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중국 대법제자 염자(念慈)
[명혜망] 저는 1995년에 법을 얻었습니다. 23살 아가씨에서 이제는 50대 중년이 되었습니다. 이번 생에 운 좋게 자비롭고 위대하신 사부님과 이렇게 위대한 법을 만나 제 생명이 영원히 구원됐습니다. 오늘 사부님께 제 수련의 일부 체험을 보고드리고 수련생 여러분과 교류하려 합니다. 적절하지 않은 점은 수련생 여러분께서 자비롭게 바로잡아주길 바랍니다.
연공 음악을 듣고 수련에 들어서다
1995년 여름, 타지에서 장사하던 저는 집에 계신 몸이 편치 않은 어머니가 걱정되어 어머니를 보러 집에 갔습니다. 마당에 들어가자마자 몸이 불편했던 어머니가 마당을 쓸고 계셨습니다. 제가 돌아온 것을 보고 기뻐하며 손에서 빗자루를 내려놓고 제 여행 가방을 받으면서 저에게 아버지와 함께 파룬따파(法輪大法, 파룬궁)를 수련한다고 신이 나서 말씀하셨습니다. 마을에 많은 사람이 파룬궁을 수련하고 있고 진(鎭)에서 수백 명이 함께 수련한다면서 파룬따파는 가장 높은 불가 대법이며 이제 건강해서 더는 약을 복용할 필요가 없다고 하셨습니다. 제가 어머니께 “정말로 병이 나았어요? 완전히 치유됐나요? 더는 약을 드시지 않아도 되나요?”라고 물었더니 어머니는 약을 끊은 지 4개월이 넘었다고 말씀하셨습니다. 파룬따파를 수련한 이후로 몸이 더는 불편하지 않고 일해도 힘들지 않으며 집 마당과 실내도 말끔히 치우고 있다고 하셨습니다.
심신이 건강하고 즐거워하는 어머니를 보면서 반년 전에 어머니를 만났을 때 장면이 떠올랐습니다. 그날도 오전이었습니다. 침실 문에 들어서자마자 반쯤 침대에 누워 저에게 힘없이 인사하는 어머니가 보였습니다. 어머니는 예전에 건강이 좋지 않았으나 침대에 누워 계시지는 않았습니다. 베개 옆에는 여러 종류의 수입 약과 위장약이 잔뜩 놓여 있었습니다. 저는 어머니를 위로하면서 어찌 된 일인지를 물었습니다. 어머니는 며칠 전에 이모 댁에 갔다가 피곤해서 경추증이 다시 도졌다면서 식욕도 없고 팔다리도 마비됐다며 며칠 괴로웠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아버지도 무기력한 표정으로 말씀하셨습니다. “며칠 전 네 엄마를 데리고 큰 병원에 갔더니 전문의는 이런 경추증에는 마땅한 치료법이 없다면서 증식된 뼈가 뇌로 이어지는 혈관과 너무 가깝기에 수술하지 못하고 보존적으로 치료할 수밖에 없다고 하더라. 수술이 실패하면 혈관이 손상돼 경추 이하 사지는 마비될 것이니 항상 약을 먹어야 한다고 하더라.” 아버지가 당시 의사에게 이 질병으로 인해 발생할 수 있는 최악의 결과가 무엇인지 묻자 의사는 이 뼈가 계속 증식하면 뇌로 이어지는 혈관을 압박해 뇌에 산소 부족, 혈액 부족, 괴사 등을 일으킨다고 했습니다.
이제는 건강하고 온몸이 가볍고 미간에 웃음꽃이 활짝 핀 어머니를 바라보며 온 가족은 마음속으로 파룬따파에 감사하고 있었습니다. 저는 얼른 어머니에게 앞으로 열심히 수련하고 사부님 말씀을 잘 들으라고 말했습니다.
다음 날 아침, 저는 잠결에 어렴풋이 음악 소리를 들었는데 꿈인 줄 알았습니다. 집에 갈 때마다 10시간 넘는 장거리 버스를 타야 하기에, 부모님은 피곤해하는 저를 아침에 몇 시까지 자든 깨우지 않았습니다. 사람들이 연달아 아버지께 인사하는 소리에 저는 잠에서 깨어났습니다. 아버지가 사람들을 모두 배웅한 후 저는 왜 이렇게 많은 사람과 인사하냐고 물었습니다. 아버지는 “우리집이 넓어서 모두가 함께 법공부하고 연공하는 연공장이 되었단다. 매일 아침 5시, 저녁 7시에 수련생들이 우리 집에 와서 법을 공부하고 연공한단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저는 아버지에게 물어봤습니다. “방금 음악은 아버지가 틀어주신 건가요? 어쩜 이렇게 듣기 좋아요? 지금까지 이렇게 좋은 음악을 들어본 적이 없어요. 정말 너무 좋아요.” 아버지는 이 말을 듣고 웃으며 말씀하셨습니다. “아빠가 이미 대법 책 한 세트를 너를 위해 구해놓았단다.” 그리고 “내 딸이 대법과 인연이 있어 정말 기쁘구나. 넌 인연 있는 사람이야”라고 하셨습니다. 저는 아버지께 즉시 음악 테이프를 다시 틀어달라고 했고 아버지는 저에게 연공 동작을 가르쳐 주셨습니다. 이렇게 해서 저는 부모님의 안내로 운 좋게 대법 수련을 시작하게 되었습니다.
고난을 겪으면서 법에서 바로잡다
법을 얻은 초기 몇 년 동안은 젊어서 노는 데 열중해 법공부를 별로 하지 않았고, 수련생들과도 접촉하지 않았으며, 부모님과 멀리 떨어져 있어서 자신을 잘 단속하지 못했습니다. 가게를 차리고 장사하며 종일 바빴던 저는 때때로 인연 있는 사람을 만나면 대법이 얼마나 좋은지, 질병을 치료하고 건강을 유지하는 데 얼마나 기적적인 효과가 있는지에 대해 이야기했지만 법공부는 별로 하지 않았습니다. 1998년 초가 되어서야 법공부는 대법제자가 반드시 해야 할 일임을 깨닫고 진정으로 대법을 배우기 시작했습니다.
