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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법 수련을 통해 나는 감사하는 법을 배웠다

글/ 중국 대법제자

[명혜망] 저는 은퇴한 교사로 올해 65세입니다. 1996년에 운 좋게 대법을 얻은 후, 연공 효과가 즉각 나타나 건강과 도덕면에서 모두 큰 변화를 경험했습니다. 기공과 종교를 수년간 찾아 헤매던 혼란스럽고 무기력했던 마음이 순식간에 안정을 찾았습니다. 파룬궁이 바로 제가 찾던 대법이며, 리훙쯔(李洪志) 선생님이 바로 제가 찾던 자비롭고 위대한 사부님이라고 확신하게 됐습니다.

이제 제 가정생활에서의 수련 체험을 자비롭고 위대하신 사부님께 보고 드리고, 수련생들과 교류하며, 인연 있는 분들과 하늘이 내린 이 큰 복을 나누고자 합니다.

1. 어린 시절의 꿈

저는 어릴 때부터 다른 아이들과는 다른 특징이 있었는데, 바로 어르신들과 어울리기를 좋아했다는 점입니다. 또래들이 뛰어다니며 놀고 자기들만의 놀이를 즐길 때 저는 대부분 어르신들 곁에 있었습니다. 바느질하시는 할머니들께 바늘에 실을 꿰어 드리고 실을 가져다드리거나, 어르신들이 들려주시는 이야기와 농담을 들었습니다. 또 누구네 며느리는 불효하다느니, 누구네 시어머니와 며느리 사이가 좋지 않다느니, 누구네 자식들이 부모에게 잘하거나 못한다느니 하는 등 이런저런 남의 집 얘기를 들었습니다. 그때부터 저는 부모님께 잘해야겠다는 생각을 품게 됐습니다.

나이가 들면서 저 역시 마을의 거의 모든 가정에 시어머니와 며느리 사이의 갈등이 있음을 보게 됐습니다. 어떤 시어머니는 횡포를 부리고, 어떤 며느리는 불효했습니다. 다투는 사람, 욕설을 퍼붓는 사람, 뒤에서 험담하는 사람 등 정말 갈등으로 가득했습니다. 저는 사람들이 “시어머니와 며느리는 ‘천적’이다”라고 말하는 것을 자주 들었습니다. 과연 그럴까요? 저는 결혼하면 좋은 며느리가 되어 시부모님을 잘 모셔야겠다고 생각했습니다. 앞으로 잘할 수 있을지 장담할 순 없었지만 저는 여전히 이 아름다운 소망을 품고 미래를 꿈꿨습니다.

2. 꿈의 파멸과 재생

대학을 졸업하고 결혼한 후 저는 도시에 정착했습니다. 남편은 세 형제 중 둘째였죠. 처음에는 가족 관계가 꽤 좋았고 세 동서 사이에도 큰 문제가 없었습니다. 하지만 우리 아이가 태어난 후 갈등이 생겼습니다.

출산휴가가 끝나고 직장에 복귀해야 했기에 시어머니께서 아이를 돌봐주셔야 했습니다. 그런데 시어머니는 이미 2살이 넘은 큰아주버니의 둘째 딸 샤오인(小茵)을 돌보고 계셨습니다. 샤오인은 정부 몰래 낳은 아이라 태어난 후부터 줄곧 할머니와 함께 살았습니다. 시어머니는 제 아기를 돌보러 오시려 했지만 샤오인이 울며 할머니를 놓아주지 않고 친어머니도 따르지 않아서 결국 시어머니께서 샤오인을 데리고 와 제 아이를 돌보게 됐습니다. 표면적으로는 시어머니께 샤오인을 데리고 오시라고 했지만 속으로는 불쾌했습니다. 형님(맏동서)이 아이를 달래지 못한다고 원망했고 손녀를 떼어놓지 못하는 시어머니도 원망했습니다.

어쩔 수 없이 시어머니와 조카딸을 집으로 들였습니다. 마음속 우울함이 가끔 저를 괴롭혔지만 자신을 위로하며 겉으로는 여전히 시어머니를 잘 대했고 조카딸도 제 자식처럼 대했습니다. 시어머니가 제가 조카딸을 차별한다고 느끼지 않도록 했습니다. 저녁에 시간 날 때면 조카딸에게 동화도 들려주고 그림책으로 글자도 가르쳤더니 반년 만에 조카딸은 많은 글자를 익혔습니다.

