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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인 “자네가 파룬궁을 수련한 게 헛되지 않았군!”

글/ 랴오닝성 대법제자 본인 구술, 수련생 정리

[명혜망] 저는 농촌 여성으로 나이가 60세에 가깝습니다. 파룬따파(法輪大法, 파룬궁)를 수련한 20여 년 동안 고난도 있었지만, 대법이 가져다준 아름다움과 행복이 더 많았습니다.

1. 고난

결혼 전에 저는 몸이 약해 바람을 이기지 못했습니다. 부모님께서 고생하며 저를 고등학교까지 보내셨지만 대학에 합격하지 못했습니다. 제가 어디를 가든 사람들은 제가 농사일을 하는 사람 같지 않다고 말했습니다. 하지만 저는 결국 농촌에 정착했고 그때 저는 제 운명이 좋지 않다고 원망했습니다.

부모님은 제가 고생할까 봐 우리 마을에서 성실하고 얌전한 남자를 찾아 결혼시켰습니다. 그가 바로 제 남편입니다. 그에게는 형과 누나가 한 명씩 있었고 역시 가난한 집안이었습니다.

결혼 4개월 만에 저는 결핵성 늑막염에 걸렸습니다. 두통이 있었고 기운이 없으면 걸을 수 없어 앉아서 쉬어야 했습니다. 때로는 낮이나 밤에 잠을 잘 때 머리는 또렷했지만 몸을 움직일 수 없었고 일어날 수도 없었습니다. 어쩔 수 없이 부체(附體-여우, 족제비, 귀신 등 따위)를 모셨습니다.

아들이 태어난 지 1주일쯤 됐을 때 저는 39.5도의 고열로 정신이 흐릿해졌고, 구급차를 불러 병원에 갔더니 폐결핵 진단을 받았습니다. 그래서 저는 산후조리 기간에 아이에게 젖을 줄 수 없었습니다. 그때 시부모님은 우리 맞은편 집에 살고 계셨는데 시어머니께서 말씀하셨습니다. “어디서 병신을 데려왔구나!” 그때 제 마음은 매우 괴로웠고 이렇게 사는 게 무슨 의미가 있나 싶었습니다. 나중에 시부모님이 우리와 한 지붕 아래 살지 않게 됐지만 생활은 크게 달라지지 않았습니다. 제 남편은 ‘찌질이’라고 불렸고, 우리 가족을 존중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습니다! 우리 부부는 번갈아가며 아팠고, 마을 사람들이 우리를 표현한 대로 우리는 “아무 능력도 없고, 오직 병 앓을 능력만 있었습니다!”

10여 년간 우리의 삶은 이렇게 빠듯하고 고통스럽게 지나갔습니다… 고통과 절망 속에서 저는 스스로에게 물었습니다. ‘이 모든 것은 무엇을 위한 것일까?’

2. 하늘에서 내린 기쁨

1998년 12월 어느 날이었습니다. 저는 우리 지역의 농촌 장터에 갔다가 아름다운 음악 소리를 들었고 그곳으로 달려갔습니다. 사람들이 기공을 연마하고 있는 것을 보고 파룬궁이라는 걸 알게 됐습니다. 저는 연마하고 싶었고 제 세포가 흥분하는 것 같았습니다. 집에 돌아와서 우리 마을에서 파룬궁을 연마하는 사람을 찾았습니다. 이렇게 저는 법을 얻게 됐습니다. 이것은 정말 하늘에서 내린 기쁨이었습니다!

수련 후 사부님께서 제 집안의 환경을 정화해주셨고 제가 법을 얻은 지 5일 만에 저는 그 부체의 위패를 태워버렸습니다. 아무 문제도 없었습니다. 사부님께서는 제 몸도 정화해주셨고 그야말로 한 점 병 없이 몸이 가벼워졌습니다! 그때부터 제 마음은 창문이 열린 것 같았고 햇살이 쏟아져 들어왔습니다. 세상이 모두 밝아진 것 같았습니다.

한번은 사부님의 설법 비디오를 보다가 한 대법제자가 자신은 아무것도 볼 수 없지만 끝까지 수련하겠다고 말하는 내용이 나왔습니다. 그때 저도 마음속으로 말했습니다. ‘저도 끝까지 수련하겠습니다!’

20여 년간 저는 줄곧 사부님의 요구에 따라 엄격하게 처신하고 일했습니다. 세상 사람들도 제 몸에서 파룬따파의 아름다움과 기적을 보았습니다.