부모님 집에 돌아갈 때마다 연수반에 간 것처럼 수련생들이 수련의 길에서 서로 바싹 따라가는 모습을 보며 시간이 얼마나 긴박하고 대법이 얼마나 소중한지 알았지만 저의 거처로 돌아오면 한동안 견지하다가 나중에는 다시 느슨해지곤 했습니다.
이렇게 1999년 ‘7.20’ 박해가 시작될 때까지 줄곧 느슨했습니다. 천지를 뒤덮을 듯한 박해에 모든 대법제자들은 하늘이 무너지는 듯한 느낌을 받았을 겁니다. 그제야 편안한 수련 환경이 수련자에게 얼마나 소중한지를 깨달았습니다. 그러나 그 뒤를 이어 사악한 중공 악당과 구세력의 미시적, 표면적 박해가 전면적이고 광범위하게 시작됐습니다.
아버지는 보도원이었고 부모님과 가족 모두가 대법이 정말 좋고 사부님이 세인을 구하러 오신 진짜 신(神)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기에 온 가족은 ‘전향(수련 포기)’을 거절했습니다. 처음에는 부모님을 번갈아 가며 세뇌반, 파출소 공안국, 구치소에 납치했고 벌금과 불법 감금, 한밤중에 문을 두드리는 일은 흔한 일이었습니다.
남동생은 막 일을 시작했을 때 납치돼 공안국에 끌려갔습니다. 남동생은 인품도 좋고 공부도 잘했기에 대학 시절 학과 반장이었고 학생회 간부를 맡았는데, 속아서 중공 악당 조직의 당원이 되었습니다. (이미 악당을 탈퇴함) 이제 막 졸업한 아주 뛰어난 대학생이고 앞날이 창창한 좋은 청년이더라도 “파룬따파는 정말 좋습니다”라는 진실을 말하고 진상 자료를 만들었다는 이유로 업무용 컴퓨터와 프린터를 압수당했고 불법적으로 납치됐습니다.
저는 당시 결혼했고 임신 중이었으며 부모님 집에 살고 있었는데, 앞으로 무슨 일이 일어날지 몰라 매일 불안하고 힘든 시간을 보냈습니다. 고난을 겪으면서 임신 9개월 만에 아기를 낳았는데 며칠 만에 아기가 죽었습니다. 당시 정치법률위원회 간부들은 부모님께 하루에 두 번씩 경찰서에 가서 보고하도록 강요하고 벌금을 부과했습니다. 대법 수련생들이 베이징으로 청원하러 갈까 봐 두려웠기 때문입니다.
그 후 사부님의 정법이 진행됨에 따라 사부님의 새로운 경문을 잇따라 받았습니다. 남동생의 직장 상사가 나서서 동생을 ‘처분보류’시켰고, 저도 아이의 죽음이란 고통에서 이겨 나왔습니다. 그 당시 저는 법공부가 부족하고 정념이 부족해 모든 면에서 많은 압박을 받았고, 몸에 심각한 치질 병업이 나타났습니다. 화장실에 갈 때마다 15시간 이상 통증을 느꼈고, 늦은 밤이면 통증이 심해지는 경우도 있었습니다. 매일 화장실 가기 전에 너무 긴장됐으나 먹으면 배출해야 했기에 어쩔 수 없었습니다. 그렇다고 밥을 먹지 않을 수는 없었습니다. 한 달도 안 돼서 저는 거의 10kg이나 줄어들었습니다. 저는 부모님께 “열심히 수련하세요. 사부님께서 두 분을 보호하실 겁니다. 저는 아마 업이 큰 것 같으니 더는 연공하고 싶지 않아요”라고 말했습니다. 부모님은 “너는 연공하지 않고 이렇게 심하게 아픈 데다 약을 먹어도 낫지 않으니 병원에 가는 수밖에 없겠구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아버지는 제가 늘 눈물을 흘리는 것을 보고 말씀하셨습니다. “딸아, 나와 네 엄마는 네가 심신에 이렇게 큰 상처를 입은 것을 보고 너에게 고통을 더 줄까 봐 두렵구나. 너도 서른 살이 다 돼서 아이를 가졌는데 아이를 잃었으니 네게 너무 많은 말을 하고 싶지 않다. 우리 집안은 모두 수련하는 사람이니 대법으로 잘 대조하고 잘 생각해 봐. 사부님께서는 “기왕 수련인 이상 우리의 수련 이 길에는 우연한 일이 없다”(뉴질랜드법회 설법)라고 말씀하셨다. 네가 종일 괴로움을 겪고 있는데 이것은 정(情)으로 자신을 못살게 구는 것이 아니냐? 수련자는 마땅히 명예, 이익, 정을 담담히 내려놓아야 한다. 우리 가족이 전생에 이 아이에게 빚진 게 있지 않을까?
아이는 우리 집에서 태어났어. 아이를 잃은 후 우리 가족은 모두 슬프고 따라서 괴로워했지. 물론 네가 가장 괴롭겠지. ‘전법륜(轉法輪)’에서 사부님께서 말씀하신 것과 같아. “사람의 元神(왠선)은 불멸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당신이 전생의 사회활동 중에서 누구에게 빚을 졌을 수 있고, 누구를 괴롭혔을 수 있으며, 또는 무슨 좋지 못한 일을 했을 수 있는데, 그 채권자는 당신을 찾으려 할 것이다.”(전법륜) 그 아이는 이번 생에 우리에게 빚 받으러 온 거야.