어느 날, 아이들과 건물 앞에서 놀다가 제가 실수로 자전거를 넘어뜨렸는데 그 자전거가 옆에서 놀던 샤오인을 쳤습니다. 샤오인이 엉엉 울기 시작했고 저는 얼른 아이를 안고 달랬는데, 시어머니는 무뚝뚝한 표정으로 제가 나쁜 마음을 품었다며 저를 탓하셨습니다. 너무나 억울해 눈물이 글썽거렸지만 억지로 참았습니다. 저녁 식사를 준비한 후 그들에게 밥을 차려주고 저는 밥맛이 없어 혼자 밖으로 나갔습니다. 인적 없는 곳에 가서 엉엉 울었습니다. 모든 원망과 분노가 올라와 하늘에 하소연했습니다. ‘사람 구실하기가 왜 이리 어려운가요? 며느리 노릇하기가 정말 힘듭니다.’ 게다가 시어머니가 샤오인을 편애하는 모습을 보고 질투심까지 생겼습니다. 이렇게 제 어린 시절 꿈은 점점 파멸되어 갔습니다.

9년이 지나 저는 파룬따파(法輪大法, 파룬궁)를 수련하기 시작했습니다. 진선인(真·善·忍) 대법의 지도 아래 저는 조금씩 자신을 바로잡아갔습니다. 원망 등 부정적인 감정으로 인한 거리감이 점차 사라지고, 좋은 사람이 되고 노인에게 효도할 수 있다는 자신감을 다시 얻었습니다. 이번에는 어린 시절의 꿈이 더는 환상이 아니라 달성할 수 있는 실제 목표임을 확신할 수 있었습니다.

2001년, 저는 법을 실증하기 위해 베이징에 청원하러 갔다가 불법적으로 강제 노동수용소에 보내졌습니다. 이는 우리 가족에게 큰 타격이었죠. 시아버지는 체면을 중시하는 분이라 밖에서 세 아들과 며느리가 얼마나 좋고 집안이 얼마나 화목한지 자주 자랑하셨는데, 작은며느리가 아이 문제로 부부싸움을 하다 농약을 먹고 죽고 저는 중공에 의해 불법 노동수용소에 보내지는 등 갑작스러운 변고로 시아버지는 우울해져 집에만 계셨습니다.

2003년 5월, 시아버지가 암으로 갑자기 돌아가시자 시어머니께 큰 타격이 됐습니다. 시어머니의 정신 상태가 급격히 나빠져 큰아주버니가 70세가 채 안 된 어머니를 모시고 함께 살았습니다. 휴가 때 집에 갔더니 형님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어머님이 우리 땅콩 따는 걸 도와주시다가 갑자기 몸이 굳어 움직이지 않으셔서 급히 마을 의사를 불렀어. 혈압을 재보니 240이나 돼서 며칠 동안 링거를 맞으셨지. 그 후로 자주 멍하니 계셔.” 형님은 또 이렇게 말했습니다. “너무 무서워. 더 이상 일을 돕지 마시라고 해야겠어. 무슨 일이 생기면 사람들이 나 때문에 일하다 돌아가셨다고 할 거야. 동서가 어서 어머님을 모셔가.” 형님이 시어머니를 밀어내는 것 같아 마음이 무거워졌습니다. 하지만 우리도 시어머니를 모실 준비가 안 돼 있어서 대답하지는 않았습니다.

또 한번은 집에 갔더니 시어머니가 남루한 옷차림에 헝클어진 머리, 흐릿한 눈빛으로 거리에 앉아 계셨습니다. 차가 시어머니 앞에서 멈추고 우리가 내리자 그제야 우리를 보시고 급히 일어나 제 손을 잡으며 말씀하셨습니다. “너희들이 왔구나. 난 매일 여기서 너희를 기다렸단다.” 그러면서 눈물을 흘리셨습니다. 제가 “어머님, 왜 여기 혼자 계세요?”라고 여쭤보니 “큰며느리가 날 상대하지 않는구나. 매일 눈치 보기 싫어서 나왔다”라고 하셨습니다.

