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동북 대법제자
[명혜망] 지난 몇 년 동안 저는 여러 가지 집착심으로 교란을 받아, 정말 이리 넘어지고 저리 구르며 곤두박질치며 떨어졌습니다. 어디로 떨어졌는지는 모르겠지만 뒤처지고 싶지 않았습니다. 마음속으로는 사부님께서 저를 포기하지 않으셨음을 알고 있었습니다. 그렇지 않았다면 제가 어떻게 오늘까지 걸어올 수 있었겠습니까!
저는 넘어져도 엎드려 있을 수 없음을 알고 있습니다. 한정된 시간 내에 노력을 배가하여 앞서 나가는 이들을 따라잡아야 하며, 이 귀중한 기연(機緣)을 소중히 여겨야 합니다.
1. 다사다난한 사람이 운 좋게 대법을 얻다
수련 전에 저는 여러 가지 질병에 시달리면서도 경쟁심이 강한 사람이었습니다. 어렸을 때 집이 가난해서 여자아이임에도 남자아이처럼 일해야 했고, 심지어 학교에도 가지 못하게 하고 생계를 위해 아이스바를 팔러 다녔는데, 마치 교과서에 나오는 ‘성냥팔이 소녀’와 같은 운명이었습니다. 아이스바를 다 팔지 못한 날에는 매를 맞을까 봐 한밤중에도 집에 갈 엄두도 내지 못했습니다. 집에 가지 못하면서 밖에서 비바람을 맞고 추위에 떨면서 저는 복도에 서서 계속 아이스바를 팔았고, 주민들에게 자주 꾸중을 들었습니다. 가난한 삶은 정말 힘들었습니다!
성장한 후, 저는 지식청년(주: 문화대혁명 기간 중고등학교를 졸업하고 농촌이나 생산현장 노동에 직접 참여한 젊은이)과 결혼하게 됐는데 시댁은 남아선호사상이 심했습니다. 결혼 후 딸을 낳자 계획생육 정책에 따라 독생자녀증을 발급받아야 했는데, 아들을 원했던 시댁은 딸을 낳은 저를 못마땅해했습니다. 그때부터 제 삶은 더욱 비참해졌고 남편에게 맞고 시댁 식구들에게 시달리는 일이 잦아졌습니다. 눈물로 세월을 보내면서 심신이 큰 타격을 입어 온갖 질병에 시달렸습니다. 어쩔 수 없이 아이를 안고 강에 뛰어들기도 하고 차에 치이려 하기도 했지만 죽지는 못했습니다.
여러 병원을 전전하며 신께 빌고 부처님께 절을 올리기도 했지만 병세는 호전되지 않고 오히려 새로운 병만 늘어갔습니다. 이를 지켜본 친구가 《파룬궁(法輪功)》이라는 책을 건네주었고, 저는 이틀 만에 다 읽었습니다. 사부님께서 제 몸을 정화해주셔서 어느새 모든 병이 나았고 무병하고 몸이 가벼운 상태를 진정으로 체험하게 되었습니다. 그때부터 저는 수련의 길에 들어섰습니다. 정말 운 좋게 대법제자가 되었습니다. 대법을 얻게 되어 너무나 행복했습니다!
2. 고난을 겪었지만 자비로우신 사부님의 보호 아래 집으로 돌아가는 길을 걷다
수련을 시작한 지 얼마 안 된 음력 1월 6일 새벽 4시경, 기온은 영하 27~28도였습니다. 저는 따뜻한 이불 속에서 나와 눈 덮인 길을 걸어 급히 연공장으로 향했습니다. 그런데 고개를 들어보니 마주 오는 얼굴이 냄비 바닥의 그을음처럼 새까맣고, 큰 보따리를 메고 저를 향해 큰 눈을 부릅뜨고 이를 드러내며 걸어오는 여자가 보였습니다. 하지만 저는 놀라지 않았고 오로지 늦지 않게 연공장에 도착하는 데만 마음을 썼을 뿐 그녀에게 신경 쓰지 않았습니다.
그다음 날 아침, 저는 또 평소처럼 연공장으로 갔는데 같은 시각 같은 장소에서 검은 옷을 입은 깡마른 남자가 두 다리가 묶인 듯 폴짝폴짝 뛰면서 저를 향해 다가왔습니다. 저는 여전히 연공하러 가는 것에만 마음을 두고 그를 전혀 개의치 않았습니다. 그가 제 옆에 거의 다다랐을 때 그는 몸을 옆으로 돌려 저에게 등을 보이며 제게 길을 양보했습니다. (길이 좁아 한 사람만 지날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저는 그의 몸에 바싹 붙어 지나갔는데 그에게서 음산하고 차가운 기운이 느껴졌지만 저는 서둘러 그를 지나쳐 연공장으로 향했습니다. 나중에 모두에게 이 일을 말하고 나서야 뒤늦게 무서워졌습니다.