3. 큰아주버니, 큰시누이와 친척들이 마음속으로 파룬따파가 좋다는 것을 인정하다

시아버지는 오래전에 돌아가셨고 시어머니는 줄곧 큰아들과 함께 사셨습니다. 두 손녀와 증손자도 모두 시어머니가 키우셨습니다. 하지만 시어머니는 우리 가족에게 매우 인색했고 제 아들을 돌봐주신 적이 한 번도 없었습니다.

하지만 2016년 12월, 시어머니가 수술을 받아 간호가 필요했습니다. 큰아주버니네가 아무 말도 하지 않는 상황에서 저는 시어머니의 연세가 많으니 모두 큰아들에게 맡길 수는 없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저는 자진해서 오래된 관행을 깨고 시어머니가 누구에게 잘하고 못했는지 따지지 않고 교대로 모시기 시작했습니다. 시어머니는 겨울에는 우리집에서, 여름에는 큰아주버니 집에서 지내셨습니다. 2017년에는 시어머니의 건강이 좋지 않아 추위를 많이 타셨기 때문에 돌보기 편하도록 남편과 상의해 근처에 작은 아파트를 샀고, 우리 집 단층 주택은 리모델링하지 않았습니다. 이런 상황이 3년 동안 지속됐고 85세이신 시어머니는 2020년 5월에 돌아가셨습니다.

시어머니가 7번 입원해 교대로 간호한 기간에 일어난 이야기

2017년부터 시어머니는 7번 입원하셨고, 매번 10일에서 14일 정도 큰아주버니네, 큰시누이네, 우리집에서 교대로 간호를 했습니다. 하지만 누가 당번이든 시어머니의 하루 세 끼 식사는 모두 제가 담당했습니다.

저는 정성껏 음식을 준비해 시어머니가 맛있게 드시도록 했고, 늦게 배달한 적이 없었습니다. 드시고 싶어 하는 것은 무엇이든 사드렸고, 돈을 따지지 않았습니다. 저는 제가 수련하는 사람이고 사부님께서 이렇게 요구하셨으니 이렇게 해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수련하려면 잘 수련해야 합니다.

한번은 큰시누이도 병원에 있어서 제가 두 가지 음식을 준비해야 했습니다. 시누이는 당뇨병이 있어서 흰쌀밥을 먹지 않았거든요. 그날 비가 엄청나게 쏟아졌고 점심으로 저는 동과(冬瓜)탕에 완자를 만들었습니다. 저는 자전거를 밀고 낡은 우비를 입고 장화를 신었습니다. 비가 너무 많이 와서 음식을 담은 그릇을 들고 가기가 어려워 물통에 넣어 자전거 핸들에 걸고 위를 잘 덮어 식지 않도록 묶은 뒤 병원 쪽으로 자전거를 밀고 갔습니다. 1리(里, 500m) 거리였지만 가는 게 매우 힘들었습니다. 길에는 한 사람도 보이지 않았습니다. 하늘에서는 우르르 천둥이 치고 번개가 하늘을 밝혔습니다. 가끔 전조등을 켠 차가 지나가기도 했지만 모두 급히 지나갈 뿐이었습니다.

이때 저는 시어머니가 전에 닭목살을 드시고 싶어 하셨던 걸 기억해냈습니다. 저는 서둘러 처마 밑에 자전거를 세우고 닭목살을 사러 갔습니다. 또 큰시누이를 위해 큰 빵도 샀습니다. 그런 다음 이것들을 겉옷 안쪽에 넣어 몸에 가까이 두어 따뜻함을 유지했습니다. 그분들이 차가운 음식을 드실까 봐 걱정됐거든요.

이 짧은 시간 동안 제 장화에는 물이 가득 찼고, 몸은 안에서 밖까지 모두 젖었습니다. 병원에 도착하니 시어머니와 큰시누이가 복도에 서 계셨습니다. 시어머니가 제게 방금 있었던 일을 말씀하셨습니다. 옆 병실의 한 환자분이 우리에게 말씀하셨다고 합니다. “며느리를 기다리지 마세요. 제게 작은 전기밥솥이 있으니 죽을 좀 끓이고 짠 반찬을 좀 드세요. 우리 모두 이렇게 먹고 있어요. 이렇게 비가 많이 오는데 며느리가 올 수 있겠어요?” 그러나 시어머니는 이렇게 대답하셨습니다. “우리는 죽을 끓이지 않아요. 이렇게 비가 많이 오는 것뿐만 아니라 칼날이 떨어져도 제 며느리는 올 거예요!” 저는 그 말을 듣고 웃었습니다.