시어머니는 원래 꾸미기를 좋아하셔서 집안 청소는 싫어하셔도 자신은 깔끔하게 단장하고 머리도 잘 빗으셨는데, 지금 모습은 예전과 완전히 달랐습니다.

그때 저는 제가 수련자라는 걸 떠올렸습니다. 우리가 선택한 기준은 진선인(真·善·忍)인데, 이는 그저 말로만 하는 게 아니라 문제에 부딪혔을 때 실제로 책임지고 의무를 다해야 하는 것입니다. 이때 저는 자비심이 샘솟아 마음속에 있던 손해 볼까 봐 두려워하는 경계심도 녹아내렸고, 형제와 동서 사이에 노인 부양을 두고 득실을 따지는 마음도 사라졌습니다.

결혼 전에는 남편 집에 아들이 셋이니 앞으로 노인 부양 문제도 셋이서 나눠 맡으면 되니 제게 큰 부담은 없겠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시동생은 재혼 후 시어머니와 갈등이 생겨 분가할 때 합의한 매년 시어머니께 드릴 곡식조차 주지 않아 시어머니가 직접 찾아가 달라고 해야 했습니다. 형님도 시어머니와 사이가 좋지 않아 결국 우리집으로 오실 수밖에 없었습니다. 저는 마음을 정했습니다. 시어머니가 남편이라는 아들 하나만 낳으신 걸로 여기고 시어머니가 가기 싫어하거나 남들이 받아들이기 싫어하는 곳에 가시게 하지 않겠다고 말입니다. 이렇게 최종 결심을 하고 남편과 상의해 시어머니를 모셔오기로 했습니다. 남편도 동의해 그 후 우리 가족은 3대가 함께 살게 됐습니다.

그러나 시어머니는 도시에 오신 후 익숙한 집도 없고 이웃과의 왕래도 없어 적응하지 못하셨습니다. 온통 낯선 환경에 마음을 못 잡으셔서 며칠 만에 고향에 돌아가고 싶다고 하셨죠. 시어머니를 고향으로 모셔다드리긴 했지만 혼자 하실 수 없어 다시 큰아주버님 댁에서 지내야 했는데 형님과 잘 지내지 못해 다시 우리에게 데려가 달라고 하셨습니다. 첫해에는 이렇게 여러 번 오가시더니 나중에는 이곳에 익숙해지시고 몇몇 노인들과 친해지셔서 더는 돌아가겠다고 하지 않으셨습니다.

저는 시어머니께 새 옷과 신발, 모자를 사 드리고 가끔 저녁 식사 후 함께 산책도 하고 목욕도 도와드리는 등 최선을 다해 보살펴드렸습니다. 시어머니와 웃으며 즐겁게 일상을 나누면서 계속해서 시어머니 마음을 따뜻하게 해드리고 행복감을 드리려 노력했습니다.

시어머니와 밤낮으로 지내다 보면 기분이 좋지 않을 때도 있었습니다. 처음에는 시어머니가 정말 저를 방해한다고 생각했습니다. 시어머니의 고집이 제 관념을 흔들 때면 마음이 요동치고 괴로웠습니다. 하지만 수련하는 사람에겐 법보(法寶)가 있습니다. 불편함을 느낄 때 그것이 바로 수련할 부분이 있다는 걸 알려주는 겁니다. 안으로 자신을 돌아보면 자신을 교란하는 관념과 집착을 반드시 찾을 수 있습니다. 끊임없는 법공부를 통해 그 마음에 대한 대법 법리가 나타나 순간 돌파하고 초월할 수 있었습니다. 심성이 높아지면 마음이 넓어지고 모든 게 좋아져서 대부분의 문제가 빨리 해결됐고 어려움도 오래가지 않았습니다. 시어머니와의 관계도 점점 좋아져서 함께 외출할 때면 모르는 노인들이 종종 시어머니께 “이분이 따님이세요?”라고 물으면 시어머니는 늘 자랑스럽게 “아니에요, 며느리예요”라고 대답하셨습니다.

