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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편이 극력 반대하다 대법 속에서 이로움을 얻기까지

글/ 대만 대법제자

[명혜망] 저는 남아선호 가정에서 자랐습니다. 위로 두 명의 언니와 아래로 두 명의 남동생이 있었는데, 어릴 때 저는 항상 부모님이 남동생들만 특별히 아낀다고 질투했습니다. 아버지는 도박을 좋아하셨고 결국 제가 초등학교 6학년 때 스스로 목숨을 끊으셨습니다.

어린 시절 기억 속에 행복은 없고 부모님의 끊임없는 다툼만 있었습니다. 자라서는 행복한 결혼 생활을 꿈꿨지만 현실은 뜻대로 되지 않았습니다. 남편은 도박은 하지 않았지만 담배를 피우고 술을 마셨습니다. 매일 일은 하지만 가정에는 전혀 관심이 없었죠. 당시 저에겐 세 아이가 있었는데, 막내아들은 겨우 2살, 큰아들은 4살, 딸은 6살이었습니다. 그때 삶은 무척 힘들었습니다. 남편은 가정을 회피하고 일에만 몰두했고 세 아이를 돌보는 책임은 모두 제게 떠맡겨졌습니다.

셋째 아이를 낳은 후 산후조리를 제대로 하지 못해 건강 상태가 좋지 않았고 불면증은 일상이 됐습니다. 특히 생리 기간에는 침대에 누워 있을 수밖에 없어 밥도 못 해 먹을 지경이었습니다. 게다가 남편은 자주 술에 취해 늦게 귀가했습니다. 그때 저는 이런 삶이 정말 사람이 살 수 있는 게 아니라고 느꼈습니다.

한번은 막내가 태어나기 전, 남편이 또 술에 취해 집에 돌아왔을 때 제가 아이를 임신 중인데도 전혀 배려하지 않는다고 불평했습니다. 그때 저는 절망적인 마음에 차라리 아이들을 데리고 5층 아파트에서 뛰어내리자고 생각했습니다! 다행히 마침 같은 단지의 아주머니를 만나 위로를 받고 그 생각을 접었습니다. 저는 또 잠자다 그대로 가버리면 좋겠다고 자주 생각했지만, 아이들이 아직 어리다는 생각에 차마 그럴 수 없었습니다. 이렇게 제 삶은 마치 걸어 다니는 시체 같았습니다.

1. 법을 얻다

저는 1999년 8월, 제 나이 34살에 법을 얻었습니다. 법을 얻게 된 계기는 1998년 제가 살던 단지가 태풍으로 무너졌는데 당시 건설사가 소극적인 태도로 처리를 꺼린 사건 때문입니다. 그래서 주민들이 모여 사건 1주년이 됐을 때 관련 기관에 항의하러 갔습니다. 그때 단지에서 유일한 파룬궁수련생을 알게 됐습니다.

처음엔 파룬궁에 별로 관심이 없었습니다. 하지만 단지의 다른 아주머니들이 그 수련생이 수련한 후 젊고 예뻐졌다는 걸 보고 모두 9일 강의에 참가하고 싶어 했고 저도 따라서 신청했습니다. 처음엔 단순히 살을 빼려는 목적이었고 수련의 개념은 전혀 없었습니다. 9일 강의를 듣고 나서야 제게 천지개벽할 만한 변화가 일어났습니다.

그때 저는 매일 막내를 데리고 9일 강의에 갔습니다. 녹화 테이프를 볼 때는 계속 잠만 잤고 무엇을 하러 왔는지도 몰랐습니다! 나중에야 그때 사부님께서 제 머리를 조절해주고 계셨다는 걸 알게 됐습니다. 당시 제 사상 업력이 너무 무거워서 9일 강의에 가고 싶지 않게 만드는 힘이 내면에 항상 있었지만, 체면 때문에 안 갈 수도 없었습니다. 그때 저는 속으로 ‘아들이 평소에 말썽을 부리니 만약 얘가 말썽을 부리면 안 갈 거야’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막내가 놀랍게도 특별히 얌전해서 전혀 떼를 쓰지 않았습니다.