물론 제가 잘하지 못할 때도 있었습니다. 어느 날 오전에 제가 비닐하우스에 가서 모종에 물을 주다가 중간에 전기가 나갔고 전선에서 연기가 났습니다. 다시 우물물을 끌어 급히 물을 주면서 시어머니께 밥을 해드려야 해서 서둘러 하다가 강낭콩 지지대에 넘어졌습니다. 한쪽 바지가 모두 젖어서 벗고 속바지만 입은 채 바지를 하나 더 걸쳤습니다. 10시 30분이 됐고 저는 집에 가서 밥을 해야 했습니다. 그렇지 않으면 시간이 모자랄 것 같았거든요. 그날은 마침 음력 2월 2일이어서 관습에 따라 돼지머리고기를 사야 했습니다. 하지만 비닐하우스 문을 나서자마자 자전거 타이어에 바람이 빠진 걸 발견했습니다. 저는 힘껏 자전거를 밀고 수리소로 급히 갔습니다. 어떻게 하면 가장 빨리 수리할 수 있는지 젊은 기술자와 의논했고 그는 내부 튜브를 갈자고 했습니다. 튜브를 갈면 10여 위안이 들고, 구멍을 때우면 3위안밖에 안 듭니다. 저는 즉시 갈자고 했습니다. 비싸더라도 빨리만 하면 됩니다. 튜브를 교체한 후 저는 서둘러 채소를 사고 돼지머리고기도 사서 시어머니의 식사 시간을 놓치지 않았습니다.

중간에 자전거를 밀고 언덕을 오르는데 마음이 약간 불편해졌습니다. 그날 저는 얇은 바지 하나만 입고 있었고 양말도 젖어 있었습니다(급하게 서두르다 갈아입는 걸 잊었습니다). 겨울이라 매우 추웠습니다! 그래서 저는 사부님의 법을 외웠습니다. “참기 어려운 것도 참을 수 있고, 행하기 어려운 것도 행할 수 있다(難忍能忍, 難行能行).”(전법륜) 그제야 마음이 점차 평온해졌습니다. 사실 법에 대조해보면 제가 마음을 움직이지 말았어야 했습니다.

교대 간호가 갑자기 변했을 때 일어난 이야기

2020년 3월 어느 날, 시어머니가 다시 병원에 입원하셨는데 이번에는 간호 상황이 변했습니다.

먼저, 큰동서가 뇌출혈로 쓰러져 큰아주버니가 돌봐야 했습니다. 제 남편은 교대 근무를 하고 있었고 이 일로 매우 조급해하며 때로는 심장박동수가 분당 100회에 달해 몸이 견디기 힘들어했습니다. 큰시누이는 당뇨병과 고혈압이 있어 병원에 가서 노인을 모시기에는 몸이 견디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큰시누이는 큰아주버니의 큰딸에게 시어머니의 식사를 준비하도록 했습니다. 시어머니는 음식에 대해 까다로우셨습니다. 죽은 너무 묽지도 않고 너무 되지도 않아야 했고, 작은 생선을 3~6마리 정도 구워야 했는데 너무 딱딱하거나 너무 무르면 안 됐습니다. 또 따로 요리를 해야 했고 식감이 부드러워야 했습니다. 조카딸은 이 말을 듣고 자기 엄마와 말다툼을 했고 이불 속에 누워 울기 시작했습니다. 잠시 일이 멈춰 있는 것 같았지만 시어머니는 중병으로 간호가 필요했습니다!

저는 이 일을 알고 수련인으로서 다른 사람을 위해 생각해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사부님께서 우리를 이렇게 가르치셨습니다. 저는 아이에게 제 결정을 알렸습니다. “네가 밥을 하지 않아도 돼. 외숙모가 할게. 네 엄마를 잘 돌보기만 하면 돼. 네 아빠가 아침, 점심, 저녁 각각 한 시간씩 날 대신해 주면 내가 집에 가서 음식을 준비할 수 있을 거야.” 이렇게 해서 저는 모든 것을 맡게 됐고 개인의 이익을 내려놓고 온 마음과 정성을 다해 시어머니를 돌봤습니다.

말하기는 쉽지만 실제로 하기는 정말 어려웠습니다.