셋째 날, 과연 또 갈 수 있을지 걱정됐습니다. 하지만 연공장에 사람이 적다는 것을 생각해 보았습니다. (원래는 수십 명이 모였는데 겨울이 되면서 줄어들더니 명절 때는 6, 7명밖에 안 되었습니다.) 제가 가지 않으면 사람이 더 적어질 텐데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래서 저는 또 따뜻한 이불을 박차고 나와 북풍이 부는 눈보라 치는 어둠 속을 걸었습니다. 그런데 기적이 일어났습니다. 같은 시각 제가 걷던 그 길에서 밝고 넓은 서치라이트 같은 불빛이 갑자기 제 앞을 밝혀 주었고, 제가 방향을 틀면 불빛도 따라 돌아서더니 연공장에 도착할 때까지 계속 비춰 주었습니다. 그 불빛은 사흘 밤을 계속 비춰 주었습니다.
어느 날 저는 새벽어둠을 뚫고 자전거를 타고 연공장으로 갔습니다. 연공을 마치고 날이 밝아 돌아오는데, 길 한 구간이 온통 얼음으로 뒤덮여 자전거를 타고 지나갈 수 없었습니다. 사람들은 자전거를 끌고 걷다가 자꾸 넘어졌고, 길가의 급수탑에서 물이 흘러나와 그 일대가 온통 스케이트장처럼 되어 있었습니다. 그런데 새벽 어스름 속에서 제가 어떻게 그 길을 무사히 자전거로 건넜는지 알 수 없었습니다. 저는 사부님의 자비로운 보호를 느끼며 대법을 수련하고 사부님과 함께 집으로 돌아가겠다고 결심했습니다.
3. 정체(整體)의 기점에서 해야 할 일을 하다
그때 자료가 부족했기에, 저는 친지의 장례비를 능력 있는 수련생에게 주어 자료점을 설립하도록 했습니다. 자료점은 봄에 죽순이 돋듯 하나둘씩 세워졌고 저는 매우 흐뭇했습니다. 하지만 법공부가 깊어지면서 ‘가정 자료점은 온 세상에 만개해야 한다’는 말을 떠올리고 그저 기다리며 의지해서는 안 된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비록 저는 다섯 해밖에 학교에 다니지 않았지만(초등학교 때 한 학년을 뛰어넘어 3학년이 되었는데 마침 문화혁명의 시골로 내려가는 시기였음) 저는 대법제자이기에 무엇이든 할 수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이런 생각이 나오자마자 사부님의 보호 하에 저의 작은 자료점도 꽃을 피웠고 외지 수련생이 자료점을 세우는 것도 도왔습니다. 당시 제 장비는 낡았지만 새로 산 좋은 장비를 외지 수련생에게 주었습니다. 한편으로는 제 장비가 이미 제 법기(法器)라고 생각했고, 다른 한편으로는 남에게 물건을 줄 때는 좋은 것을 주어야 한다고, 특히 농촌 수련생들에게는 더욱 그래야 한다고 여겼습니다.
어느 날 시골에서 온 수련생이 우리 집에 와서 제가 막 산 물건들을 모두 가져갔는데 저는 그때 아무 말도 하지 않았습니다. 그녀가 떠난 후 문득 이런 생각이 떠올랐습니다. ‘나도 돈 주고 산 건데, 당신 형편이 나보다 낫잖아. 그런데 왜 직접 사지 않고…’
이런 생각이 막 떠오르자마자 저는 곧바로 잘못되었다는 것을 알아차렸습니다. 재빨리 마음가짐을 바로잡으며 사악에게 빈틈을 주어서는 안 되고, 대법제자 사이에 간격을 허용해서도 안 되며, 우리는 하나로 융합된 정체(整體)이며 대법 일은 누가 하든 중생을 구하는 것이고 모두 같다는 것을 생각했습니다. 정념이 나오자 저는 홀가분하고 상쾌해졌으며 또 한 가지 집착을 찾아내 즉시 그것을 닦아 없앴습니다.
4. 직접 대법의 신기함을 증명하다
2000년 가을 어느 날, 샤워를 하던 중 전화를 받으러 가다가 미끄러운 바닥에 넘어져 다리가 부러졌습니다. 너무 아파 온몸이 부들부들 떨렸지만 그때 제일 먼저 든 생각은 ‘나는 대법제자이고 사부님이 계시니 사부님께서 날 구해주실 것이다’였습니다. 저는 수련생을 불러 저를 부축해 일으켜 세워 달라고 하고는 함께 연공했습니다. 그때 수련생 몸에서 붉은빛이 나오는 것이 보였고, 저는 온기를 느끼며 부러진 다리가 부어올랐지만 점차 아프지 않게 되었습니다.