몇 년 후 우리는 새집으로 이사했는데, 뜻밖에도 새집으로 옮긴 후 우리 집에는 매일 원망이 끊이지 않았습니다. 시어머니의 비위생적인 습관이 두드러져 남편이 자주 큰 소리로 꾸짖었고 집안 분위기가 매우 나빠졌습니다. 시어머니는 늘 쓰레기를 주워오시길 좋아하셨는데 하지 말라고 해도 듣지 않으셨습니다. 앞에서는 그러지 않겠다고 하시다가도 돌아서면 또 쓰레기통을 뒤지셨죠. 저도 화가 나서 강박적으로 시어머니의 행동을 지켜보았지만 아무리 해도 시어머니는 변하지 않으셨습니다.

저는 이렇게 계속할 수 없다고 생각했습니다. ‘이미 집착이 생긴 게 아닌가? 시어머니를 간섭하지 말고 내려놓아야 해.’ 얼마 지나지 않아 시어머니는 주워 온 병을 지하실에 놓다가 부주의로 미끄러져 넘어지셔서 엉덩이뼈가 골절되는 사고가 났습니다. 이로 인해 큰 번거로움이 생겼죠.

남편은 어머니를 돌보려고 휴가를 내야 했고 저는 낮에는 출근하고 밤에는 시어머니의 부름에 응해야 했습니다. 의사는 노인이 욕창에 걸리지 않도록 특별히 주의하라고 당부했습니다. 특히 대소변을 보는 부위가 감염되지 않도록 청결을 유지해야 하며 그렇지 않으면 생명이 위험할 수 있다고 했습니다. 우리는 의사의 지시에 따라 시어머니를 세심히 돌보았습니다.

그 당시 시어머니의 대변을 받아내고, 대변을 손으로 파내고, 대변으로 더러워진 침구를 세탁하는 일은 저에게 매우 괴로운 일이었습니다. 처음에는 구역질을 참지 못했는데 나중에 법공부를 하며 안으로 찾아보니 그것이 더러움을 두려워하는 마음이라는 걸 깨달았습니다. 진정한 더러움은 외부가 아닌 제 마음속에 있다는 걸 알게 됐습니다. 더러움을 두려워하는 집착을 제거하니 아무렇지 않았습니다. 그때부터 제 마음은 시어머니와 하나가 되었고 어떤 장벽도 없어졌습니다.

두 달여가 지나자 시어머니는 부축을 받고 침대에서 일어나 휠체어를 타실 수 있게 됐고, 1년 후에는 난간을 잡고 계단을 오르내리실 수 있었으며, 지팡이를 짚고 외출도 하실 수 있게 됐습니다. 이웃들이 시어머니를 돌본 이야기를 꺼내면 시어머니는 “우리 며느리는 친딸보다 더 가까워요”라고 말씀하셨죠.

3년 후, 시어머니 몸에 이상이 생기고 팔다리가 붓더니 곧 돌아가실 것 같았습니다. 저는 남편과 시어머니를 고향으로 모셔다드리는 것에 대해 상의했지만 남편은 동의하지 않았습니다. 형님 부부가 시어머니를 돌보지 않았으니 임종을 지키게 할 필요가 없다면서 우리가 직접 장례를 치르면 된다고 했습니다.

제가 말했습니다. “그건 좋지 않아요. 어머님 장례는 온 가족과 마을 사람들의 마음을 고려해야 해요. 우리가 어머님을 고향으로 모셔가는 건 큰아주버님 가족과 셋째 네 가족에게 마지막 효도의 기회를 주는 거예요. 그래야 사람들이 더 합리적이고 조화롭고 원만하다고 느낄 거예요. 그렇지 않으면 앞으로 형제들을 어떻게 대할 거예요? 그럼 정말 관계가 깨질 거예요.”

남편은 동의했고 형에게 연락한 뒤 시어머니를 고향으로 모셔갔습니다. 열흘 남짓 후 시어머니는 세상을 떠나셨습니다. 하지만 셋째 네 가족은 중병을 앓고 계신 어머니를 방문하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장례식에도 참석하지 않았습니다.