병원에서 간호할 때는 주사를 봐야 했고, 시어머니는 기본적으로 한 시간에 한 번씩 소변을 보셨습니다. 소변을 받아 의사의 요구에 따라 병에 부어야 했습니다. 목적은 소변량을 측정해 투약의 근거로 삼기 위해서였습니다. 때로는 소변이 손에, 발에, 어디에나 묻었습니다. 제가 대법을 수련하지 않았다면 절대 해내지 못했을 겁니다. 때로는 너무 졸려서 2분만 눈을 붙이려고 하면 시어머니가 저를 부르셨습니다. 소변을 보신다고 해서 준비하면 받는 통에 소변이 없었습니다. 제가 “왜 소변을 안 보셨어요?”라고 물으면 시어머니는 “안 나와”라고 하셨습니다. 저는 “조급해하지 마세요. 천천히 보세요”라고 말하고 잠시 후에 다시 봐도 여전히 보지 못하셨습니다. 저는 짜증을 내거나 화를 내지 않고 시어머니의 마음을 헤아려드렸습니다. 물론 그렇게 하면 잠을 잘 수가 없었습니다.

우리집은 비닐하우스 농사로 생계를 유지합니다. 비닐하우스를 관리하는 사람들은 알겠지만 이것은 매우 힘든 일이고 사람의 손길이 필요합니다. 그때 저는 제 비닐하우스를 거의 돌볼 수가 없었습니다. 저는 근처의 수련생에게 부탁해서 비닐을 걷고 환기를 해달라고 했습니다. 나중에 가 보니 고추 모종도 쓰러지고 잡초도 많이 자랐습니다. 그때 저는 모든 것을 내려놓고 신경 쓰지 않았습니다.

저는 집에 가서 밥을 했는데 두 가지를 준비해야 했습니다. 시어머니의 음식을 준비하고 동시에 남편의 음식도 준비해야 했습니다. 시어머니는 매번 식사할 때마다 메뉴를 정하셨고 저는 그대로 만들었습니다. 매번 시어머니는 매우 만족하셨습니다. 저는 병원에서 자전거를 타고 집으로 급히 돌아와 죽을 끓이고 반찬을 만들어 시어머니께 가져다드렸습니다. 저는 식사할 시간도 없었고 여러 해 동안 변함없이 지켜온 식습관을 완전히 깨뜨렸습니다. 저는 시어머니께 이런 얘기를 한 적이 없습니다. 때로는 집에 와서 남은 밥으로 대충 때우곤 했습니다. 너무 바빠서 식사할 시간이 없었거든요. 저는 항상 좋은 소식만 전하고 걱정되는 일은 말씀드리지 않았습니다. 시어머니가 걱정하실까 봐요. 시간이 촉박해서 급하게 오가다 보니 제 속옷은 항상 흠뻑 젖었습니다.

우리 마을에서는 제 시어머니의 ‘까다로움’을 모두 알고 있었습니다. 마을 사람들은 시어머니에게 ‘진삼첨(陳三尖, 세 가지 까다로운 점이 있다는 뜻)’이라는 별명을 지어줬습니다. 그뿐만 아니라 시어머니는 활발한 며느리를 좋아하셨는데, 저는 약하고 말을 잘 못했기 때문에 시어머니는 늘 저를 마음에 들어 하지 않으셨습니다. 다른 사람들의 말로 하면 “반쪽 눈동자도 맘에 들어 하지 않았다”는 거죠. 한번은 제가 큰 뼈와 과일을 사서 시어머니께 가져다드리려고 병원에 갔는데 병원 문 앞에서 4, 5명이 시어머니와 이야기를 나누고 있는 것을 보았습니다. 그중 한 할머니가 저를 보더니 걱정스럽게 물었습니다. “아이고, 왜 이렇게 말랐니?” 시어머니가 즉시 말을 받았습니다. “난 저 애를 약혼할 때부터 싫어했어. 너무 말랐거든. 영감(시아버지를 가리킴)만 좋아했지!” 저를 받아들이지 않으시는 마음이 말씀에 그대로 드러났습니다. 하지만 저는 전혀 개의치 않았습니다. 그 할머니는 제가 시어머니와 싸울까 봐 놀라 즉시 일어나려고 했지만, 몸이 좋지 않아 쉽게 일어나지 못했고 겨우 일어나서는 서둘러 빠른 걸음으로 떠났습니다. 할머니의 뒷모습을 보며 저는 마음이 담담했고 마음에 두지 않았습니다.

