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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부님 설법반에 참가했던 소중한 추억들

글/ 후베이성 우한시 대법제자

[명혜망] 1993년, 저는 우한시 시위원회 강당에서 사존(師尊)의 설법을 들을 수 있는 영광을 누렸습니다. 잊지 못할 순간이었습니다.

그해 직장 동료 한 분이 제게 말했습니다. “파룬궁은 수련이에요. 아주 좋아요.” 당시 저는 그 말을 듣고도 별로 마음에 두지 않았습니다. 수련이 뭔지, 기공(氣功)이 뭔지 몰랐거든요. 머릿속이 텅 비어 있었죠. 그때 제 취미라곤 오직 춤추는 것뿐이었습니다. 그런데 이틀 후 저녁 식사 때 갑자기 마음속에 한 가지 생각이 떠올랐습니다. ‘내일 파룬궁 학습반에 가서 들어볼까?’ 하지만 어디서 들어야 할지 몰랐습니다. 그때 동료가 했던 말이 떠올랐습니다. “시위원회 강당이에요.”

우한에 살고 있었지만 시위원회 강당이 어디 있는지 몰랐습니다. ‘어차피 할 일 없으니(연차휴가 중이었음) 나가서 물어보자’고 생각했죠. 버스 정류장에 갔더니 버스가 왔고 그냥 올라탔습니다. 버스가 어디로 가는지도 모르고 운전기사에게 물어보지도 않았습니다. 혼잣말로 “이 버스가 시위원회 강당으로 가나?”라고 중얼거렸더니 버스에 탄 청년 두 명이 “네, 가요”라고 하더군요. 저는 얼른 물었죠. “파룬궁(학습반) 들으러 가세요?” 그들이 “네”라고 하자 저는 기뻐하며 “이제 찾을 필요 없겠네요”라고 말했습니다. 그들은 “우리랑 같이 가시면 돼요”라고 했습니다. 정말 운이 좋았죠.

강당에 도착했는데 좀 늦었습니다. 그날 입장 시간에 늦었을 뿐 아니라 사부님께서 수업을 시작하신 지 벌써 3일째였습니다. ‘그래도 기왕 왔으니 들어가야지’라고 생각하고 입장권을 사서 들어갔습니다. 수강생이 많았지만 금방 자리를 찾았습니다.

사부님께서 단상에서 설법하고 계셨습니다. 늦었지만 열심히 들었습니다. 잘 이해되지 않는 부분도 있었습니다. 잠시 후 사부님께서 수강생들의 병을 제거해주신다고 하셨습니다. 사부님께서는 “병이 있는 사람은 자신의 병을 생각하고, 병이 없는 사람은 가족 중 한 사람의 병을 생각하세요”라고 하셨습니다. 저는 당시 제 병이 생각나지 않아서 아버지(양부)의 후두암만 생각했습니다. 아주 심각했거든요. 또 사부님께서 발을 구르라고 하셔서 저도 따라 발을 굴렀습니다.

다음 날, 다시 수업을 들으러 갔습니다. 어제 늦었으니 오늘은 일찍 가야겠다고 생각했습니다. 막 집을 나서는데 코피가 나기 시작했는데 아주 심하게 났습니다. 이웃이 준 휴지로도 멈추지 않았고 몇 분이 지나도 계속 코피가 났습니다. 저는 초조해졌는데 코피 때문이 아니라 오늘도 늦을까 봐 걱정됐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리 선생님, 늦고 싶지 않습니다”라고 말했습니다. 신기하게도 말이 끝나자마자 코피가 멈췄습니다. 얼른 얼굴의 피를 닦고 버스 정류장으로 달려갔죠. 마침 시위원회 강당으로 가는 버스가 왔습니다. 강당에 도착했는데 또 늦고 말았습니다. 들어가 보니 사부님께서 단상에서 설법하고 계셨는데 저를 보시는 것 같았습니다. 저는 얼른 고개를 숙였습니다. 그 후 며칠 동안은 늦지 않았습니다.

저는 사람들이 말하는 ‘좀 우둔한’ 그런 사람입니다. 깨닫는 능력이 떨어지죠. 학습반이 끝나고 아버지(양부)를 뵈러 갔더니 병이 나으셨고 어머니(양모)께 밥도 해드릴 수 있게 되셨습니다. 하지만 저는 자비로운 사부님께서 아버지를 구해주셨다는 걸 깨닫지 못했습니다. 이 일만 생각하면 죄송스럽습니다.

학습반이 끝나고 수료증을 받았는데 매우 기뻤습니다. ‘이제 나도 파룬궁 수련생이구나!’ 그런데 몇 분 지나지 않아 수료증을 잃어버렸습니다. 아무리 찾아도 안 보여서 다음에 또 학습반에 참가해 수료증을 꼭 받아야겠다고 생각했습니다.

저는 또 사부님의 정저우 학습반에 참가했는데, 그때 저는 그저 수료증을 받으려고 설법을 들으러 간 것이었습니다. 깨달음이 너무 부족했죠. 저 같은 수련생을 두고 사부님께서 얼마나 힘드셨을까요!