억만 명의 대법제자가 수련의 길을 걷고 있는데 그들 중 예전에 불치병에 걸렸던 많은 사람이 착실하게 수련하고 대법을 진정으로 수련해서 사부님의 보호로 모두 병업(病業)에서 벗어났지. 그리고 엄마를 봐라. 대법을 수련하기 시작한 이래 이전의 모든 질병이 사라졌다. 다시 너 자신을 봐. 너는 한 달 넘게 침대에 누워 있었는데 매일 점점 괴로워하고 너무 여위어 가고 있어. 약도 적지 않게 복용했지만 낫지 않았잖니. 게다가 병원에 수술받으러 가더라도 그 고통은 말할 것 없고 수술해도 낫지 않으면 어떻게 할 거니? 딸아, 돌아와서 열심히 수련해봐. 고해는 끝이 없어도 뉘우치면 구원을 받아. 이 단계를 통과하면 괜찮을 거야.”
이 말을 듣고 저는 한참 침묵했습니다. 아버지의 말씀이 일리가 있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어머니와 주위 수많은 수련생도 수련을 통해 모든 질병이 사라졌는데 나의 요만한 일이 무슨 큰 문제인가? 아이를 잃고 극도로 고통스럽고 견딜 수 없는 육체적 고통을 겪은 것은 아마도 정말 빚 때문일 수 있어. 수련을 잘하고 마음을 내려놓자. 더는 아이를 잃은 생각을 해선 안 돼. 고통 이외에는 아무 의미도 없어. 몸이 아프든 안 아프든 상관하지 말고 사부님과 법을 믿고 모든 것을 사부님께 맡기자.’
아버지는 저에게 대법 책을 가져다줄 테니 지금 읽으라고 하셨습니다. 저는 그러겠다고 말씀드렸습니다. 아버지는 “병 치료를 추구하는 마음이 없어야 해”라고 하셨습니다. 저는 “걱정 마세요. 아빠, 저도 법리를 알아요. 추구하지 않을 거예요. 끝까지 내려놓을 거예요. 저는 생사를 사부님께 맡길 거예요”라고 대답했습니다.
한 시간 남짓 지나서 화장실에 가야 했는데 약간 긴장되었습니다. 부모님은 웃으며 “가봐, 긴장하지 말고”라고 하셨습니다. 다음 순간, 기적이 일어났습니다. 한 달 넘게 밤낮 저를 괴롭혔던 치질과 혈변의 참을 수 없는 고통이 그쳤습니다.
그 후 수련에서 우리 가족은 이 사건을 이야기할 때마다 정진하지 못한 저를 포기하지 않고 수련을 게을리한 저를 버리지 않으신 사부님이 너무 자비롭다는 것을 느꼈습니다. 저는 마음속으로 반드시 사부님의 말씀을 잘 듣고 열심히 수련해야겠다고 다짐했습니다. 이런 식으로 저를 깨우쳐주신 사부님께 감사드립니다. 저에게는 아직 조사정법(助師正法), 중생을 구하고 자신을 잘 수련해 천국으로 돌아가야 할 큰 서약이 있습니다.
당시 고난을 통해 저는 오성이 향상됐을 뿐만 아니라 수련에 대한 자신감도 확고해졌습니다. 또한, 사부님께서는 저를 도와 그렇게 큰 업과 생명을 빚진 큰 업을 없애주셨습니다. 자비롭고 위대하신 사부님께 감사드립니다.
심성 제고
어머니가 처음으로 여자 감옥에 감금된 해, 남동생네는 남자아이가 태어났습니다. 어머니가 집에 계시지 않고 제 아이가 큰 데다 학교가 마침 방학이어서 저는 남동생 집에 올케의 산후 도우미로 갔습니다. 집에 돌아온 지 며칠 후, 동창(동창과 그녀의 어머니도 수련생)이 그녀의 아버지(파룬궁을 수련하지 않음)가 폐암 중기 진단을 받았다고 했습니다. 동창은 대법을 통해 그녀 아버지의 생명을 구하려고 저에게 어느 날 시간을 내서 그녀 집을 방문해 아버지를 설득해 대법을 배우도록 도와달라고 했습니다. 저도 대법만이 그를 구할 수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습니다. 그녀의 아버지가 진심으로 대법의 이치를 이해하는 것도 매우 행운이고 좋은 일이기에 저는 남동생이 쉬는 토요일, 일요일에 그녀 집에 가기로 약속했습니다.
그녀 집에 갈 때마다 속으로 사부님께 정념을 강화하고 교란을 제거해주십사 간청했습니다. 동창과 그녀의 어머니도 발정념을 했습니다. 저는 그녀의 아버지와 두 번 이야기를 나눴습니다. 처음 얘기 나눈 후 동창의 아버지는 일리가 있다고 느꼈고 대법을 인정했습니다. 저는 그에게 사부님의 설법 영상 CD를 드리고 그에게 매일 한 강을 보되 아무것도 추구하지 말고 대법 표준에 따라 자신을 요구하고 법리에 따라 잘하기만 하면 된다고 당부했습니다.
한 달 넘은 후 동창이 전화했습니다. 아버지가 훨씬 좋아졌고 식사 양도 늘어났으며 다른 암 환자와는 달리 항암치료를 받은 후에도 여전히 머리숱이 많고 전혀 빠지지 않아 의사들도 드문 일이라고 했다고 말했습니다. 우리 몇 사람만 자비로운 사부님께서 그를 보호하고 그의 죄업을 없애주신 것을 알고 있습니다.
그런데 며칠 후 동창에게서 전화가 왔습니다. 그녀의 아버지가 요 며칠 법공부를 하지 않고 있다는 것이었습니다. 고모가 사이비를 믿고 있어서 그녀의 아버지를 찾아와 반나절 동안 이야기를 나누면서, 무릎을 꿇고 병을 없애달라고 빌도록 했다고 합니다. 그녀의 아버지도 그 말을 믿게 되어, 그녀와 어머니가 아무리 말해도 법공부를 하지 않는다고 했습니다. 저는 마음이 좋지 않아 주말에 다시 한번 그녀 집에 가기로 했습니다. 마침 어머니도 형기를 마치고 집에 돌아오셔서 주말에 저와 함께 그녀 집에 가겠다고 하셨습니다.