또 이 아주머니들 중 누군가 오지 않으면 저도 안 가도 되겠다고 생각했는데, 결과적으로 모든 사람이 9일 강의를 다 들었습니다. 하지만 그 사람들은 9일 강의를 마친 후 하나둘 수련하지 않게 됐습니다. 돌이켜 보면 사부님께서 제가 법을 얻을 수 있도록 정말 고심하셨다는 걸 알 수 있습니다!

9일 강의를 마친 후, 저는 어릴 때부터 받은 억울함과 원한, 평소 숨쉬기도 힘들게 했던 물질이 한순간에 제거됐습니다. 그 순간 저는 큰 소리로 울었습니다! 제 생명이 이제부터 달라질 거라는 걸 알았습니다! 예전의 저는 어머니가 어릴 때부터 동생들만 사랑하고 저를 사랑하지 않는 걸 신경 썼지만, 이제는 상관없어졌습니다! 예전의 저는 아버지가 동생들만 사랑하고 저를 사랑하지 않는다고 원망했지만, 이제는 원망하지 않게 됐습니다! 남편이 지금 어떤 모습이든 중요하지 않게 됐습니다. 제게 사부님이 계시니까요! 그 순간 저는 인생에서 한 번도 느껴보지 못한 기쁨과 행복을 느꼈습니다. 제가 법을 얻었기 때문입니다!

2. 시련이 오다

법을 얻은 후 집안일하고 아이들을 돌보는 일 외에 매일 많은 법을 읽었습니다. 《전법륜(轉法輪)》을 최소한 두 강의를 읽고 각 지역 설법도 최소 두 권 읽었습니다. 저는 매일 대법에 푹 빠져 있었고 비록 볼 수는 없었지만 제 몸 주변에 많은 파룬(法輪)이 제 신체를 조절하고 있음을 분명히 느낄 수 있었습니다.

약 두 달간 저는 매일 쓰고도 남는 에너지가 있다고 느꼈고, 가부좌할 때는 마치 로켓처럼 위로 치솟는 것 같았습니다. 그때 남편도 제 변화를 보고 기뻐하며 “파룬궁이 그렇게 좋다면 열심히 연마해”라고 말했습니다. 하지만 수련이 순탄하기만 한 것은 아니었고 점차 갈등이 나타나기 시작했습니다.

남편은 제가 대법을 너무 중요하게 여겨 자신을 신경 쓰지 않는다고 느끼기 시작했습니다. 심지어 술을 마시고 대법에 반대하기 시작했고 매번 대법 때문에 저와 싸웠습니다. 한번은 “계속 연마하면 당신을 죽일 거야!”라고 했습니다. 저는 “날 죽여도 난 두렵지 않아요. 난 계속 연마할 거예요”라고 말했습니다. 그는 또 “우리가 예전에 얼마나 좋았는지 봐. 지금은 대법 때문에 자주 싸우잖아”라고 했습니다. 저는 “난 예전이 그렇게 좋았다고 생각하지 않아요”라고 대답했습니다. 나중에 그는 더 이상 방법이 없어서 “연마하고 싶으면 해. 난 상관하지 않겠어”라고 했습니다. 저는 제가 한 고비를 넘었다고 느꼈습니다. 이 고비는 제가 수련을 굳건히 하는지 보는 것이었습니다. 그 후 남편은 정말로 더 이상 소란을 피우지 않았습니다.

3. 안으로 찾다

그 후의 날들 속에서도 사악한 요소들은 여전히 남편이 술에 취했을 때를 이용해 교란했습니다. 한번은 심지어 대법 서적을 모두 찢어버렸습니다. 저는 마음속으로 사부님께 정말 죄송하다고 느꼈고 제자인 제가 수련을 잘하지 못해 손실을 초래했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때 저는 남편에 대해 원망하는 마음이 생겼고 그가 저에게 가한 상처를 원망했습니다. 한동안 저는 매우 고통스러웠고 그의 몸에서 나는 불쾌한 냄새를 맡을 수 있었습니다(이전에는 없었던). 이런 사람과 평생을 살아야 한다니 저는 정말 상상할 수 없었습니다.