3. 수련하도록 도와주신 부모님께 감사드리다

시어머니를 보낸 지 7년 만에 제 부모님을 모시게 되었습니다. 2016년, 부모님께서 제 옛집으로 이사 오셨고 큰여동생이 돌봐드렸습니다. 제가 퇴직한 후 80대 부모님과 함께 살게 되었는데, 얼마 지나지 않아 큰여동생은 큰딸의 아이를 돌보러 갔습니다. 그때 어머니는 중병을 앓고 계셨고 장 절제 수술을 받으셔서 오랫동안 대변을 가리지 못하셨습니다. 자주 모르는 사이에 침대나 이불, 바지 주머니에 대변을 보셨고, 바닥과 화장실도 매우 더러워졌습니다. 지금도 가끔 그런 일이 일어납니다. 시어머니를 모셨던 경험 덕분에 저는 이런 더러운 것들에 그리 민감하게 반응하지 않았고 혐오감도 없었습니다. 어머니는 자존심이 강하신 분이라 옷을 더럽히실 때마다 자책하시며 제가 불쾌해하거나 싫어할까 봐 항상 제 안색을 살피셨습니다. 어머니가 부담 갖지 않도록 저는 매우 편안한 모습을 보이며 농담도 건네 어머니의 마음을 편하게 해드렸습니다.

어머니는 성격이 급하고 강한 편이셔서 집안의 모든 일을 주관하셨습니다. 어릴 적 어머니께 매를 많이 맞았지만 저는 여전히 어머니의 선한 마음과 남을 배려하는 마음, 그리고 남을 돕고자 하는 마음을 좋아했습니다. 특히 우리가 어렸을 때 집에서 맛있는 음식을 만들면 할머니 할아버지께 맛보시라고 한 그릇씩 가져다드리게 한 것이 기억에 남습니다. 어머니는 처음에 대법을 배우고 연공도 하셨지만 자신의 병을 내려놓지 못하고 아버지에 대한 원망을 버리지 못해 업력의 인과에서 벗어나지 못하셨습니다.

아버지는 밖의 일만 신경 쓰고 집안일은 거의 하지 않으셨습니다. 자신의 옷도 빨지 않아서 아버지 옷이 더러워질 때마다 제가 쫓아다니며 갈아입으라고 했습니다. 아버지는 말씀은 잘하시지만 손재주가 없어서 집에서는 밭일 외에는 아무것도 하지 못하셨습니다. 자전거 바퀴가 고장 나도 고치지 못하고 남을 배려할 줄 모르셔서 어머니는 자주 아버지를 원망하셨습니다. 특히 어머니가 아파서 스스로를 돌볼 수 없을 때 아버지는 전혀 도움이 되지 않으셨습니다. 처음에는 아버지가 서툴러서 오히려 방해가 되는 것을 보고 저도 자주 화가 났습니다.

과거 아버지의 행동 때문에 저는 아버지가 이기적이라는 관념이 생겼고 아버지가 눈에 거슬렸습니다. 게다가 매일 휴지도 쓰지 않고 한쪽 코를 막고 코를 푸시며 아무 데나 가래를 뱉는 아버지를 보면서, 또 식사 때마다 아버지의 비위생적이고 남들이 싫어하는 생활 습관을 마주해야 했습니다. 아무리 말해도 고치지 않으셔서 정말 힘들었습니다. 그래서 부모님과 함께 보낸 5년 동안 아버지는 제게 가장 큰 시련이 되었습니다.

처음에는 오랫동안 제 문제를 찾지 못했습니다. 매일 사람을 화나게 하는 아버지의 행동만 보았고, 볼수록 더 화가 났습니다. 아버지 앞에서 저는 제가 수련자라는 사실을 완전히 잊어버리고 부정적인 감정만 쌓여갔으며 나중에는 아버지께 화를 내기에 이르렀습니다. 그제야 저는 저 자신에게 문제가 있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입으로는 진선인(真·善·忍)을 수련한다고 하면서 어떻게 이것이 수련자의 모습일 수 있겠습니까?