변화

2020년 5월, 시어머니께서 병원에서 평온히 세상을 떠나셨습니다. 큰아주버니, 큰시누이와 친척들이 장례를 치를 때 순조롭게 진행됐고 어떤 갈등도 없었습니다. 그중에 돈이나 예물에 대해 저와 남편은 모두 따지지 않았습니다. 이 일에 대해 모두가 매우 만족스럽게 마무리 지었습니다.

하지만 큰시누이는 제가 시어머니를 간호하는 것을 보고 원래 저를 무시하던 태도를 바꿨습니다. 큰아주버니도 전에는 저를 상대하지 않았는데, 평소에는 “동생이 찌질이라 며느리를 다스리지 못해(제가 파룬궁을 수련하는 것을 가리킴)”라고 했습니다. 대법제자가 좋은 사람이 되는 행동은 그와 무관한 것 같았습니다. 하지만 이렇게 그들과 관련된 절실한 이익이 실제로 그들에게 일어나자 그들의 마음이 움직였습니다. 그들은 저를 걱정하기 시작했고 따뜻한 말을 했습니다. 저는 그들이 진심으로 저를 인정하고 이 대법이 정말 좋다는 것을 알게 됐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큰아주버니네 두 조카의 태도도 바뀌었습니다. 사실 제 큰동서도 대법을 수련했지만 갑자기 뇌출혈이 생겨서 원래 대법이 좋다고 인정했던 자녀들이 부정적인 생각을 갖게 됐습니다. 어머니가 20여 년간 수련했는데도 뇌출혈이 생겼다며 더 이상 믿지 않게 된 것입니다(물론 형님은 지금 자신의 원인을 찾았고 몸이 빠르게 회복되고 있습니다). 심지어 대법제자가 그들 집에 가면 쫓아내기까지 했고 매우 반감을 가졌습니다. 이번에 시어머니의 입원을 통해 조카들은 진심으로 말했습니다. “우리 엄마가 잘하지 못한 거예요. 대법이 나쁜 게 아니에요. 모두가 숙모처럼만 한다면 얼마나 좋을까요.” 그들은 수련인을 ‘등급’으로 나누기까지 했고 각자의 심성이 다르지만 대법은 좋다고 생각했습니다.

마을의 한 친척은 전에 파룬궁만 언급하면 돌아서서 가버렸는데, 이제는 자발적으로 제게 다가와 친절한 태도를 보였습니다. 저는 그가 파룬궁에 대해 태도를 바꿨다는 걸 알았습니다.

명절 때마다 친척들도 우리 가족에게 후한 선물을 하기 시작했고, 심지어 자발적으로 이것저것 사주었습니다. 저는 진상을 알게 된 생명들이 마음속에서 우러나오는 감사를 표현하는 것을 보았습니다. 물론 저는 그들에게 예의를 갖추었고 그들이 추가로 비용을 들이지 않도록 했습니다.

4. 남동생 가족이 대법 사부님께 감사드리다

시어머니가 초기에 입원해 계실 때 제 올케(남동생의 아내)가 파룬궁을 수련한다는 이유로 중공에 의해 불법적으로 감옥에 갇혀 있었습니다. 그때 저는 올케의 아이가 대학에 다니고 있어서 학업에 지장을 주면 안 된다고 생각했습니다. 올케의 시부모(즉, 제 부모님)는 모두 80세에 가까운 나이셨고 남동생은 대퇴골두 괴사증을 앓고 있었습니다. 조카의 대학 교육비가 필요했지만 이 집안의 기둥이 감옥에 갇혀 있었습니다. 저는 대법제자로서 법을 실증해야 하고 이 가정이 흩어지도록 놔둘 수 없다고 생각했습니다.

저는 어머니께 말씀드렸습니다. “작은 며느리가 감옥에 갔으니 우리가 이 집을 지켜야 해요! 우리에겐 사부님의 보호가 있으니 우리가 좀 더 고생하면 사부님께서 모두 잘 안배해주실 거예요.” 그 후 저는 부모님과 함께 더 많은 일을 했습니다. 올케 집도 비닐하우스를 하고 있어서 저는 두 개의 비닐하우스를 관리했습니다.

어머니 “리 대사부님께서 정말 잘 보호해주시는구나!”