제 동료(수련생)가 강당에서 사부님을 뵙고 말씀드렸습니다. “사부님, 제 머리가 왜 이리 맑지 않을까요? 왜 이런지 잘 모르겠어요.” 사부님께서 동료의 정수리를 세 번 두드리셨습니다. 그러자 그 수련생은 눈이 밝아지고 정신이 맑아졌습니다.

우리는 속인 사회라는 큰 물감통에 너무 깊이, 너무 오래 빠져 있었습니다. 사부님 말씀과 같습니다. “한 사람을 제도하기란 아주 어려운데, 당신의 사상을 개변하기가 아주 어려우며, 당신의 신체를 조정(調整)하기도 아주 어렵다.”(전법륜) 우리는 사부님께서 제자들과 중생들을 위해 바치신 모든 것을 상상조차 할 수 없습니다. 사부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므로 내가 여러분에게 알려주는데, 쉽게 얻었다고 쉽게 잃어서는 안 된다. 이것이야말로 지극히 진귀하여 가치를 가늠할 수 없다.”(전법륜)

정저우 학습반에서 돌아온 후 제 인생관에는 큰 변화가 생겼습니다. 그때부터 수련의 길에 들어섰습니다. 사부님 설법을 직접 들을 수 있었던 기회를 무척 소중히 여겼습니다. 매일 법공부와 연공을 하며 매우 행복했습니다. 그 후 어렸을 때부터 자주 나던 코피가 멈췄고 목과 어깨 통증, 아랫배 통증도 나았습니다. 정말로 병 없이 온몸이 가벼워지는 느낌을 체험했죠. 무척 편안했습니다. 자주 밖에 나가 대법을 널리 알렸고 사람들에게 마음으로 전해주어 인연 있는 사람들이 파룬궁 수련에 들어왔습니다.

1999년 ‘7·20’ 때 장쩌민이 사악한 본성과 질투심으로 거짓말을 만들어내고 흑백을 전도하며 파룬궁을 모함했습니다. 하늘이 무너지는 것 같았습니다. 남편은 너무 두려워했습니다. 그는 ‘문화대혁명’을 겪었기에 연루될까 봐 걱정돼 집에서 제게 법공부와 연공을 하지 못하게 했습니다. 심지어 제 아버지를 시켜 사부님 사진을 찢으려 했지만 제가 빼앗아 왔습니다. 저는 사부님을 굳게 믿었고 대법을 굳게 믿었습니다.

2001년, 저는 베이징에 가서 대법을 실증하고 사부님과 대법을 위해 공정한 말 한마디를 하려 했습니다. 하지만 기차역에서 납치돼 즉시 1년간 강제노동을 당했습니다. 1년 후 집에 돌아오자 남편은 법공부와 연공을 더욱 못 하게 했습니다. 하지만 진선인(真·善·忍)은 이미 제 마음속에 뿌리를 내렸습니다. 남편이 집에 없을 때 법공부와 연공을 했는데 한번은 들키고 말았습니다. 남편은 화가 나서 대법 서적을 훼손했고 마성이 크게 발작했습니다. 그때 저는 두려움이 커서 남편이 집에서 난동을 부릴까 봐 그 후 몇 년간 집에서 법공부와 연공을 하지 않았습니다.

나중에 남편의 기분이 좋을 때 대화했습니다. “연공으로 건강해졌잖아요. 오래된 변비도 나았고요.” 남편은 제 말을 듣고 잠자코 있었는데 제가 말한 것이 모두 사실이었기 때문입니다. 그후 그는 저를 그렇게 엄격하게 감시하지 않게 됐고 저는 좀 더 자유로워져 집에서 법공부와 연공할 기회를 얻었습니다. 몇 년 후 남편은 병으로 세상을 떠났습니다.

저는 비록 일찍 법을 얻었지만 꾸준히 배우고 연마하지 못했습니다. 특히 ‘7·20’ 이후에는 어떻게 진지하게 법공부를 해야 할지 몰랐죠. 남편이 세상을 떠난 후 동료(수련생)를 찾아 법공부 모임에 참가하고 단체 법공부를 하며 함께 진상을 알리러 나갔습니다. 그제야 저는 진정한 수련이 무엇인지 깨달았습니다. 때로는 제가 신수련생 같다고 느껴졌습니다. 나중에 단체 법공부를 통해 이전의 법공부와 독서가 그저 형식적이었을 뿐 마음에 와닿지 않았다는 걸, 어떻게 수련해야 하는지 몰랐다는 걸 깨달았습니다. 수련생들의 심득 교류는 저에게 큰 자극이 되어 많은 것을 깨닫게 해주었고, 제 부족함을 찾게 해주었으며, 제가 대법의 요구와 매우 멀리 떨어져 있다는 걸 보여줬습니다.

저는 계속해서 단체 소그룹 법공부에 참가하고 있습니다. 저는 작은 것부터 하나하나 시작해 사부님의 가르침을 명심하고, 법공부를 많이 하고 또 많이 하며, 세 가지 일을 잘하겠습니다.

 

원문발표: 2024년 9월 8일
문장분류: 수련교류>나의 사부님
원문위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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