한번은 남편이 또 늦게 돌아왔는데 그가 문을 열자마자 화가 나 있다는 걸 느꼈습니다. 당시 저는 방에 있었고 거실에서 소리가 들려왔습니다. 비록 볼 수는 없었지만 검은 기운이 저를 향해 몰려오는 것을 분명히 느꼈습니다. 저는 정념으로 남편 뒤에 있는 사악한 요소들을 해체했고, 결과적으로 남편이 기세등등하게 방문을 열었다가 바람 빠진 풍선처럼 다시 문을 닫는 걸 보았습니다. 이 경험을 통해 저는 정념의 위력을 느낄 수 있었습니다.

보통 밤에는 아이들과 일찍 잠자리에 들었습니다. 술에 취한 남편을 마주하고 싶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한번은 갑자기 전화가 왔는데 경찰서에서 온 전화였습니다. 남편이 술을 마시고 사람을 치었고 자신도 다쳤다며 즉시 오라고 했습니다. 저는 어쩔 수 없이 세 아이를 두고 병원에 갔고, 남편이 얼굴에 피를 흘리며 아직 술이 깨지 않은 채 있는 걸 보았습니다. 그는 저를 보자마자 눈을 부릅뜨며 “왜 왔어! 난 아직 안 죽었어!”라고 말했습니다. 그는 병원에서 좋지 않은 말을 했고 저는 마음속으로 평온하게 그를 바라보며 전혀 화를 내지 않았습니다. 다행히 남편은 큰 문제가 없어서 그를 데리고 돌아왔습니다. 남편이 술이 깬 후, 그는 저에게 미안하다고 말했습니다! 저는 이 시련을 통과했다고 느꼈습니다.

법공부를 계속 깊이 하면서 법을 얻은 지 2년 정도 지났을 때, 저는 인터넷을 통해 진상을 알리기 시작했고 매일 많은 사람에게 탈당을 권유했습니다. 저는 자주 생각했습니다. 중생들에게 자비심을 낼 수 있는데 왜 남편에게는 그럴 수 없을까? 결국 그 이유를 찾았습니다. 그를 제 남편으로 여겼기 때문이었습니다. 나중에 저는 관념을 바꿔 그를 중생으로 여기기로 했습니다.

그 후 남편이 저에게 무엇을 하거나 말해도 저는 원망하는 마음이 없었습니다. 점차 그가 밖에서 술 마시는 횟수도 줄어들었습니다.

4. 아이의 병

큰아들이 초등학교 2학년 때, 갑자기 일주일 동안 고열이 나고 음식을 먹지 못하더니 행동도 이상해졌습니다. 이는 제 수련 중 매우 큰 난관이었습니다. 그때 제가 수련한 지 3년도 채 되지 않았을 때였고, 저는 학교 선생님들의 여러 가지 의혹을 견뎌야 했습니다. 문제가 생기면 진상을 알려야만 풀 수 있다는 걸 알았기에, 그때 저는 학교 교장과 주임에게 가서 진상을 알리고 제가 대법에서 얻은 이로움을 말했고, 교장과 주임의 동의를 얻었습니다.

게다가 수련생들도 저에 대해 의견이 있어서 제 수련에 문제가 생겨 가정 관계가 계속 안 좋아진다고 생각했습니다. 나중에 저는 큰아들을 데리고 중의와 양의 병원을 다 찾아갔지만 어떤 병인지 알 수 없었습니다. 마지막으로 큰 병원에 가서 검사했고 결국 아들은 초등학교 4학년 때 흑색종 뇌종양으로 확진받았습니다. 나중에 아들은 수술을 받았지만 제거할 수 있는 종양만 제거했고 뇌 중추신경에 있는 가장 큰 종양은 손댈 수 없었습니다. 남편은 아이의 병을 제가 대법을 수련한 탓으로 돌렸고 제가 아이를 제대로 돌보지 않아 이런 결과가 됐다고 생각했습니다.