남편이 돌아와 제 다리가 부러진 것 같다며 여하튼 병원에 가서 엑스레이를 찍어보자고 해서 남편을 따라갔습니다. 병원에서 제가 엑스레이 기기 위에 섰을 때 의사가 저에게 “거기서 뭐 하세요?”라고 물었고, 손에 의뢰서를 들고 “다리 부러진 사람은 어디 있어요?”라고 큰 소리로 물었습니다. 제가 “저예요”라고 대답하자 그는 “들어와서 이 의뢰서를 건네준 분 아닌가요?”라며 기계 화면을 가리키며 “이렇게 부러진 다리로는 걸을 수 없을 텐데, 어떻게 혼자 걸어 들어왔죠?”라고 물었습니다. 제가 “제가 여기에 서 있어야 화면에 부러진 다리를 보여줄 수 있지 않나요?”라고 말하자 그는 어리둥절해하며 문으로 걸어가 진료실 의사들에게 “여기 와서 좀 봐주세요”라고 큰 소리로 불렀습니다. 그는 화면을 가리키며 “다리가 0.5인치 이상 어긋난 분쇄성 골절인데도 걸어 들어왔어요”라고 말했습니다. 그리고 저에게 “내려오세요”라고 했습니다.
제가 내려오자 그는 다른 의사들에게 “보셨죠? 어떻게 걸을 수 있는 거죠?”라며 의아해했습니다. 의사는 수술을 위해 병원에 입원하라고 했지만 저는 남편에게 입원하지 말고 집에 가자고 했습니다. (당시 두려운 마음에 그 자리에서 대법의 신기함을 실증하지 못한 것이 유감입니다.)
병원을 나설 때 남편은 믿지 못해 저를 다른 병원으로 데려갔습니다. 그곳에서도 엑스레이 사진은 똑같이 나와서 의사는 진단을 어떻게 써야 할지 몰라 “엑스레이 사진에 따르면 걸을 수 없는데, 혼자서 걸어 들어오는 것을 봤기 때문에 진단을 내리기 어렵습니다”라고 말하면서도 여전히 사실대로 ‘1인치 이상 어긋난 분쇄성 골절’이라고 적고 입원 치료를 하라고 했습니다. 저는 남편에게 집에 가자고 했고, 남편은 빠르게 택시를 잡아 저와 집으로 돌아왔습니다.
저는 차를 타지 않고 걸어서 집으로 돌아갔습니다. 집에 가는 길에 남편은 저에게 “과학으로도 대법의 기적을 증명할 수 없네”라고 말했습니다. 이후 남편도 대법의 신기함을 인정했습니다. 10년이 지난 지금, 다리는 여전히 부러져 있고 골극(骨刺, 뼈가 가시처럼 덧자란 것)이 남아 있지만 걸을 수 있을 뿐만 아니라 달릴 수도 있습니다. 보는 사람마다 대법이 너무나 신기하다고 합니다.
5. 납치하러 온 경찰에게 진상을 알리다
한번은 공안국 경찰서장이 수색 영장, 체포 영장을 갖고 비밀경찰, 경찰차, 경찰관 10여 명을 데리고 우리집으로 와 저를 납치하려 했습니다. 알고 보니 그는 전화를 도청해 제가 아픈데도 병원에 가지 않았다고 말했습니다. 지난번에 병원에서 엑스레이를 찍었을 때 대법을 실증하지 못했는데, 이번이 이야기할 기회라고 생각했습니다. 저는 병원에서 찍은 엑스레이를 보여주며 말했습니다. “보세요, 병원에서 찍은 엑스레이가 맞죠? 이 다리가 부러진 게 사실이죠? 어떻게 병원에 가지 않았다고 말할 수 있나요? 방금 우리집 전화를 도청했다고 하셨는데, 좋습니다. 저는 전화를 바꾸지 않을 겁니다. 계속 우리가 무슨 말을 하는지, 파룬궁이 무엇인지, 제가 왜 파룬궁을 수련하는지 듣게 하겠습니다. 수련을 하기 전에는 온몸이 병들었는데, 파룬궁 수련을 하지 않았다면 오래전에 죽었을지도 모릅니다. 우리는 진선인(真·善·忍)을 수련하기 때문에 일체 부끄러운 일이 없으며 모두 정정당당합니다! 게다가 저는 다리가 부러졌지만 밖으로 나갈 수 없는 상태가 아니에요. 바깥세상은 멋진데 집에만 있으면 무기력해지잖아요.”
