니다… 이틀 후 기적이 일어났습니다. 심각한 병업이 순식간에 사라졌습니다. 하지만 겨우 일주일을 견디고 나니 장시간 포륜(抱輪)을 하면 짜증이 났습니다. 이 기간에 피부 병업도 심해졌습니다.

현지의 70세 담당 수련생을 보니 40세도 안 되어 보이고 안색이 좋으며 피부가 하얗고 붉은빛이 도는 것을 보고 매우 놀랐습니다! 이것이야말로 법을 가장 잘 실증하는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그녀에게 어떻게 하셨냐고 물었더니 그녀는 철저하게 정해진 시간에 연공을 하고 매일 법공부도 많이 한다고 했습니다. 저도 그녀처럼 되고 싶었지만, 오늘 해냈다가 내일은 못 하고, 발정념할 때 손바닥이 뒤집히고 연공할 때 졸려서 계속 돌파하기가 어려웠습니다. 그제서야 당시 뉴욕 수련생들에게 이런 현상이 나타났던 것에 대한 고민을 이해하게 되었습니다.

가정 갈등도 점점 더 커져서 얼마 전에는 집을 떠나려고까지 생각했습니다.

제가 다시 파룬궁으로 돌아온 후 아들도 돌아오게 하려고 적극적으로 노력했습니다. 애틀랜타에서 현지 몇몇 담당 수련생을 우리집으로 초대해 교류했고, 우리도 그들의 집에 갔지만 모두 소용없었습니다. 아들은 1년 동안 제게 웃는 얼굴을 거의 보여주지 않았고 모든 일에 불만족스러워했으며, 제가 한 마디만 더 말해도 매우 화를 냈고 심지어 탁자를 내리치기도 했습니다. 특히 그가 매번 제게 입을 다물라고 할 때, 제가 듣지 못하니까 입 다물라는 손짓까지 했는데 아들의 그런 행동은 더욱 제 마음을 아프게 했습니다. 그때마다 노동수용소에서 경찰이 테이프로 입을 막았던 그 장면이 떠올랐습니다.

현지에서 션윈 공연이 있을 때마다 저는 극력 그를 보러 가게 하려고 했고, 그가 션윈을 보고 나면 우리를 새롭게 볼 것이라고 항상 희망했습니다. 재작년 이곳에서 션윈 공연이 시작됐을 때 저는 또 그에게 보러 가자고 권했지만 그는 단호히 거절했고 손녀도 보러 가지 못하게 했습니다. 저는 며칠 동안 고민하다가 마침내 그의 여자친구를 먼저 설득하기로 생각했습니다. 제가 션윈 티켓을 그녀의 생일 선물로 주겠다고 했는데, 뜻밖에 그녀가 오히려 아들을 설득해 함께 보러 갔습니다. 공연을 보고 돌아온 아들은 매우 기뻐하며 티켓 값은 제가 낼 필요가 없다고 말했습니다! 하지만 겨우 며칠 동안만 화를 내지 않았을 뿐입니다. 그도 화를 내는 것이 옳지 않다는 것을 알아서 방 안 가득 화를 내지 않겠다는 쪽지 붙이고 휴대폰 메인 화면에도 알림을 띄웠습니다.

제가 수련 일기를 쓰자 그도 동시에 일기를 썼지만 우리 둘 다 여전히 제 멋대로였습니다. 그들이 살아있는 생선을 사 먹고 바닷가에 가서 조개를 캐자 저는 이런 행동을 그의 여자친구 탓으로 돌렸습니다. 저는 강제로 막으려고 했습니다. 말을 듣지 않으면 뉴욕으로 돌아가겠다고 했습니다. 아들의 여자친구는 기독교 신자인데 저는 또 생각했습니다. ‘예수님의 법이 지금 사람들을 제도하지 못하는 것도 당연하구나. 종교를 믿는 사람도 절제하지 않는구나.’

