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병업에 관해 여러분과 교류하고자 합니다

글/ 해외 대법제자

[명혜망] 병업에 관해 여러분과 교류하고자 합니다. 제 생각으로는, 대법에 해로운 큰 잘못을 저지르지 않은 진정한 수련인이라면 넘어가지 못할 병업관도, 부정할 수 없는 구세력의 배치도 없습니다. 그런데 왜 어떤 이들은 이런 난관에 부딪히고 심지어 육신마저 잃어버리는 걸까요? 저는 세 가지 측면에서 견해를 나누고자 합니다.

첫째, 대법과 자신의 수련에 대한 인식 문제

우리가 수련하는 것이 우주대법이라는 걸 다들 알고 계십니다. 그런데 단순히 표면적으로만 아시는 걸까요, 아니면 진심으로 그렇게 여기시나요?

이런 예를 들어보겠습니다. 당신의 부모님은 천하를 다스리는 왕이시고 집안이 매우 부유해서 황금이 가득한데 어떤 이유로 기억을 잃고 가난한 시골 마을에 흘러들어와 빚더미에 앉게 되었다고 칩시다. 매우 가난하므로 작은 빚이라도 엄청나게 큰 것처럼 느껴질 겁니다. 하지만 진짜 당신 집을 알아보고 집으로 돌아가는 길을 찾았다면, 그 빚이 아직도 하늘처럼 크게 느껴질까요? 여전히 건너기 힘든 심연으로 여겨질까요? 여전히 이전처럼 자신감이 생기지 않을까요?

진정한 대법제자로서 우리 앞에 황금산이 있어도 보지 못하는 건, 근본적으로 우리가 마음속 깊이 법을 인식하지 못하고 대법제자의 책임과 사명을 깨닫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둘째, 사유방식과 관념을 면밀히 살펴봐야

어떤 이는 말합니다. “대법은 위대하지만 제 능력은 부족해요. 아직 그만큼 높이 수련되지 않아서 구세력의 배치를 깨기 어렵네요.”

이 문제에 대해 저는 이렇게 봅니다. 표면적으로는 당신이 대법을 수련하고 있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사실 사부님께서 당신을 선택하시고 성취할 기회를 주신 겁니다. 당신에겐 든든한 후원자가 계신 거죠. 당신의 존재는 단순히 개인적인 일이 아닙니다. 이런 관점에서 볼 때, 자신이 안 된다고 여기는 건 단순히 개인에 대한 인식일까요? 거기에는 구세력이 당신의 사유와 사유방식을 배치한 게 있는 겁니다.

당신이 스스로 안 된다고 여기면, 사유가 당신의 능력을 제한해 주변의 모든 호법신(護法神)과 정신(正神)들이 능력과 권한을 발휘하지 못하게 가로막아 그들도 당신을 도울 방법이 없어집니다. 그들이 당신을 도울 때도 법리에 부합해야만 도와줄 수 있기 때문입니다. 당신의 능력과 당신 몸에서 작용하는 바른 요소들도 당신 생각에 부합되어야 합니다. 스스로 할 수 없다고 여기면 정말로 안 됩니다. 당신이 어느 층의 법에 부합되면, 그 층의 법의 위력이 당신에게서 체현되어 나올 수 있습니다.

명혜망에 이런 글이 있던 게 기억납니다. 손오공이 흑백무상에 의해 저승으로 끌려갔을 때 수명이 다했다는 통보를 받았습니다. 사람의 이치로는 그건 죽은 거나 다름없었죠. 하지만 손오공은 그 말을 전혀 인정하지 않고 눈 하나 깜짝하지 않더니 이렇게 말했습니다. “나는 이미 삼계를 벗어나 오행 속에 있지 않은데 어찌 지옥의 관할을 받겠는가!” 자신에 대한 확고부동한 믿음이 있었기에 지옥도 그를 어쩔 수 없었던 겁니다.

또 하나, 우리가 정념을 내보낼 때, 특히 생사의 고비에서 발정념을 할 때 많은 사람이 수동적이고 소극적입니다. 이미 포기하고 자신도 안 된다고 여기면서 어쩔 수 없이 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런 상황에서는 발정념을 한다고 해서 결과가 쉽게 바뀌진 않습니다.

이 문제는 매우 심각합니다. 예를 들어 강한 군대와 약한 군대가 싸운다고 칩시다. 그런데 약한 군대 병사들이 모두 “최선을 다하겠지만 전력 차이가 너무 커서 결국 질 거야”라고 생각한다면 아무리 발버둥을 쳐도 결국 패하고 말 겁니다. 하지만 역사적으로는 약자가 강자를 이기고 소수가 다수를 이긴 사례가 많이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정말로 자신의 사유방식과 관념을 잘 살펴보고, 정법과 중생제도의 기점에 서서 그것이 법에 부합하는지, 구세력에 부합하는지 가려봐야 합니다. 특히 근본적인 문제나 생사의 기로에서 일념의 차이는 천지차이입니다.