동창에게 전화를 받은 그다음 날 아침, 발정념을 하려고 앉자마자 가슴이 답답하고 숨이 막힐 정도로 불편했습니다. 저는 남동생 집에 자주 가지 않아서, 어머니의 작은 침실에 임시로 작은 스프링 침대를 놓고 어머니와 마주 보고 잤습니다. 어머니의 발정념에 방해가 될까 봐 가슴이 답답하고 불편해도 말하지 않고 화장실에 가서 소변을 보면 좀 나아질 거로 생각했습니다. 변기에 앉아 처음 든 생각은 ‘나는 아버지의 체질을 이어받아 심장이 좋지 않구나’, 그러다 다시 생각해 보니 ‘이게 말이 되나? 이미 수련하고 있는데 아버지는 아버지고 나는 나인데.’ 두 번째로 든 생각은 ‘내가 뚱뚱해져서 가슴이 답답하구나. 요즘 식욕을 억제하지 못해 살이 찐 것 같으니 살을 빼야겠어’라는 등 머릿속이 온통 혼란스러웠습니다.
그때 문득 동창이 건 전화가 떠올랐습니다. 그녀 아버지가 대법을 믿지 않는다고 했는데 왜 그러실까 하고 생각해 봤습니다. ‘그분이 믿지 않는 것은 곧 내가 믿지 않는 것과 같고, 내가 그걸 보게 된 것도 우연이 아닐 거야. 잠깐, 내가 왜 믿지 않는 거지? 나는 사부님과 대법을 믿고 산후조리를 하러 돌아왔고, 시간을 내어 현지 수련생들의 자료점 설립을 도왔으며, 수련생들이 자료 제작을 배우도록 도와주고 프린터와 기타 소모품 구입도 지원했어. 게다가 매일 법공부와 연공도 했는데 왜 내가 사부님과 대법을 믿지 않는 걸까?’ 우연한 일은 없습니다.
제가 어느 부분에서 사부님과 대법을 믿지 않았는지 계속 찾아보던 중, 문득 전날 밤 잠들기 전의 한 장면이 떠올랐습니다. 당시 저는 남동생의 아기를 안고 맞은편에 앉아 계신 어머니와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는데, 몸이 뜨거운 게 느껴져 보니 아이가 오줌을 싸고 있었고 제 옷도 흠뻑 젖어 있어서 저도 모르게 욕이 튀어나왔습니다. 그런데 고개를 들어보니 마침 올케가 웃으면서 저를 보고 있었습니다. 올케는 아무 말 없이 저에게서 아이를 받아 안고 방으로 돌아갔습니다. 올케는 수련은 하지 않지만 아주 마음씨가 좋은 사람입니다.
갑자기 너무 부끄러워졌습니다. 이렇게 오랫동안 수련을 해왔는데 어떻게 아직도 욕을 할 수 있을까요? 잠들 때까지 너무 당황스럽고 마음이 무거웠으며 얼굴을 들 수 없었습니다. 그런데 막상 침대에 누우려고 하니 침대에서 삐걱거리는 소리가 났습니다. 침대도 좁고, 이불 속감의 울퉁불퉁한 질감도 불편하게 느껴졌습니다. 게다가 매일 온 가족의 일상을 챙기고 기저귀도 매일 빨아야 해서 몸은 피곤하고 마음은 조급해졌습니다. 그래서 어머니께 불평을 토로했습니다. “어머니, 제가 덮고 있는 이 낡은 이불 좀 보세요. 안감에 울퉁불퉁한 것들이 잔뜩 있고, 작은 침대는 너무 좁아서 몹시 불편해요. 저희 집에서 제가 쓰는 침대는 가로세로 2미터에 2미터 40센티나 되고, 침구도 순면으로 돼서 푹신푹신하고 편안한데, 여기서 제게 준 이건 뭐예요? 주말에 친정에 가서 푹 쉬어야겠어요.” 그러자 어머니께서는 재빨리 위로해주시며 말씀하셨습니다. “알았다. 여기서 오래 있는 것도 아니니 좀 참고 견뎌 보렴.” 저는 투덜거리며 잠이 들었습니다.
바로 그 순간, 저는 제가 왜 사부님과 대법을 믿지 않게 됐는지 깨달았습니다. 제가 마주한 모든 일과 이 세상에서 걸어온 모든 길은 제가 수련을 하기에 사부님께서 다 배치해주신 것이었습니다. 제가 산후조리를 도와주는 것도 모두 배치된 일이며, 그에 수반되는 이 모든 자잘한 일들 역시 제가 마땅히 제고해야 할 바이고 걸어가야 할 수련의 길인데도, 저는 법리로써 자신을 대하지 못하고 눈앞의 상황들을 불평으로 대했던 것입니다.
수련의 길에 작은 일은 없습니다. ‘사부님, 제가 잘못했습니다. 다시는 원망하지 않겠습니다. 이 모든 것은 저를 제고시켜 주시려는 것임을 알겠습니다.’ 바로 그 찰나 기적이 일어났습니다. 순식간에 ‘휙’ 하는 느낌과 함께 가슴에서 무언가가 빠져나가는 것 같았고, 마치 제 심장을 누르고 있던 거대한 바위가 걷어내진 듯 온몸에 홀가분함이 느껴졌습니다. 그 모든 과정은 불과 1초도 채 안 되는 시간에 일어난 일이었습니다. 저는 즉시 사부님의 자비와 대법의 자비를 온몸으로 느낄 수 있었습니다.
방으로 돌아와 어머니께 그 과정을 말씀드리자 어머니도 무척 기뻐하셨습니다. 우리는 함께 사부님의 자비로운 깨우침에 감사드렸습니다. 수련의 길에는 정말로 작은 일이란 없습니다. 저는 이 수련의 길에서 수많은 신기한 일들을 겪었지만 지면 관계상 여기서 일일이 나열하지는 않겠습니다.
온 가족이 수련의 길을 굳건히 걷다
지난 몇 년 우리 가족은 수련의 길에서 순탄하지 않은 많은 고난을 겪으면서도 사부님의 보호 아래 여전히 사부님을 믿고 법을 믿는 확고한 수련의 큰길을 걷고 있습니다.