이 말을 듣고 그는 일어서며 저에게 “좋아요, 밖에 나가지 말고 집에서 연마하세요”라고 말한 뒤 사람들을 데리고 나갔습니다.
6. 깨달았으면 해내야 하고 해내야 수련이다
2007년 7월 말, 저는 법공부를 하던 중에 갑자기 사악이 모두 베이징에 집중되어 있다는 것을 깨달았고, 근거리에서 발정념을 해야 한다는 인식이 들어 바로 비를 무릅쓰고 표를 사러 가서 그날 오후에 기차를 탔습니다. 가는 중간에 기차를 한 번 갈아타고 다음 날 정오에 베이징에 도착했는데, 정오라 맑은 날이었지만 하늘 높이 떠 있는 태양은 짙은 안개에 가려져 제대로 보이지 않았고, 땅에도 사람들의 그림자가 드리워져 있었지만 햇빛은 보이지 않았는데, 정말 사악이 모두 베이징에 집중된 것 같았습니다.
저는 톈안먼(天安門) 광장에 가서 가부좌하고 치맛자락으로 다리를 덮은 후, 구입한 신문을 펴서 손으로 가려 단수(單手) 입장 자세로 발정념을 하기 시작했습니다. 경찰이 2인 1조로 나란히 제 옆을 오가고 경찰차도 오갔지만 저는 움직이지 않고 베이징 공간장의 사악을 제거하는 데 집중했습니다.(물론 결가부좌를 하면서도 편리한 조건과 지혜로 해냈습니다.) 반나절이 지나고 저는 피곤함을 느껴 묵을 곳을 찾아 예전에 묵었던 곳으로 갔는데, 뜻밖에도 일반 객실보다 가격이 절반인 방을 구할 수 있었습니다. 정말 불가사의했습니다! 저는 서둘러 법공부를 하고 다시 톈안먼 정문으로 가서 사악을 제거했습니다.
이튿날은 국무원과 신화문, 푸유가에 가서 먼저 발정념으로 톈안먼 안팎과 자금성 등지를 청리(淸理)했습니다. 이곳의 제복 입은 경찰과 사복 차림의 경찰은 세 걸음, 다섯 걸음마다 한 명씩 서 있어 관광객보다 많았고, 행인은 앞으로 다가서지 못하게 했습니다. 저는 계속 발정념을 했고 하루가 끝나면 너무 피곤해서 법공부와 연공을 서둘러 했습니다. 셋째 날에는 마두(魔頭)의 기념관으로 청리하러 갔고, 휴관 중이었지만 주저하지 않고 청리했습니다.
이때 비가 내리기 시작했고 폭우가 쏟아져 인터넷에도 베이징에 폭우로 인한 재해가 발생했다는 소식이 보도될 정도였습니다. 신기하게도 제가 차에 타면 하늘이 뚫린 듯 엄청나게 비가 쏟아졌고, 차에서 내리면 비가 그쳤습니다. 물길을 걸으며 사악을 청리할 곳을 다시 선택해 사악을 제거하고 차에 타면 다시 폭우가 내렸습니다.
저녁 8시가 넘어 이화원(頤和園)에서 사악을 청리한 후 지하철을 타고 사악을 제거하려고 했는데, ‘동물도 생명이다’라는 생각이 떠올랐습니다. ‘맞다. 동물원은 아직 청리하지 않았는데 비도 오고 시간도 늦었는데 어떻게 갈 수 있을까?’ 이런 생각을 하다 고개를 들어보니 10m 떨어진 곳에 ‘동물원’이라고 적힌 버스가 보였습니다. 저는 재빨리 버스 기사에게 “동물원 가나요?”라고 물었고, 기사가 고개를 끄덕여 저는 홀로 버스에 올라 동물원으로 향했습니다.
비가 내리고 있었지만 젖지는 않았고, 청리를 마친 후 지하철로 가는 막차를 타고 한밤중까지 지하철 주변을 청리했습니다. 숙소로 돌아왔을 때 20년 만에 만나는 옛 지인에게서 연락이 왔는데, 그는 고향으로 내려왔다고 했습니다. 이는 인연 있는 사람이 구원받으러 오는 것으로 그가 그 도시 당교(黨校)의 주임이어서 저는 서둘러 그에게 진상을 알려야 했습니다. 그가 진상을 모르면 다른 사람들에게 해를 끼칠 수 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차표는 열흘 후에나 구할 수 있어서 어찌해야 할지 사부님께 가지(加持)를 청했습니다. 걷다가 우연히 고개를 들어보니 길가에 매표소가 보였습니다. 서둘러 들어가 물어보니 그날 표가 있을 뿐만 아니라 요금도 몇십 위안밖에 되지 않아 이렇게 저렴한 적이 없었는데, 숙소처럼 절반밖에 되지 않는 가격이었습니다. 저는 순조롭게 귀향길에 올랐습니다.