그해 옥수수가 기적을 일으켰습니다. 다른 집의 옥수수 모종은 작았는데 남동생 집은 물을 줄 사람이 없고 가뭄까지 들었는데도 밭의 옥수수 모종이 아주 컸습니다. 올케가 평소에 집에서 잘 해왔기 때문에 어머니는 대법이 좋다는 것을 매우 믿으셨습니다. 그래서 어머니는 밭에 가서 리(李) 대사부님께 절을 하고 감사드렸습니다!

어느 해 겨울, 어머니가 집에 계실 때 갑자기 방에서 뛰쳐나오셨습니다. 인중 부위가 심하게 아파서 계속 소리를 지르셨고 아버지와 남동생이 절뚝거리며 어머니를 부축해 침대에 눕혔습니다. 어머니는 ‘파룬따파하오(法輪大法好-파룬따파는 좋습니다), 쩐싼런하오(真善忍好-진선인은 좋습니다)’를 외우셨고, 그러자 인중에서 뭔가가 관자놀이로 옮겨가는 것 같았고 점점 아프지 않게 되었습니다. 이렇게 어머니는 약도 먹지 않고 나으셨습니다! 나중에 어머니가 비닐하우스에 오셔서 이 일을 말씀하셨는데 손으로 관자놀이를 가리키셨습니다. 제가 보니 그곳에 계란 노른자만한 크기의 멍이 들어 있었습니다. 이것이 바로 사부님의 보호입니다. 그렇지 않았다면 병원에 가서 검사해도 무슨 병인지 알아내지 못했을 것입니다.

그때부터 어머니는 대법을 더욱 믿으셨고 9자 진언을 열심히 염하셨습니다. 사부님께 향을 피우고 삼배구고(三拜九叩)를 하셨습니다.

그해 겨울 눈이 왔는데 4인치나 쌓였습니다. 저는 새벽 3시에 일어났습니다. 비닐하우스 위의 쌓인 눈을 해가 뜨기 전에 치워야 했기 때문입니다. 그날 제 남편은 아침 8시에야 퇴근할 수 있었기에 저 혼자 아파트에서 비닐하우스로 급히 갔습니다. 날씨가 무척 추웠고 길에는 아무도 없었습니다. 가끔 아파트 단지에서 불빛이 새어 나왔지만 저는 두렵지 않았습니다. 사부님이 계시니까요! 20분 정도 걸어 그곳에 도착했는데, 눈을 치우는 사람이 한 명도 보이지 않았습니다. 저는 우리집 비닐하우스부터 치우면 안 된다고 생각했습니다. 해가 뜨면 비닐하우스를 덮은 천을 걷어야 하는데, 올케가 집에 없으니 그쪽이 손해를 보면 안 됐습니다. 아이가 학교에 다니려면 돈이 필요하니까요.

제가 솜옷을 벗고 보온 내의만 입은 채 비닐하우스의 눈을 대부분 치웠을 때, 아버지와 어머니가 막대기와 작은 삽을 들고 절뚝거리며 오셨습니다. 그러고 나서 우리집 비닐하우스를 치웠습니다. 제가 180미터의 비닐하우스를 다 치웠을 때 해는 아직 뜨지 않았고 아무것도 지장받지 않았습니다.

제 체중은 약 45kg 정도밖에 안 됐고 60세에 가까운 나이에 이렇게 많은 일을 하는 것은 수련을 했기 때문입니다. 사부님께서 제게 건강한 몸을 주셨습니다. 사부님의 보호와 가지(加持)가 없었다면 저는 전혀 할 수 없었을 것입니다. 저에게는 두 명의 여동생이 있지만 제 마음속으로는 누구와도 비교하지 않았습니다. ‘다른 사람들은 왜 하지 않을까? 왜 모든 게 내 몫이 됐을까?’ 저는 전혀 이런 생각을 하지 않았고 누구도 원망하지 않았습니다. 그들의 몸이 모두 좋지 않아서 올 수 있으면 오고, 오지 못해도 저는 아무 생각이 없었습니다.

그해 올케의 아이 대학 등록금은 충분했고 집안 모든 일이 잘 안배되어 아무 탈 없이 잘 지냈습니다. 이는 사부님의 보호입니다. 저는 이렇게 생각했습니다. 정말 “수련은 자신에게 달렸고(修在自己), 공은 사부에게 달렸다(功在師父)”(전법륜)는 말씀이 맞습니다. 저는 단지 약간의 노력을 했고 조금 고생했을 뿐입니다.