확고하게 수련한 이유로 1999년 이후 부모님은 번갈아 납치돼 구치소, 유치장, 세뇌반에 보내지셨습니다. 수련으로 건강해진 아버지는 2005년 여름, 중공 악당의 심한 박해를 받고 고통 속에서 64세 나이로 세상을 떠나셨습니다. 아버지는 반평생을 의술에 종사하며 선행을 쌓고 존경을 받으셨습니다. 가정의 행복을 누리며 자손들이 곁에서 모시고 있어야 할 나이에 중공 악당의 잔혹한 박해로 세상을 떠나셨습니다.
이제 어머니에 대해 말하겠습니다. 어머니는 2006년에 외지에서 진상을 알린 이유로 박해받아 내몽고에서 불법 강제노동 2년을 선고받았고, 2010년과 2017년에는 불법으로 각각 1년씩 징역을 선고받았으며 2021년에도 진상을 알린 이유로 다시 추적을 받아 떠돌이 생활을 하다 6개월 만에 납치돼 1년 이상의 불법 판결을 받았습니다. 70세가 넘은 어머니는 대법 수련으로 건강했지만 최근 몇 년 계속된 박해로 인해 건강이 예전 같지 않게 많이 나빠지셨습니다.
이 기간 저와 남동생은 수련을 포기하지 않아 여러 번 박해를 받았습니다. 남동생은 사람을 구하는 항목에 참여했는데 2022년 경찰이 집을 수색해서 전단과 CD 등 자료를 발견했고 경찰에게 20만 위안이 넘는 자가용을 압수당하고 강제로 직장에서 해고당했습니다. 8개월이 지난 후, 우리는 남동생이 불법적으로 4년 형을 선고받았다는 통보를 받았습니다. 그 8개월 동안 남동생의 소식은 전혀 없었습니다. 지인을 통해 남동생이 고문과 협박을 받으며 강요된 자백을 했는데 단 3일 만에 의식을 잃었다는 사실을 알게 됐습니다. 수련하지 않는 불쌍한 올케와 어린 두 조카는 하늘이 무너지는 것 같았고 의지할 데가 없었습니다. 남동생은 사회적으로 좋은 사람으로 알려졌는데, 이런 박해를 받다니 하늘이 용납하지 않을 겁니다. 때가 되면 반드시 인과응보가 있으리라 믿습니다.
2009년 남편을 따라 북방의 한 도시로 이사한 후 우리의 생활에도 변화가 생겼습니다. 저는 몇 년간 해오던 작은 장사를 그만두고 집에서 남편과 아이를 돌보는 한편, 진상 편지를 만들어 각지 직장과 개인에게 우편으로 보냈습니다. 제가 사는 도시에는 대법이 널리 전해질 때 많은 사람이 대법 수련에 들어왔고 박해가 시작된 후에도 많은 수련생이 계속 수련을 견지했습니다. 남편도 수련하고 있어 저는 곧 현지 수련생과 연락이 닿아 그 지역의 사부님을 도와 정법 하는 흐름에 동참하게 되었습니다. 저는 현지 수련생들과 협력해 법을 실증하고 중생을 구했으며, 제 특기를 살려 집에 자료점을 만들어 프린터로 진상자료를 만들고 레이저 조각기로 호신부(護身符) 등을 만들었습니다. 수련생들이 도움이 필요할 때면 저는 차를 몰고 그들과 협력하며 진상을 알리고, 진상자료를 배포하며, 수련생들의 자료점 구축을 돕고, 오지 수련생들에게 자료 제작 소모품을 전달했습니다. 대법을 실증하는 데 필요한 자금과 물품은 개인의 득실을 전혀 따지지 않고 저와 남편 모두 지지하고 협력했습니다.
진상을 안 경찰이 대법제자를 선하게 대하다
남편을 따라 북방에 온 후 법을 실증하고 중생을 구하는 항목에 참여한 이유로 저는 두 번이나 불법 감금을 당했지만 자비로우신 사부님의 보호로 매번 무사히 벗어날 수 있었습니다.
첫 번째는 2011년 말로 기억합니다. 수련생과 함께 차를 타고 다른 지역에 가서 진상자료를 배포하다 납치됐습니다. 외지 경찰이 저를 현지로 압송해왔을 때는 이미 저녁이었고 야간 근무 중인 젊은 경찰 두 명이 저를 감시했습니다.
저는 먼저 발정념을 해 그들의 구원을 방해하는 사악한 생명을 제거한 후 그들에게 진상을 알려주기 시작했습니다. 파룬궁수련생은 세상에서 가장 좋은 사람으로 매우 선량하며, 사부님께서 가르치신 진선인(眞·善·忍)의 표준에 따라 좋은 사람이 되려 한다고 말했습니다. 그들에게 고등학교 때 배웠던 고에너지 물리학을 기억하는지 물은 후 ‘전법륜’에 나오는 입자구조에 관한 내용부터 시작해 그들의 선념을 일깨워주었으며, 중공은 대법 수련을 하는 선량한 사람들을 박해하기 위해 거짓 선전에 의존하고 있고 ‘톈안먼 분신자살 사건’ 역시 조작된 것이라고 알려주었습니다. 수련생들이 가정이 파괴될 위험을 무릅쓰고 사람들에게 진상을 알리는 것은 그들이 인과응보가 있음을 믿게 하려는 것이라 말했습니다. 파룬따파가 좋다는 것을 믿으면 복을 받을 것이고 9자 진언을 외우면 재난을 모면할 수 있습니다. 반대로 수련생을 박해한다면 반드시 응보를 받게 될 것입니다.
그 결과 두 젊은 경찰은 제가 말한 진상을 진지하게 경청했습니다. 저녁에 다른 경찰이 와서 저를 가리키며 순순히 따르지 않으면 수갑을 채우라고 지시했을 때, 그 젊은 경찰들은 이구동성으로 “그럴 필요 없어요”라고 말했습니다. 그 경찰이 나간 뒤 그들은 저를 돌아보며 “수갑을 채울 게 뭐 있나요”라며 “어느 대학 나오셨어요? 밤에 추우면 라디에이터 옆에서 주무세요”라고 말해주었습니다. 그들은 야식을 먹을 때 물이 겨우 두 병밖에 없었는데, 한 병을 저에게 주고 치킨 다리도 하나 건네주었습니다. 저는 연신 고맙다고 인사하며 “배고프지 않으니 두 분이 드세요. 젊은 나이에 밤샘 근무라 배고프실 텐데요”라고 말했습니다.