집으로 돌아와 그를 만나 진상을 알려준 후 삼퇴(三退: 중공의 3대 조직인 공산당, 공청단, 소선대 탈퇴)도 해주었습니다. 또 DVD 플레이어를 사러 갔고, 진상 CD, 진상 자료를 준비해 서둘러 그를 찾아 역으로 갔습니다. 개찰구로 다급히 달려가는데 검표원이 그에게 표를 건네려는 순간 저는 황급히 그를 불렀습니다. 그가 돌아서서 통로 입구로 들어가려는 찰나, 제 부름에 돌아서서 제가 준비한 것들을 받고는 감격하여 연신 고개를 끄덕였습니다. 그는 집에 가서 진상 CD와 자료를 본 후 “대법 사부님의 훈도(薰陶) 아래 당신은 진심으로 애쓰시는 것 같습니다. 저는 당신의 마음 씀을 알고 있으니 안심하십시오”라고 답장을 보내왔습니다.
7. ‘5.13’을 마음 깊이 새기며 사부님의 자비로운 보호에 감사드리다
몇 년 전 5월 11일 새벽, 삼촌 집에 머물던 네 살 외손자가 새벽 5시 무렵에 갑자기 구토하기 시작해 어린이 병원으로 급히 실려 갔습니다. 여러 검사와 화학검사 결과 거의 모든 수치가 비정상이었습니다. 아이의 큰아버지와 큰어머니가 외지의 대형병원에 계신데, 큰아버지는 의학박사후 연구원이시고 큰어머니는 의학박사여서 검사 결과를 보내드렸더니 그들도 비정상이라며 입원 관찰 치료를 권했습니다.
이 소식을 듣고 저는 급히 병원으로 달려갔습니다. 병상에 누운 아이의 몸에 여러 개의 수액병이 매달려 있는 모습을 보았고, 아이가 저를 보고는 이 링거병을 빼고 싶고 주사 맞기 싫다고 해서 의사와 상의해 보겠다고 했습니다. 의사는 아직 결과가 나오지 않아 안 된다고 했습니다. 아이가 울면서 주사를 빼지 않으면 입원하지 않고 집에 가겠다고 하자 의사는 몇 병을 빼게 하고 마지막엔 영양수액만 남겼습니다. 당시 의사는 24시간 입원 관찰을 하자고 했습니다. 하지만 당시 병원에는 전염병에 걸린 아이들이 많아서 저는 우리 아이는 문제가 없으니 여기에 입원할 순 없고, 아이도 집에 가자고 하니 저녁에는 집에 가겠다고 말하고 돌아왔습니다. 이튿날 이른 아침, 병원으로 서둘러 돌아와 로비에 들어서며 저는 아이에게 “마음속으로 ‘파룬따파하오(法輪大法好-파룬따파는 좋습니다), 쩐싼런하오(真善忍好-진선인은 좋습니다)’를 외우면 사부님께서 널 병원에서 나가게 해주실 거야”라고 말해주자 아이는 알아듣고 고개를 끄덕였습니다.
입원 3일째 아침, 일찍 병원으로 돌아와 로비로 걸어 들어가며 아이에게 물었습니다. “오늘은 5월 13일로 사부님 생신이란다. ‘파룬따파하오’를 외쳐야 하지 않을까?” 아이는 즉시 “파룬따파하오! 사부님, 오늘은 사부님 생신인데 저를 집에 보내주세요!”라고 외쳤습니다. 아이의 우렁찬 목소리가 병원 로비에 울려 퍼지자 모든 사람의 시선이 아이에게 쏠렸고, 놀란 할아버지가 뒤에서 달려와 아이의 입을 막았습니다.
병동 의사가 회진하러 와서 새로 주사를 놓으라고 지시해 처치실에서 세 명의 간호사에게 둘러싸인 채 혈관을 찾았는데, 저는 아이의 팔을, 할머니는 다리를, 아빠는 양팔을 잡았습니다. 아이는 두려움에 울부짖었고 할머니도 눈물을 흘렸으며, 사위의 눈물이 제 손에 뚝뚝 떨어졌습니다. 20여 분이 지나자 아이의 머리는 물에 감은 듯 흠뻑 젖었고, 옷도 흠뻑 젖어 아이는 울음으로 기진맥진했습니다. 저는 가슴이 아파 아이를 품에 안고 간호사에게 “우선 좀 쉬세요, 아이를 데리고 나가 좀 쉬게 해야겠어요”라고 말했습니다.