당시에는 시어머니를 돌봐야 했고 두 개의 비닐하우스도 관리해야 해서 시간이 충분치 않았습니다. 그래서 저는 최대한 간단하고 관리하기 쉬운 채소를 심었습니다. 돈을 많이 벌려고 생각하지 않았고 가정의 지출을 충당할 수 있으면 됐습니다. 그렇게 평상심을 유지했습니다. 신기하게도 올케의 비닐하우스에서 첫해에 심은 샐러리가 매우 잘 자랐고, 그해 가격이 평소보다 3배 가까이 높아 잘 팔렸습니다. 그 한 번으로 1만 6천 위안을 벌었습니다. 나중에 다른 채소들도 심었습니다. 1년을 계산해보니 3만 위안 이상의 수입이 있었고 올케가 집에 있을 때보다 더 많은 돈을 벌었습니다. 저는 이 모든 것이 사부님께서 주신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올케 집 비닐하우스에서 또 기적이 일어났습니다. 비닐하우스의 플라스틱 덮개는 보통 1년에 한 번 교체해야 하는데, 올케가 이미 1년 사용했고 제가 3년 더 사용했는데도 교체하지 않았습니다. 총 4년을 사용했는데 작은 구멍 두 개만 있었고 테이프로 붙여서 사용했는데 지장이 없었습니다. 햇빛도 잘 들어와 채소가 잘 자랐습니다. 보통 플라스틱 덮개는 1년에 한 번 교체해야 하고 품질이 좋은 것도 2년밖에 사용하지 못합니다.

그해 우박이 내렸을 때 다른 농가의 새 플라스틱 덮개는 모두 다시 고정해야 했지만, 올케 집의 것은 4년째 사용 중인데도 얇은 작은 구멍 몇 개만 있었습니다. 이는 플라스틱 덮개에 우박이 전혀 맞지 않았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이는 완전히 상식을 뛰어넘는 일입니다! 이것이 파룬따파의 위력이 아니라고 할 수 있겠습니까? 심지어 어머니가 비닐하우스 앞에 심은 어린 모종도 손상되지 않았습니다. 어머니는 감탄하며 계속 말씀하셨습니다. “리 대사부님께서 정말 잘 보호해주시는구나, 정말 잘 보호해주시는구나!” 어머니는 대법에 대한 믿음이 더욱 깊어지셨습니다.

올케가 감옥에서 돌아왔을 때 저는 이 모든 것을 온전히 그녀에게 넘겨주었습니다. 정상적인 지출을 제외하고 남은 1만 9천 위안도 포함해서요.

올케의 아버지 “대법제자는 정말 좋은 사람이야!”

또한, 제 시어머니가 초기에 입원해 있을 때, 저는 병원에서 올케의 부모님도 보았습니다. 물어보니 올케의 어머니가 암에 걸리셨다는 것을 알게 됐습니다. 저는 제가 할 수 있는 노력을 다해 상황을 개선해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시어머니께 음식을 가져다드릴 때 음식을 조금 더 만들어 두 노인 분께도 가져다드리면서 대법이 좋다고 염하시면 건강에 좋다고 말씀드렸습니다.

한번은 제가 밭에서 모종 간격 조절을 막 끝냈을 때였습니다. 그때 시어머니는 이미 퇴원하셨습니다. 비가 오려는 것을 보고 거의 저녁 5시가 다 되어 이 두 노인 분이 식사를 하셨는지 걱정됐습니다. 이 비는 소나기였기에 저는 서둘러 병원에 가서 상황을 확인했습니다. 마침 올케의 아버님이 음식을 사지 못하셨습니다. 그분은 나이가 많으셔서 이곳 상황에 익숙하지 않으셨습니다. 저는 즉시 돌아서서 조금 먼 곳에 있는 분식점에 가서 밥과 볶은 고기를 사고, 돼지 족발과 맥주 한 병도 사서 가져다드렸습니다. 나중에 그분은 항상 이 일을 잊지 못하시고 제 좋은 점을 이야기하셨습니다. 사실 이것은 아주 작은 일에 불과합니다. 때로는 올케의 어머님이 볶은 간을 좋아하셨는데, 제가 이 요리를 잘하지 못해서 식당에 가서 한 접시 사다 드렸고, 물만두를 드시고 싶어 하셔서 저는 여러 식당을 돌아다니며 사다 드렸습니다. 최대한 소원을 들어드리려고 노력했습니다.