2022년 5월에 저는 A라는 중국 내 수련생과 연락이 됐고 그의 조언으로 안으로 찾기 시작했습니다. 불과 며칠 간의 착실한 수련으로 시방세계가 진동했습니다! 이전에는 밤에 제가 그룹 친구들과 음성 통화를 할 때 목소리가 조금만 커도 아들이 달려와서 매우 화를 내며 입을 다물라고 했습니다. 옆방에 있는 손녀가 깰까 봐 걱정했던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 아들이 뜻밖에도 평소와 달리 살금살금 와서 제게 두 손을 모으고 조용히 해달라고 했습니다. 더 이상한 것은 어느 날 밤 아들이 와서 제게 치실로 이를 닦아주겠다고 했습니다. 이런 일은 예전에 없었던 일입니다.

하지만 A 수련생이 납치된 후 저는 다시 밖으로 찾고 밖을 향해 보기 시작했습니다. 그의 문제를 찾고 해외 수련생들의 문제를 보며, 그들이 A를 오해한다고 원망하고 그들이 전화를 걸어 구출하지 않는다고 원망했습니다! 뜻밖에 이렇게 원망하자(밖으로 찾고 원망하자) 저는 막 깨달은 그런 느낌을 더 이상 찾을 수 없게 됐고 다시 인간 세상에 빠져들었습니다.

이어서 아들과 손녀가 열이 나기 시작했고 검사 결과 모두 코로나 양성이었으며 곧이어 저도 기침이 나기 시작했습니다.

아들과 손녀의 몸 상태가 회복된 후 그들은 다른 지역으로 여행을 떠났습니다.

어느 날 제가 쓰레기를 버리러 갔다가 그곳에 누군가가 버린 물건들이 많은 것을 발견했는데, 그중에 아주 새것처럼 보이는 1인용 매트리스가 있었습니다. 저는 이것이 바로 제가 원하던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아들이 사준 매트리스가 너무 커서 자리를 많이 차지한다고 늘 불평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저는 그것을 집으로 가져왔습니다. 그리고 제 큰 매트리스를 벽에 기대어 세우고 이 1인용 매트리스를 카펫 위에 깔아 가부좌와 수면에 모두 편리했습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제 몸에 붉은 반점들이 생기고 매우 가려웠습니다. 처음에는 소업이라고 생각해서 다른 쪽으로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아들과 손녀가 돌아온 후 그들 몸에도 붉은 반점이 생겼고, 이때서야 매트리스를 들춰보았는데 벌레가 있는 걸 발견했습니다. 아들은 아파트 관리사무소의 해충 방제 담당자를 불러 확인하게 했는데, 이런 종류의 벌레를 제거하는 것은 매우 힘들고 1천 달러가 넘게 들며 우리집에서도 절반을 부담해야 한다고 했습니다. 저는 이 말을 듣고 정말 후회스러웠습니다.

해충 방제 담당자는 우리에게 먼저 물건들을 정리하라고 하고 이틀 후에 다시 오겠다고 했습니다. 그날 밤 저는 인터넷에서 어떻게 벌레를 제거하는지 찾아보았는데, 보고 나서 깜짝 놀랐습니다. 너무 어려웠습니다! 밤새 고통스럽고 후회하며 잠들지 못했고 날이 밝기도 전에 집안 물건들을 정리하기 시작했습니다. 버릴 것은 버리고, 제 큰 매트리스와 주워 온 매트리스를 모두 버렸으며, 내가 덮던 이불도 버렸고, 집안의 모든 옷을 뜨거운 물로 빨고 고온으로 건조했습니다. 소파 쿠션, 아들의 큰 침대, 손녀의 침대를 안팎으로 모두 세척했고, 건조할 수 있는 것은 건조하고 씻을 수 있는 것은 전부 씻었습니다. 3개의 방과 거실 전체가 두꺼운 카펫이어서 매일 여러 번 진공청소기로 청소했습니다. 시간을 정말 많이 낭비했습니다.

이번 교훈을 통해 미국에 온 이후 물건 줍는 것에 집착하던 마음을 단번에 뿌리 뽑았습니다. 이 집착심을 수련해서 없앤 후로는 다시는 다른 사람이 버린 물건 중에 제가 마음에 드는 것을 볼 수 없게 되었습니다.