저는 아이를 안고 경치 좋은 곳이 보이는 엘리베이터를 타고 풍경을 보여주며 아이의 긴장을 풀어주고 이야기를 나누었습니다. “오늘은 특별한 날이지. 사부님 생신으로, 전 세계 대법제자들이 사부님의 탄신을 축하드리고 있단다! 오늘 아침에 ‘파룬따파하오’를 외치며 사부님께 오늘 집에 보내달라고 부탁하지 않았니? 용감하게 피를 좀 뽑아 검사하면 병이 없으니 결과가 정상일 거고, 사부님께서 우리가 집에 갈 수 있게 해주시지 않을까?” 아이는 고개를 끄덕이며 동의했습니다. 진료실로 돌아갔을 때 간호사는 두 명뿐이었고 아이가 의연하게 팔을 내밀자 간호사는 한 번에 주사를 성공시켰습니다.
병실로 돌아온 지 한 시간 만에 주치의가 들어와 아이의 보호자가 누구냐고 물어 제가 저라고 대답했습니다. 의사는 “당신이 결정할 수 있는 보호자입니까?”라고 물었고, 저는 아이 아버지가 잠시 자리를 비웠다고 했습니다. 의사는 자기 진료실로 가자고 해서 저는 그를 따라갔습니다. 의사는 컴퓨터를 켜고 제가 볼 수 있도록 빼곡한 검사 결과를 가리키며 말했습니다. 저는 “이해할 수 없으니 결과가 어떤지 말씀해 주세요”라고 했습니다. 그러자 의사는 “이 아이는 병원에 왔을 때 수치가 모두 비정상이었습니다. 입원한 지 겨우 3일밖에 되지 않았고 약도 먹지 않았습니다. 단지 영양제 수액만 맞았는데 어떻게 정상이 된 거죠? 이런 경우는 처음 봅니다”라고 말했습니다. 저는 기쁜 마음으로 “잘됐네요. 그럼 이제 퇴원해도 되겠네요”라고 좋아하며 돌아서서 나오려는데, 의사가 “아이 아버지가 돌아오시면 빨리 오라고 전해주세요”라고 말했습니다. 저는 알겠다고 하고 아이를 꼭 안고 병실로 걸어가며 감격에 겨워 말했습니다. “사부님께서 너를 집으로 보내주셨구나! 사부님 감사합니다. 어서 짐 싸서 집에 가자.” 아이는 눈을 동그랗게 뜨고 저를 바라보더니 작은 두 손을 모아 스스로 합장하며 사부님께 감사의 인사를 올렸습니다.
아이 아버지가 들어와 우리를 멍하니 바라보며 “무슨 일이에요?”라고 물었습니다. 저는 이제 집에 갈 수 있게 됐으니 의사를 만나보라고 했습니다. 의사를 만나고 온 아이 아버지는 “의사 선생님이 아직 약도 안 먹었으니 좀 더 지켜봐야 한다면서 가지 말라고 하던데요”라고 말했습니다. 저는 “병이 없으면 퇴원해야지. 자, 우리 집에 가자”라고 말했습니다. 정오에 우리는 집에 도착했고, 집에 온 후 아이는 모든 게 정상이었습니다. ‘5.13’을 마음 깊이 새기며, 사부님의 자비로운 보호에 감사드렸습니다!
8. 수련생을 구출하며 대도무형(大道無形)의 정체(整體)를 이루다
어느 날, 외지에서 수련생을 구출하기 위해 최대한 빨리 그 지역으로 가자는 전화를 받았습니다. 옷을 갈아입을 시간도 없이 수련생들과 함께 서둘러 그 지역으로 갔습니다. 납치된 수련생은 학생들에게 진상을 알리다 신고당해 세뇌반으로 끌려갔던 것입니다. 그곳 수련생들은 전반적으로 협력이 매우 잘 이루어졌습니다. 그들 중 일부는 사악한 경찰, 그 가족과 친척들의 주소와 전화번호를 찾았고, 일부는 신속히 그들의 가족과 친척들에게 불법적 행위를 폭로했습니다. 또 근거리에서 발정념을 하는 등 거의 모든 법공부 팀이 협력해 동시에 발정념을 했고, 우리는 수련생 가족들과 함께 정법위원회와 610(파룬궁 탄압기구) 사람들을 직접 대면해 강대한 정체를 형성했습니다.