올케의 어머니는 퇴원한 지 얼마 되지 않아 세상을 떠나셨는데, 그때 올케는 아직 감옥에서 돌아오지 않았습니다. 저는 자발적으로 그 집에 가서 오신 친척들에게 진심으로 말했습니다. “딸이 할 수 있는 일은 제가 다 할 수 있습니다. 제가 그녀를 대신해 하겠습니다.” 그 집에는 올케가 유일한 딸이어서 항상 매우 사랑하고 걱정하셨기 때문입니다. 친척들은 이 말을 듣고 매우 감동했습니다!

솔직히 말해서 저는 단지 대법제자로서 해야 할 일을 했을 뿐이고, 특별한 것이 없다고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올케의 아버지는 계속 잊지 못하시며 입버릇처럼 말씀하셨습니다. “대법제자는 정말 좋은 사람이야!”

5. 마을 사람들이 내가 대법을 수련해 복을 받았다고 말하다

그동안 우리집 비닐하우스도 기적이 연이어 일어났습니다. 시간이 부족해서 거의 관리를 하지 못했는데도, 우리 마을에서 같은 종류의 고추를 심었는데 우리 비닐하우스에서 가장 많은 돈을 벌었습니다. 1년에 4만 위안 이상을 벌었습니다. 보통은 3만 위안 정도인데, 다른 사람들보다 거의 1만 위안을 더 벌었습니다.

남편은 직장에서 가장 나이 많은 직원이었습니다. 그는 본래 회사의 감원 대상 명단에 있었는데 조용히 용광로를 수리해 놓았더니 회사에서 그를 남겨두었고, 월급도 3천 위안 이상입니다. 제가 20여 년간 수련하는 동안 그도 혜택을 받아 약 한 알 먹지 않고 건강하게 지냈습니다. 그는 때때로 제가 가부좌하는 모습을 따라 하며 진심으로 ‘파룬따파하오(法輪大法好)’를 외웁니다.

제 아들은 컴퓨터 소프트웨어를 전공했고 졸업 후 남쪽으로 발령받아 일하다가 지금의 회사로 옮겼습니다. 이 회사는 국유기업인데 이 회사에 입사할 때는 최소한 명문대 졸업생이어야 했습니다. 그런데 제 아들은 2류 대학 출신인데도 채용되었습니다. 지금 그의 월급은 2만 위안이 넘고, 흡연이나 음주 같은 나쁜 습관도 없어 품행이 매우 좋습니다. 이를 아는 사람들은 모두 놀라워합니다. 이 일을 알게 된 한 노인이 제게 말했습니다. “자네가 파룬궁을 수련한 게 정말 헛되지 않았군! 복을 받았어!”

저는 한때 마을의 도로 포장 요청에 적극적으로 응해 혼자서 큰 삽을 메고 일하러 갔습니다. 친척을 위해 옥수수를 따다 우리집 밭을 돌볼 수 없어 어쩔 수 없이 밤 2시에 물을 주기도 했습니다. 큰아주버니 집에 사시는 시어머니를 위해 석탄을 사드렸지만, 우리가 10여 년간 살던 단층집에는 석탄을 사본 적이 없습니다. 우리집과 주변 마을 주민들의 비닐하우스가 수해를 입지 않도록 우리집 땅에 길이 110미터, 깊이 1.5미터, 너비 2미터가 넘는 큰 도랑을 파서 0.5무 이상의 땅을 차지하고 연간 1천여 위안의 손실을 보았지만 담담하게 받아들였습니다. 마을 사람들은 제 선행을 기억하고 저를 매우 높게 평가합니다. 심지어 소문이 멀리까지 퍼져 저 같은 사람을 언급하면 모두가 알 정도이고, 기독교인조차도 인정할 수밖에 없어 이렇게 말합니다. “그녀는 사람들의 신뢰를 얻었군요. 이 파룬궁은 정말 좋군요!”

사실 저는 단지 사부님의 말씀을 듣고 진심으로 모든 사람에게 잘 대했을 뿐입니다. 모든 것은 사부님께서 주신 것이며 사부님과 대법이 없었다면 이 모든 것이 없었을 것입니다.

마지막으로, 저는 온 가족을 대표해 은혜로운 사부님께 큰절을 올리며 제도해주신 은혜에 감사드립니다! 세상 사람들이 모두 파룬따파가 좋다는 것을 알고 평안히 재난을 넘길 수 있기를 바랍니다!

 

원문발표: 2024년 7월 29일
문장분류: 수련교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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