셋째, 행위로써 부정해야

위의 두 가지 외에도 매우 중요한 요소가 있는데, 바로 행동으로 그것을 부정하는 것입니다.

인식, 사상, 관념 등이 모두 법의 기점에 부합된다면 행위 역시 대법의 요구에 맞아야 합니다. 관을 넘을 때, 특히 큰 관을 넘을 때 몸은 매우 고통스럽겠지만 저는 그런 고통을 인정하지 않고 제가 해야 할 일을 합니다. 한번 생각해 보세요. 몸이 너무 아파서 움직이기 싫을 때, 그건 구세력이 필사적으로 당신의 몸을 통제하며 해야 할 일을 못하게 방해하는 게 아닐까요? 그럼 당신이 애써 해야 할 일을 해내는 건 필사적으로 몸에 대한 통제권을 되찾는 것과 같습니다. 만약 그것에 순종한다면 잠시는 고통이 덜할지 모르지만 구세력이 배치한 길로 들어서게 됩니다. 당신의 몸은 더 단단히 통제당할 것이고 점점 더 고통스러워질 겁니다.

일본에 한 나이 지긋한 수련생이 계셨는데, 그분은 큰 관을 넘을 때 온몸의 뼈가 부서지는 것 같아 움직일 수 없이 누워만 있었다고 합니다. 다른 사람들이 병원에 모시려 해도 가지 않고 도움도 거절하셨죠. 화장실에 가려고 간신히 몸을 일으키다가 침대에서 떨어졌는데, 다시 조금씩 움직여 가까이 있는 화장실까지 가는 데 무려 두 시간이나 걸렸답니다.

이분은 연공을 할 수 없으면 그냥 누워서라도 연마하고, 법공부를 할 수 없으면 법을 암기하며, 어떻게든 스스로 정상으로 돌아가려고 했습니다. 지금은 건강하게 걷는데 젊은이들보다 더 활력이 넘칩니다. 사부님과 대법에 대한 신념으로 행동으로써 구세력의 배치를 부정했기에 큰 난관을 헤쳐나온 겁니다.

진심으로 구세력을 부정한다면 당신 몸속의 바른 요소들도 구세력의 통제에서 벗어나려 애쓰고, 호법신과 주변의 정신들도 모두 당신을 도우며, 사부님과 대법도 당신을 가지(加持)하는데 그래도 넘지 못할 관이 있을까요?

도리는 다 알고 있지만 정작 문제에 부딪히면 여전히 의혹투성이가 됩니다. 무엇보다 법공부와 연공은 매일 반드시 해내야 하고, 법공부할 때는 마음을 조용히 해야 합니다. 이것이 구세력의 배치를 깨부수는 기초입니다.

또한 제 체득이 여러분에게 참고가 되길 바랍니다. 제 방법은 아주 간단한데 바로 고요해지는 겁니다. 표면적으로 아무리 고통스럽고 괴롭고 넘기 어려워도 최대한 마음을 평온히 가라앉히고 내심을, 아니 내면 깊숙한 공간의 자신을 고요히 들여다보세요. 그곳이 평온하고 고통이 없으며 조화로운 곳임을 발견하게 될 겁니다. 그 고통과 번뇌는 표면에 떠 있는 것일 뿐입니다.

그때 당신은 진정으로 고통과 번뇌가 당신이 아니라 표면에 달라붙은 한 층의 물질임을 체득하게 됩니다. 그것과 자신을 쉽게 분리해낼 수 있을 겁니다. 어쩌면 그것이 당신의 표면 신체를 일시적으로 통제할 순 있겠지만 당신의 마음까지 통제할 순 없습니다.

여러분도 아시다시피 밀레르빠 부처님은 당시 병업이 나타났을 때 마음에 고통이 없었습니다. 이것이 바로 우리 수련인으로서 도달해야 하는 가장 기본적인 상태입니다. 우리는 정법시기 대법제자이기에 이런 고통이라도 마땅히 감당하지 말아야 할 것은 감당하지 말아야 합니다. 선해(善解)하든 전화(轉化)하든, 우리에겐 대법을 실증하고 중생을 구해야 하는 중책이 있기에 이런 교란을 받아들일 수 없습니다. 대법에는 지혜가 무궁무진하니까요.