우리는 제때 도착해 가족들과 상의한 후, 먼저 직장에서 나서서 석방을 요구하고, 석방하지 않으면 우리 둘이 동행해 가족들과 함께 사악과 직접 대면해 구출하기로 했습니다. 우리 수십 명은 모여 앉아 법공부와 홍음(洪吟) 암송, 발정념을 했는데, 시간이 촉박해 차를 타고 돌아가야 해서 오후 3시까지 석방되게 해달라고 사부님께 가지를 청했습니다. 정오 12시부터 우리는 모두 발정념을 멈추지 않았고, 3시가 되자 전화벨이 울리며 수련생이 무사히 석방되었다는 소식이 전해졌습니다. 사부님 감사합니다! 모두가 감격의 눈물을 흘렸습니다.
한번은 외지 수련생이 세뇌반에 납치됐는데 우리 지역에서 구출하려 했지만 진상을 모르는 친동생이 가로막아 석방하지 못하게 했습니다. 수련생의 남편도 어쩔 수 없다며 나서지 않았습니다. 그 지역 수련생 대부분은 직접 사악과 대면하기 어려운 처지라 저보고 가서 살펴봐 달라고 부탁해서 저는 즉시 그곳으로 갔습니다. 도착해서 수련생들에게 상황을 듣고 저는 직접 남편을 만나보자고 제안한 후 택시를 타고 그의 집으로 달려갔습니다. 도중에 우유 한 상자와 컵라면 한 박스, 반찬을 샀습니다. 집에 도착했을 때 남편은 우리를 무시했고, 동행한 현지 수련생이 그에게 “다른 지역에서 일부러 당신을 만나러 온 분들이고 선물도 이렇게 많이 사왔는데 왜 그러세요?”라고 했습니다. 저는 웃으며 그에게 인사하고 말했습니다. “고생 많으시네요. 지금 같은 궂은 날씨에 집 안팎으로 바쁘시고 음식 만들어 줄 사람도 없으시니 제가 먼저 먹을거리를 좀 드리겠습니다.” 그는 저를 집 안으로 들여보냈고 제가 물건을 방에 내려놓자 그도 따라 들어왔습니다.
저는 아내분은 어떻게 지내고 계시냐고 물었습니다. 그가 “안에서 맞고 있어요”라고 하자 저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지금은 농번기가 한창인 가을인데 집에 아내분이 없으니 큰일이네요. 당신이 아내분을 모셔와야죠. 생활도 해야 하잖아요.” 그는 “처제가 반대해서 안 된대요”라고 했습니다. 저는 “처제도 시집간 사람이라 자기 살림 꾸려야죠. 당신 집안일까지 돌볼 순 없잖아요. 그녀가 추수를 도우러 왔나요? 아니면 어떤 도움을 주던가요?”라고 물었습니다. 그는 “그냥 가로막고만 있어요”라고 대답했습니다. 저는 웃으며 그를 한쪽으로 불러 말했습니다. “처형이나 처제에게 도와달라고 부탁해보세요. 남자가 직접 나서기 어려우니 제가 그분들께 부탁하는 게 어떨까요. 제가 처제를 만나서 권해볼게요.”
저는 동생을 찾아가 사리에 맞고 정에 호소하는 방식으로 이해관계를 제시하며, 언니는 좋은 사람이고 파룬궁 수련에는 잘못이 없으며 장쩌민이 파룬궁을 박해한 것이라고 강조했습니다. 저는 그녀에게 이렇게 말했습니다. “다른 사람들은 언니를 이해 못 해도 동생은 언니가 좋은 사람인 걸 잘 알잖아요. 그런데 왜 그들이 언니를 때리도록 내버려 두나요? 마음이 안 아파요? 그래도 언니잖아요. 저는 언니를 한 번도 만난 적이 없는데도 맞았다는 소식에 마음이 너무 아파 바로 달려와 언니를 구출하려는데, 동생이야말로 언니를 더 사랑하잖아요. 어서 언니를 집으로 모셔다드리세요.” 제가 진심을 다해 말하자 저도 모르게 눈물이 났습니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강경했던 동생도 제 눈물에 마음이 움직였는지 연신 고개를 끄덕이며 동의했습니다. 제가 집에 도착하기도 전에 언니가 풀려나 집으로 돌아갔다는 연락을 받았습니다.
어느 날, 외지에서 수련생이 납치되어 감옥에 갇혀 있다는 연락이 왔고, 외지 수련생들이 와서 구출할 테니 협조해 달라고 부탁했습니다. 당시 제게 할 일이 있었지만 수련생 구출이 급선무라 생각하고 제 일을 미뤘습니다. 이는 사부님께서 저를 선택하신 것임을 알았기 때문입니다. 이런 식의 전화를 종종 받았는데, 누가 건 전화인지, 상대방이 누군지도 모르지만 사부님께서 저를 선택하셨다고만 여겼습니다. 약속대로 서둘러 그곳에 갔고 우리 둘은 서로 낯선 사이였지만 오랜만에 만난 가족같이 편안하고 친근한 느낌이었습니다.