학교 상담 선생님이 큰아들의 상태를 알아보려고 작은아들과 대화를 나눴는데, 작은아들에게 아스퍼거 증후군(자폐증의 한 종류)이 있다는 걸 발견했습니다. 당시 저는 학교, 수련생, 남편의 의혹에 직면해 제가 견딜 수 있는 한계에 거의 도달했다고 느꼈고, 조금만 더 있으면 견디지 못할 것 같았습니다. 큰아들의 병은 선천적인 것이었지만 모든 일을 저 혼자 감당해야 했으며, 수술할 때도 저 혼자뿐이었습니다. 대법을 수련하지 않았다면 저는 절대 견디지 못했을 겁니다.

큰아들은 수술 후 하루 종일 돌봐줘야 했고 간질 발작이 있었으며 동시에 걷기도 힘들어했습니다. 의사는 저에게 아이가 결국 마비될 거라고 말했습니다. 그때 저는 자주 아들을 업고 5층으로 올라가 엘리베이터가 없는 컴퓨터 교실에 가서 새로운 진상 알리기 방법을 배웠습니다. 제가 수련하고 진상을 알려 사람을 구할 수만 있다면 아무리 큰 고통도 개의치 않았습니다. 큰아들의 감정은 자주 불안정했고 때로는 제가 사준 샌드위치가 자신이 먹고 싶어 하는 것이 아니라는 이유로 샌드위치를 바닥에 던지고 저에게 “꺼져!”라고 소리치곤 했습니다. 이런 아이를 대할 때 제가 화를 낼 수 있었을까요? 안 됩니다! 왜냐하면 저는 수련하는 사람이니까요.

아들이 초등학교 5학년 때 이미 음식을 먹을 수 없었습니다. 병원에 데려간 그날, 아이는 평소와 달리 이것저것 먹고 싶다고 말했습니다. 그때 저는 매우 기뻤고 정말 그렇다면 아이를 집으로 데려갈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그날 밤중에 아이가 갑자기 쇼크 상태에 빠졌고 의사가 응급 처치로 삽관 시술을 했습니다. 목숨은 구했지만 아이는 여전히 혼수상태였습니다. 그때 시어머니도 병원에 와서 아이를 보셨고 우리는 병원에서 9자 진언 ‘파룬따파하오(法輪大法好-파룬따파는 좋습니다), 쩐싼런하오(真善忍好-진선인은 좋습니다)’를 외웠습니다. 그러자 아이의 눈이 점점 밝아졌습니다.

의사는 우리에게 아이가 아직 어리니 기관 절개술을 하자고 했지만 저는 하고 싶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관을 꽂고 있으면 정말 아이를 돌보기가 힘들었습니다. 그래서 저는 깊이 생각해 보았습니다. ‘왜 기관 절개술을 거부하는 걸까?’ 아이가 고통받는 걸 두려워했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사는 건 정말 고통스러운 일이고 동시에 저도 고통받는 걸 두려워했습니다. 결국 아이를 돌보는 무거운 짐은 제게 떨어질 테니까요. 집안 형편이 좋지 않아 아이를 시설에 보내도 비용이 들 텐데, 남편도 아이를 보내고 싶어 하지 않았습니다. 그가 가장 사랑하는 건 바로 이 아이니까요.

하지만 상황이 급박해 저와 남편은 결국 어쩔 수 없이 기관 절개술에 동의했습니다. 저는 병원에서 이런 환자를 어떻게 돌보는지 배웠습니다. 가래 제거, 등 두드리기, 음식 먹이기, 체위 변경, 인공호흡기 모니터링 등을 하며 거의 24시간 전문 간병인이 됐습니다. 나중에 아이의 상태가 마침내 안정됐습니다! 저는 계속 병원에 있을 순 없다고 생각했습니다. 집에 가서 진상을 알리고 사람들을 구해야 했기에 집에서 아이를 돌보기 시작했습니다. 제가 세심하게 돌봐서 아이에게 거의 문제가 생기지 않았습니다.