저는 안으로 찾기 시작했습니다. 이전에도 매일 법공부를 했지만 사부님께서 요구하신 대로 안으로 찾는 기제(機制)를 가동하지 않았기에 소득이 없었습니다. 자신의 문제를 찾겠다고 결심하자 법리가 곧바로 나타나기 시작했습니다. 마음이 맑아지고 편안해졌으며 아버지를 대하는 태도도 달라졌습니다. 하지만 이런 좋은 상태가 며칠 지속되지 못하고 어느새 예전처럼 밖으로 보는 사고방식으로 돌아갔습니다. 한참 후에야 방향이 잘못됐음을 깨닫고 다시 자신을 돌아보았습니다. 법공부를 하며 다시 승화하는 과정이 몇 번이나 반복됐는지 모릅니다. 정말 양파 껍질을 벗기는 것 같았습니다. 한 겹 벗기면 또 다른 겹이 나오고 그것을 벗기면 또 다른 겹이 나오는데, 모든 겹을 벗겨내야 진정한 자아가 드러날 수 있습니다. 이 과정에서 저는 남을 존중하지 않는 마음, 남을 업신여기는 마음, 원망하는 마음, 더러운 것을 싫어하는 마음, 조급한 마음, 남을 통제하려는 마음, 독선적인 마음, 오만한 마음 등 마성(魔性)과 현대의 변이된 관념들, 그리고 각종 사람의 마음을 한 겹씩 제거했습니다. 지금 저는 예전과 크게 달라졌습니다. 예전에는 나쁜 상태가 오래 지속되고 좋은 상태는 짧았는데, 지금은 좋은 상태가 오래 유지되고 나쁜 상태는 짧아졌습니다. 나쁜 생각이 들면 빨리 알아차리고 없앨 수 있어 기분이 매우 좋습니다. 정말로 환골탈태한 느낌입니다.

아버지께 화를 냈던 과정을 되돌아보니 아버지의 행동을 보고 마음이 불편했던 것은 제 마음속에 형성된 관념이 보이지 않는 벽이 되었기 때문임을 깨달았습니다. 아버지의 행동이 저를 겨냥한 것은 아니었고, 그저 아버지가 수십 년간 자신의 관념 속에서 형성한 습관일 뿐이지만, 다른 공간에서는 일종의 에너지로 나타납니다. 제가 이런 행위를 인정하지 않자 그 에너지가 제 마음을 순조롭게 통과하지 못하고 순간적으로 밀쳐져 돌아갔습니다. 이로 인해 에너지의 충돌이 생기는데 이는 곧 자신에게 부정적인 에너지가 생기고 내적으로 소모되어 덕을 잃게 되는 것입니다. 사부님께서는 “真(쩐)ㆍ善(싼)ㆍ忍(런)은 좋고 나쁜 사람을 가늠하는 유일한 표준이다”(전법륜)라고 하셨습니다. 그런데 제가 만들어낸 결과는 무엇입니까? 상대방에게 위생을 지키고 성실하며 남을 배려하라고 요구하는 것이 옳아 보이지만, 실제로 표현된 상태는 마성(魔性)이며 우주의 특성에 어긋나는 것입니다. 즉, 제 행동은 사부님께서 요구하신 진선인의 기준에 따른 것이 아니라 제가 옳다고 여기는 개인적인 관념으로 행동한 결과입니다. 사실상 자신의 관념대로 살아가는 것이며 이는 분명히 법(法)에 어긋나는 것입니다. 이런 잘못된 방향으로는 어떻게 그 아름다운 경지에 도달할 수 있겠습니까? 사부님의 지도와 대법의 세례가 없다면 절대로 이룰 수 없는 일입니다.

반성하면서 저는 큰 문제를 발견했습니다. 오랫동안 안으로 찾았지만 찾지 못했던 그 나쁜 관념을 나중에야 깨달았습니다. 어머니의 영향으로 늘 보고 들어 익숙해지고 습관이 된 음(陰)이 성한 상태였습니다. 사부님께서는 말씀하셨습니다. “당신이 그를 여자처럼 다루는데 (뭇 사람 웃음) 어찌 사나이가 될 수 있겠는가? 전반 사회에 모두 이런 형세가 형성되었을 때, 당신들이 생각해 보라. 그 사회의 남자들은 모두 남자 여인(男女人)으로 변하고, (뭇 사람 웃음) 여자는 모두 여자 남자(女男人)로 변했다. (뭇 사람 웃음) 이것은 음양이 뒤바뀐 것이다.”(각지 설법6-아태지역 수련생회의 설법) 저는 이런 가정에서 자랐기에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뒤바뀐 사고방식이 형성되었던 것입니다. 사부님의 가르침이 없었다면 저는 정말로 그것이 잘못되었다는 것을 깨닫지 못했을 것입니다. 저는 어머니를 좋아하고 아버지는 좋아하지 않았습니다. 싫어하는 마음에서는 자신의 부족함을 찾기 쉽지만 좋아하는 집착에서는 부족함을 찾기가 쉽지 않습니다.