우리는 공안국에 가서 발정념을 하고, 정법위원회와 610 사무실을 직접 찾아가 대면해 석방을 요구했으며, 묵묵히 매우 잘 협력했습니다. 우리는 사실에 근거해 그들에게 진상을 알렸고, 사람은 모두 선한 면이 있음을 말했습니다. 그들과 대화할 때는 마치 오랜 친구를 만난 듯 평온하고 친근하게 이야기를 나누었고, 그들의 명백한 일면 역시 대법이 좋다는 걸 인정했습니다. 당시 그는 수련생이 감금된 감옥으로 전화를 걸어 상황을 확인한 뒤 석방했습니다. 이 건물에 들어가려면 여러 검문소를 통과해야 해서 한 번 들어가기가 쉽지 않았는데, 사부님의 가지 하에 지혜롭게 들어갈 수 있었습니다. 그래서 나올 때는 한 층 한 층 사악을 청리하는 발정념을 하고, 사무실 전화번호와 직책, 성명을 일일이 적어 명혜망에 올려 해외 수련생들이 진상 전화를 걸 수 있게 했습니다. 우리는 하나의 정체이기 때문입니다.
9. 대면해 진상을 알려 대법제자의 자비를 모든 중생에게 남기다
진상자료를 만들 때 저는 최대한 한 번씩 읽어보려고 노력합니다. 이는 직접 대면해 진상을 알릴 때 자신의 소양을 충분히 발휘하고, 진상 내용도 풍부하고 다채롭게 해서 사람들이 듣기 좋고 쉽게 삼퇴하도록 하기 위해서입니다.
어느 날 버스에서 한 여성이 진상 전단을 들고 있는 걸 보고 제가 말을 걸었습니다. “저도 이 자료 즐겨 봅니다. 글이 참 진실하게 잘 쓰여 있고, 내용도 좋고 풍부하더라고요.” 이 기회를 빌려 저는 정념을 내보내며 진상을 알렸고 버스에 타고 있던 사람들도 흥미롭게 들었습니다.
버스가 정류장에 도착하자 한 중년 남성이 타면서 말했습니다. “정류장에서 내릴 분 계신가요? 제가 허리 디스크가 있어서 허리와 다리가 아파 서 있기 힘들거든요.” 저는 즉시 자리에서 일어나 자리를 양보했습니다. 그는 정중하게 자리에 앉았습니다. 저는 그에게 말했습니다. “허리와 다리가 아프면 정말 견디기 힘들죠. 제 다리가 부러졌을 때는 아예 떨면서 움직일 수도 없었어요.” 그 말을 듣자마자 그는 자리에서 일어나며 “다리가 부러졌는데 제가 어떻게 앉을 수 있겠어요”라고 했습니다. 저는 얼른 그를 자리에 앉히며 “제 다리가 나아지지 않았다면 어떻게 당신께 자리를 양보할 수 있었겠어요?”라고 하며 부러졌던 다리를 들어 그에게 보였습니다. 그는 다시 일어서서 제게 앉으라고 했고, 저는 다시 그를 앉히며 “걱정 마세요. 편히 앉으세요. 전 괜찮아요”라고 하며 다시 부러졌던 다리를 보여줬습니다. 그러자 그는 “아직도 뼈가 좀 튀어나와 있네요”라고 말했습니다.
저는 그에게 다리가 부러진 경위와 파룬따파의 신기함을 말해주었고, 진심으로 ‘파룬따파하오(法輪大法好), 쩐싼런하오(真善忍好)’를 외우면 아프지 않게 되고 삼퇴하면 평안할 수 있다고 알려주었습니다. 그는 흔쾌히 탈퇴했고, 저에게 거듭 감사를 표했습니다.
버스에서 내릴 때 저는 그에게 호신부(護身符)를 주면서 ‘파룬따파하오, 쩐싼런하오’라는 아홉 글자 진언을 잊지 말라고 당부했습니다. 버스에서 내려 돌아보며 그에게 “저는 이 인연을 소중히 여기고 당신을 기억하겠습니다”라고 말하자 그는 감격해하며 “저도 잊지 않겠습니다. 감사합니다! 파룬따파하오!”라고 화답했습니다.
요즘 저는 진상을 알릴 때 최근 발생한 전염병 진상이 담긴 USB를 사람들에게 나눠주고 있는데, 방화벽을 우회할 수 있는 카드와 위챗 QR코드를 담은 명함도 함께 줍니다. 이는 그들이 인터넷 검열을 뚫고 더 많은 진상을 접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해서입니다.
원문발표: 2024년 6월 23일
문장분류: 수련교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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