저는 이것이 자비로우신 사부님께서 저에게 지혜를 주셔서 사람들이 진상을 알고 구원받을 수 있도록 진상을 알리라고 하신 것임을 압니다. 다음 날 아침, 출근과 동시에 다른 사람들이 와서 교대하자 저는 또 진상을 알렸습니다. 마음속으로 사부님께 제 정념을 강화해주시기를 간청했습니다. 사악에 협조해선 안 되며 저는 이 검은 소굴에서 나가야 합니다. 여기는 제가 있을 곳이 아닙니다. 사부님께서는 저를 감시하던 사람을 잠들게 하셨습니다. 저는 그를 가리키며 “자요, 계속 자요. 내가 안전한 곳에 도착할 때까지 자다가 깨어나요”라고 말했습니다. 사부님의 보호 아래 저는 이 기회를 이용해 공안국 건물을 빠져나와 박해를 모면할 수 있었습니다.
사존께서 항상 보호해주셔서 추격에서 벗어나다
2022년 봄, 중공의 박해로 인해 가족 중 다른 사람이 박해를 받으면서 저도 연루되어 그날 밤 외지에 끌려가 불법 감금되었습니다. 전염병으로 인해 일시적으로 여관에 감금되어 격리되었는데 여관에 들어가자마자 그들은 저를 바닥 고리에 수갑으로 채웠습니다.
저는 주변을 둘러보았습니다. 이곳은 공안국이 설치한 사설 검은 감옥이었고 쇠의자, 바닥 고리, 수갑이 있었지만, 감시카메라는 없었습니다. 저는 속으로 사부님께 도와달라고 간청했습니다. 제가 수련을 잘하지 못했다는 것을 깊이 느꼈고, 사부님께 번거로움을 드려서 죄송함을 느꼈으며 사람마음을 닦아버리지 못한 것에 대해 용서를 빌고 반드시 바로잡으리라 다짐했습니다. 저는 사부님께 저의 정념을 강화해주십사 간청했습니다. ‘저는 검은 소굴에서 벗어날 것이고 절대 사악의 박해에 동조하지 않겠습니다.’
저는 만나는 사람마다 계속해서 진상을 알렸습니다. 다음 날 오후가 되어갈 무렵, 저를 감시하던 사람이 잠이 들었습니다. 저는 마음속으로 그녀가 계속 잠들어 있기를 바라는 생각을 보냈습니다. 그러고는 조심스레 수갑을 풀고, 걸을 때 소리가 날까 봐 신발을 손에 들었습니다. 문을 열자마자 문에 달린 쇠사슬에서 달그락 소리가 한 번 났습니다. 저는 쇠사슬을 향해 마음속으로 말했습니다. “너는 소리 내면 안 돼. 대법에 동화해서 대법제자를 보호해야 해.” 그러자 쇠사슬은 곧바로 소리를 멈췄습니다.
문을 열고 복도로 걸어갔을 때 고개를 들고 보니 맞은편에서 5, 6미터쯤 떨어진 곳에 경찰이 핸드폰을 보고 있었습니다. 저는 그를 향해 계속 핸드폰을 보라는 생각을 내보내고 아무도 저를 볼 수 없다고 생각했습니다. 몇 걸음을 재빨리 걷자 로비 밖으로 나갔습니다. 모퉁이를 돌아 좁은 길로 향했습니다. 얼마 가지 않아 한 농경지로 들어섰습니다. 사부님의 보호 아래 길에서 옷 하나를 주웠습니다. 주로 감시카메라가 제가 원래 입고 있던 옷을 찍어 저를 쉽게 식별할까 봐 걱정됐기 때문입니다. 주운 옷으로 갈아입고 감시카메라를 피해 계속 앞으로 걸어갔습니다.
큰 강을 건널 때(다리 양쪽에 감시카메라가 있어서) 감히 다리 위를 걸을 엄두가 나지 않았습니다. 강 위쪽에 폭 20cm 정도의 긴 시멘트 판자가 강 양쪽 둑에 걸쳐져 있는 게 보였습니다. 그건 공사할 때 그곳에 남겨진 시멘트 판자였습니다. 저는 난간도 없고 두 발도 겨우 디딜 수 있는 그 시멘트 판자 위로 갈 수밖에 없었습니다. 시멘트 판자 한가운데 부분(즉, 강물 바로 위 시멘트 판자의 가운데)에는 사람 키 절반 정도 높이에 1m가 넘는 커다란 시멘트 더미가 쌓여 있었습니다. 이는 주로 사람들이 이곳으로 강을 건너는 걸 원치 않아 일부러 쌓아둔 것 같았습니다.
저는 사부님께 저를 보호해 달라고 빌면서 겨우겨우 강을 건넜습니다. 큰 시멘트 더미 옆에 이르자 먼저 더미를 손으로 단단히 붙잡고 천천히 다리를 뻗었습니다. 무척 힘들었지만 결국 사부님의 보호로 간신히 강을 건넜습니다. 생각해보면 지금도 무서운데, 만약 강물에 빠졌다면 큰일이 났을 겁니다. 강물이 매우 깊고, 강 양쪽 둑의 경사면은 모두 매끄러운 시멘트로 되어 있어서 물에 빠지면 도저히 나올 수 없었을 테니까요.
강을 건넌 후, 복숭아 과수원을 지나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너무 배가 고파서 걸을 힘조차 없고 다리는 떨리기 시작했습니다. 그제야 며칠 동안 단 한 끼도 제대로 먹지 못했다는 사실이 떠올랐습니다. 원래는 과수원 주인께 양해를 구하려 했지만 한참을 찾아봐도 사람이 보이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마음속으로 ‘수련생을 도와주면 주인분께서도 반드시 복을 받으실 것’이라 생각하며 복숭아 몇 개를 땄습니다.