12. 아들과 손녀도 법공부를 시작하다

2022년 12월, 아들이 다시 손녀를 데리고 플로리다로 여행을 가서 겨울을 피했습니다. 여행이 끝나고 돌아올 때 손녀는 열이 나고 있었습니다. 이번 발열은 지난번보다 훨씬 심각해서 숨이 가빠 똑바로 누울 수 없을 정도였습니다. 아들은 돌아오자마자 제게 손녀의 남은 음식을 먹지 말라고 주의를 줬지만 다음날 아침 아들도 열이 나기 시작했고 매우 심해서 침대에서 일어나지 못했습니다. 아침, 점심 식사를 한 입도 먹지 못했습니다. 나중에 저는 아들의 동의를 얻어 사부님의 설법 녹음을 틀어 들려주었고, 그날 저녁에 아들은 조금 나아져서 약간의 음식을 먹을 수 있었습니다. 저는 그 며칠 동안 그들의 남은 음식을 먹었을 뿐만 아니라 손녀와 한 침대에서 잤습니다. 그러나 아무런 불편함이 없었습니다.

저는 손녀에게 《전법륜》을 읽어주고 손녀 방에서 연공을 했습니다. 곧 손녀는 나아졌습니다. 아들이 열이 났을 때 이튿날 바로 일어날 수 있었고, 저는 《전법륜》 책을 주며 말했습니다. “내가 미국에 온 지 7년이 됐는데 약 한 알 먹지 않았어. 너희는 다 백신을 맞았는데도 두 번이나 확진됐고, 나는 백신을 맞지 않았는데 한 번도 확진되지 않았지. 이게 바로 대법의 기적 아니니?” 아들은 마음으로 수긍하며 고개를 끄덕였고 그래서 대법 책을 보기 시작했고 곧 그도 나아졌습니다.

그 후 우리 세 사람은 함께 법공부를 하고 연공을 했습니다. 아들은 또 손녀를 위해 천제서점 웹사이트에서 영문판 《전법륜》과 《파룬궁》 책을 주문했고, 저와 손녀를 위해 대법 옷을 주문했으며 저를 위해 연공복 한 벌도 샀습니다. 아들은 키가 커서 입을 만한 사이즈가 없어서 그 자신을 위한 대법 옷은 사지 않았습니다. 손녀를 위해 선녀복과 머리 장식도 샀습니다. 그 후로 단체 연공이나 시위 활동에 참가할 때마다 아들이 자발적으로 나와 손녀를 데려다주었습니다.

아들이 다시 대법으로 돌아올 수 있다니! 이것은 저에게 정말 너무나 기쁜 일이었습니다. 그래서 저는 여기저기 다니며 기쁜 소식을 전하고 자랑했습니다! 너무나 기뻤습니다. 하지만 상처가 나았다고 아픔을 잊은 것처럼, 저는 환희심, 과시심, 정에 대한 집착을 방종했고 아들은 얼마 지나지 않아 다시 속세로 떨어졌습니다!


【편집자 주: 예로부터 스승을 배반한 자는 오직 영원히 문하에서 축출되는 길밖에 없었다. 그러나 지금 파룬따파(法輪大法)는 사부님의 은혜가 홍대하여 정법(正法)이 끝나지 않는 한 사부님께서는 누구든 돌아와 수련하는 것을 허락하신다. 그러나 새롭게 수련을 시작하더라도, 사악한 세력에 전향되고 세뇌당한 후 다른 이들을 전향시킨 죄업을 소멸하고, 이렇게 많은 세월 동안 정법과 중생 제도에 끼친 손실을 보상하는 것이 어찌 쉬운 일이겠는가! 시련과 감당해야 할 것들은 피할 수 없으며, 결코 편하고 즐겁고 가볍게 지낼 수 없다. ‘엄정성명’은 수련생이 대법과 사부님께 드리는 새로운 서약이다. 넘어진 후 일어나 분발하여 곧바로 따라잡고 새로운 서약을 실천해야 하며 앞으로 가야 할 길은 여전히 길고 매우 험난하다. 수련은 지극히 엄숙한 것이다.】

 

원문발표: 2024년 9월 24일
문장분류: 수련교류
원문위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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