화를 내는 것과 기뻐하는 것, 사랑과 미움, 좋고 나쁨, 좋아하는 것과 싫어하는 것 등은 모두 대립하여 존재하는 통일체라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제가 어느 쪽으로 치우치든 모두 정(情) 속에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정에서 벗어나고 정을 돌파해야만 이원적 대립이 없는 비범한 사람이 될 수 있고, 그래야만 높은 경지에서의 조화로운 통일을 체득할 수 있으며 내적 소모가 없는 진정한 포용과 수용을 이룰 수 있습니다. 생명이 간섭받지 않고 통제받지 않는 자신의 존재 방식으로 자연스럽게 나타나게 하여 각자 자신의 귀속지를 향해 나아갈 수 있습니다.

외부의 모든 사람과 사물은 우리 내면의 관념이 외부 세계에 투영된 것임을 깨달았습니다. 우리 마음속에 불편함이 있다면 반드시 제거해야 할, 도(道)에 부합하지 않는 관념과 사람의 마음일 것입니다. 부모가 늙거나 병들면 자녀의 보살핌이 필요합니다. 이는 자녀나 며느리, 사위가 피할 수 없는 현실입니다. 미워하거나 싫어하는 마음은 자신에게 원망과 번뇌만 더하여 정신적 균열을 일으키고 자신의 에너지를 소모시킬 뿐이니 당연히 노인을 공경하는 본분을 다하지 못하게 됩니다.

일반적으로 속인의 입장에서 보면 노인들에게 이것저것 잘못되었다고 생각하면서 노인들에 대한 태도가 당연하다고 여기는데, 이는 속인의 인식입니다. 이러한 인식이 가져오는 결과는 참을 수 없어 하고, 화를 내며, 악(惡)을 드러내는 것입니다. 평화롭게 살려면 노인들이 변해야 한다고 생각하지만 자신에게도 바꿔야 할 것이 있다는 점은 생각하지 못합니다.

진선인의 원칙에 따르면 이 문제를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요? 이 세상의 우리 부모, 형제자매는 모두 인연 관계로 온 것입니다. 모두가 서로 갚아야 할 빚과 은혜, 원한이 있습니다. 이는 전생이나 더 오래된 윤회 속에서 맺은 선악의 결과가 다르기 때문입니다. 과거에 형성된 나쁜 습관을 바로잡으려면 이번 생에서 가족을 잘 대하고 업(業)을 없애고 소원을 마무리 지어야 합니다. 선(善) 속에는 참음[忍]이 있습니다. 참지 못하면 선이 없고 참음은 관용이며 수용입니다. 모든 것을 원만하게 원융할 수 있고 분별, 음양, 옳고 그름, 좋고 나쁨이 없이 단지 서로 다른 두 면만 있을 뿐입니다. 손바닥과 손등, 이불의 앞면과 뒷면처럼 분리할 수 없는 것입니다.

이러한 법리를 깨달았을 때, 저는 원망, 자아, 독선 등 마성(魔性)의 족쇄가 갑자기 풀리는 것을 느꼈습니다. 내면으로부터 따뜻하고 부드러운 자애로움과 기쁨, 홀가분함과 자유로움이 솟아났습니다. 이것이 바로 사부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영원한 행복이며, 자비롭고 위대하신 사부님께서 세상에 법을 전하고 사람을 구해 중생이 모두 혜택을 받게 하는 묘법입니다. 한편으로는 세인을 통해 제자들을 수련시키고, 다른 한편으로는 제자들이 법을 실증하는 영광스러운 과정을 세상에 영원히 남기는 것입니다. 우주의 모든 선량한 중생들은 사부님의 위대함과 법의 위대함에 감사드릴 것입니다.

 

원문발표: 2024년 8월 29일
문장분류: 수련교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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