저는 매일 24시간 아이 곁에 있었고 전혀 외출할 수 없었으며 수련생들과도 접촉할 수 없었고, 수련생들도 우리집에 오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그때 저는 생각했습니다. ‘수련생이 없다고 해서 수련을 못 하나? 나에겐 사부님이 계시잖아!’ 그때부터 남편의 태도가 좋아졌습니다. 그는 제가 다른 사람들이 할 수 없는 일을 하고 혼자서 여러 사람 몫을 한다는 걸 보았기 때문입니다. 그는 “당신은 정말 신기해!”라고 말했습니다. 때로는 남편은 무심코 “당신을 믿어, 당신은 수련에 성공할 거야”라고 말하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업무량이 많아지고 수련 상태도 불안정해지자 제 집착심도 나왔습니다. 그때 TV 홈쇼핑을 보면서 외출해서 쇼핑할 수 없는 제 욕구를 충족시킬 수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보다 보니 사람의 마음이 커져서 TV에 무슨 좋은 물건이 있나 계속 보고 싶어졌습니다. 나중에는 제 수련 상태는 점점 나빠졌고 몸도 점점 더 힘들어졌습니다. 매우 괴롭고 피곤하다고 느꼈습니다. 저는 갑자기 깨달았고 이 고비를 반드시 넘어야겠다고 굳게 다짐했습니다. 그 후 제 수련 상태가 다시 좋아졌습니다.

아마도 제가 이전에 상태가 좋지 않아서 아이가 감기에 걸렸던 것 같습니다. 아이가 가래가 점점 많아지고 빼내기 어려워졌습니다. 나중에는 폐출혈로 응급 후송되어 병원에 도착하자마자 혼수상태에 빠졌습니다. 아이는 병원에서 몇 달을 보냈고 저는 남편에게 아이에게 《전법륜(轉法輪)》을 읽어주라고 격려했습니다. 우리는 매일 아이를 보러 갔고 남편은 최소한 50번은 《전법륜》을 읽었으며, 그 과정에서 그의 사상도 정화되었습니다.

처음에 남편은 수련이 너무 어렵다고 말했지만 사부님 말씀대로 좋은 사람이 되겠다고 했습니다. 비록 결국 아이는 떠났고 올해로 벌써 10년이 됐습니다. 아이가 떠날 때는 16살이었고 저는 총 9년 넘게 그를 돌봤습니다. 저는 아이가 다른 공간으로 갔고 그곳에서는 고통이 없을 거라고 생각합니다.

5. 돈에 대한 집착을 내려놓자 가정 환경이 바로잡히다

어릴 때부터 가정이 가난해서 저는 줄곧 돈을 매우 중시하는 집착이 있었습니다. 이 집착을 내려놓지 않을수록 갈등은 더 두드러졌습니다. 남편은 모든 일에서 저와 따졌고 가장 심할 때는 저에게 수도 요금, 전기 요금, 가스 요금, 인터넷 요금을 내라고 했으며, 심지어 그의 음식을 먹으려면 돈을 내야 한다고 했습니다. 때로는 마음속 고통이 얼마나 컸는지 모릅니다! 이는 제 관념을 깊이 뒤흔들었습니다. ‘도대체 나는 왜 결혼을 한 걸까!’

법공부를 하면서 여전히 안으로 찾아야 한다는 걸 알았습니다. 남편의 잘못이 아니라 그 집착심 때문이었죠. 그래서 천천히 스스로에게 말했습니다. ‘돈이 정말 그렇게 중요해?’ 남편은 무슨 일을 하든 저와 상의하지 않았습니다. 한번은 제가 퇴근해서 돌아오자 남편이 차를 한 대 샀다고 말하면서 대출자 이름에 제 이름을 썼으니 내일 은행 직원과 계약하러 가자고 했습니다. 처음에는 기분이 좋지 않아 받아들이고 싶지 않았습니다. 남편이 대출금을 갚지 못할까 봐, 제 이익이 손상될까 봐 걱정됐습니다. 나중에 이것이 수련이라고 생각했고 수련에는 우연한 일이 없다고 생각해서 다음 날 은행에 가서 계약을 체결했습니다.