어느 마을 입구에 다다랐을 때, 인가 하나가 눈에 들어왔습니다. 마음씨 착한 노부부께서 저에게 찐빵 하나와 마스크, 물병 하나를 주셨습니다. 하지만 마을에 감시카메라가 너무 많이 보여 저는 마을로 들어가지 않고 숲속으로 향했습니다. 다시 두 시간 넘게 걸은 후 숲속에서 앞으로 달려가는데, 대로 위에서 경찰차 소리가 들려왔습니다. 그래서 저는 마음속으로 ‘악당들은 영원히 나를 볼 수 없다’는 생각을 내보냈습니다.
그때 맑게 갠 하늘이 불과 몇 분 만에 강풍이 일더니 곧이어 폭우가 쏟아지기 시작했습니다. 굵은 빗줄기가 후두둑 떨어지는 걸 보고, 저는 서둘러 큰 나무 아래로 걸어가며 계속 전진했습니다. (나중에 한 수련생에게서 들은 말인데, 그 강풍과 폭우가 바로 저를 보호해주었다고 합니다. 만약 비가 오지 않아 숲속 길이 걷기 어려운 상황이 아니었다면, 그들은 그날 오후 곧장 숲속으로 들어와 저를 찾았을 것이라고요. 그날 제가 탈출한 일로 그들은 화가 머리끝까지 나서, 그 비 오는 밤에 여러 수련생 집을 찾아다니며 저를 찾았다고 합니다. 이튿날에도 대로변에서 경찰차가 사이렌을 울리며 저를 붙잡으려 했다고 합니다.)
비를 피할 곳도 없어 ‘사부님 어떡하죠?’하고 생각하며 고개를 들었더니, 바로 오른쪽 앞에 과수원을 지키는 비닐하우스가 보였습니다. 저는 재빨리 그 안으로 들어갔는데 다행히 옷이 그다지 젖지는 않았고 바닥에는 작은 나무 의자도 있었습니다. 그곳은 정말 도움이 되었습니다. 사부님 감사합니다!
잠시 후 온몸에 한기가 느껴졌습니다. 추위에 떨고 있는데 옆을 보니 검은 정장이 있었습니다. 그것도 안감까지 있는 두꺼운 정장이었죠. 얼른 그걸 입자 금세 따뜻해졌습니다. 정말 다행이었습니다. 사부님께서 제 곁에 계신 거였습니다. 저는 감동해 눈물이 줄줄 흘러내렸습니다.
날이 어두워지고 비도 좀 그쳤습니다. 저는 다시 친척 집 방향으로 걸음을 옮겼습니다. 나중에 곰곰이 생각해 보니 그날은 무서워하는 것조차 잊은 것 같았습니다. 지금 생각하면 자비로우신 사부님께서 계속 제 곁을 지켜주고 계셨던 게 분명합니다. 평소 같으면 어두운 밤길을 걷는 게 무서워 엄두도 못 냈을 텐데, 그날 밤엔 전혀 두렵지 않았습니다. 길가에는 무덤이 즐비했고 최근에 세상을 떠난 이의 무덤에는 화환까지 꽂혀 있었습니다.
되짚어보면 참 신기한 일이었습니다. 그날 밤은 비가 내리는데도 하늘이 전혀 어둡지 않았고 땅의 웅덩이도 선명히 보였습니다. 비는 잠깐 멈췄다가 또 내리길 반복했습니다. 비가 올 때면 저는 큰 나무나 채소·과일 비닐하우스 옆에 서서 연공을 하고, 비가 그치면 다시 앞으로 걸었습니다. 오후 1시쯤부터 깊은 밤까지 한참을 걸었는데 몇 시인지도 가늠할 수 없었습니다.
방향을 잡고 감시카메라를 피하려다 보니, 저는 큰길과 작은 길을 번갈아 걸어야 했습니다. 그러다 한참을 큰길로 걷고 있을 때였습니다. 멀찍이 전조등을 좌우로 흔드는 경찰차 한 대가 보였습니다. 한눈에 경찰차임을 알아차릴 수 있었죠. 저는 계속 도로변을 따라 걷고 있었기에 도로변 녹지대 때문에 제가 어두운 데 있고 그들은 밝은 데 있는 셈이었습니다. 경찰차가 저에게 가까이 왔을 때 저는 나무 밑동에 웅크리고 앉아 사부님께 절 보호해 달라고 간청하며 정념을 발했습니다. ‘누구도 나를 볼 수 없다.’ 그렇게 경찰차는 제 곁을 스쳐 지나갔지만 그들은 저를 보지 못했습니다.
비 오는 밤이라 그런지 제 위치를 정확히 가늠하기가 어려웠습니다. 그날 밤, 길에는 사람 한 명 보이지 않았습니다. 가로등이 있는 곳은 감시카메라가 있을까 봐 감히 가지도 못했습니다. 그때 문득 누군가를 만나 제가 가려는 친척 집이 얼마나 더 남았는지 물어보고 싶었습니다. 마침 그때 전기 스쿠터를 탄 사람이 나타났습니다. 저는 얼른 그를 불러 세워 길을 물었더니 하마터면 지나칠 뻔했다며 앞마을이 바로 그곳이라고 알려주었습니다. 제가 그를 처음 불렀을 때 그는 깜짝 놀라더니 “밤길을 혼자 걷다니 무섭지 않나요?”라고 물었습니다. 저는 사부님께서 보호해주시니 두렵지 않다고 속으로 대답했습니다.
그 비 오는 밤, 새벽녘에야 친척 집에 도착했습니다. 문을 두드리진 않고 연공을 하며 날이 밝기를 기다렸습니다. 오전 5시가 조금 넘어서야 친척 집으로 들어섰습니다. 사부님의 자비로운 보호 덕분에 끝내 위험에서 벗어날 수 있었습니다.