그렇다면 어떻게 고요함에 도달할 수 있을까요? 이런 체득이 없는 수련생이라면 잘 모를 수도 있겠습니다. 현실적으로 우리 마음에 영향을 주는 것이 너무 많은데, 예를 들면 동영상입니다. 저는 꼭 필요한 경우 외에는 최대한 동영상을 보지 않는 게 좋다고 생각합니다. 특히 속인의 것들은 당신의 머릿속과 몸속에 온갖 잡다한 것들을 많이 쑤셔 넣습니다. 원래도 조용해지기 힘든데 심각한 교란까지 일으킵니다. 연공할 때 졸리고 기운 없고 집중이 안 되는 건 물론, 사람 이쪽 면의 교란도 그것과 관계가 있습니다.

다음으로 중요한 건 장시간 발정념입니다. 이는 우리 자신의 공간에 있는 좋지 않은 요소들과 구세력의 교란을 제거하는 것입니다. 장시간 정념을 내보내면 사람의 변화가 매우 큽니다. 사유가 명석해지고, 일에 집중하며, 번거로움과 교란이 적어집니다. 견지만 하면 이런 것들을 모두 체득할 수 있을 겁니다. 게다가 많은 큰 관도 어느새 해결될 수 있습니다.

동영상을 최대한 보지 않고 장시간 발정념을 하기만 한다면, 당신의 마음이 점점 고요해짐을 느낄 수 있을 겁니다. 물론 마음이 고요해진다는 걸 오해하는 사람도 있을 수 있는데, 꼭 앉아서 교란이 없어야만 조용해질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제가 보기엔 처음에는 그럴 수도 있지만 마음이 점점 고요해지면 무슨 일을 하든 조용해질 수 있습니다. 예를 들어 공부를 해도 매우 집중할 수 있어 빨리 배울 수 있고, 일을 할 때도 마찬가지입니다.

점차 마음을 고요히 할 수 있게 되면, 자주 자신의 내면을 들여다보세요. 처음엔 익숙하지 않아서 비교적 표면적인 부분만 느낄 수도 있겠지만, 천천히 더 깊은 내면의 상태를 느낄 수 있게 될 겁니다. 서서히 체득이 점점 깊어지고 미시적으로 변하다가, 일정 정도에 이르면 바깥세상이 아무리 시끄러워도 당신의 미시적인 자신은 고요하고 평온하다는 것을 발견하게 될 겁니다. 그 깊은 자신을 지킬 수만 있다면, 표면의 그 어떤 느낌도 당신의 마음을 흔들 수 없고 근본적으로 당신을 움직일 수 없습니다. 속인들 말로 ‘태산이 무너져도 눈 하나 깜짝하지 않는다’는 경지인 것이죠. 사부님께서 예를 들어 말씀하신 적이 있습니다. “어떤 속인의 마음이든지 다 버려야 한다! 어떤 제자는 말하기를 “두려울 것이 무엇인가, 머리가 떨어져도 몸은 여전히 가부좌를 하고 있을 것이다.”라고 했다. 비교해 보면 수련함이 어떠한가가 일목요연(一目了然)하다.”(정진요지-대폭로) 이 말씀이 바로 그런 경지라고 이해합니다.

사실 우리가 이런 경지에 도달하면 표면의 병업쯤은 아무것도 아닙니다. 밀레르빠 부처님처럼 감당해야 한다면 감당하면 그만입니다. 병업이 이미 당신에게 실질적인 해를 끼치지 못하게 되는데 당신 마음에 미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그럼 해결될 것은 자연히 해결됩니다. 그때 당신이 움직이는 염(念)은 모두 미시적인 데서 나오고 지혜로운 것이며, 당신이 발휘하는 능력 역시 미시적인 데서 비롯됩니다. 당신 스스로 많은 일을 해결할 수 있게 됩니다. 그때는 병업에 대한 생각이나 관념 같은 것도 없어집니다. 사부님께서 ‘홍음6-남을 제도하고 자신을 제도함은 어렵다네’에서 말씀하신 것처럼 “상사(上士)는 난(難)을 만나면 웃음으로 풀어내고”의 경지에 이르게 되는데 넘기 어려운 관이 어디 있겠습니까.

이상은 그저 제 개인적인 인식일 뿐이니 여러분은 법을 스승으로 삼으시길 바랍니다. 어쨌든 수련생들이 교란을 좀 더 적게 받고 우리의 사명을 더 잘 완수해 진정으로 사부님의 정법을 도우며 중생을 구해내기를 희망합니다.

 

원문발표: 2024년 7월 14일
문장분류: 수련교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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