작년 10월, 남편이 갑자기 몸이 불편하다고 느꼈고 온몸이 아프다고 했지만 무슨 이유인지 몰랐습니다. 나중에 점점 피부가 노랗게 변했습니다. 큰 병원에 가서 검사한 결과 담석이었고 치료 시기를 놓쳐 담낭을 제거해야 했습니다. 남편이 오랫동안 술을 마신 탓에 간 수치도 매우 높아 수술하면 생명의 위험이 있어서 의사는 가족들에게 마음의 준비를 하라고 했습니다. 며칠 후 병원에서 기다리다 간 수치가 내려가 수술할 수 있게 됐습니다. 수술 전 저는 남편에게 9자 진언을 외우라고 했고 남편은 현실에 몰려 어쩔 수 없이 동의했습니다. 나중에 수술은 매우 성공적이었습니다. 이 기간 저는 계속 병원에서 남편을 돌봤고 남편은 때때로 불평하며 아이들이 매일 와서 그를 보지 않는다고 했습니다. 저는 아이들에게도 그들의 일이 있다고 했고, 그는 제가 그를 위해 최선을 다하고 있다는 걸 느꼈습니다.

나중에 남편은 퇴원했지만 건강 상태가 계속 좋지 않았습니다. 무슨 이유인지 모르겠지만 남편은 먹지도 자지도 못하고 얼굴색이 점점 나빠졌습니다. 퇴원한 지 5일 만에 남편이 구급차를 불러달라고 하더니 화장실에서 의식을 잃었습니다. 나중에 구급차가 그를 병원으로 데려갔고 그제야 그가 5일간 소변을 보지 못했다는 걸 알았습니다. 의사는 긴급히 그를 중환자실로 보내고 위독 통지서를 작성했으며, 빨리 투석 일정을 잡았습니다.

병원에서 저는 그에게 사부님 설법을 들려주고 9자 진언을 외우게 했습니다. 남편은 며칠 동안 투석을 받아 독소를 제거했고 나중에 사부님의 보호 아래 상태가 마침내 안정됐습니다. 중환자실에 있는 동안 남편은 계속 이것저것 먹고 싶다고 졸랐고, 아이들은 모두 그가 귀찮다고 느껴 상대하지 않으려고 했지만 저는 최대한 그의 요구를 들어주려고 노력했습니다. 그가 무엇을 먹고 싶어 하면 제가 사다 주었고 간호사들도 웃으면서 남편에게 간식 코너가 생겼다고 말할 정도였습니다.

병원에 있는 동안 저는 계속 그와 대화했습니다. 그는 이전에 제가 시간을 들여 전화로 중국 중생들을 구하는 일의 중요성을 이해하지 못했고, 제가 가족에게 신경 쓰지 않는다고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이번 병으로 인해 그는 감동을 받았습니다. 제가 그를 정성껏 돌보는 것 외에도 금전적인 면에서도 그와 따지지 않았습니다. 병원비와 제 일 때문에 생긴 손실에 대해서도 저는 신경 쓰지 않았습니다. 생명이 가장 중요하고 돈은 모두 몸 밖의 물건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수련하는 사람은 돈을 더욱 담담히 봐야 합니다. 입원비도 제가 먼저 냈고 남편이 갚을지 걱정하지 않았습니다. 남편은 병원에서 저에게 자신이 얼마나 돈이 있는지 말하면서 그 돈으로 저와 함께 남은 인생을 보내고 싶다고 했습니다. 지금 남편은 술과 담배도 끊었고 저는 자신의 마음을 수련해야만 모든 것이 바로잡힐 수 있다는 걸 깨달았습니다.

6. 진상을 알리는 장이 남편의 몸을 조절해주다

6년 전부터 저는 RTC 플랫폼에서 진상을 알리기 시작했습니다. 직장 일 외에 다른 시간은 모두 전화로 사람들을 구하는 데 사용했습니다. 남편이 퇴원한 후 그의 몸은 보통 사람보다 약했습니다. 어느 날 그는 갑자기 매우 피곤하고 불편하다고 느껴서 샤워하고 일찍 자야겠다고 말했습니다. 그때가 저녁 7시 조금 넘어서 막 저녁을 먹고 얼마 안 됐을 때였습니다. 저는 원래 침대에 앉아 법공부를 하고 있었는데 그의 말을 듣자마자 바로 침대에서 내려와 전화를 걸기 시작했습니다. 컴퓨터가 방에 있어서 남편이 자면 전화를 걸 수 없기 때문이었습니다.