그 이후로 저는 여러 곳을 전전하다가 드디어 자리를 잡고 3가지 일을 하며 생활할 수 있었습니다. 사부님의 보호 속에서야 저는 이렇게 많은 어려움을 뚫고 걸어올 수 있었습니다. 그렇지 않았다면 어느 한순간에라도 위험에 처할 수 있었을 것입니다.
떠돌이 생활을 하는 동안 끊임없이 사부님의 일깨움을 받으며 저는 많은 법리를 깨닫게 되었습니다. 책을 많이 보고 법을 많이 배우는 것이 매우 중요하다는 것, 공산당 문화를 없애고 휴대폰에 대한 집착을 제거하며 현대화된 전자제품을 바르게 활용하는 것, 수련에 대한 정념을 굳건히 하고 사부님 말씀에 따라 법공부를 많이 하는 것 등입니다.
감사한 마음
수련의 길에는 고난도 있지만 기쁨과 희망이 더 큽니다. 수련을 시작한 후로 저희 가족은 어른, 아이 할 것 없이 집 안팎에서 모두 건강하게 지내고 있습니다. 지난 2년간 매년 어머니를 뵙기 위해 고향에 갔는데 남편이 가끔 바빠서 저 혼자 가곤 했습니다. 거의 1,400km가 넘는 거리를 혼자 운전해서 무사히 다녀올 수 있었고, 그렇게 먼 길을 가는데도 그다지 피곤하지 않았습니다.
직장 동료들은 모두 제가 아주 건강해보인다고 말합니다! 주변 사람들도 제가 파룬궁을 수련한다는 걸 잘 알고 있고, 저 역시 늘 수련인의 표준에 따라 자신을 규율하려 노력하고 있습니다. 동료들은 저에게 친화력이 있다고 말하곤 합니다. 처음 직장에 왔을 때만 해도 청소하는 사람이 거의 없었습니다. 우리 직장 건물은 3층짜리 주택인데, 사무실마다 더는 참을 수 없을 정도로 지저분해져야 겨우 자기 사무실만 대충 치우는 정도였습니다. 로비나 계단 같은 공용 공간은 청소하는 사람이 거의 없었습니다. 그래서 저는 입사 이튿날, 장갑을 끼고 위아래층을 말끔히 청소했습니다. 제 눈에 보기에도 훨씬 깔끔해져서 마음이 편해졌습니다. 업무 시간 외에는 주방에서 채소를 다듬는 등 잔일을 거들면서 그 틈에 대법 진상도 알리곤 했습니다.
지난 몇 년간 저는 회사에서 특별한 일이 없으면 휴가를 낸 적이 없고, 성심성의껏 맡은 바 직무를 다했습니다. 구내식당에서 식사할 때가 가장 북적이는 시간인데, 동료들끼리는 저속한 농담을 주고받으며 난잡하게 구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러나 그 누구도 저한테는 그런 농담을 하지 않고 모두 절 존중해 줍니다. 이는 대법이 만들어낸, 수련인다운 품행 때문이라는 걸 잘 알고 있습니다.
저는 매일 출근하면 가장 먼저 사무실 안팎을 깨끗이 청소합니다. 그러다 보니 직장에 있는 동안 거의 모든 사람이 대법 진상을 알게 되었습니다. 우리 회사 기사님과 간부들도 제가 직장에 온 게 마치 맑은 물줄기 같다고 말씀하셨습니다.
특별히 언급할 만한 건, 이번에 제가 박해를 당했을 때의 일입니다. 저희 직장은 사기업인데, 간부들은 제가 남겨둔 많은 업무를 처리할 사람이 없어진 걸 원망하기는커녕, 오히려 제 남편을 직접 찾아가 저에 대해 잘 알고 있다면서, 기꺼이 직접 나서서 돈까지 들여가며 저를 도와주고 싶어 하셨습니다. 여러 가지 이유로 남편은 정중히 거절했지만 간부분들이 저를 그렇게 대해 주신 것에 대해 저는 큰 감동을 받았습니다. 그분들과 오래 지내온 터라 잘 알고 있습니다. 제가 수련을 통해 닦아낸 인품을 오랜 시간 지켜보셨기에 그런 결정을 하셨던 것입니다.
벌써 파룬따파를 수련한 지 30년 가까이 되어갑니다. 온 가족이 다행히도 대법을 만난 후로는 (출산 때를 제외하곤) 단 한 번도 병원에 가본 적이 없습니다. 저와 남동생의 아이들 역시 하나같이 품행과 학업이 훌륭합니다. 아이가 대학 졸업할 즈음에 저는 박해를 받아 도망 다니는 신세였기에 아이를 도와주기는커녕 전화조차 할 수 없었습니다. 오늘날 대학생 취업이 이토록 어려운 상황에서 아이는 스스로 좋은 일자리를 찾아냈고 지금은 최고의 인터넷 기업에서 일하고 있습니다. 또 다른 두 아이 중 한 아이는 이미 유학을 떠났고, 나머지 아이도 올해 하반기에 유럽으로 유학을 갈 예정입니다. 사부님께서 대법제자들을 위해 모든 걸 다 잘 배치해주셨다고 굳게 믿고 있습니다. 우리 아이들은 어릴 때부터 대법 속에서 자라왔기에 사부님의 시를 많이 암송할 줄 알고 대법이 좋다는 걸 믿고 있습니다.
지난 몇 년간 중공 악당의 박해를 온갖 방법으로 견뎌냈지만 그로 인해 수련 자체를 후회해 본 적은 단 한 순간도 없었습니다. 여전히 굳건히 사부님과 법을 믿고 있습니다.
돌이켜 보면 나누고 싶은 이야기가 너무나도 많지만 지면이 한정되어 있어 여기까지만 함께 공유하고자 합니다. 자비롭고 위대하신 사부님, 감사합니다!
원문발표: 2024년 6월 29일
문장분류: 수련교류
원문위치:
正體 https://big5.minghui.org/mh/articles/2024/6/29/468308.html
简体 https://www.minghui.org/mh/articles/2024/6/29/468308.html