제가 이렇게 전화를 걸기 시작하자 연속으로 사람들의 탈당을 권유할 수 있었고, 이 기간 남편은 두세 번 방문을 열었습니다. 저에게 할 말이 있는 것 같았습니다. 전화 통화 중 잠깐 시간이 나서 문을 열고 그에게 물었습니다. “할 말 있어요? 계속 문을 여는 것 같던데.” 그가 말했습니다. “이상해! 아까는 정말 안 좋았는데 지금은 괜찮아졌어. 기운이 나는 것 같아. 내 얼굴색이 어때?” 저는 대답했습니다. “좋아 보여요! 내가 말해줄게요. 방금 제가 사람들을 구하고 있었어요. 우리가 사람을 구할 때는 장(場)이 있어서 당신이 혜택을 받은 거예요.” 그가 말했습니다. “하지만 문이 닫혀 있었잖아요” 저는 설명했습니다. “그 장은 문으로 막을 수 없어요. 이 공간의 제약을 받지 않아요.” 그의 얼굴에 기쁨의 미소가 번졌고 묵묵히 인정했습니다.

맺음말

제 딸은 어릴 때부터 저와 함께 대법을 접했습니다. 원래 수줍음이 많고 내성적이었는데 지금은 이해심 많고 남을 돕는 성격이 됐습니다. 그녀에겐 많은 친구가 있고 보통 사람들도 그녀와 어울리기를 좋아합니다. 작은아들의 상태에 대해서도 가끔 걱정됐습니다. 아이는 한때 아버지를 따라 담배를 피웠고 제가 계속 타일러도 소용없었습니다. 나중에 저는 생각했습니다. 이미 할 말은 다 했으니 이제 그 마음을 내려놓아야 한다고요. 제가 마음을 내려놓았을 때 작은아들이 스스로 담배를 끊었습니다. 지금 작은아들은 안정된 직장이 있고 사람들과 지내는 데도 큰 어려움이 없습니다.

대법을 수련하지 않았다면 우리 가정이 어떻게 변했을지 모르겠습니다. 남편의 행동이 작은아들에게 큰 영향을 미쳤고 어릴 때부터 그는 아버지를 원망했습니다. 저는 자주 그를 타일렀습니다. 아버지에게 문제가 있지만 그래도 네 아버지이고, 아버지도 힘들게 일해서 너를 키웠으니 아버지께 잘해야 한다고요.

작은아들이 최근 저에게 말했습니다. “아버지는 수련하는 사람은 아니지만 최선을 다해 좋은 사람이 되려고 노력하신대요.” 그는 또 이번에 아버지가 입원했을 때 제가 한 행동에 감동했다고 했습니다. 어릴 때부터 쭉 지켜봐 왔기에 남편이 저를 어떻게 대했는지 알고 있었거든요. 아들은 아버지 같은 사람은 아무도 상대해주지 않을 거라고 했습니다. 저도 대법을 수련하지 않았다면 벌써 이혼했을 겁니다. 이혼하지 않았더라도 이렇게 온 마음을 다해 그를 돌보지는 않았을 겁니다. 제가 이렇게 할 수 있는 건 제가 대법제자이기 때문입니다.

여기까지 쓰면서 사부님께서 하신 말씀 “수련을 처음과 같이 하면”(각지 설법 9-2009년 대뉴욕국제법회 설법)이 떠올랐습니다. 처음 몇 년간 저는 정말 정진하고 용맹했습니다. 후반기에는 많은 시간을 진상 알리기에 사용하고 직장 일도 해야 해서 법공부와 연공에 쏟는 시간이 예전보다 정말 많이 줄었습니다. 때로는 집착을 의식했지만 늘 질질 끌면서 내려놓지 않았습니다. 플랫폼에서 신수련생들이 용맹정진하는 모습을 보며 제가 정말 분발해야 한다는 걸 깨달았습니다!

마지막으로 사부님의 자비로운 제도에 감사드립니다. 사부님의 보호가 있었기에 제가 오늘까지 한 걸음 한 걸음 올 수 있었고, 수련한 지 23년째를 맞아 사부님께 성적표를 제출합니다.

이상은 개인적인 수련 경험과 깨달음이며 부족한 점이 있다면 수련생 여러분의 자비로운 지적을 바랍니다.

 

원문발표: 2024년 8월 24일
문장분류: 수련교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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